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274페이지)


글쎄, 버티는 삶이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다. 근데 정의하기 어려운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참 모순이기도 하겠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틈틈이 찾아오는 절망의 순간을, 버티지 않으면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절망의 근원을 찾아내 원망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뿐일까? 하지만 그렇게 원망한다고 해서 또 무엇이 달라질까. 갈팡질팡, 힘들다가 괜찮다가 하는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서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날카로워지는 건 싫고. 그러니까. 신경질이나 짜증, 찡그린 얼굴이 내 모습이 되어가는 게 싫은데, 그게 쉽게 변할 수도 없는 방식 같아서 화가 나는 일 반복된다. 지금 이 상황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면 될 것 같은데, 그건 또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은 건 아니다. 책으로 출간한 몇 권, 그 안에서도 몇 문장을 읽으며 방송에서 보는 그의 이미지와 말투가 그대로 옮겨간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이 책을 보고 드는 생각.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또 어려운데, 글의 분위기가 변한 느낌이다. 그 변화가 싫거나 이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삶의 어떤 순간을 건너온 그가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게 보여서 흥미로웠다. 어쩌면 그가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 게 더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항상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절대 그의 생각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은 그의 모든 것이고, 그걸 부정하려면 차라리 부러져버리겠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던 시간. 이미 다 알겠지만, 그는 생사를 오가는 큰 시련을 겪었다. 힘들다는 항암 치료까지 마치고 건강해졌다. 어느 날 방송에서 다시 본 그는 변해있었다. 그와 결벽증은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먼지 한 톨 용서할 수 없는 그의 자세가 너무 익숙했는데, 그는 이제 조금 흐트러진 상태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말투도 그대로고 문장도 그대로인데, 어딘지 모르게 그가 변했다는 건 그냥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마치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간을 걷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꺼낸다. 차분하게 말한다. 간절하고 친근하게.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는 태양계 경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절대적인 고독 앞에 혼자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다는 걸 깨닫고 지구로 귀환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간단한 걸 우주 끝까지 가서야 알 수 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109페이지)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웃음이 나고 용기가 되는 말인 줄 처음 알았다. 입버릇처럼 죽겠다고 말하고, 미칠 것 같다고 머리카락 쥐어뜯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처럼 망했다는 말도 저절로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망하려면 아직 멀었단다. 그래, 아직 망하지도 않았고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었다. 첫 장은 그의 투병 경험을 말하고 이후 달라진 그의 시선을 들려준다. 나는 그가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고 아무런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항상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방송에서 그런 이미지로 보일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잘못했다고 해도 말로 싸우면 그를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는 그가 살아온 방식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뒤로하고 혼자였던 시간을 후회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삶의 방식을 이제는 다르게 보려고 애쓴다.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왔기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안쓰러움을 느껴도 될지 모르겠다. 그 시간과 그 방식을 통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을 사는 또 다른 이에게 말한다. 절망에 빠지거나 도움을 기대할 곳 없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고민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장을 쓰는 그의 마음이 문장에서 그대로 읽힌다. 그만의 방식으로, 달라진 그의 시선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다. 사람들의 고민과 절망을 들을 때마다 그가 찾은 해법을 들려준다. 불행을 인정하는 것. 삶에 언제나 공생하는 불행이란 녀석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절망과 고통을 무너뜨리는 것일 테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에서 우리가 버티고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희망도 있다고, 우리 삶이 언젠가 빛을 낼 그 순간을 기다리고 기원하며 살아가는 날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살고 싶다는 농담, 54페이지)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 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60페이지)


두 번째 장과 세 번째 장은 그동안 그가 그동안 만나왔던 영화나 책, 시사적인 뉴스들을 가져와 삶의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의미를 전하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을 강조한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불행을 탓하는 일이 얼마나 인생을 안타깝게 만들고야 마는지 보여준다. 닉슨 대통령의 몰락, 천재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를 몰락시킨 연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처럼 불행과 피해의식은 우리 삶을 또 다른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 비단 이렇게 영화 주인공이나 과거의 인물들에 빗대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 원망도 하고 싶은 게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또 다른 후회뿐이라는 것을. 그의 말처럼, 우리가 불행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반복되는 절망과 괴로움,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게 불행을 원망하는 거로 생각하기 쉽다. 내 불행의 화살이 향할 곳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 불행의 화살을 쏘기만 하면서 살 텐가. 불행의 생각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바라보는 객관성을 키우는 게 불행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도 그 바닥에서 올라와 역작을 남긴 니체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행을 직시하고 객관화하면 이 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는다고 조언한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기 객관화로 불행을 다스린다면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과거의 불행을 발판 삼아 현재의 건강한 삶이 유지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가는 인생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들린다. 불행이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우리 삶을 짓누르는 무게 따위 느끼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각자의 불행은 너무 다양하고, 그 불행을 해결할 방법은 본인만 안다.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버티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아프기 전과 후의 내가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살고 싶다는 농담, 217페이지)


오늘도 버티는 삶인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그의 위로가 담백하다. 섣부른 오지랖이나 조언이 아니라, 그 불행을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로 들린다. 살기로 한 이들이 충분히 닮아도 좋을 삶의 자세가 그의 문장 안에 담겨 있다. 그의 문장에 담긴 따뜻함이 더 빛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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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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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일이 누가 중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둘 중의 하나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한 번 트인 귀는 막히지 않고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으며 상한 마음과 망가진 관계는 고치기 힘들다. 얼른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당신들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137페이지)


"우퍼를 하나 살까?"

형제자매들 모두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어디로 이사를 하여도 층간소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단독주택에 살던 나도 이제는 아파트에 살게 됐다. 신축이냐 구축이냐를 떠나서 공동주택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소음은 예상하였고,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각오를 했음에도, 이사한 지 한 달 정도 지내면서 우퍼를 사자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평소에도 소리에 민감했지만 남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도 층간소음 정도는 충분히 감당했던 내가, 막상 계속 머물러야 할 집이라고 생각하니 이 소음에 자꾸 예민해진다. 왜 위층 사람들은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거지?


처음에는 내가 참을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뛰고 소리를 지르는 데도 그걸 말리는 어른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소음을 참을 수 없어서 화가 났던 어떤 날은 위층의 현관문 앞에까지 간 적이 있다. 혹시나 윗집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확인하고 싶었다. 역시 나를 괴롭히는 소음의 범인은 윗집이었다. 집안의 소리가 현관문을 뚫고 계단 아래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아이를 말리는 어른의 소리는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같이 노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어른의 발망치 소리는 기본이었다. 아, 나는 이 지점에서 화가 났던 거구나. 층간소음 자체가 아니라, 공동주택에 살면서 조심하려고 애쓰지 않는 이들의 태도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거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로 다투거나 살인을 했다는 뉴스가 더는 새롭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익숙한 사건·사고가 되어버렸다. 이해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그 정도 소음을 못 참고 사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층간소음은 단순히 소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해하고 참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감정적인 문제가 있다. 머리로는 무조건 참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공동주택에서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고 있을까 싶어 화가 치미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면 다툼이 되고 물리적인 폭행이나 살인이 된다. 불안하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 이 화가 폭발할지 무섭기까지 하다. 이 소설을 만나고 나는 더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어느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1112호 여자였고, 피해자는 바로 위층 1212호에 잠시 머물던 조카였다. 모두가 층간 소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문제를 제기하며 민감하게 굴었던 건 1111호, 작은 소음도 참지 못하고 바로 더한 소음으로 보복하곤 했던 여자였다. 그러니 1112호가 가해자라고 말했을 때 다들 의아해했다. 설마 1111호를 잘못 말한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1111호가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1211호와 1011호가 모두 이사를 나갔을까. 나중에 들어보니 어느 날 1111호의 여자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동안 이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걸까.


작가는 이 아파트의 각 호를 조심히 비추면서, 우리가 어떻게 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되고 집중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선명하게 그린다. 집은 말 그대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형식을 가졌지만, 이곳 역시 집이다. 누구나 마음 편히 쉬고 싶은 곳이다. 그런 공간이 나를 더 불안하게 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곳이 된다면, 우리는 이곳에 어떻게 머무를 수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 처음, 이 소음으로 문제를 삼던 1111호 여자는 알고 보니 재혼 가정이었다. 어린 아들이 있는 남자와 결혼해서 시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누구도 재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정에 최선을 다했다. 아내와 엄마, 며느리 자리에서 충실했다. 예쁜 딸도 낳았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냉랭했고 언제나 의심했다. 그 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시어머니의 냉대와 언어폭력에 여자는 아이를 낳은 지 8년이나 지난 후에 산후풍에 걸리고, 조금만 바람이 닿아도 한기를 느낀다. 그때부터 여자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친했던 위층 1211호의 소음을 느낀다. 참을 수 없었다.


옆집 1112호 여자 역시 어느 날부터 소음을 감지한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던 여자는 위층의 소음에 1111호가 복수하는 행동임을 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에게 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러다 점점 옆집의 공격은 그녀를 향하고, 그녀도 더는 참지 않는다. 1011호의 아기 엄마는 1111호의 항의로 아기의 울음소리에 민감해진다. 아이가 우는 존재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오직 위층의 항의가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아이를 돌본다. 아이가 조금만 울어도 아이에게 화를 냈다. 그러다가 점점 아이의 울음을 무기 삼아 1111호를 공격한다. 아이가 울 때마다 천장 가까이 아이를 들어 올리면서 그 소리가 위층으로 잘 들리도록 노력했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절규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우는 아이의 얼굴, 그에 반해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우는 소리에 기뻐하면서 웃는 자기 얼굴에 경악했다. 이 소음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자기 아기였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고, 이사하는 것만이 답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각 호의 사연을 들으면서 점점 보이는 게 있다. 언제 어느 곳이나 소음은 있었지만, 그것을 더 잘 느끼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단순히 소음의 크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사방팔방 모든 것이 연결된, 특히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일상생활의 모든 소리가 여기에서 저기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움직인다. 결국 소설 속의 사람들은 가정이 파탄 나고 병을 얻기도 하지만, 그게 꼭 소리 때문은 아닐 거였다. 이미 각자의 삶에서 불안과 불화가 깊숙이 뿌리 내려 있던 상태에서 민감하게 다가오는 소음은, 이들에게 갈등을 일으키고 폭발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 일이 아파트에서, 이웃들을 향했을 뿐이다. 나의 마음과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현실과 답답한 벽을 마주한 채로 마음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들. 날이 선 시어머니의 말들이 가슴에 꽂힐 때마다 쌓여가는 외로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도 도움을 청할 곳 없는 현실, 처음 하는 육아가 힘들지만 감당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일들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게 속으로 담아두기만 했던 고통스러운 마음이 소음이라는 매개로 폭발하고 말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누구나 피해자라고 하지만, 언제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나만 공감하는 건 아닐 테다. 소음이 만드는 문제에 앞서 그 소음에 민감해지는 이들이 모두 집에 있던 여자들이었고, 그 여자들이 어떻게 소음에 반응하기 시작하는지 그 과정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1111호 여자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고민에 대해 남편과 상의했다. 아니, 여자의 일방적인 토로라고 해야 하나. 남편은 언제나 좋은 사람 흉내를 내면서 아내의 고통에 방관자였다. 괜찮겠지, 좋아지겠지, 아니겠지. 남편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서 자기 역할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살았다. 층간소음 문제까지 일어나자 해결하기는커녕 위층 남자와 술 한잔하고 기분 좋게 들어와서는 아내의 예민함을 탓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던 옆집 여자 역시 무책임한 남편에 혼자 양육과 생활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 고통받았다. 이 팍팍한 일상에 마음은 너덜너덜해지고, 이해할 수 있었던 옆집 여자의 소음 공격에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거다. 어쩌면 이해와 공감을 보여줘야 하는 건 아파트 내의 공동생활 대상자들이 아닌, 가정에서 서로에게 보여줘야 하는 게 시작 아니었을까.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가장 보살피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가족이니까. 바로 옆에서 나를 이해 못하고 상처받는 나의 마음을 들을 줄 모르는 이들에게 느끼는 배신감이, 소음을 참지 못 하고 공격에 이르게 하는 행동의 발단이 되어가는 건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나만 고통받는 것으로 느끼는 그 배신감의 이름은 외로움일지도 모르지.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나만 힘든 이 상황 말이다.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엄마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실체도 없는 소리가 엄마의 삶을 잡아먹었다. 나도 머지않아 그것에 먹힐 거다. 옆집 아줌마는 무슨 소리를 듣는 건지 엄마처럼 계속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112페이지)


그럼 내가 경험한 소음의 시작은 어디일까. 이사를 온 지 한 달여, 아마도 나는 이 공간과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 아닐까 싶다. 이사를 오기 전날부터 몸이 불편했던 게 생전 처음 대상포진을 경험했고, 그 무서운 병은 언제 어디서나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끔찍한 후유증을 남겼다. 먹는 것마다 체해서 병원과 약국의 단골이 되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따라다녔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점점 문을 열어놓기가 싫어졌다. 아파트 주차장의 소음, 놀이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트럭에 물건을 싣고 와서 파는 장사꾼의 목소리까지 온갖 소리에 짜증이 났다. 환기한다고 습관적으로 문을 열어놓긴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는 않다. 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지니 조금씩 주변의 것에 집중하게 되더라. 그중 하나가 소리였던 듯하다. 나와 상관없는 곳에서 전달되는 소리에 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이렇게 된 상황 하나하나가 못마땅했던 날들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선을 조금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위층의 아이들은 집에서 운동회를 하고 어른의 발망치 소리는 계속된다. 밖에서 들어오는 소음도 여전할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이 만드는 소리에 그러려니 할 것이다. 나 역시 내 생활에 적응하면서 타인의 소리가 아닌 내 삶이 만드는 소리에 집중하고 싶다. 그러고도 계속되는 소음이라면 또 다른 답을 찾아야겠지. 그거 말고 찾을 수 있는 현명한 답을 아는 이가 있다면 말해줬으면 좋겠다. 누구나 경험할 이 소음에 조금은 그 고통을 덜어낼 수 있도록.


너무 생생해서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떻게 썼을까 궁금했다. 이건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읽으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순간순간 올라오는 욱하는 감정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작가의 실제 경험이 담긴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이사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결과를 보여줬다. 그게 정답은 아닐 테지만, 그 순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 이사라는 건 맞지 않을까? 고요할수록 더 잘 들리는 소리는 층간소음에서 빛을 발한다. 혼자 있을 때, 그 고요함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외로움이 그 틈을 노리고 침투할 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층간소음이 누구에게 더 예민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오느냐 하는 상황을 이렇게 소설로 확인한다. 명확한 답이 없는 현재진행형의,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의 문제일 때 우리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계속 묻게 된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활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상처받은 이들의 모습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그 묘한 경계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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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백수린 지음, 주정아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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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과거를 뒤로하고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는 밤.

실패보다는 희망을 말하는 밤.

누군가에게는 과오를 덮어줄 축복처럼,

위로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밤. (5페이지)


짧은 단편 속의 이들에게 공감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어쩌면 나와 다르지 않을 일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처받고 아픈 시간을 보내는 상실의 감각을 드러낸다. 언제나 그 시간의 끝은 있고, 오지 말라고 밀어내고 붙잡아도 기어코 우리 앞에 다가오고야 마는 순간은 또 묵묵히 받아들여야 할 운명 같다. 그러다가도 문득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순간을 불러온다. 알게 모르게 잊고, 잃고 살아왔던 것들. 현실에 치여서, 겁나고 무서워서 포기하던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꺼내게 한다. 무심하고 무뎌지려 애쓰던 감각들이 되살아날 때마다 조금씩 두근거리는 가슴.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보다 하고 걸어왔는데, 어느 날 문득 멈췄을 때 비치는 지나온 시간이 인생의 또 다른 길을 열어주는 건 아닐까 기대가 생기기도 하는 나날.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더 시선이 머무는 이유다.


대학교 행정조교로 일하는 여자는 오늘의 삶이 불안하다. 언제나 꾸었던 꿈은 항상 궤도수정을 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애인과의 관계도 위태롭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그녀의 시간이 맞는 건가 싶으면서도 선뜻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도 못하는 일상. 언제까지 이런 삶이 계속될까 궁금하면서, 걱정과 근심이 앞서는 오늘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옳은 걸까? 「언제나 해피엔딩」의 주인공은 박 선생의 한 마디에 기운을 얻는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불행한 시간이 아닌 오늘 여기에 집중하며, 그래도 다른 의미가 있는 인생을 걸어가는 희망을 품는다. 그래, 괜찮겠지, 괜찮아지겠지, 나아지겠지. 우리가 오늘의 불안을 안고 살며 언제나 외우는 주문을 여기서도 본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인생들인지, 안쓰러우면서 안도한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위로받는 기분이다.


칼칼한 바람이 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상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할 조금의 여유마저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로 하여금 끝내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그것은. (중략) 이 세계는 사람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잔인해지도록 종용하지만, 이런 세계에 살더라도 그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니까. (101~102,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


공항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동안 공항에 가본 적은 없다. 「완벽한 휴가」의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항 가까운 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을 자주 갈 거로 여겨지지만, 그들에게 공항은 언제나 계획에만 있는 장소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던 탓일까. 그런 이들이 어느 날 공항으로 향한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함이 아닌, 말 그대로 공항에 다녀오기 위한 목적이다. 여름휴가 기간이었다. 폭염이 기승이었고 전기세를 아끼고자 에어컨도 쉽게 틀지 못한 나날. 그들은 공항에서 휴일을 지낸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각자의 일을 하고, 공항 안에서 음식을 먹는다. 시원한 곳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여름의 더위를 식히는 일이 괜찮은 것 같으면서 여자는 어릴 적 아빠의 모습을 떠올린다. 기억하지 못하고 지냈던 어떤 날 속의 아빠는 그리움이자 애틋함이다. 공항에서의 휴가는 완벽한 날이었다. 비슷한 느낌으로 「어느 멋진 날」은 더운 날의 해변에서 마주친 한 남자의 시선이었다. 여자는 기혼이었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책장을 넘기던 그때 무심코 마주친 시선. 남자는 여자의 치마 밖으로 나온 발을 보고 있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여자는 묻지 않았다. 대신, 남자와 가벼운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이다. 남자는 여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했고, 그때부터 여자는 자기 발에 신경이 쓰인다. 은근히 설레면서 자기 발을 바라본다. 언제였던가, 자기에게 아름다움을 말해주거나 그런 시선을 보낸 사람이 있었던 게. 낯선 곳에서의 낭만 같은 느낌으로 여자는 그날을 기억한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혼자만 오래 간직하고 싶은 수줍은 추억으로 말이다.


「참담한 빛」의 어린 부부는 배 속에 아이를 품고 침몰하는 배의 뉴스를 듣는다. 처음 아이를 갖고 아이를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용기는 배의 침몰 소식에 불안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희망이 기적이라는, 희망이 불처럼 번진다는 말에 또 한 번 용기를 낸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 세상 살아가는 걸음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다짐 같은 게 아닐까.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라며,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가는지 그 시작을 보는 듯하다. 마지막 단편이었던 「아무 일도 없던 밤」처럼 죽음을 앞에 둔 노인을 바라보는 요양사의 시선과 대조적이다. 곧 운명할 것 같은 노인의 상태, 멀리 있는 딸들이 엄마의 마지막을 보고자 달려오고 있지만, 폭설이라는 기상이변으로 시간이 지체된다. 무심하게 환자들을 대하며 감정을 배제하고 살아온 요양사는 고요하게 누워 딸을 기다리는 듯한 노인을 보며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남편이 그렇게 갑자기 죽을 줄 몰랐다고. 남편이 돈을 벌겠다며 떠나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 또 죄책감을 느꼈다고. 애틋한 부부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부부의 모양새를 하고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로가 조금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떠난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쌓는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르지. 여자는 다시 만나게 될 남편과의 감정에 뭔가 기대하지는 않았을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조우할 남편과의 모습에 괜찮은 가족의 모습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혹여 사지로 가는 남편을 붙잡지 않았던 것에 죄책감을 느낀 걸까 싶기도 하고. 우리 앞에 닥친 불행에 스스로 갖는 어떤 감정이 떠오른다.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걸까? 언제 어느 때고 우리 삶에 끼어들 기회를 엿보는 불행이란 놈에게 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불안과 자책과 싸워가는 게 우리 아닐까.


그녀는 허기가 져 병실에 비치된 냉장고를 뒤지다가 누군가 사놓은 딸기를 찾았다. 향긋했던 딸기는 뭉개지고 짓물러 있었다.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딸기의 뭉개진 부분들을 과도로 도려내고, 얼마 남지 않은 과육을 입속에 허겁지겁 집어넣었다. 딸기가 달았다. 히터를 세게 튼 병원은 창밖의 세계와 완벽히 단절된 듯이 비현실적이었다.

"오늘 밤은 죽지 말아요."

그녀가 노인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226~227페이지, 아무 일도 없는 밤)


엄마와 딸의 여행을 그린 「비포 선라이즈」는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여행의 의도를 보는 듯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딸은 엄마와 프랑스 여행을 계획한다. 엄마가 고생하지 않고 좋은 것을 보고 다닐 수 있게 여행 일정을 잡은 딸은 출발하기 전부터 엄마와 의견 충돌을 겪는다. 여행 다니면서도 서로 여행 스타일이 다른 것에 당황하며 급기야 짜증이 나기도 한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딸은 어느 날 숙소의 창가에 앉아 일출을 기다리는 엄마를 본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해 뜨는 것을 기다리자 싶었던 엄마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행 일정에는 없던, 엄마와 숙소의 창가에 마주 앉아 부모님의 세월을 듣는 일. 아버지를 생각하며 애틋한 표정으로 부부의 젊은 날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표정에는 여행보다 더 좋았던 시간이 그대로 묻어 있다. 해 뜨는 것을 보겠다며 기다리던 엄마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고, 서서히 드러나는 해의 눈부심에 찡그리는 표정마저 행복하게 보인다. 엄마의 낭만을 이뤄주겠다고 시작한 여행은 뜻밖의 장소와 시간에서 행복한 여행이 된다. 여행의 의미가 바로 이런 거겠지. 우리가 꿈꾸는 여행도 같다. 같이 먹고 걷고 보고, 그러다가 좋은 것을 함께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진짜 여행인 거지.


딸을 만나러 프랑스에 간 아버지의 낯선 시작이 펼쳐질 「여행의 시작」, 옛 연인과 이십 년 만에 추억의 장소에서 만나는 「오직 눈 감을 때」, 첫 키스가 무섭다며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연인이 귀여워 안아주던 「우리, 키스할까?」, 불면의 밤에 눈을 뜨고 외로울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건 얼마 전에 구조한 유기견뿐인 「그 새벽의 온기」, 갑작스러운 누나의 동물원 방문이 어색했지만 언젠가 그리워질 날이 될 것 같은 「봄날의 동물원」, 여행지에서 만나 여행지에서 헤어지며 다음을 말하는 게 쓸쓸하다는 걸 알게 되는 이별의 순간 「어떤 끝」, 사랑을 위태롭게 하는 현실 속의 자기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 모두의 이야기이면서 또 각자의 이야기가 될 단편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건너가는 우리가 쉽게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 그렇게 우리는 어떤 끝을 만나고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평범한 주인공들의 평범한 일상을 마주하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으면서도, 어떤 날을 살아가는 내 모습 같아서 씁쓸하기도 했다. 왜 누구나 바라는, 피해갈 수 있는 순간들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짙다. 다들 비슷하지 않나? 불행을 피해가고 싶고, 불안을 감당하기 무섭고, 행복을 기다리고. 어쩌면 그렇게 바라는 행복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당연하게 마주치는 일상 같기도 해서 무던해지고 싶은데 또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순간들. 우리가 사는 수많은 오늘이 그러하더라.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하고 말했다. (155페이지, 언제나 해피엔딩)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안하고 불행한 순간들을 맞닥뜨렸을 때의 우리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지나간 어느 날을 꺼내 보며 애써 미소 짓기도 하고,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오직 그것만이 방법인 것처럼, 그게 최선인 것처럼. 하긴, 다른 무슨 방법이 있을까. 내가 아는 방법도 그것뿐인데. 누군가의 마음, 누군가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찾아내는 이런 위안의 방식도 있다는 것을 이 짧은 소설들로 또 배운다. 오늘은 사라져버릴지 몰라도 언젠가 오늘을 기억하는 순간이 찾아올 테니. 또 어떤 불행과 불안의 순간에 기적 같은 희망을 바라며 오늘의 흔적을 더듬어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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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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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하면서 읽기 시작한 이 짧은 소설들은 어느새 너무 웃픈 사랑 이야기로 자리 잡았다. 각 이야기의 제목이 어쩜 이렇게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사랑 이야기에 혼자 웃으면서 씁쓸해졌다. 그러다가 결국은 웃으면서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독자가 되었다. 너무나 평범한 우리네 사랑 이야기인데, 왜 각자에게는 그렇게도 특별한 사랑으로 남을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된 듯하다.


부부가 오랜 세월 함께하면서 어떻게 정이 들고 늙어갈 수 있을까 했던 궁금증에 답을 준 <어떤 별거>는 한숨과 애틋함을 동시에 불러왔다. 아내와 더는 못 살겠다며 아들에게 투정하고, 가출 같은 별거에 당당함을 부르짖는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젠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며, 싸울 때마다 별거했던 아버지의 다짐은 대단했다. 그런 아버지도 어머니의 건강 앞에서는 그저 걱정이 앞서는 한 남자였다. 어머니 관절약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며 잊지 말고 사다 주라는 아버지의 당부. 싸우려면 지독하게 싸우고 철천지원수가 되어 욕만 해도 될 텐데, 어머니 드시는 약이 떨어져 가는 걱정은 왜 하는 것인지. 어머니는 또 어떻고. 아버지 욕을 한 바가지 하면서도 평소 화장실 못 가서 힘들어하던 아버지의 선식을 챙겨준다. 이럴 거면 왜 싸우고 왜 별거를 하신다고 하는 건지. 이런 게 사랑이고 이렇게 부부가 같이 늙어가는 건가.


어린아이의 수줍은 사랑 역시 웃음이 절로 나온다. <독감>에서 보여준 아이들의 행동에 '어머?' 하는 시선을 보내게 된다. 우리 어렸을 적 생각도 난다. 이런 마음이 뭔지 모르겠지만, 설레고 두근거리는 기분이 좋아서 마냥 웃음이 실실 새기만 했던 표정을 기억해본다. 독감으로 결석한 딸을 찾아온 같은 반 남자아이를 보고 의아해하던 느낌도 잠시, 남자아이가 가져간 딸의 마스크에 더 기가 막힌다.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쓰던 마스크를 쓰고 싶은, 학원에 가기 싫어서 감기 걸리고 싶다지만 그 아래에는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그렇게 티가 나는데 말이다. ^^ 아이의 마음이 이렇게 순수한가 싶으면서도, <개만도 못한>에서는 정말 키우던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한 남자의 처절한 절규가 하늘을 찌른다. "나도 데려가야지!" 이런 외침은 순간적으로, 완전 진심인 거다. 연애하던 남자와 여자는 충동적으로 강아지를 한 마리 분양받는다. 같이 살면서 같이 키우고, 3년여의 세월을 함께했지만 결국 연애는 끝났다. 여자는 남자에게 강아지를 두고 떠났고, 남자는 강아지를 핑계 삼아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강아지를 센터에 맡기겠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고, 강아지만 데리고 떠난다. 으잉? 이게 아닌데? 남자는 예상 밖의 전개에 황당하지만, 여자는 진심을 드러내고 사라진다. 여자는 남자를 다시 볼 생각이 전혀 없었고, 강아지를 두고 협박한 남자를 정리하고자 마지막으로 나타난 거였으니. 남자는 그런 여자의 마음도 모르고 절규한다. "개는 데려가면서 나는 왜 안 데려가냐구!" 아, 역시 현실에서 확인하는 사랑의 끝은 아름답지만은 않아...


이별하고 정리하는 일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의 노트북>을 보고 공감한다. 헤어지고 뒤늦게 돌려받은 노트북 바탕화면에서 사라진 사진. 여자는 자기 흔적을 남기기 싫다고 남자의 노트북 안의 사진을 지웠고, 남자는 남의 물건에 왜 함부로 손을 데느냐고 화를 낸다. 누가 잘못한 걸까? 남의 물건에 손을 덴 여자? 헤어진 여자 사진을 계속 보관하고 있던 남자? 남자와 여자는 싸웠고, 남자는 여자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여자는 헤어졌고, 남자는 헤어지자고 말한 순간부터 여자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무슨 타이밍이 이러냐. 헤어지자는 말에 여자는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헤어지고 있었고, 남자는 그 말이 무슨 신호탄이라도 되듯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니. 사람 마음이 이래.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순간들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이 너무 많잖아. 언제나 어긋나고, 언제나 후회하고. 그러다가 또 다른 인연에 용기를 내기도 하는.


<식혜 같은 내 사랑>의 성구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마흔여덟의 노총각이다.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하고 손자 손녀 한번 보여드리지 못해 어머니께 불효하는 게 죄송한 나날이지만, 그게 어디 그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더냐. 선을 보고 여자를 만나도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면 연락이 뚝 끊기는 게 일쑤. 어느 순간 그도 결혼을 포기하고 지금의 가족 구성원에 만족하며 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이혼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여자 동창 지숙을 보고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에 지숙의 소문은 금방 퍼지고, 마치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그런 지숙이지만 성구의 마음은 지숙의 현재를 더 사랑하는 일이 최선이었고, 지숙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든 중요하지 않은 거 아니겠나.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외치던 성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마흔여덟의 총각 성구의 사랑은 이제 시작인 걸까. 시골 마을의 어느 잔칫날을 보는 듯한 기분에 자꾸만 성구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은 건 나뿐인 건 아니겠지? 사랑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은근히 짠해 보이면서, 은근히 그 짠내에 힘을 보태주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 같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게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하는 모습인 걸 부정할 수도 없다. 드라마나 영화 대사 같은 표현을 하고 싶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게 현실 속 우리 모습 아닌가. 너무 투박해서 이게 사랑이고 연애인가 싶다가도, 이런 모습마저 받아주는 이가 있어서 인연인가 싶은 마음에 안도하고. 그래서 사랑이다. 너무 유쾌하고 경쾌해서 얼핏 사랑이 아니고 코미디인가 싶으면서도, 여전히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이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 조금씩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사랑으로 위로받기도 하고 사랑에 아파하기도 하면서 그 시간을 걷는 사람들이다. 세상이 쉽지 않다는 건 너무 잘 아는데, 그 쉽지 않은 일 중의 하나인 사랑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그래서 더 어렵고 알 수 없는 게 사랑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에휴, 쉽지 않구나, 사랑도. 마치 우리 삶처럼.


글쎄, 작가의 전작 짧은 소설을 이미 만나봐서인지. '누가 봐도 이기호의 글'이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게 가장 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씁쓸한 시선에서도 웃음을 만들고, 찌질한 외침 속에서도 당당함을 보여주는 그만의 방식이 재미있다. 아, 세상 이렇게 살고 싶구나 싶을 정도로, 누군가의 시행착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은근한 처세술을 배우는 기분도 든다. 이게 사랑이구나 싶으면서도, 이렇게 사랑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배움? ㅎㅎ 울고 웃는 인생사 속에 그대로 녹아있는 사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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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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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87페이지)


아버지와의 짧은 일화로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아버지의 시간을 깊이 파고들면서 무게를 더해가고, 결국은 우리 삶이 부모에게 시작된 것임을 말하는 듯하다. 거리가 생기고 마음이 달라지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반드시 함께할 수 없는 상황과 생각이 있다. 자연스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면서 부모에게 독립하는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면 편한데, 또 그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은 마음이라 어렵다. 하루키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시간을 듣고 읽게 된 그에게 변화는 찾아왔으리라.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에 쌓아온 경험에 녹아든 누군가의 인생을 읽음으로써, 한 인간의 이해가 커졌을 테다.


어린 시절, 단독주택에 살았던 하루키는 항상 고양이가 함께 했다. 외아들인 그에게 고양이는 형제였고, 책은 소중하고 즐거운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러 갔다. 고양이를 담은 상자를 해변에 내려놓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고양이가 하루키 부자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있었다는 일. 어라? 무슨 일이지? 사실 고양이를 버리면서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고양이를 버린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음 독하게 먹고 버리고 왔는데, 웬걸. 고양이는 그들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와 마치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표정이었지 않았을까. 고양이가 어떻게 돌아왔을까 싶은 궁금증과 이상하게 안심되는 마음에 묘한 순간이었다.


고양이에 얽힌 단순하고 가벼운 이야기로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어느 시대의 역사를 한 개인의 시간으로 읽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하루키가 이렇게나 사적인 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사실 그의 작품을 몇 편 읽었지만, 하루키 자신 외의 누군가를 말하는 건 거의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굳이 이 작품을 써야만 했던 이유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언젠가는 문장으로 정리해보겠다는 그의 오래된 다짐이 있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억과 정리가 이 책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다. 어린 아들에서 청소년으로, 성인이 된 그에게도 아버지와 다른 의견으로 가깝지 못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오랜 세월 다정한 부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아버지 돌아가실 즈음에 화해 비슷한 마음을 나누는 게 모든 시간을 정리해주는 건 아니었겠지. 누구에게나 필요한 시간 아니었을까. 정리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온전히 담아둘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 말이다.


그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데 특히 의아했던 건, 전쟁에 세 번이나 소집되었다는 거다.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두 번의 전쟁에 더 참전한 젊은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면 앞날이 까마득해진다. 이 전쟁이 끝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부터, 하고 싶은 게 많은 시절의 꿈을 꺼내지도 못한 슬픈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고요했던 건 아니다. 끊임없이 혼란스러웠고 부유하지 못한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아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절에 입양되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파양되었고, 절을 운영하던 아버지(하루키의 할아버지)를 이어받는 일에 눈치 싸움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말년은 심한 질병으로 힘든 투병을 했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유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루키와 아버지는 이십 년 넘게 남처럼 살아왔다. 아버지가 바라는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게 큰 이유일 수도 있지만, 그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는 이미 관계가 끊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를 계속 실망하게 했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순간도 편하지 않았을 마음에, 소설가로 만족하며 살아왔지만 언제나 그 완성의 빈구석에 아버지가 있었을 터였다. 그러니 언젠가 한 번은 이 이야기로 아버지와의 시간을 소환하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 그에게는 필요했으리라.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아버지의 시간 속에 자리한 참전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기억이 완전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의 기억들은 아버지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게 했다. 이제 막 입대한 초병들을 진정한 군인으로 만들겠다며 중국인 포로를 죽게 한 이야기는 끔찍했다.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아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하루키에게는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후로도 계속되는 아버지의 참전 경험들은 어린 소년에게는 낯선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더는 없으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테지. 자기 길을 결정하면서 아버지와 소원해지고, 아버지와 마주하는 시간은 물론이고 서로의 불필요한 마주침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가 언급했던 그 시간의 사건들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듯하다. 더는, 아직은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마음이 읽힌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기어코 한 번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이제야 들려오다니.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아프고 불편하게 했을 감정들이 이 책 속에서 많이 읽힌다.


그에게 지나간 세월 속에서 잊히지 않고 자꾸만 떠오르는 것으로 아버지는 존재했다.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아버지 삶의 풍경들을 글로 쓰겠다는 그의 결심은 이렇게 짧은 문장과 글로 완성되었다.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말이, 치유의 방법의 하나가 어떤 생각과 기억을 글로 써보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언젠가 기억 속 아버지를 꺼내 보고 써봐야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치유의 방법을 하루키가 보여준 듯하다. 나는 아버지와 기억이라고 할 정도로 함께한 시간이 거의 없어서, 연필을 손에 쥐어도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적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하면 하루키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그에게 정말 다정하고 애틋한 아버지였던 것 같다. 희미하고 불완전하지만, 오랜 세월 속 아버지를 꺼내와 다시 대화하는 그의 시도가 부럽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 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이 부모 세대의 신경을 일일이 곤두서게 하는 것처럼. (62페이지)


누군가를 온전히 기억하는 방법으로, 누군가와 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바람으로, 어느 역사의 한 부분을 수정하지 않고 기록하는 방식으로 좋았던 책이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화해하는 마음으로 그 관계를 다독이고 정리하는 그의 이야기 자체가 고마웠던 글이다. 언젠가 나도 이 문장들처럼, 기록들처럼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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