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자주 드나들면 그냥 알게 된다. 어떤 의사(의료진)가 환자를 위하는 건지 저절로 보인다. 저자가 지금 이렇게, 마지막 구명 밧줄을 잡는 것처럼 계속 말하는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환자를 위해서다. 환자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길어져서 환자가 사지를 넘지 않도록 붙잡으려고,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살리려고. 그게 전부다.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대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마라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 (골든아워1, 148~149페이지)

 

저자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게 아덴만 작전이고, 저자의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가 작년이다. 그사이 다른 매체를 통해 인터뷰나 강연을 잠깐씩 보긴 했지만,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훌륭한 의사라는 생각만으로 멈췄다. 북한군 병사를 치료하면서 그의 인터뷰를 몇 번 보고, 국회의원들에게 중증외상센터의 현실과 대책을 브리핑하는 걸 보면서 뭔가 달라질 거로 믿었다. 중증외상센터가 왜 필요하고 또 그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하는지 일련의 사건들로 증명되었으니까. 알려진 것이 그 정도일 뿐,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나라의 병원에 그가 말하는 필요한 시스템을 갖추고 중증외상센터의 지원이 늘어나서, 병원까지 가지 못해 길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더는 없는 세상이 곧 올 거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진했던 것 같다. 세상을 너무 몰랐다. 어느 날 CF에 등장한 그를 보고 의아했다. 화면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다. 그가 왜 CF까지 등장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이름을 알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은 오해를 했다. 나중에 그 CF를 찍어야 했던 배경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출동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지 않는 정부 대신에,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해주는 통신사와 손잡고 찍은 광고. 그것도 갑자기 출동하게 된 현장을 화면에 담게 되었다는 후문에 한숨이 푹푹 나오더라는...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가 방송이나 다른 인터뷰에서 말하는 현장의 생생함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나 역시도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저렇게 나대는 거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의 목숨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과 구조장비를 갖추려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걸 해주지 못하는 정부나 그런 생각조차도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의 간절한 바람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당장 눈앞에 엄청난 돈을 물어다 줄 제도가 아니어서 아무도 어떤 기관도 쉽게 협조하지 않는 것일까?

 

책을 읽다가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했던 게 참 오랜만이다. 끝이 없는 그의 노력이 시한부가 될까 봐 답답하고, 그런데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고 있는 그에게 감동해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 그놈의 행정은 당장 현장에서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행정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우선이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급하지 않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골든아워에 도착해서 치료를 시작해야 환자가 살아날 기회는 늘어난다. 의료진이 환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다.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니. 미국이나 독일, 영국, 일본에서도 정착되었다는 중증외상센터의 시스템이 대한민국에서는 한없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 앞에 무엇이 문제가 되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그의 인터뷰를 한 번씩 볼 때마다 이 커다란 제도를 그 혼자서 이고지고 끌고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한 인터뷰일수록 그의 신념은 사그라진 것 같다. 다음이 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일에 그는 더는 어떤 바람조차 갖지 않는 듯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가 없는 중증외상센터의 운명을 생각한다. 그곳은 언제까지 운영이 될까, 그가 없는 그곳이 과연 존재할까, 그럼 우리가 목숨을 구할 기회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앞선다.

 

이 책은 2002년부터 2018년까지 그가 경험한 기록이다. 1권에서는 주로 그가 외상외과에 들어와서 부딪힌 의료 현실에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미국과 영국의 외상센터 연수로 그는 한국에서도 정착시킬 외상센터를 기대했겠지만, 한국의 현실은 그의 바람을 다 담지 못했다. 외상센터로 실려 오는 환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들려주면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접 마주한 인간의 무력함을 토로한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왜 중증외상센터가 필요한지 피력하지만, 그의 바람이나 노력만큼 따라주지 않는 현실이 답답하다. 이어지는 2권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장의 모습이 담겼다. 그가 속한 병원이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었지만 열악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외상센터를 제대로 갖출 시스템을 안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사고 현장에서의 일들, 병원과 정부가 해결해주지 않은 행정상의 일들,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나아가야만 하는 그의 감정들. 거기에 그 혼자가 아니라 중증외상센터 팀원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가 이끌어가고 있지만, 그 혼자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와 동급으로 들려온다. 틈나는 대로 헬기 출동 훈련을 하고 부족한 장비지만 정비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환자를 구하러 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응급 출동 현장의 이야기는 더 생생했다. 세월호 사고에도 갔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거기에서도 참 우리나라의 행정은 사람이 우선이 아닌 채로 굴러가더라. 더는 그곳에서 남아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돌아왔을 때는 얼마나 허탈했을까. 밤에 나는 헬기 소리를 소음이라고 민원을 넣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만약 그 소음(?)이 지금 나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오고 있는 소리가 되었을 때야 아무 말도 안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특히 힘을 잃은 채로 중증외상센터를 떠나는 동료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읽고 있는 내 어깨도 축 처진다.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고 해도 그들의 끝은 어떤 모습일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이대로 중증외상센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을 구하고자 한다는 그의 신념과 의지가 끝날 것만 같아서 무섭다.

 

외래 진료는 내가 병원에서 하는 일 중 그나마 가장 부담이 적다. 이때 만나는 환자들은 생사를 오가는 긴 싸움을 끝내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환자가 부서지고 으깨진 몸으로 실려 왔을 때나, 검붉은 피를 쏟아내는 수술방에서 그리고 죽음과 지난한 전투를 벌이는 중환자실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과는 다르다. 미국에서 연수받을 때 데이비드 호이트(David Hoyt) 교수는 외래 진료는 추수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외래 진료는 죽다 살아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고, 내 지긋한 일상에서 실제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골든아워1, 19~20페이지)

 

그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아예 표정이 없는 사람 같다. 이 사람이 지금 화가 났는지 슬픈지 아픈지 어떤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혹시 로봇인가? 그만큼 그에게서 표정은 물론이고 웃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가 활짝 웃는 모습을 봤다. 이런, 그에게 이런 표정도 있구나 싶은 놀라움. TV에서 그의 병원 생활을 취재하는데, 중증외상센터로 실려 온 환자가 잘 치료 받고 퇴원한 후에 외래 진료를 온 장면이 보였다. 그때 그가 활짝 웃으면서 진료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이제는 안 봐도 되겠다고, 잘 나았으니 더는 안 와도 된다고 말하며 환자와 웃으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모습에 놀랐다.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 것을 확인한 기쁨도 있지만, 그가 이럴 때 웃는구나 싶은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서 실려 온 환자가 잘 치료받고 나가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에게는 이 일을 하는 목적이자 신념이었다. 더도 덜도 아닌, 사람을 살리는 그 자체가 그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이유다. 우리가 그를 응원하는, 그에게 다가온 환자를 더 많이 살릴 수 있게 정부의 지원과 외상센터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다. 사람을 살리는 일, 예방 가능한 사망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외상센터 안에는 환자를 끌고 CT를 찍으러 갈 사람도 부족했다. 외상외과 교수들은 다른 대학 병원이라면 수련의들이 할 일들을 직접 몸으로 감당하며 버텨내고 있었다. 새벽 3시에 환자에게 소변줄을 꼽고, 똥으로 오염된 핏물을 온몸에 뒤집어쓰며 수술했다.

이런 현실과는 정반대로 새 정부는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나섰다. 각종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외상센 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들의 업무 공백을 메워주는 전담간호사들의 근무시간도 주 52시간으로 묶여버렸다. 증원은 없으면서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기상천외한 정책. 이것은 센터 운영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나는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돌아가야 간신히 유지될 수 있는 내 처지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골든아워2, 290~2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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