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숙제처럼 받아놓은 다른 책을 옆에 두고,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구매한 책을 또 옆에 쌓아두고서도 읽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서 또 인터넷서점을 헤매다가, 새로 받은 이 책을 잠깐만 살펴봐야지 하면서 펼쳐 들었다가 하룻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가독성 쩐다. 작가의 전작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으나, 아직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하던 차에 만난 책이다. 물론 이야기의 시작과 과정(미스터리한 추리 스릴러), 그리고 조금씩 풀어가는 결말에 이르기까지는 기존에 읽은 추리소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궁금했던 건 뭔가 드러나지 않은, 석연치 않은 그 느낌이 다른 책과 다르게 다가오기에 더 기대감이 컸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후미에는 육아에 찌든 나날을 지낸다. 그녀도 한때 잘나갔다. 아름다운 외모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직장생활도 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육아에 전념했다. 딸 둘을 키우면서 그녀는 변했다.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마구 먹어댔다. 결과는 비만 중의 비만인 몸뚱이. 누구 탓을 할까. 남편도 원망스럽다. 큰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다시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아이에게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강요에 어느 정도 키우고 다시 직장을 찾으려던 중에 둘째 딸을 임신했다. 이제 돌봐야 할 아이가 둘이다. 시간은 더 없다. 직장은커녕 집에서조차 자기 시간을 찾기 힘들다. 먹었다. 먹고 또 먹었다. 살이 찐 몸은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웠다. 그녀는 정신적인 병까지 얻었다. 해리성 장애. 가끔 그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몸은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빈번하게 증상이 나타난다. 초등학생인 큰딸은 학교에서 왕따까지 당하고 있다. 다 후미에의 뚱뚱한 몸 때문이다. 엄마의 외모가 아이에게 놀림거리가 된 거다.


, 정말 이 마음 알 것 같다. 내 인생 조금이라도 찾아가고 싶은데, 현실은 꽉 막혀 있어서 답답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도 맞는 일인데, 이게 우선인 삶도 버겁고. 후미에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녀가 자꾸 먹어대는 걸 이해할 것도 같다는 이 공감.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 서사를 쓰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마따나, 이 작품은 저자가 처음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범죄 추리 소설이다. 그만큼 처음부터 등장하는 후미에라는 인물 묘사는 강렬했다.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부터 극단으로 치닫는 느낌을 뿌린다. 육아와 살림에 찌든 일상에서 등장한 비만의 여성, 이벤트 응모가 취미이자 유일한 탈출구였던 그녀에게 어느 날 배송된 디너쇼 티켓. 그 디너쇼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의 권유로 프리랜서처럼 일하면서 고액의 수입을 올리고, 이제 그녀는 더는 뚱뚱하고 못난 아줌마가 아니었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여성이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과거의 그녀로 돌아갔다. 행복하다.


이 일은, 오직 너만 할 수 있어.”

너만 할 수 있어.

그 말에 후미에의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고 인정해주는 기쁨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185페이지)


넌 더 아름다워질 거야.”

더 아름다워진다.

가나코가 남긴 말이 후미에의 가슴을 강하게 울렸다. (180페이지)


의심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 생각해보자. 언제나 들어왔던 그 말,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물론 후미에도 일하게 됐고 그에 따른 보수를 받게 되었지만, 금액이 많다. 누가 들어도 혹할 금액이다. 의심은 당연하다. 어떤 일이기에 이렇게 많은 돈을? 하지만 후미에에게 그 이유가 보일 리 없다. 그녀를 지옥에서 구해준 것처럼 다가와 준 고등학교 동창 스기우라 가나코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가나코가 얼굴의 흉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일을 대신해주면서, 후미에의 아름다운 외모로 승승장구할 화장품 사업을 같이하는 일은 너무 즐거웠다.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 나를 구원해준 천사 같은 친구. 고맙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이고 돈을 벌면서 자신감도 되찾게 해준 그녀에게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인생이 아름다워졌다. 읽다 보니 점점 불안해지는 이 느낌은 뭔가 싶다. 너무 잘 풀리잖아? 아무리 오랜만에 만난, 과거의 고마움을 갚고 싶다는 친구의 호의라고 하지만 과해도 너무 과하지 않음? 하지만 인간이란 당장 눈앞의 것만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피폐해진 삶을 구원해준 가나코의 고마움에 이 순간의 방점이 찍힌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불안하게 흐른다. 독자에게 후미에의 평온과 인생의 변화를 즐기게 놔두지 않는다. 후미에의 이야기와 교차로 들려오는 강력계 형사 하타와 나쓰키 콤비. 잔인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몇 가지 단서로 해결해야 한다. 피해자는 남자, 화장품 사업을 했고 갑자기 사업을 정리했다는 것. 후미에는 이 사건의 강력한 용의자가 된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세상에 절대 공짜는 없다니까. 가나코가 모든 걸 꾸민 게 분명해. 수상했어, 자꾸 후미에 뒤로 숨으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럼 후미에는 피해자인데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누군가 구해줘야 할 텐데, 후미에의 누명을 벗겨줘야 할 텐데. 애가 탄다. 읽는 동안 우리는 이미 봤으니까. 가나코의 수상한 태도와 후미에가 받은 돈의 상당함과 그 출처를 의심했어야 했는데. 왜 그걸 못 봤느냐고?! 그런데 더 이상한 건 갑자기 죽어서 나타난 남자의 정체다. 그는 누구인지, 왜 갑자기 죽어서 등장한 건지, 이 결말 같은 순간에 확인해야 할 과정은 어떻게 펼쳐질지.


긴장감이 대단하다. 무서움의 공포가 아니라, 이 사건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싶은 근질근질함이다. 정확히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이 모든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고 흘러왔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다. 무엇보다 뚱뚱하다가 아름다워진 여자의 빛나는 인생이 이렇게 허물어져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슬프기까지 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가지지 않을까? 나부터도 갑자기 찐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면서 자주 우울해진다. 오늘은 한의원에 가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한약으로 살 빼면 그래도 덜 독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약을 끊고 또 요요가 오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까지 덤으로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소설 역시 여성에게 아름다운 피부를 선사한다는 화장품을 판매하고, 후미에도 되찾은 외모로 당당해진 걸 보면서, 남성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여성에게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집착은 떨칠 수가 없는 숙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만 얘기한 소설은 아니다. 가나코의 행동을 보면서 요즘 우리가 많이 접하는 온갖 범죄를 연상하게 된다. 한방에 거금을 마련할 수 있는 지능적인 사기 수법,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뻔히 보이는, 한번 맛보고 나니 놓을 수 없는 돈을 갖는 방식.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좇는 욕망은 너무 닮았다. 아름다움을 잃은 그때로 돌아가긴 싫어, 호화로운 이 생활을 몰랐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 그런 욕망 때문이었을까. 피해자는 늘어나고, 또 피해자는 계속 생길 것이다. 더 악질적이고, 더 교묘한 방법으로 저지르는 일들에 상처받은 사람은 또 삶의 커다란 벽 앞에 서 있겠지. 그래서 더 사회면 뉴스에서 보던 일들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가해자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듣고도 공감할 수 없던 것은 결말에서 확인한 피해자들의 사연 때문이었다. 상처받고 외로운 마음을 알아준 사람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내주었는데, 그 믿음을 배신하고 비웃고 있었을 거로 생각하니 피가 끓어오른다. 피해를 본 금액보다, 내 믿음을 배신당했다는 게 더 큰 절망이라는 것을, 가해자는 알기나 할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해서는 안 될 사회악으로 거듭나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이를테면, 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는 무사히 태어나기만 기원한다. 무사히 태어나면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고, 그게 이루어지면 머리가 좋기를 바라고, 그다음은 명문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란다. 욕심은 끝없이 커진다.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바랐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는 당연하다고 여기던 걸 잃을 때이다.

당연한 건강, 당연한 세 끼 식사, 당연한 잠자리. 그때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게 무너져 내렸을 때, 사람은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443페이지)


외모를 향한 욕망에서 시작된 일인가 싶었다가도, 언제라도 우리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이 작품의 원제가 네펜테스라고 한다. 벌레잡이통풀이라는 의미로, 달콤하게 꾀어내어 그 안으로 들어온 벌레를 먹으면서 산다는 뜻이라고.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원제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지 알게 된다. 한 개인의 욕망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이면을 마주하는 시간을 만든다. 비극이면서도, 고발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의를 찾으려는 형사의 노력까지 더해진, 탄탄하게 잘 짜인 미스터리 추리소설이다.


#달콤한숨결 #유즈키유코 #비채 #추리소설 #미스터리 #김영사

##책추천 #범죄소설 #아름다운외모 #뒤틀린욕망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9-15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만 믿으면 안 될 텐데, 사람은 그런 말에 잘 속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해자면서 가해자도 될 수 있다니... 후미에가 그런 경우일 듯하네요 뭐든 자신이 애써야 얻을 수 있을 텐데,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1-09-15 19:31   좋아요 1 | URL
누군가의 빈틈을 끊임없이 파고들면서 그 마음을 상하게 하고 믿음에 배신을 안기는 사람은 어떤 생각일까 궁금했어요. 이 소설 읽다가 보니, 타인에게 상처주는 것도 습관이 될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한번 두번, 그러다가 타인의 상처에 무감각해지는...

희선 2021-09-19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 님 명절 연휴네요 구월엔 명절이 있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건지... 명절 즐겁게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구단씨 2021-09-23 20:25   좋아요 1 | URL
연휴 잘 지내셨나요? ^^
월요일 같은 목요일 지내고 있습니다.
희선님 말씀처럼 명절이 있어서 그런지 9월이 빨리 가버린 느낌이네요.

scott 2021-09-19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추석 연휴 동안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해피 추석~


∧,,,∧
( ̳• · • ̳)
/ づ🌖

구단씨 2021-09-23 20:25   좋아요 0 | URL
맛난 거 많이 드셨어요? ^^
뭔가 하고 싶은 거 많이 생각하고 명절 시작했는데,
아무 것도 한 게 없이 명절이 끝났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