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는 지난 호하고 좀 달라진 점이 있다. 삶창에서 시는 그래도 한두 편이 실렸지만, 소설이 실린 경우를 잘 보지 못했는데, 이번엔 소설이 실려 있다. 그리고 평론도.
문학이 점점 현실에서 멀어지는 시대에 문학을 살리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해야 하나. 문학은 우리 인간 삶과 떨어져 있지 않고, 인간 역사와 더불어 함께 해왔는데, 최근에는 다른 장르들에 밀려나고 있는 추세다.
여기에 문인들이 저지른 안 좋은 일들이 하나하나 까발려지고 있으니, 문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괴퍅한 행동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과거에 된서리가 내리고 있는 중이다.
자기들은 기벽이라고, 기행이라고, 그냥 괴퍅한 행동이라고 할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치욕이고 잊을 수 없는 모욕이고, 상처일텐데, 이를 여전히 가볍게 여기고 넘어가려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미투 운동에 대한 글 '너희들의 세상은 끝났다(이나영)'와 '왜 영화 속 성소수자들은자주 사망하는가(신필규)' 라는 글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처절한 반성을 하지 않고 변명을 하거나 다른 주장을 하니 문학이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지. 문학은 곧 삶이라고, 작품은 곧 작가라고 그렇게 주장하던 것이 멀지 않은 과거니 말이다.
이때 삶창이 다시 문학이 차지하는 지면을 늘리는 것은 그럼에도 문학이 해야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이 힘들 때 글로 위로를 받았던 적이 있었고, 글로 행동으로 나설 때가 있었으니, 세상이 문학을 아무 낮춘다고 하더라도 문학은 여전히 문학으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 우리에게 다른 관점으로 생각할 힘을 주는 것, 우리에게 다른 삶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삶을 보듬어 주는 것. 문학은 여전히 그렇게 살아남아야 한다.
이번 호에 실린 소설 '차뚤부즈'를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진행형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
소설을 읽다보면 '투쟁'이라는 말을 몸으로 표현할 길이 없던 주인공 차뚤부즈가 우리나라에 와 '투쟁'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는 과정이 그의 회상으로 나와 있다.
말을 못하는 주인공이 오로지 연극만 하고 살아왔던 주인공이, 투쟁을 알 수 없어 투쟁을 표현하지 못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투쟁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그래서 그는 인도에서 사라져가는 연극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이 된 것.
반성해야 한다. 약자에게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게 한없이 약하게 굴었던 우리들 모습을. 이 소설과 함께 기독교 문제를 다룬 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이정한)'을 읽을 필요가 있다.
종교가 지닌 기본 교리는 사랑이다. 약한 사람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 그러나 지금 종교는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약자에게 한없이 인색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가이사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하지 않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다. 이번 호가.
이제 봄이다. 계절만 봄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봄이 되어야 하는데... 남북관계는 봄으로 가고 있지만 다른 관계는 여전히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겨울에 머물러 있다. 삶창에서도 그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니 더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지 않게. '짙은 어둠의 시대를 건넜으나, 문은 아직도 멀리 있다(오창은)'는 글을 이어서 문이 바로 우리 곁에 있게, 그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