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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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이다. 연극으로 보거나 영화로 보아도 좋을 작품을 책으로 읽는다. 보는 것과 읽는 것의 차이. 예전에 학교에 다닐 때 읽히려고 쓴 희곡을 '레제 희곡, 레제 드라마'라고 했다고 하는데... 많이 들어본 제목의 이 희곡을 이제서야 읽는다.

 

영화나 연극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희곡을 읽으니, 우선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제한되지 않는다. 연극, 영화를 미리 보았더라면 그 역할을 연기한 배우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텐데, 읽으면서 인물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희곡의 내용은 처음에 나오는 말로 압축이 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12쪽)'라고 했다는 말.

 

뉴올리언스 주에 진짜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있다고 하니, 실제와 허구를 적절하게 혼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도착한 곳은 극락이 아니다. 정신병원이다. 결국 과거에 매달린 영혼이 구제받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거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유폐되는 것으로 결말을 맺은 것이다.

 

남부 귀족 집안, 그것은 철저히 과거에 불과하다. 그런 과거에 잡혀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블랑시가 그렇다. 블랑시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첫번째 남편이었던 동성애 소년. 그의 자살, 그 다음 난잡한 성생활, 학교에서 추방, 동생네 와서도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고,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생활.

 

하지만 동생인 스텔라는 다르다. 스텔라는 과거와 결별했다. 그녀가 함께 사는 스탠리는 철저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욕망이라는 전차에 다른 욕망을 다 빼버리고 오직 자신의 남성성만을 내세운다. 이런 스탠리를 스텔라는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철저하게 현실에 자신을 적응시키려는 모습이다.

 

스텔라의 남편인 스탠리는 빈민가 남성답게 그는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놀이에 집중하며 과거나 미래는 안중에 없다. 오로지 그는 현재만이 중요하다. 아내 사랑에도 이런 가리지 않은 육체적 사랑이 드러난다. 이런 그에게 처형이라고 등장한 과거에 집착하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려 하지 않는 블랑시는 귀찮은 존재다.

 

그와 블랑시의 대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과거는 현재를 넘어설 수 없고, 환상은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 블랑시가 스탠리에게 유린당하는 것은 이제 그런 과거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블랑시를 유린한 뒤 더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황에 있는 블랑시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으로 희곡은 끝나는데.. 여기서 동생인 스텔라는 남편이 언니를 겁탈한 것을 알면서도 육체적 욕망으로 돌아간다. 남편에게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언니인 블랑시는 육체적 관계를 통해 과거를 잊고자 했지만, 더 과거에 얽매이게 되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그래서 육체적 관계에서도 진실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신만의 진실성. 남들은 거짓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마음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자위.

 

(미치:거짓말, 거짓말, 겉과 속이 모두 거짓말투성이예요.

블랑시 : 속으로는 절대 안 했어요. 마음속으로는 거짓말한 적 없어요. 134쪽)

 

하지만 스텔라는 그런 남편을 받아들인다. 언니와는 다른 방향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육체적 욕망에 충실한 남편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그렇게 그들은 아이를 낳고, 이 아이는 이제 그들 미래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스텔라와 핏줄이었던 블랑시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녀에게 아이는 없다. 또한 현재적 사랑도 없다. 육체를 내던지는(이런 표현이 어울린다) 행위밖에는 하지 않는다. 그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속이게 된다. 자신은 순수한 사랑을 갈망한다고... 그러나 그것은 비극으로 치닫는 행위일 뿐이다.

 

욕망이라는 전차에 몸을 실어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는 것에 불과하다. 더 이상 도착지는 없다. 그냥 묘지일 뿐이다. 정신병원이란 묘지와 다름 없지 않은가.

 

이런 블랑시가 구원받을 길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블랑시도 극락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과거와 결별하는 길은 현재에 자신을 맡기는 일인데,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블랑시라는 여인을 통해 과거에 집착하면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의 파멸을 보게 되고, 스탠리를 보면서 이런 비도덕성이 육체적 현존으로 나타나면서 현재를 살아가게 하고도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스탠리가 옹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블랑시 같은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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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2 1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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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2 14: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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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2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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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3 0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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