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토록 산업화된 시대에. 시인은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이 각박해져 갈수록 시인이 내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세상이 시멘트로 덮일 때마다 시인이 노래하는 자연은 점점 사라지는데...

 

 인공이 판치는 시대. 자연이 사라져가는 시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래도 꽃 피면 꽃을 보기 위해 우 몰려가고, 꽃 대신 서로의 뒤통수만 보다, 서로의 발길에 치여 오기도 하고...

 

  단풍이 들면, 또 단풍을 보러 우 몰려가 서로의 몸을 부딪치고, 부딪히며 그렇게 자연 속에 사람들만 채워놓다 돌아오고는 하는데.

 

시인은 사라져 가는 자연을 안타까워 하며, 인공의 시대를 거부하기 위해 다시 자연을 불러오지만, 시인에게 불려온 자연은 점점 줄어들기만 하고.

 

그래도 시인은 자꾸 자꾸 자연을 불러오고. 우리들에게 아직은 자연이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시인이 불러온 자연이 인공을 몰아내지는 못하고, 다시 인공 속에 파묻혀 버리는 현실.

 

나희덕 시집을 읽다가 '또 나뭇잎 하나가'라는 시를 보고는 시인의 처절한 몸부림을 표현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 나뭇잎 하나가

 

그간 괴로움을 덮어보려고

너무 많은 나뭇잎을 가져다 썼습니다

나무의 헐벗음은 그래서입니다

새소리가 드물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허나 시멘트 바닥의 이 비천함을

어찌 마른 나뭇잎으로 다 가릴 수 있겠습니까

새소리 몇 줌으로

저 소음의 거리를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입술은 자꾸만 달싹여

나뭇잎들을, 새소리들을 데려오려 합니다

 

또 나뭇잎 하나가 내 발등에 떨어집니다

목소리 잃은 새가 저만치 날아갑니다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년 2쇄. 94쪽.

 

시인이 발버둥치는데, 계란으로 바위 치기밖에 되지 않는 현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시인. 이런 시인들이 있어 그나마 '시멘트 바닥의 비천함'이 잠깐이라도 가려지고 있는데...

 

자꾸만 줄어드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 인공의 세계에서 자연과 멀어지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

 

나뭇잎들을, 새소리들을 우리에게 데려오려는 시인의 몸부림. 그런 시인의 몸부림이, 바로 시인이 시로 표현하는 언어, 말들이 아닌가 한다.

 

그 말들이 비루한 세상을 온전히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잠시 비루함을 가려주면서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생각하게도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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