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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평점 :
전문가의 시선으로 행간의 의미를 잘 파악하면서 읽어야 하는 게 시일 것 같은데, 막상 펼쳐본 정호승의 시는 그냥 일상을 듣는 기분이다. 세상의 슬픔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바라본 어느 장면을 그려내고, 과거의 어느 날을 추억하는 말들. 하나의 문장이 구절이 되면서 쌓인다는 게 어떤 건지 보는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펴낸 13권의 시집에서 추린 275편의 시가 담긴 시선집이다. 7부로 나뉘어 담겼는데, 살펴보니 시가 발표된 순서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시인이 나이 먹어가는 흐름을 시의 구절들이 따라온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 등단 50년이라는 시간에 어울리는 시선집이 아니었나 싶다. 다양한 생각들, 경험들, 시선들이 보이는 그대로 적혔다. 있는 그대로 다 담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싶지만, 그대로 다 담아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시인의 감정은 넘치듯 넣어두었는지도.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세상의 모든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통곡하고
세상의 모든 등대가 사라져도
나는 그대가 걸어가던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되어
그대가 밝히던 등대의 밝은 불빛이 되어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364페이지)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다고, 그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는 첫 번째 단락으로 시작하는 시다. 어떤 시간을 이야기하는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온 국민이 눈물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날이다. 바닷길이 하늘길이 되었다고, 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이냐고, 잊지 말자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이 두렵다고. 그래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마지막 구절은 마치 다짐처럼 들린다. 잊은 적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는 약속 같은 말.
아무리 중요하고 큰일이라도, 매체에서 한참을 떠들다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진다. 1년쯤 지나고 비슷한 시기가 오면 기념한다고 과거의 같은 날을 기억한다. 그리도 다시 바쁜 일상에서 잊기 쉬운 날들이다. 누굴 탓하랴. 우리 삶이 그런 것을. 그렇다고 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마음을 상기하게 하는 시인의 구절은,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고통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 상처를 가슴에 묻고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아, 시인의 가슴에도 상처가 되고 슬픔으로 남아있구나. 그 슬픔은 우리 일상에서도 깊게 자리한 감정이라는 걸 드러내기도 한다.
눈조차 오지 않는 쓸쓸한 오늘밤에도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불행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더 불행하다
(밤길에서, 84페이지)
꾸역꾸역 잘 견뎌온 오늘이 또 다른 희망으로 불행의 크기는 줄여준다는 걸까? 살아가는 수많은 날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마치 우리 삶의 종착역이 희망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처럼, 누구나 똑같이 그곳을 향해 가는 게 인생이라는 듯이.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건가 싶은데, 정말 아직 희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슬퍼할 수도 있다는 말을 알 것도 같고. 희망을 가운데 두고 생기는 이 묘한 감정을 한 마디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씁쓸하고 쓸쓸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 그래도 걸어야만 하는 삶. 뭐 이런 걸 자꾸 생각하게 하는 시다. ‘밤길에서’라는 시 제목이 그렇고, 밤길을 생각하니 그 어두운 골목이 떠오르고, 한겨울 느지막한 시간에 그 골목을 걸어 집으로 가는 무거운 발걸음이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마음이 그렇다.
어떤 일상을 보내든, 어떤 감정을 배우든, 우리는 또 이렇게 걷고 걸어서 삶을 채운다. 온갖 감정을 다 경험하고, 그 감정을 다 감당할 수 없음에 또 이렇게 쏟아낸다. 말하고, 적고, 듣는다. 아마도 그건 아직은 괜찮다는 안도이면서 위로이기도 하고, 어느 날 닿게 될 행복을 생각하는 일일 거다. 시인이 적어간 시들이 세상으로 나와, 우리에게 읽히고 담긴다.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의 것’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이제 그가 쓴 시는 읽는 우리의 것이 되어 마음을 달랜다. 모든 인간에게 날아가 닿을 그 시가 각자의 시간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지 궁금하다. 누구의 가슴속에서나 시가 가득하다고, 그러니 그 가득함 누리면서 꺼내 읽는 맛이 나겠다. 한 번으로는 다 알지 못할, 두 번으로는 더 깊어질 구절들을 새기기에 좋은 만남이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에 대하여, 216페이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277페이지)
담백하게 시인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읽기 좋은,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담은 구절들에 빠져도 좋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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