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의 졸림을 이기려고 눈을 부릅뜨면서, 저녁 일일 드라마의 오늘 분량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 얼굴을 보고 있다. 웃음이 난다. 졸리면 그냥 주무시지, 기어코 본방 사수하겠다면서 주인공의 복수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계신다. 일상의 낙이 매일 저녁 방송하는 TV 드라마를 보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웃기다. 마치 그걸 보지 않으면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이 책을 읽고 있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을까 하고.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갖고 싶었다는데,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은지 계속 생각하고 있다.

 

 

제목만 들으면 무슨 스릴러인가 싶겠지만, 유골의 주인이 엄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놀라움과 궁금증이 먼저 생길 거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어야 이런 말이 가능할까. 혹시 경험해본 사람은 조금 알까? 막 화장터에서 나온 유골을 담은 유골함을 손에 들면 따뜻하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한 온도다. 온돌방에 앉아 있는 느낌으로 따뜻하다. 만약 내 엄마의 유골이 그런 느낌이라면, 한 번쯤 그 유골함을 꽉 안고 싶어질 것 같다. 엄마를 안는 기분으로,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의 저 말을 듣고 나니 궁금해졌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어야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고. 눈동자가 떨릴 정도로 엽기적인 말로 들리지만, 엄마를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면,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문장 그 자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간의 마음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이 강렬한 감정이 부르는 아픔을 알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한 번쯤은 상상해 보고 싶지 않은가?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겠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감정을 알기에는 상상만 한 게 없으니.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시로, 계속 상상한다. 내 엄마와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죽음을 볼 때마다, 그 죽음의 대상이 엄마가 될 때를 생각해 본 적이 많다. 특히 언젠가부터 엄마의 병원행이 잦아질 때마다 생각은 극단적인 쪽으로 기운다. 작가 자신이 20대에 겪은 혈액 질환 때문에 엄마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기에, 그 이후로도 엄마의 존재는 남달랐을 것 같다. 저자의 엄마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아들을 사랑하고, 한없는 애정과 격려를 보내며 아들의 삶을 응원했다. 그런 엄마가 암이라니, 더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말기 선고를 받고 나니 이제 엄마의 병을 고치기보다는 엄마의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저자와 애인은 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긴 시간 엄마를 돌보면서 지쳐갈 때쯤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글은 저자가 의사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해 두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어떤 순간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그 기록을 읽는 것에서 그만이겠지만, 그 대상이 엄마라면, 부모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더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끄덕이면 슬픔에 공감하는 이들, 참 많을 것 같다.

 

늘 함께일 거로 생각했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질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떠나간 이를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게 고통일지 기쁨일지 모르겠다, 아직은. 주변 많은 이의 죽음을 애도했고, 지금도 가까운 이의 백혈병 투병을 지켜보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만, 아직은 그 슬픔을 100% 공감할 그릇을 갖지 못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아니었기에, 그저 누군가의 죽음 때문인 이별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마다 상상의 시간은 길어진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마 그들도 이런 마음이겠지 하는 심정을 이해 하고자, 언제가 내가 마주할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며 가슴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평소 엄마와 얘기하면서도 엄마의 죽음을 빼놓지는 않는다. 작년 말에는 엄마가 죽으면 가고 싶다는 봉안당에 미리 다녀왔다. 조건이 맞으면 좋은 자리에 계약해놓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엄마의 종교를 바꿔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 포기했다. 외삼촌(엄마의 오빠)이 계셔서 더 마음이 가는 곳이었는데,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엄마가 종교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곳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얘기한다. 그곳에서 쉴 주인공인 엄마와 함께 말이다.

 

저자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저자의 아버지는 뜻밖에 담담해 보였다. 아내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마는,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는 표정으로 아내를 보내는 모습이 의연했다. 그런 아버지가 술이 늘고, 집안이 지저분해질 정도로 치우지 않고, 일상이 흐트러져 있었다. 겉으로는 자식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진심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슬픔은 누구나 똑같은 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저자 형의 모습도 비슷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고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저자에게 시선이 쏠리곤 했는데, 정작 그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이런저런 정리를 하면서,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 보였는데, 그 이면의 표정을 미처 다 읽지 못했던 거다. 가족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 없고, 엄마의 돌봄에 감사하지 않은 자식 없다. 그러니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은 생애 가장 큰 슬픔일 것이다.

 

 

엄마를 보내고 난 후의 이야기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발견하는 엄마의 메모들, 엄마가 가꾸던 정원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남겨진 이들은 또다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들을 마주해야 하고, 울고 웃으면서 그 시간을 추억해야 한다. 엄마의 강요로 남겨두었던 정자를 꺼내 아이를 낳게 되면서 또 한 번 엄마의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저마다의 의미를 쌓아간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말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더라도, 마음이 알고 느끼는 것들을 그렇게 적립하는 시간이었다.

 

몇 십 년을 엄마가 해주시는 밥 먹고 살다가, 이제는 조금씩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엄마가 지금보다 덜 늙었을 때 따로 살아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즘이다. 언젠가 혼자서 지낼 엄마를 생각하니, 작년보다 한 살 더 나이 드신 엄마가 부쩍 더 늙어 보이는 건 왜일까. 같이 살 집을 알아보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고, 따로 살 집을 알아본다고 하니까 투덜투덜 서운해하시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엄마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복잡한 요즘이다. 같이 살자니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봐 싫어하시는 것인지, 따로 살자니 갑자기 혼자 지내는 일상이 겁이 나는 것인지. (사실 나도 많이 무서운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겁이 많아지고,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것보다 자식에게 물어보고 의지하는 모습이 늘어간다. 한때는 이 집의 가장이었던 당신. 이제는 본인이 돌봄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는 게 슬프면서도 안도하는 걸 볼 때마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힘듦을 겪었을지 새삼 알겠더라. 그래서 엄마의 지금 변덕을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홀가분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이는 엄마, 당신의 두려움과 떨림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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