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교든, 천주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또는 다른 종교든 종교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해 오지 않았던가.
 
  위안만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삶,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종교를 지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종교가 많을수록 사람들이 행복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면, 부정적인 대답이 올 수밖에 없다.
 
  종교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전쟁들, 학살들을 제외하더라도 종교가 흥할수록 이상하게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은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교회나 성당, 그리고 땅 넓은 줄 모르고 넓어지는 절, 크고 넓고 높고 화려해지는 성전들과 달리 일반인들의 삶은 작고 좁고 낮고 누추해지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란 소설에서 예수가 다시 이 세상에 내려왔을 때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예수는 다시 감옥에 갇히고 심판을 받고 추방이나 사형을 당하리라는 그런. 그 시대에 예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도종환, 지금은 장관이 되어 있지만, 보수정권 10년 동안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그가 절망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낸 시집. 
 
시집 속에는 절망이 도처에 보이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길어올리고 있다. 그렇기에 다시봄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그중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연상시키는 시. 아니 지금 우리나라 종교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시. '흐느끼는 예수'
 
흐느끼는 예수
 

 


만일 예수가 눈발 풀풀 날리는 철거 지역에 와서
꺼멓게 타버린 슬픔의 시신을 안고 몸부림치는
늙은 여인 곁에 앉아 울고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았을까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해고노동자의
절망의 무게를 두 팔로 받아 안으려다
손에 피를 묻힌 채 흐느끼는 예수를 보았다면
우리는 그를 예수라고 믿었을까
가난한 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세상을 향해
예수가 독사에 빗댄 욕을 거칠게 내뱉았다면
우리는 막말하는 그에게 실망해 등을 돌렸을까
만일 예수가 로마의 군사기지 철조망 앞에 앉아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달라고 비에 젖으며 기도했다면
그날도 노인들이 군복을 입고 교회 앞에 몰려왔을까
만일 예수가 오늘 아침 이 땅에 와서
탐욕의 식탁과 향기 없는 정원
정의 없는 권력과 이성 없는 극단
자비 없는 기도를 비판한다면
그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
국정원이 몇가지 비리를 언론에 넘기고
조간신문 기사로 돌팔매질한 뒤
감옥에 가두려 하지 않았을까
불법체류자나 무슨 무슨 주의자로 낙인찍어
이 땅을 떠나게 만들지 않았을까 
만신창이가 된 채
진눈깨비 내리는 지평선 속으로
혼자 걸어가게 하지 않았을까
 
도종환, 사월 바다, 창비. 2016년. 110-111쪽.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04-19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