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부드러운 손'

 

  그렇다. 시간은 결코 거칠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윽, 시간은 나를 쓰다듬고 지나갈 뿐이다.

 

  시간이 스윽, 나를 부드럽게 만지고 지나가는 동안 내 몸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에게 하나하나 무언가를 맡기고 만다.

 

  예전엔 내 것이었던 것들이 시간의 부드러운 손으로 넘어가 이제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부드럽게 나를 다른 존재가 되게 이끌고 간다.

 

  이 시집에는 이러한 늙음에 대한 시들이 많다. 시인이 정년을 하게 된 나이라서 그런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몸에서 하나하나 기능을 잃어가는 것들과 또 전화번호부에서 하나하나 지워지는 번호들, 사람만이 아니라 예전 것을 잃어가는 사회, 자연의 모습들을 담은 시들이 시집 곳곳에서 나온다.

 

시간은 절대로 거칠게 나를 다루지 않는다. 그냥 부드럽게 나를 만진다. 나를 이끈다. 그런데 그 손길을 거부할 수 없다. 부드러움 속에 무서움이, 냉정함이 담겨 있음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이 시집을 읽으며 늙어감에 대해서, 거부할 수 없는 변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하나 더, 과연 내가 추구하는 삶은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

 

이제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인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내가 살아오면서 추구했던 것들이 가짜 아름다움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마치 이 시처럼.

 

밤바다

 

집어등 눈부시게 바다를 밝히는 한밤중

어선들 주변으로 떼 지어 몰려드는

오징어와 갈치 들 앞 다투어

줄줄이 갑판으로 잡혀 올라온다

깊은 물속 어둠을 헤치고 다니던

물고기의 날카로운 눈도 아무 쓸모없이

빛의 꾐에 홀려서

목숨을 잃어버린다

죽음의 불빛들 찬란하게 반짝이는

수평선의 아름다운 야경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2017년 초판 6쇄.  15쪽.

 

내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온 삶을 이제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통해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헤쳐온 삶들이 어쩌면 집어등을 보고 몰려든 물고기들과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아찔하다.

 

결국 '죽음의 불빛'을 '삶의 불빛'으로 착각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더 시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이제는 '죽음의 불빛'을 보고 달려들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라는 것이 몸을 약하게는 하지만 정신은 오히려 더 넓게 깊게도 하지 않던가. 힘이 넘쳤을 때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도 하지 않던가.

 

최소한 죽음의 빛과 삶의 빛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를 읽었다.

 

여전히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리는 사람이 많다. 그 빛이 어떤 빛인지 구분하지 않고. 그러나 이제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시를 통해 이 점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축복이다. 

그리고 하나 더, 죽음의 불빛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그들이 우리에게 그 빛이 삶의 빛이라고 우겨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도록 '날카로운 눈'을 지녀야 하겠다는 생각도 이 시집을 통해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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