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이제 황혼에 접어들었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았고, 할일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

 

  인생이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계절로 치면 겨울이리라. 시간으로 치면 자정에 가깝거나 자정을 막 지났거나. 예전엔 자정이 하루의 끝이자 시작이었지만 요즘은 막차가 연장된 관계로 자정이 넘어서야 하루가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

 

  이 시집 제목, 겨울밤 0시 5분이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온 시인이 자신의 인생 막바지에 바치는 노래라고 해도 좋겠다.

 

  그만큼 이 시집에는 나이든 삶에 대한 시가 많다. 황동규 시인이 1938년생이고, 이 시집은 200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 낸 시집이다.

 

고희라는 말, 예전부터 희귀했다는 나이 70이 이제는 별 것 아닌 나이가 되었지만 사회에서는 한발 물러나 이제는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끝일까? 아니, 시작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살아온 날보다는 분명 적을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는 나이니까 말이다.

 

시집에서 그런 감정이 담긴 시어를 발견했다. '다행이다' 그래 지금껏 잘 살아왔잖아, 그것이 비록 평탄한 삶은 아니었지만, 온갖 굴곡을 겪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랴.

 

인생 70. 겨울이 아니다. 가을이라고 해야 한다. 열매를 맺고, 잎새를 떨굴 나이. 잎새를 떨군 맨몸으로 세상에 설 나이.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을 맞이하게 되지만, 이것은 어김없는 법칙이니...

 

지금껏 살아온 것,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가을날, 다행이다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아직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 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쥐어박듯 찢겨져도 사라지긴 어렵다.

찢겨져도 내처 숨쉰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헤어진 일 감춰둔 곳을 찾아보리라.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2013 년 초판 8쇄.  115쪽.

 

무성한 잎을 떨구고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것들이 드러날지라도 세상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 다시 내가 만나왔던 것들을 찾을 수 있는 것. 나이듦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를 읽으며 내 늙음을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드러낼 것이며, 무엇을 반추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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