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리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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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금입니다. 한 잔 꺾어봅시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정신은 비교적 말짱하다. 헌데 계단 오르기가 힘들다. 양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늘어진 엿가락처럼 꼬였다. 옆에서 따라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시지 않고 선을 그은 것이 그나마 다행. 기특한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51페이지)

 

밤 10시쯤, 정말 딱 한 잔만 하고 싶었다. 아니다. 딱 한 병. (한 잔은 좀 서운하잖아) 집에 엄마가 맛있게 익혀둔 고기도 있었고, 목이 시원해지는 과일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 한 병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상황. 2월 설날 명절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집에 맥주가 없을 게 뻔한 걸 알면서도 냉장고를 뒤졌다. 아하. 그때 미처 다 마시지 못하고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맥주가 한 병 나온다. (다행이다) 신난다. 기분 좋게 맥주를 컵에 따르다가 급우울해져버렸다. 맥주가 한 컵 밖에 안 나와. ㅠㅠ 정말 딱 한 잔뿐인 거야? 아쉬운 대로 그 한잔을 마시다가 보니 속이 상한다. 아, 서운해. 뭔가, 정말 서운해. 맥주를 사러 가야겠다. 그런데 너무 귀찮다. 걸어서 3분 거리의 마트까지 가는 게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그때 마침, 내 눈에 들어온 건 며칠 전에 제부가 왔다 가면서 준 와인이다. 아주 좋은 거라고 했다. 비싼 거라고도 했다. 얼마나 좋은 건지, 얼마나 비싼 건지 모른다. 몰라도 괜찮다. 일단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이름도 모르는 그 와인을 땄다. 조금씩, 한 모금씩, 그렇게 천천히 마시다가 보니 와인 반병을 마셨더라. 그때야 알았다. 내 손에 힘이 빠지고 있던 것을... 그래도 뭐, 기분이 알딸딸하니 좋더라. 적당히(?) 잘 마셨고, 기분 좋게 취해서, 잤다. (주사가 특별히 없고, 그냥 술 마시면 졸리니까, 잔다. 그래도, 그날 그렇게 몸이 늘어지고 손에 힘이 빠지는데도, 양치까지 잘하고 잤다니까!)

 

아, 이런. 술과 함께한 미야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자꾸 말이 삼천포로 빠지려고 한다. 내가 아직도 술이 안 깼나 보다. 술은 술술 들어가지만, 인생은 안 술술~하다는 미야코의 일상에서 웃음까지 곁들이다 보니 술과 미야코에게 취하는 기분이다. 그녀의 이름 코사카이 미야코. 책 소개에서 보면, '코사카이'는 '술이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뜻이란다. 어쩜 이리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 잡지사 편집부에서 일하는 미야코는 퇴근과 동시에 술집이 즐비한 골목으로 선배 언니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는 게 삶의 낙이다. 어라? 무슨 말인가 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니 열쇠가 없다. 택시에서 두고 내렸나? 의미 없는 길을 오가며 열쇠를 찾았는데, 그녀의 손에서 도망간 가방은 집 앞 돌덩이에 걸쳐 있다. 술로 가득 채운 에피소드가 미야코를 설명한다. 동료의 명품 가방 안에 술 마신 것을 게워내고, 취중에 길거리에서 누워 잠자는 그녀는 누구인가. 훌러덩 벗고 있던 그녀의 앞 시간은 어디서 찾아와야 하나? 잃어버린, 찾을 수 없는 그것(?)을 기억해내기 위해 그녀가 했던 일들에 숨이 막힌다.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머리는 또 왜 이렇게 아픈 건가. 병원 진료실에서의 일화에는 진짜 박장대소했다.

 

어쨌거나, 병원에는 진료에 앞서 기록하는, 문진표라는 것이 있다. 외상에 관해서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됐는지도 적는다.

"코사카이 씨."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흰 커버를 덮은 둥근 의자에 앉아 의사와 마주했다. 의사의 첫 마디.

"정직한 사람이군요."

놀랄 일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사실 위장, 속임, 거짓말은 적인 편이라 생각한다. 허나 병원 의사의 소견으로 듣기엔 이게 뭔가 싶었다. 조심성 없다, 멍청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차라리 그러려니 할 상황 아닌가. 술 취해 다쳐서 병원에 왔는데 어째 도덕적인 칭찬을 듣는 거지? 미야코는 절로 고개가 외틀렸다.

의사는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대개 이런 상황에서 '넘어졌다'고 씁니다."

그러면서 문진표에 다치게 된 경위란을 톡톡 쳤다.

흰 종이에 꾹꾹 눌러쓴 글자. '술이 떡이 돼서.' (155~156페이지)

 

이러니, 미야코가 어떤 사람인지 눈앞에서 그려지지 않아? 몸에 술이 채워지지 않을 때도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잖아. 게다가 그녀가 술만 잘 마시느냐? 아니다. 일도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다. 작가를 대하는 것부터 기획을 마무리하는 일까지, 그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하는 그녀다. 대책 없을 것 같지만, 나름 선을 지키고 열정을 불사르는 그녀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녀이기에 어느 자리에서건 인기를 폭발시킨다. 말 그대로 못 하는 게 없다. 누구 하나 그녀를 미워할 수도 없다. 일 잘해, 술 잘 마셔, 인간적이지, 대화 통하지. 이 얼마나 좋은 상대냐고. 읽는 내내, 이런 사람 하나쯤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솔직히 미야코 같은 사람 옆에 한 명 있다. 일단 술병을 들면 말술을 마시는데, 술 취한 그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말 힘들다. 새벽 두 시에 술집 앞에서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한 시간을 헤맨 적도 있다. 에휴...)

 

술이 술술 넘어가듯 그녀의 인생도 이렇게 술술 넘어가는 듯했으나,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실패로 기록될 일이 있으니, 바로 연애다. 어느 날, 대학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가 만나자고 한다. 뭔가 느낌이 온다. 이상하다. 좀 더 예쁘게 하고 나가야지. 아마도 오늘이 디데이가 될 것 같다. 오호~ 이건 틀림이 그거야. 바로 그거! 프.로.포.즈. 뭐, 아직 결혼할 때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뭐, 결혼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미야코는 설레는 맘으로 애인을 만나러 간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미야코한테 물어봐. 그날 밤 그녀가 왜 그렇게 술잔을 꺾어댔는지 말이야. 그녀는 애타게 불렀다. 술아 술아~ 내 술들아~ 일루 와~. 한 잔 꺾고 꺼억~, 두 잔 꺾고 꺼~어~억~

 

술로 시작해서 술로 계속되고, 술로 즐겁고 우울해지는 그녀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남 일 같지 않은 거냐. 소설인데 시트콤 같다. 나 같고, 내 옆의 또 다른 사람들 같다.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오늘을 풀고, 속상함을 털어내고, 기쁜 일에 더 설레게 하는 매개로 술을 선택한다. 술 때문에 미야코가 보인 엉뚱함이 자칫 과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과함이 어쩌다 한 번, 귀엽게 보일 정도라면 괜찮을 듯하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이 가볍지만도 않다. 직장이나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진지한 일들이 그녀들의 끝도 없는 수다로 술술~ 풀어가는 재미가 있다. 그게 바로 살아가는 즐거움 아닐까. 때로는 울기도 하는 인생이지만, 이렇게 웃어가는 일들 때문에 오늘이 재밌어질 수도 있는 거. 그런 재미를 술이,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게 즐겁다.

 

모두, 오늘도 시원하게 넘어가는 한 잔으로 즐겁게 지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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