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뒤로 난 길로 저녁마다 산책을 하는데, 기찻길이 보인다. 30분 정도 걷다 보면 지나는 기차를 몇 대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랑 둘이서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기차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라고. 질리도록 했던 말... 그냥 역에 가서 기차를 타면 되는 일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일까. 막상 기차를 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건 실행에 옮기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냥 습관처럼 하는 말이라는 것을, 엄마도 나도 안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버지 때문에 어디 가는 일이 불가능했는데, 아버지가 안 계신데도 어딘가로 가는 일이 쉽지 않더라. 오늘은 이런 일로 내일은 저런 일로,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고 떠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는 걸 새삼 느낄 즈음. 드디어 기차를 탔다. 집을 떠나 어딘가로 향했다.

 

10월 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기로 말만 한 상태였는데도 설렜다. 기차표 예약하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캐리어를 꺼내고, 소지품 몇 개와 엄마와 내가 갈아입을 옷 한 벌씩만 넣고 짐을 다 쌌다. 동생과 통화를 하고 하루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몇 년 동안 집을 비우지 못해 힘들었을 엄마와 나에게, 제부가 어렵게 예약한 숙소도 있으니 설악산에 가자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 때문에 예약한 일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꼭 오셔야 한다고. 이렇게 같이 어딘가로 가자고 얘기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곤 했는데, 예전 같으면 너희들끼리 다녀오라고 말했을 엄마가 별 고민도 없이 같이 가자고 하더라. 그럴 때 주저하면 안 된다. 엄마 마음 변하기 전에 일을 저질러야 한다. 바로 기차표를 예약하고 짐을 싸고, 말을 번복하지 말라고 엄마한테 으름장을 놓고. 별다른 준비도 없이 그렇게 집을 떠났다.

 

 

여기서 서울까지는 고속열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다. 노원에 사는 동생이 잠실에 있는 언니한테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보다 빠른 시간이다.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는 곳인데, 매번 한번 오라고 하는 제부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만 했는데,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는 게 조금 씁쓸했다. 사실, 그렇게 다녀온 곳에서도 별거는 없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거리, 사람들, 먹을 것 같은 게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태풍 콩레이가 지나간 후여서 바닷바람은 세고 파도도 높고 너무 추웠다. 아직은 이른 시기였던 터라 설악산의 단풍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좋았다. 엄마와 함께여서 더 좋았다. 나이가 들고 여기저기 아프면서 오래 걷지 못하는 엄마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데도 엄마는 그 먼 거리를 걸어 올라가고, 힘들다고 밤마다 코를 골면서 주무시는데도 일정에 다 맞춰 움직여줬다. 그렇게 힘들면서도 재미있다고, 이렇게 데리고 나와 줘서 자식들한테 고맙다는 말도 하셨다. 노인네 데리고 다니는 거 쉽지 않은데 애썼다고.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또 오고 싶다고... 또 오면 되는 거지!!! 여동생과 내가 동시에 한 대답에 다 같이 웃고 말았는데, 속으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에게 이런 말 처음 들었다. 그동안 사는 게 팍팍해서, 크고 작게 일어나는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 가족을 이끌어온 엄마의 고달픔이, 막상 어디 가자고 하면 귀찮다고 거절하던 엄마가 어딘가로 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그대로 들려서. 이제라도 여기저기 많이 다니고 싶은데 엄마가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그래서 요즘 부모와 함께 떠난 여행, 특히 엄마와 함께 다니는 이야기를 찾아서 보고 있다. 작년에는 <엄마의 골목> 때문에 참 많이 울컥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발랄한 느낌의 엄마와의 여행책들을 만났다.

 

작가 태원준이 엄마와 떠난 여행이 마냥 신기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한 해외여행도 아닌 듯했다. 여행비용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편안하고 고민할 게 적은 패키지여행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조건에 엄마가 함께했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두 사람은 해냈다. 막상 떠나고 보니 어떻게든 나아가게 되어 있더라. 아들과 엄마. 그 조합이 이뤄낸 여행이 참 발랄해서 보는 이가 다 즐거웠다.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신난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더라. 아, 부러워라. 예순 살과 서른 살의 엄마와 아들이 한 이 여행은, 힘들면서도 놓치기 아까운 하루하루를 함께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삶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그러니 언제 또 올지 모를 이 여행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오자는 바람처럼 보였다. 엄마도 아들도, 열심히 걷고 많은 것을 보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겪고... 뭉클했다. 커다란 배낭 하나씩 메고 서 있는 모자의 뒷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부럽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너도 엄마랑 가면 되잖아?!’라고 말하겠지만, 이 모자의 여행이 부러운 건 그렇게 떠나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일정부터 비용까지, 떠나있는 동안 비워둘 곳의 정리까지, 크고 작은 일들이 발목을 잡곤 했다. 작가는 엄마의 환갑잔치 대신 그 비용으로 엄마와의 여행을 택했고, 작가의 엄마 역시 아들의 제안에 응해주었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정리해야 할 것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같이 여행길에 오르면 감정 상할 일이 많을 텐데, 그걸 아들과 엄마가 한다는 게 무슨 기적이라도 보는 듯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300일이라니... 가능할까 싶은 일을 가능하게 만들고야 만 이 모자가 부럽지 않을 수가 있나?

 

엄마는 일상의 대부분이 걱정투성이다. 이제 11월이 시작인데, 엄마는 벌써 김장할 걱정을 한다. 기름값이 많이 올랐는데, 기름으로 난방을 하는 여기 시골에서의 겨울을 지낼 걱정을 한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는 감기 없이 올겨울을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을 한다. 가족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자식들이 별문제 없이 하루하루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기도한다. 마치 그게 자신의 걱정과 기도로 다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 10월에는 한 달 사이에 세 번의 장례식을 다녀오면서, 언제 닥칠지 모를 자기 죽음도 걱정한다. 며칠 전 누군가의 장례식에 다녀온 어느 날,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면서, 또 어딘가로 놀러 가고 싶다고도 했다. 엄마에게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 지난번의 짧은 여행이 좋으셨나 보다. 그러면서, 어딘가를 다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건강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듯하다. 두 다리가 건강해야 여기저기 걸으면서 많은 것을 볼 것이고, 정신이 건강해야 보고 듣는 많은 것을 즐기면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을. 그건 누구보다 우리가 바라는 일인데 말이다. 엄마가 건강하게 지내면서 우리와 지금처럼 스스럼없이 얘기도 하고, 싸우고, 같이 다니는 일상을 계속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엄마가 없으면 할 수 없으니까, 의미가 없으니까.

 

짧았던 가을 여행을 기억하며 다시 겨울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 어디로 갈지 언제 갈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생각만 해도 좋다. 엄마 앞에 닥친 가장 급한 일은 김장일 텐데, 김장이 끝나고 가야겠지? 명절이 돌아오면 힘들다고 하실 테니까 명절 기간도 피해야겠지? 겨울이니까 지난번보다 짐은 많아지겠지? 캐리어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으니까 하나 더 사야겠다. 혹시라도 엄마가 망설이면 조금 더 귀찮게 졸라봐야지. 달달 볶이다 보면 두 손을 들고 가자고 하겠지...

 

집을 나서는 게 문제이지, 막상 나서고 나면 그다음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게 되어 있다. 추우면 가방 안에서 패딩을 꺼내 입고, 다리가 아프면 조금 쉬었다 가고, 배가 고프면 근처 식당에서 뭐든 먹으면 될 것이고. 한 가지 걱정은 체력이다. 유독 겨울 지내기를 힘들어하는 엄마가 잘 견딜 수 있기를... 나야 엄마보다 젊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게 익숙해서 덜 힘들겠지만, 허리와 무릎이 안 좋은 엄마가 오랜 시간 걷기에는 무리가 생기는 게 걱정이 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가 될지 몰라서 놓치는 게 더 후회될 것 같다. 조금은 덜 춥고, 덜 힘들 곳. 겨울을 즐길 수 있지만 따뜻하게 쉴 수 있는 곳,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같이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