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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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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전부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특정한 걸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죠. (206페이지)
여름의 한가운데, 꼭 장마철의 꿉꿉함이 그대로 담긴 듯한 그 날의 묘사에 빠져들었다. 유난히도 더웠던 날, 폭우가 내릴 것처럼 습한 기운이 온 마을을 뒤덮은 날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을의 축제 같은 시간이 펼쳐졌다.
호쿠리쿠 지방 K시. 사람들은 그 집을 ‘배의 창문이 있는 집’이라고 불렀다. 명망 있는 의사 집안의 3명이 동시에 생일을 맞이한다. 한 가족의 삼대가 생일이 같을 수가 있을까? 그것부터 그 집안의 신비로움과 위대함을 뒷받침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 개인의 생일이 아니라, 마을의 잔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고, 마을 사람들 또한 그 집안에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왔다. 의원을 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던 남자, 없는 듯 조용히 살아가며 자기 역할을 했던 안주인, 그리고 아이들. 그중에 묘하게 매력을 뿜어대던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여자아이의 존재감은 유별났다.
불길한 느낌은 피해가지 않았다. 생일잔치에 모인 사람 중 음료수와 술을 마신 이들이 모두 죽었다. 그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딱 두 명, 그 집안의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녀와 그 집에 드나들던 유모. 아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료수를 마시지 않았고, 유모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기에 그나마 목숨을 건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병들, 기괴한 모습으로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그 집안의 마지막 모습을 장식했다. 그 집안의 주인과 손님 구분 없이 죽음 앞에 무너졌다. 범인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고, 거의 포기할 무렵 한 남자가 범인이라고 지목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숨진 채로 유서와 함께 발견되었다.
소설은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시간을 다시 들춰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누군가 그때의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사건의 진실을 듣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그때 본 그대로를 기억하고 있을 뿐,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아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는 그 마을 출신이다. 무슨 목적으로 그 기록을 남기려고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새삼 다른 시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독자에게도 생긴다. 그날의 일은 미제사건처럼 남아있기 때문에 말이다. 범인은 밝혀졌고, 그가 유서와 죽음으로 알리면서 사건은 끝났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진범이 따로 있을 거로 여기며 그 사건을 기억에서 놓지 못한다. 그리고 한 개인의 기록은 《잊혀진 축제》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다시 한번 세간의 논쟁거리가 된다.
읽는 내내, 범인을 알면서도 범인이 누굴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잔칫집에 음료와 술을 배달했던 청년. 그가 범인이겠지. 그 청년을 찾으면 이 사건은 모두 풀릴 것이다. 물론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사건이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테지. 이상하게도 그 혼란 속에서 범인이 잡혔는데, 아무것도 개운해지는 게 없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앞을 못 보는 소녀는 이 기가 막힌 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였고, 음료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유모는 공범자라는 누명까지 쓰며 긴 세월 아파했다. 모두가 피해자였는데, 누구도 가해자를 알려줄 수 없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인공이 당시 관련자들 인터뷰를 하면서, 이 인터뷰의 결과가 어떤 해결을 말해줄지 기대되는 건 당연했다. 뭔가 드러날 것만 같았다. 범인이 아닌 사건의 모든 것을 보여줄 거로 믿었다.
그 사람은 가끔씩 이상한 말을 했어요.
눈이 안 보이게 된 다음부터 보이게 됐어.
그런 말을 가끔 하는 거예요.
어쩐지 손으로, 귀로, 이마로 보이는 것 같아.
무심히 그런 말을 하곤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던 기억이 있군요.
그러니까 사건이 있고 나서 내가 몇 번이나 그 집으로 찾아가려고 한 건 히사한테 살짝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실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죄다 본 게 아닌가.
범인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요. (45페이지)
아마 1000조각 퍼즐을 맞추고 있는 기분이 이런 걸까.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는데, 범인이든 용의자든 소설 속 등장인물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은데, 무엇 하나 투명하게 개운해지지 않았다. 마치 비슷한 퍼즐 조각을 여러 개 앞에 두고 어느 위치에 넣어야 하는지 계속 고민하게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파란색의 방, 창문, 빛, 하얀 꽃, 백일홍. 반복하며 등장하는 단서들로 온갖 추측과 추리를 해보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뭔가가 들어맞는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 터. 그런데도 끝까지 이 소설은 완벽하게 소화되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아무리 풀어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 여러 가지 해석을 정답 처리해야 하는 서술 문제를 푸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읽은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과 비슷하게, ‘아,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를 이런 것이었군.’ 싶은 깨달음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분명히 있는데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애매하지만 또 계속 들여다보고 싶은 이야기의 세계, 딱 들어맞을 것 같은데 잘 맞지 않아서 계속 그 조각을 찾게 하는.
이 소설 속에서 서술하는 이들 대부분은 어딘가를 걷고 있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그 지역을 다시 찾으면서, 그 사건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더는 파고들 수 없는 자리에 서서 관조하듯 그 시간을 기억한다. 분명 그날의 사건은 똑같은데,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제각각이다. 어딘지 묘하게 어긋나 있다. 뒤늦게 들려오는 숨겨진 이야기 속에서 그날의 장면을 끼워 넣는다. 그렇게 우리는 진실을 찾고 있다. 어딘가에 그 진실의 끝이 있겠지. 완벽하게 맞춰진 그림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어느 날의 향수를 꺼내듯 이야기에 빠져들면서도 정작 그 이야기의 진실 한가운데로 들어가지는 못한 채로, 이야기의 결말은 각자의 몫이 된다. 어렴풋한 확신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은 시간으로 묻어놓기라도 하듯, 읽는 동안 고조된 긴장감은 담담함으로 바뀐다. 이렇게 바뀌어도 되나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공식이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독자의 시선으로 추리하듯 읽어가는 재미와 과거 어느 날의 기억이 불러오는 향수가 맞물려 하나의 소설 속에 녹아들었다. 작가 특유의 분위기로 세월을 거슬러 노스탤지어의 감각에 빠져들게 하면서도, 미스터리소설의 재미도 붙잡는다. 그렇다고 누군가 나서서 교통정리 하듯 결말을 들려주지도 않는다. 모두가 자기가 본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같은 것을 본 것은 아닐 거였다. 소설은 이 다양성을 중심에 둔 것처럼 들려준다. 누구나 자신이 본 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진실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니 인간이 말하는 모든 것이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벌할 수 있을 것인가. 수수께끼 같은 기묘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을 생각한다. 인간이기에 완전하지 않고, 기억은 혼란스러울 수 있으며,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축제’마저도 잊혀진다.
그때 문득 그런 문장이 떠올랐다.
과거에는 물의를 일으키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사건조차도 세월에 희해 매장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 그것은 잊혀진다는 것이다.
원래 사건 그 자체로 관계자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제 사건을 아는 사람들마저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진실은 시간의 딸’이라는 말이 있지만, 과연 시간은 이 사건의 진실을 가르쳐줄 것인가. (35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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