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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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처럼 받아놓은 다른 책을 옆에 두고,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구매한 책을 또 옆에 쌓아두고서도 읽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서 또 인터넷서점을 헤매다가, 새로 받은 이 책을 잠깐만 살펴봐야지 하면서 펼쳐 들었다가 하룻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가독성 쩐다. 작가의 전작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으나, 아직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하던 차에 만난 책이다. 물론 이야기의 시작과 과정(미스터리한 추리 스릴러), 그리고 조금씩 풀어가는 결말에 이르기까지는 기존에 읽은 추리소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궁금했던 건 뭔가 드러나지 않은, 석연치 않은 그 느낌이 다른 책과 다르게 다가오기에 더 기대감이 컸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후미에는 육아에 찌든 나날을 지낸다. 그녀도 한때 잘나갔다. 아름다운 외모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직장생활도 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육아에 전념했다. 딸 둘을 키우면서 그녀는 변했다.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마구 먹어댔다. 결과는 비만 중의 비만인 몸뚱이. 누구 탓을 할까. 남편도 원망스럽다. 큰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다시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아이에게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강요에 어느 정도 키우고 다시 직장을 찾으려던 중에 둘째 딸을 임신했다. 이제 돌봐야 할 아이가 둘이다. 시간은 더 없다. 직장은커녕 집에서조차 자기 시간을 찾기 힘들다. 먹었다. 먹고 또 먹었다. 살이 찐 몸은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웠다. 그녀는 정신적인 병까지 얻었다. 해리성 장애. 가끔 그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몸은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빈번하게 증상이 나타난다. 초등학생인 큰딸은 학교에서 왕따까지 당하고 있다. 다 후미에의 뚱뚱한 몸 때문이다. 엄마의 외모가 아이에게 놀림거리가 된 거다.


, 정말 이 마음 알 것 같다. 내 인생 조금이라도 찾아가고 싶은데, 현실은 꽉 막혀 있어서 답답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도 맞는 일인데, 이게 우선인 삶도 버겁고. 후미에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녀가 자꾸 먹어대는 걸 이해할 것도 같다는 이 공감.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 서사를 쓰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마따나, 이 작품은 저자가 처음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범죄 추리 소설이다. 그만큼 처음부터 등장하는 후미에라는 인물 묘사는 강렬했다.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부터 극단으로 치닫는 느낌을 뿌린다. 육아와 살림에 찌든 일상에서 등장한 비만의 여성, 이벤트 응모가 취미이자 유일한 탈출구였던 그녀에게 어느 날 배송된 디너쇼 티켓. 그 디너쇼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의 권유로 프리랜서처럼 일하면서 고액의 수입을 올리고, 이제 그녀는 더는 뚱뚱하고 못난 아줌마가 아니었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여성이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과거의 그녀로 돌아갔다. 행복하다.


이 일은, 오직 너만 할 수 있어.”

너만 할 수 있어.

그 말에 후미에의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고 인정해주는 기쁨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185페이지)


넌 더 아름다워질 거야.”

더 아름다워진다.

가나코가 남긴 말이 후미에의 가슴을 강하게 울렸다. (180페이지)


의심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 생각해보자. 언제나 들어왔던 그 말,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물론 후미에도 일하게 됐고 그에 따른 보수를 받게 되었지만, 금액이 많다. 누가 들어도 혹할 금액이다. 의심은 당연하다. 어떤 일이기에 이렇게 많은 돈을? 하지만 후미에에게 그 이유가 보일 리 없다. 그녀를 지옥에서 구해준 것처럼 다가와 준 고등학교 동창 스기우라 가나코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가나코가 얼굴의 흉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일을 대신해주면서, 후미에의 아름다운 외모로 승승장구할 화장품 사업을 같이하는 일은 너무 즐거웠다.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 나를 구원해준 천사 같은 친구. 고맙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이고 돈을 벌면서 자신감도 되찾게 해준 그녀에게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인생이 아름다워졌다. 읽다 보니 점점 불안해지는 이 느낌은 뭔가 싶다. 너무 잘 풀리잖아? 아무리 오랜만에 만난, 과거의 고마움을 갚고 싶다는 친구의 호의라고 하지만 과해도 너무 과하지 않음? 하지만 인간이란 당장 눈앞의 것만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피폐해진 삶을 구원해준 가나코의 고마움에 이 순간의 방점이 찍힌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불안하게 흐른다. 독자에게 후미에의 평온과 인생의 변화를 즐기게 놔두지 않는다. 후미에의 이야기와 교차로 들려오는 강력계 형사 하타와 나쓰키 콤비. 잔인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몇 가지 단서로 해결해야 한다. 피해자는 남자, 화장품 사업을 했고 갑자기 사업을 정리했다는 것. 후미에는 이 사건의 강력한 용의자가 된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세상에 절대 공짜는 없다니까. 가나코가 모든 걸 꾸민 게 분명해. 수상했어, 자꾸 후미에 뒤로 숨으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럼 후미에는 피해자인데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누군가 구해줘야 할 텐데, 후미에의 누명을 벗겨줘야 할 텐데. 애가 탄다. 읽는 동안 우리는 이미 봤으니까. 가나코의 수상한 태도와 후미에가 받은 돈의 상당함과 그 출처를 의심했어야 했는데. 왜 그걸 못 봤느냐고?! 그런데 더 이상한 건 갑자기 죽어서 나타난 남자의 정체다. 그는 누구인지, 왜 갑자기 죽어서 등장한 건지, 이 결말 같은 순간에 확인해야 할 과정은 어떻게 펼쳐질지.


긴장감이 대단하다. 무서움의 공포가 아니라, 이 사건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싶은 근질근질함이다. 정확히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이 모든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고 흘러왔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다. 무엇보다 뚱뚱하다가 아름다워진 여자의 빛나는 인생이 이렇게 허물어져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슬프기까지 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가지지 않을까? 나부터도 갑자기 찐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면서 자주 우울해진다. 오늘은 한의원에 가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한약으로 살 빼면 그래도 덜 독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약을 끊고 또 요요가 오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까지 덤으로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소설 역시 여성에게 아름다운 피부를 선사한다는 화장품을 판매하고, 후미에도 되찾은 외모로 당당해진 걸 보면서, 남성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여성에게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집착은 떨칠 수가 없는 숙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만 얘기한 소설은 아니다. 가나코의 행동을 보면서 요즘 우리가 많이 접하는 온갖 범죄를 연상하게 된다. 한방에 거금을 마련할 수 있는 지능적인 사기 수법,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뻔히 보이는, 한번 맛보고 나니 놓을 수 없는 돈을 갖는 방식.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좇는 욕망은 너무 닮았다. 아름다움을 잃은 그때로 돌아가긴 싫어, 호화로운 이 생활을 몰랐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 그런 욕망 때문이었을까. 피해자는 늘어나고, 또 피해자는 계속 생길 것이다. 더 악질적이고, 더 교묘한 방법으로 저지르는 일들에 상처받은 사람은 또 삶의 커다란 벽 앞에 서 있겠지. 그래서 더 사회면 뉴스에서 보던 일들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가해자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듣고도 공감할 수 없던 것은 결말에서 확인한 피해자들의 사연 때문이었다. 상처받고 외로운 마음을 알아준 사람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내주었는데, 그 믿음을 배신하고 비웃고 있었을 거로 생각하니 피가 끓어오른다. 피해를 본 금액보다, 내 믿음을 배신당했다는 게 더 큰 절망이라는 것을, 가해자는 알기나 할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해서는 안 될 사회악으로 거듭나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이를테면, 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는 무사히 태어나기만 기원한다. 무사히 태어나면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고, 그게 이루어지면 머리가 좋기를 바라고, 그다음은 명문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란다. 욕심은 끝없이 커진다.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바랐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는 당연하다고 여기던 걸 잃을 때이다.

당연한 건강, 당연한 세 끼 식사, 당연한 잠자리. 그때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게 무너져 내렸을 때, 사람은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443페이지)


외모를 향한 욕망에서 시작된 일인가 싶었다가도, 언제라도 우리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이 작품의 원제가 네펜테스라고 한다. 벌레잡이통풀이라는 의미로, 달콤하게 꾀어내어 그 안으로 들어온 벌레를 먹으면서 산다는 뜻이라고.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원제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지 알게 된다. 한 개인의 욕망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이면을 마주하는 시간을 만든다. 비극이면서도, 고발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의를 찾으려는 형사의 노력까지 더해진, 탄탄하게 잘 짜인 미스터리 추리소설이다.


#달콤한숨결 #유즈키유코 #비채 #추리소설 #미스터리 #김영사

##책추천 #범죄소설 #아름다운외모 #뒤틀린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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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9-15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만 믿으면 안 될 텐데, 사람은 그런 말에 잘 속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해자면서 가해자도 될 수 있다니... 후미에가 그런 경우일 듯하네요 뭐든 자신이 애써야 얻을 수 있을 텐데,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1-09-15 19:31   좋아요 1 | URL
누군가의 빈틈을 끊임없이 파고들면서 그 마음을 상하게 하고 믿음에 배신을 안기는 사람은 어떤 생각일까 궁금했어요. 이 소설 읽다가 보니, 타인에게 상처주는 것도 습관이 될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한번 두번, 그러다가 타인의 상처에 무감각해지는...

희선 2021-09-19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 님 명절 연휴네요 구월엔 명절이 있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건지... 명절 즐겁게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구단씨 2021-09-23 20:25   좋아요 1 | URL
연휴 잘 지내셨나요? ^^
월요일 같은 목요일 지내고 있습니다.
희선님 말씀처럼 명절이 있어서 그런지 9월이 빨리 가버린 느낌이네요.

scott 2021-09-19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추석 연휴 동안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해피 추석~


∧,,,∧
( ̳• · • ̳)
/ づ🌖

구단씨 2021-09-23 20:25   좋아요 0 | URL
맛난 거 많이 드셨어요? ^^
뭔가 하고 싶은 거 많이 생각하고 명절 시작했는데,
아무 것도 한 게 없이 명절이 끝났어요. ㅠㅠ
 


한국인을 위한 일본소설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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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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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초, 알람처럼 문자가 온다. 세대 내 가스 검침을 해서 문자로 회신 달라고. 처음에는 이런 걸 왜 고객에게 하라고 하느냐고 생각했는데, 당연하게도 가스계량기가 세대 내에 있으니 검침원이 방문하기 어려웠겠구나 싶다. 바로 확인하면 문자 받고 바로 회신하지만, 나도 깜빡하고 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틀 후 다시 문자가 온다. 기한 내에 검침 숫자를 입력해 달라고 말이다. 어김없이 이번 달 초, 마침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쯤 도착한 문자였다. 책 읽던 것을 멈추고 바로 가스 검침 숫자를 입력했다. 그동안에는 번거롭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내가 직접 가스 검침하는 것이 전혀 번거로운 일이 아닌 게 됐다. 중간착취의 피해자가 된 가스 검침원의 일과를 알게 돼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하루에 몇 가구를 돌고 몇 시간을 노동하면서도 제대로 받지 못할 임금이었다고 알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분명 잘못된 것인데,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현실에 막막함은 배가 됐다. 많은 노동자가 겪는 중간착취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기사의 연재를 몇 편 봤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의아하면서도 제대로 다 챙겨보지 못하고, 시간도 흘렀기에 잊고 있었다. 아직 나의 일이 아니었기에 그 관심에서 멀어진 거다. 그러다가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 바로 읽게 됐다. 물론 기사를 찾아보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같이 듣는 게 보다 정확하고 넓게 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내가 느낀 이 책은 기사 이면의 이야기까지 더해져서인지 중간착취의 생생함은 더 컸다. 346만 명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떼인 돈은 그냥 돈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계였고, 미래였다. 오늘을 더 보람있게 살았다는 증거였다. 그런 노동자에게 직접 고용이 아닌 간접고용, 용역이나 파견의 형식은 어떻게 합법적으로 되었나 궁금했다. 그동안에도 비정규직, 계약직은 있었다. 이런 고용 방식이 낯설지 않게 되었던 건 IMF 영향이 크다고 한다. 노동의 유연성을 확보하겠다면서 도입한 방식이었고, 노동자의 권리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용자로서도 굳이 정규직을 두는 것보다 비용도 절감하고 아무 때나 해고할 수 있는 용역이 더 나은 일일 테다. 중간착취가 합법적으로,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면서 노동자를 좌절시킨다.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이보다 더 악질적인 고용 방식이 있을까?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누군가 개입하는 순간 착취는 필연적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너는 나와 계약한 사이이고, 나는 원청과 계약한 사이이고, 나는 원청에 노동자를 보내야 하는 게 임무고, 너는 원청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계약을 이행하는 거고.’ 뭐 이런 취지였겠지? 그리고 너(노동자)와 나(하청의 대표) 사이에 존재하는 수수료의 문제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이 간단한 문제가 간단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선을 넘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넘어갈 적정선이라는 게 있다. 그 선을 지켰다면 착취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겠지. 이 책에서 만난 노동자의 이야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기에 울분을 토하고야 만다. 내가 받는 금액이 왜 그 금액으로 책정되었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한데도, 누구도 그걸 설명해주지 않는다. 투명한 계산을 보여주지 않는다. 닥치고 그 돈 받고 일을 하던지, 아니면 그만두든지. 흔하면서도 두려운 그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당신 아니고도 일할 사람 널렸어.


처음 기자들이 이 주제로 노동자를 취재하고 업체를 파헤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정도일 거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다.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의심을 확인해야 했고, 그 확인 과정에서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피눈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을 거다. 간접 고용된 노동자들이 도급계약서를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었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일 출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내 권리를 찾는 건 당연한데, 그 당연한 게 너무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해마다 최저임금은 오르는데 왜 급여는 그대로인지 물어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


앞에서 가스 검침원 이야기를 가장 먼저 떠올렸는데, 주변에 봐도 전기검침이나 가스 검침을 다니시는 분 중에 여성분을 많이 봤다. 막연하게 여자들도 할 수 있는 육체노동의 강도인가 보다 생각했다. 아니었다. 정규직으로 고용될 수 없는 상황,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일을 해야 했기에 그나마 시간 활용이 좋다는 이유로 시작한 분도 많았다. 과연 그럴까. 막상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의 얘기를 들어보면 시간 절약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몇천 가구를 혼자 다니면서 검침해야 했고, 비대면 시대에 그 검침도 쉽지 않았다. 각 가정을 돌면서 확인하는 일도 시간이 꽤 소요됐다. 절대 놀면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화폐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의 시간이 많았던 거다. 업체 대표가 그걸 몰랐을까? 아니다. 노동자들의 고충은 무시하고 급여를 쥐어짜면서 그들은 주머니를 채웠다. 앉아서 착복했다. 건물에서 청소하시는 분, 급식실의 조리사, 아파트 관리실의 직원이나 경비, 대기업의 하청 직원, 위험한 현장에서 몸을 다쳐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위치에 있는 많은 노동자가 간접고용의 피해자였다.


이들이 버는 돈은 얼마나 될까. 저자들이 인터뷰한 간접고용 노동자 100여 명 중 절반은 월급이 백만 원대였다. 이백만 원을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파견직 사무보조원, 국립해양박물관의 청소 노동자, 국립해양박물관 주차관리원, 아파트 경비원, 한국장학재단 콜센터 상담사, 신입 IT 개발자,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 파견 노동자, 건설 현장의 노동자 등 겨우 최저임금 수준만 맞춰놓은 급여였다. 연차가 쌓여도 똑같았다. 숙련된 경험이 있어도 마찬가지. 보통의 우리 삶은 이런 것이지 않은가.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리며 버는 돈으로 우리 삶을 누리는 거, 하루하루 일하면서 쌓이는 경험만큼 월급도 오를 거라는 바람. 하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금액의 월급을 받으면서 사는 이들이 생각하는 1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최저시급이 오른다고 좋아하지 못하는 이유다. 오른 시급만큼 삭감되는 기본급 외의 항목들이 눈물 난다. 저자들이 인터뷰한 100여 명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간접고용으로 같은 고통을 겪는 노동자 346만 명의 모습이다.


사실, 이렇게 분노하면서 얘기하고 있지만, 내가 여기에서 몇 마디로 말하는 것보다 직접 이 책을 읽고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많은 이야기를 여기에 다 옮길 수도 없고, ‘중간착취의 지옥도라는 말이 얼마나 잘 표현한 일인지 알게 될 거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뿌듯하게 채우고 싶은데, 현실은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일한 대가를 떼가는 사람들 때문에 내 땀이 제값을 못 받는다면, 나의 노동이 얼마나 자존감 떨어지는 일이 되는지. 이대로 계속 일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현실이 얼마나 구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저자들은 묻는다. 나의 노동의 대가를, 수십에서 수백만 원을 늘 떼어간다면 어떨 것 같은지. 그 질문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중간착취의 현실이 지옥도였음을 보여준다. 매체에서 여러 번 접한 상황들, 현장 근로자로 일하면서 다치거나 죽는 일이 생겨도 열악한 근로 환경만 드러나면서 그 고용 구조에 대해서는 금세 묻히고야 마는 반복적인 결과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간접고용의 피해자가 된 그들과 언제 우리의 일이 될지 모를 이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경험과 숙련도가 화폐가치가 되지 못하는 노동자-하청업체-원청이라는 피라미드 구조의 변화로 가능한 일을 어떻게 이뤄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처음 신문 기사로 접했던 몇 가지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기업(공공기업 포함)도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문득 업체의 위장 폐업을 보니 이런 생각도 들더라. 진화하는 보이스 피싱이 여기에도? 노동자의 퇴직금과 잔여 임금까지 착취하는 모양새가, 참으로 그 수법이 참신하고 교묘하고 뻔뻔했다. 더 슬펐던 건, 을이 을을 착취하는 방식이었다. 원청()은 그 자리에서 손끝으로 휘두르는 권력에, 밑의 을은 또 다른 을을, 병을, 정을 쥐어짜는 구조가 지독하게 절망적이었다. 이 악행은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분명 달라져야 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희망적이라고 웃어야 할지, 이렇게까지 해야 바위를 두드릴 수 있는 것인지 울고 싶을 정도로, 저자들의 노력은 끝이 없었다. 사실 보도 이상을 해내고 있었다. 도급비 산출 내역서를 확인하면서 착취의 근거를 파헤쳤다. 노동자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떼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찾아냈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가 그 돈이 모이는 곳이었으며, 이런 흐름을 용인하는 것 중의 하나가 법이었다. 그래서 법 제정에까지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저자들이었다. 관련 법 개정과 기존 법 개정안을 요구한다. 용역업체가 노동자의 임금에 손대지 못하게 하고, 파견 수수료는 정해진 만큼만 받게 하면서, 원청도 사용자임을, 간접고용 노동자를 위한 보호법을 만들자고 외친다. 이대로 그냥 침묵하고 머물러 있다면, 떼이고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다면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길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법 제정(개정)이 우리의 바람처럼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지도, 생각보다 오랜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계속 소리치고 부딪혀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는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고,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래서 저자들의 입법을 위한 외침이 고맙다.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이 작은 시작이, 끈질긴 노력이 가져다줄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더 확실히 알게 된 사실, 중간착취 피해의 중심에 내 남편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차마 그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했으나, 잘 안 되더라. 부디, 열심히 자기 몫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이상의 부당함이 없도록, 법 제정(개정)과 사용자의 태도가 변화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중간착취의지옥도 #한국일보 #남보라박주희전혼잎 #노동자

#노동자의피라미드구조 #용역 #중간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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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9-08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사 지은 농작물은 거치는 곳이 많아서 농사 지은 사람은 돈을 얼마 받지 못하기도 하는군요 갑자기 이게 생각나다니... 일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가운데서 돈을 떼어가다니, 그런 건 조금 낼 수 있겠지만 조금이 아니고 아주 많은가 봅니다 일을 하고 해가 가면 월급이 오르리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런 일도 별로 없다니... 일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좋겠습니다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생각하지 않아야 할 텐데...


희선

구단씨 2021-09-12 20:02   좋아요 0 | URL
그들의 인권, 노동환경을 위해 약간의 수수료(?)의 의미라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착취라는 표현 말고는 다른 게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방식이라면 문제가 많은 거겠죠.
굉장히 아픈 이야기였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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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시선으로 행간의 의미를 잘 파악하면서 읽어야 하는 게 시일 것 같은데, 막상 펼쳐본 정호승의 시는 그냥 일상을 듣는 기분이다. 세상의 슬픔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바라본 어느 장면을 그려내고, 과거의 어느 날을 추억하는 말들. 하나의 문장이 구절이 되면서 쌓인다는 게 어떤 건지 보는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펴낸 13권의 시집에서 추린 275편의 시가 담긴 시선집이다. 7부로 나뉘어 담겼는데, 살펴보니 시가 발표된 순서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시인이 나이 먹어가는 흐름을 시의 구절들이 따라온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 등단 50년이라는 시간에 어울리는 시선집이 아니었나 싶다. 다양한 생각들, 경험들, 시선들이 보이는 그대로 적혔다. 있는 그대로 다 담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싶지만, 그대로 다 담아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시인의 감정은 넘치듯 넣어두었는지도.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세상의 모든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통곡하고

세상의 모든 등대가 사라져도

나는 그대가 걸어가던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되어

그대가 밝히던 등대의 밝은 불빛이 되어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364페이지)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다고, 그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는 첫 번째 단락으로 시작하는 시다. 어떤 시간을 이야기하는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온 국민이 눈물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날이다. 바닷길이 하늘길이 되었다고, 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이냐고, 잊지 말자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이 두렵다고. 그래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마지막 구절은 마치 다짐처럼 들린다. 잊은 적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는 약속 같은 말.


아무리 중요하고 큰일이라도, 매체에서 한참을 떠들다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진다. 1년쯤 지나고 비슷한 시기가 오면 기념한다고 과거의 같은 날을 기억한다. 그리도 다시 바쁜 일상에서 잊기 쉬운 날들이다. 누굴 탓하랴. 우리 삶이 그런 것을. 그렇다고 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마음을 상기하게 하는 시인의 구절은,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고통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 상처를 가슴에 묻고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 시인의 가슴에도 상처가 되고 슬픔으로 남아있구나. 그 슬픔은 우리 일상에서도 깊게 자리한 감정이라는 걸 드러내기도 한다.


눈조차 오지 않는 쓸쓸한 오늘밤에도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불행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더 불행하다

(밤길에서, 84페이지)


꾸역꾸역 잘 견뎌온 오늘이 또 다른 희망으로 불행의 크기는 줄여준다는 걸까? 살아가는 수많은 날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마치 우리 삶의 종착역이 희망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처럼, 누구나 똑같이 그곳을 향해 가는 게 인생이라는 듯이.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건가 싶은데, 정말 아직 희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슬퍼할 수도 있다는 말을 알 것도 같고. 희망을 가운데 두고 생기는 이 묘한 감정을 한 마디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씁쓸하고 쓸쓸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 그래도 걸어야만 하는 삶. 뭐 이런 걸 자꾸 생각하게 하는 시다. ‘밤길에서라는 시 제목이 그렇고, 밤길을 생각하니 그 어두운 골목이 떠오르고, 한겨울 느지막한 시간에 그 골목을 걸어 집으로 가는 무거운 발걸음이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마음이 그렇다.


어떤 일상을 보내든, 어떤 감정을 배우든, 우리는 또 이렇게 걷고 걸어서 삶을 채운다. 온갖 감정을 다 경험하고, 그 감정을 다 감당할 수 없음에 또 이렇게 쏟아낸다. 말하고, 적고, 듣는다. 아마도 그건 아직은 괜찮다는 안도이면서 위로이기도 하고, 어느 날 닿게 될 행복을 생각하는 일일 거다. 시인이 적어간 시들이 세상으로 나와, 우리에게 읽히고 담긴다.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의 것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이제 그가 쓴 시는 읽는 우리의 것이 되어 마음을 달랜다. 모든 인간에게 날아가 닿을 그 시가 각자의 시간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지 궁금하다. 누구의 가슴속에서나 시가 가득하다고, 그러니 그 가득함 누리면서 꺼내 읽는 맛이 나겠다. 한 번으로는 다 알지 못할, 두 번으로는 더 깊어질 구절들을 새기기에 좋은 만남이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에 대하여, 216페이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277페이지)


담백하게 시인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읽기 좋은,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담은 구절들에 빠져도 좋은 시간.



#내가사랑하는사람 #정호승 #정호승시선집 #비채 #김영사

##문학 #공감 #한국시 ##책추천 #시집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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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월은 시인의 눈처럼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에 남는 시구절을 음미하는 달로! 구단님 9월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ㅅ^

구단씨 2021-09-02 22:32   좋아요 1 | URL
네. ^^
제법 긴(?) 장마가 계속되는 것처럼, 여긴 오늘도 비가 내렸어요.
바람이 달라진 요즘입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2021-09-0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호승 시인 시인이 되고 쉰해가 됐군요 그렇게 오랫동안 시를 쓰다니 대단합니다 잊지 않아야 할 일을 시로 써서 그 시를 보면 그걸 생각하기도 하겠습니다 여전히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많겠네요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희선

구단씨 2021-09-02 22:33   좋아요 1 | URL
그렇다네요. ^^ 저는 잘 몰랐어요.
이름도 알고 몇몇 시를 읽기도 했지만, 그의 책을 몇 권 읽기도 했지만,
발표된 시가 이렇게 많았다니요.
시로 표현하는 마음, 생각을 만나는 시간 좋았습니다.
 
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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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었는데, 마음이 불안하고 약한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온다고. 귀신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을 장악하려고 든다고 말이다.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리는 걸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지금 내가 안고 있는 불안과 걱정이 자는 동안 나를 침범하고 찍어누르는 거라고. 자꾸 그 걱정에 머무는 내가 악몽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어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안을 내려놔야 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어느 정도 맞았다. 근심이 사라지면 악몽도 찾아오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하지도 않았고, 제법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궁금해진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마음이 약하고 불안한 사람들인 걸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 악령에 씌어 대불호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들에게 다가온 게 정말 귀신인 걸까?


액자 구조 형식으로 써진 이 소설에서, 작가 강화길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화자인 <니콜라 유치원>을 집필 중인 소설가다. 어렸을 적부터 씐 악령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소설을 쓸 때마다 악의에 찬 목소리가 공격하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위축된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기에, 그녀는 다짐한다. 더 깊은 악의를 담은 소설로 복수하리라, 이 저주를 끝내리라. 그러던 중에 듣게 된 대불호텔 이야기에 빠져들고, 급기야 대불호텔의 저주에 깊게 관련된 그 여자, 고연주를 보기에 이른다.


복수가 복수를 낳듯이, 악의가 악의를 낳는 과정이 그대로 보였다. 대불호텔의 그들이 살아온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아프면서도 무섭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싶어 두려우면서도, 어쩌면 나도 모르게 살아온 시간을 되짚는다. 나 역시 이런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던 건 아닐까 싶어 괴롭기까지 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가.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끊어내고 싶은 간절함이 부풀어 오를 때, 이성은 날아가고 독한 감정만이 남는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힘을 갖고 싶은, 기어코 버티려는 오기 같은 것. 이런 감정은 누가 만드는 게 아니다. 내 안에서 저절로 태어난다. 막으려고 애써도 스멀스멀 피어오를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고통받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치유하고 싶은 바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악의야말로 그 치유법으로 생존한다.


이제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 말할 수 있다. 절대 풀리지 않는 원한.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망치고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마음.

악의. (49페이지)


나는 살아 있는 것들은 무서워하지 않아요. 살아 있는 것들이 남긴 것을 두려워하죠. 그건 무엇일까요. 원한, 고통, 절망. 그런 것들일까요. 무엇에 원한이 있는 걸까요. 알 수 없죠. 그렇기에 두렵죠. 실체를 알 수 없으니까요. 자신이 왜 원한을 가졌는지조차 잊어버린 존재들. 그래서 오직 원한만 기억하는 존재들. 지우고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 (141~142페이지)


고연주는 생존하고 싶었다. 대불호텔이 아니라 그 어디에 머물렀어도 그녀는 생존의 이유가 가장 컸을 테다. 셜리 잭슨도 마찬가지. 오직 쓰려는 마음, 그녀가 애타게 완성하고 싶은 저주에 걸린 저택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 뿐이다. 뢰이한도 다르지 않다. 어떤 사명감처럼 화교의 삶과 자리를 유지하고 싶었겠지. 모두 미국으로 떠났지만, 그만은 남아야 했던 이유가 있다. 지영현이라고 다를까. 어렸을 적부터 바랐던 제법 괜찮은 삶을 갖고 싶었을 그녀에게 지영현으로 살아가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 네 사람 사이에서도 싹트는 악의는 여전했다. 대불호텔의 수상함을 느끼는 이들과는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영현은 이들에게 또 다른 악의를 품는다. 왜 이들에게만 악령이 나타나는 걸까? 나는 왜 이들과 같은 삶으로 스며들지 못하는가? 심지어 귀신마저 고연주를 보호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질투하고 흠모하던 고연주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하는 그 벽을 무너뜨리고야 말겠다는 다짐은 잔인한 결말을 그린다.


대불호텔은 실존했던, 1888년 인천에서 문을 열고 성업했던 조선 최초의 호텔이라고 한다. 서울이 아닌 인천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을 보다니 놀라웠지만, 그 성업도 오래가지 못했다. 경인선이 놓이고 숙박객이 줄면서 대불호텔은 1918년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고, 화교의 경제적인 압박 정책으로 곧 문을 닫으면서 1978년 건물이 헐렸다고. 이런 역사 때문인지, 원한이 서린 공간으로 대불호텔은 너무 잘 어울렸다. 한 생애가 끝나가듯 쇠락해가는 그곳은 이들의 음침하고 우울한 이야기가 제법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죽고 다치고, 쓰러지고 무너지는 게 일상이 된, 그래서 나쁜 기운이 더 느껴지는 곳. 쫓아내려고 해도 기어코 들러붙어 나가지 않는 고연주의 존재는 이 호텔의 으스스한 생존력과 결을 같이 한다. 오히려 고연주 때문에 이곳의 원한이 배가 되고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 고연주의 공간에 셜리 잭슨과 뢰이한, 지영현까지 함께하게 된 걸 보면, 대불호텔은 원한의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곳이라는 걸 부정할 수도 없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흠칫하면서도 애써 그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지점을 통과하게 된다.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슬픔이 한곳에 모여있는 곳이 대불호텔이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는 대불호텔에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이들의 한을 다 불러모았나 보다. 단순히 망해가는 호텔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사건으로 악의를 한곳에 모아 뿜어내고 있었다. 무엇을 쓰는지 모르지만, 대불호텔에 온 지 두 달 만에 피폐해진 셜리 잭슨의 변화는 어떤 악령이 자기를 둘러싼 공포였다. 동양의 억울한 자매가 있다고, 죽은 자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고을의 한 수령이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고, 나쁜 것들을 처단함으로써 자매의 억울함은 풀어졌겠지만, 또 다른 원한이 생긴 것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들도 나름의 억울함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에 억울한 영혼이 아닌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싶다. 원한을 풀어주려는 이가 있다면, 그 원한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원한이 생기기 마련인, 그렇다면 원한은 쳇바퀴 돌 듯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고연주를 동경하던 지영현이 결국 고연주에게조차 마음이 돌아서 버렸던 것을 보면 말이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 삶이 그들을 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서럽고 외로운 고아가 되었다. 세상 속에서 약자로 남았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받고 핍박받는 존재였다. 무력한 희생자가 되어 버텨냈을 뿐이다. 공포로 가득한 그들을 견디게 해주었던 게 증오와 원한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도달한 감정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악의의 본질이었다. 우리 삶에 깊게 뿌리내린 혐오와 적대감, 감정의 폭력과 이방인을 향한 배척 같은, 약자를 바라보는 태도였다. 소설 속 화자가 찾아낸 것을 여기에서 멈췄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악의만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작가는 그들의 파국 같은 결말에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악령에 시달리며 괴로웠던 화자가 <니꼴라 유치원>을 완성함으로써, 매번 달라졌던 박지운(뢰이한의 아내)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 건물에 남아 있는 원한을, 현재에 사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바꾸려고 한다. 화자가 변했듯이, 그 역사 속 인물들의 마지막을 다르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들에게 슬픔과 악의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어차피 그 감정은 양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던가. 애정과 증오가 하나일 때가 대부분이듯, 악의와 호의, 원한과 사랑이 하나로 존재할 수 있다고 풀어낸다.


결국 이야기를 쓴다는 건, 살아가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냥 계속 살아가는 것. 삶을 그런 식으로 지속되는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이 결국은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이라 믿는다. (301페이지)


유령 같은 호텔에 갇힌 목소리가 날아가면서 자유로워졌기를, 실체 없는 악의에 계속 빠져 있지 않기를. 내가 버티고 살아가게 하는 것은 원한이나 악의가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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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8-27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나오는 대불호텔이 제가 아는 곳이 맞다면
대불호텔은 지금도 있는데, 지금은 아마 호텔로 쓰이지는 않고 전시관인 것 같았어요.
구단씨님, 즐거운 주말과 기분좋은 금요일 보내세요.^^

구단씨 2021-08-31 19:54   좋아요 0 | URL
네. 거기 맞다고 합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저는 그 전시관에 가보고 싶어요.
그 시대의 대불호텔을 재현한 장면 눈에 담고 싶습니다. ^^

비가 많이 온다고 예보를 하네요. 듣기 좋은 빗소리지만, 너무 과한 건 별로... 조심하세요. ^^

scott 2021-08-2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왠지 이 리뷰 👌등수 안에 들 것 같은 느낌이 사알짝 ~*
주말 멋지게 보내세요 ^ㅅ^

구단씨 2021-08-31 19:55   좋아요 1 | URL
이 책 후기가 다양해서 흥미로웠어요. ^^ 저는 재미있었는데요.

희선 2021-08-2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는 자세가 조금 이상하면 가위 눌리기도 해요 걱정 때문일 때가 많기는 하지만, 걱정을 해서 자는 자세가 조금 굳어서 가위에 눌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힘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기 힘들겠습니다 덜 생각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희선

구단씨 2021-08-31 19:57   좋아요 1 | URL
저는 신경 쓰는 일이 생기면 잠을 설쳐요. 물론 자는 자세도 안 좋고요.
정말 피곤하지 않으면 깊은 잠을 잘 못 자요.
이 소설의 내용을 제가 완전히 파악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인간의 모습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서 재미있었어요.

오후즈음 2021-08-3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이 그래선지 표지가 참 오묘하네요.

구단씨 2021-08-31 19:56   좋아요 0 | URL
작가의 전작 <화이트 호스>와 자매처럼 보이는 표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