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전집 2 :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사드 전집 2
D. A. F. 드 사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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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있다. 방탕한 사회를 대표하는 이름. 결국 하느님의 진노로 멸망하게 되는 도시.

 

의인 열만 있어도, 아니 의인 다섯만 있어도 멸망을 면할 수도 있을텐데... 이미 썩어문드러질대로 문드러진 사회에서는 그런 의인을 찾기가 힘들다.

 

사드가 추구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그는 귀족이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역시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을 리베르탱이라고 한다. 자유주의자? 무엇을 위한 자유주의?

 

자기 욕망을 끝간 데 없이 추구하는 자유? 여기에 남은 없다. 남이 없는 자유는 방탕이 아니다. 남의 고통으로만 유지되는 자유다.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남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아니,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가. 내 욕망을 위해서는 남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

 

'냄비 속 개구리'처럼 욕망은 서서히 달궈진다. 서서히 달궈지지만 결국 파멸로 이르게 된다. 사드가 이야기하는 이런 방탕주의 학교는 결국 파탄으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누구의 파탄.

 

사드는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의 파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들이 점점 강해지는 강도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남들을 희생시키는 장면으로 전개한다.

 

가히 사디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사디즘을 옹호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내용 전개다. 그렇다. 욕망이 남을 파멸로 이끌면 그 욕망은 정당할 수가 없다. 그런 욕망 추구는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드가 이 책을 통해서 그런 것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인간이 갈 수 있는 안 좋은 행위의 극한까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극한까지 가는 인간들의 말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극한에까지 인간이 다다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점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저런 변태가 있나? 저런 악한이 있나?는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간이 안 좋은 쪽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사드는 우리 인간이 지닌 사악함을 폭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는 말을 이 작품을 통해서, 아니 남의 고통을 통해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인간들을 통해 너는 어떻게 사느냐고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작품이 의미가 있다.

 

해설에서는 인간 질환을 연구하는 작품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안 좋은 욕망의 끝, 병적인 행동, 이런 것들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무엇인가?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으니,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다른 존재의 감정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망했다. 망해야만 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그런 사회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사람들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사람은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칸트의 말대로 목적이다. 우리 존재 자체가 목적이다.

 

이런 점에서 사드의 이 작품, 사람이 수단이 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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