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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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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을 읽기로 한 것은 순전히 그가 제2의 김현으로 불린다는 말 때문이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도 없다. 김현이 누구인가. 지금은 너무 멀리 떠나와 도대체 내가 잠시 그 언저리에서 애면글면 짝사랑을 했던 적이 있기나 했었나 싶지만 돌아보니 내가 거기 있었던 게 맞다. 김현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시를 읽고 소설을 읽으면서 평론을 읽었다. 읽으며 감동하고 그의 말들이 좋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다좋다 하면서 다녔다. 평론은 확실히 문학이었다. 

신형철의 책 두 권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두 권을 부리나케 주문을 하고 설레며 기다린다. 느낌의 공동체를 먼저 읽는다. 따끈한 신간이기도 하거니와 좀 가벼운 글들이라니, 우선 느낌의 공동체를 먼저! 

내 글읽기가 이젠 후지고 뒤떨어져 평론이 재미가 없어진 줄 알았다. 신형철에게 감사를 전한다. 여전히 평론은 재미있고 또 시가 여전히 읽을만 한 것이었다. 소낙비처럼 시의 세례를 받으며 결국 또 다른 시집을 주문한다.  

그는 참 깨끗하고 단정하며 착한 사람일 것 같다. 그가 읽고 말해주는 시들은 한결같이 좋은 시들인 것 같고 그 작품을 내는 시인들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가 발견해낸 느낌들이 좋다. 물론 깊이가 아득해서 미처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공부도 많이 한 것 같다. 깊은 눈을 가진 평론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 깊이에서 길어올리는 글들 또한 매력적이다.  

3부의 글들은 짧아서 담아 낼 이야기를 충분히 못한 것 같아서 상대적으로 덜 재미있었지만 시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좋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거나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열씸히' 반응하고, 화내는 모습이 외로 꼬나보는 시선 보다는 좋다.  

물론 내가 좋다, 어떻다 할 만한 그가 아니다. 그의 글들 대부분은 질투가 날 만큼 빼어나다. 사유와 표현 모두.  

그 덕분에 잊고 있던 시를 다시 생각하고 또 읽을 거리가 생겨서 기쁘다.  

이 책은 평론집 이름으로 나온 게 아니다. 산문집으로 나왔다. 이제 그의 평론을 읽으려고 한다. 좀 어려워서 겁이 나지만 (꼭 이런 걸 읽어야 하나? 내가? 그래! 누가 뭐라든!) 나도 가끔은 이런 지적 사치를 부려보고 싶다. 비평이 문학이라는 것을 다시 보는 일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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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고래 - 중학교 국어교과서 수록도서 푸른도서관 17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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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을 보는 다른 시선


민기, 현중, 연호, 준희 이들을 중심 인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특히 민기, 연호, 준희가 각각 화자가 되어 자신의 감정을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 이런 구성이 각각 인물의 내면을 잘 들여다 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세 아이가 같은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다른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등장인물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상대의 감정을 읽지 못하거나 혹은 서툰 독자들에게 효과적이다.



민기는 잘생긴 얼굴 하나 믿고 기획사에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외모에 비해 춤도 노래도 연기 능력은 떨어지는데 민기는 깨닫지 못한다. 연예인이 되겠다는 절박함도 없다. 딱한 것은 그 길이 쉬운 길이라고 생각하는 의식 수준이다. 길거리 캐스팅이라는 기획사 마케팅 피해자다. 현실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그럴수록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민기는 외친다. “좋았어. 인생 뭐 별거냐? 가는 거야!”

민기네 집에 세 들어 사는 연호를 상담친구로 생각하지만 연호가 자기를 좋아하는 눈치는 모른 척 한다. 자기 외모에 생기다 만 연호가 여자 친구로는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한다. 랩을 잘하는 준희가 그들 사이에 끼면서 민기는 연호에 대한 마음의 변화를 느낀다.


연호

중 3연호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다. 기초수급대상자가 될 수 있지만 할머니도 있고 엄마도 있는데 공짜밥을 먹을 수 없다는 할머니가 있다. 세상 이치를 알아 챌 만큼 철들었다. 기초환경조사서를 어떻게 거짓으로 꾸며 써야 하는 지도 안다. 원인은 엄마 때문이다. 철없이 결혼해 연호를 낳고는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음반을 내고 방송에도 나가는 가수가 되기 위해 엄마는 할머니에게 돈을 뜯어 내다 못해 알량한 전제 보증금을 빼 가는 일도 서슴지 않았았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부업을 하고 열여섯 살 소녀인 연호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게 한 엄마’에 대한 복수로 연호는 엄마의 직업을 가수가 아닌 상업으로 쓴다.

연호를 돌봐주는 할머니는 증조 할머니다. 연호 엄마도 엄마 없이 할머니 손에 자란 것 처럼 연호의 가족사는 복잡하고 비극적이다. 연호는 어린 나이에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부정하지만 어쩔 수없이 연호는 엄마의 재능을 물려 받았다. 감추고 있지만 연호는 노래를 잘한다. 노래를 너무 부르고 싶지만 엄마가 너무 싫어서 자기가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른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민기가 그룹을 만들어 연예인이 되자고 할 때도 연호는 그저 민기를 한심하게 볼 뿐이다.

우연히 민기가 마련한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가 기획사에 전달되고 민기가 아닌 연호가 발탁된다. 연호의 실력을 알아보고 연호에게 가수의 꿈을 실현할 기회가 생긴다.

꿈조차 꿀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경험한 연호는 조심스럽게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엄마도 자기의 허황된 꿈을 접고 대신 연호를 돕기로 한다. 밑바닥을 경험한 연호는 이제 오를 일만 남아 보인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펴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날은 연호의 노력에 따라 당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누군가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연호의 삶 때문이 아닐까 넘겨 짚는다. 나는 연호의 삶이 애처롭고 가여워서 마음이 아프고 어쩔 수 없이 코가 매워지고 눈물이 났다. 재건축 때문에 민기네 집에서 나와 지하 방으로 이사하던 날, 조금씩 자기 마음에 설레임으로 들어오는 준희에게 남루한 모습을 보여야 했던 연호가 안쓰러웠다. 당장 살집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삶의 절박함을 우리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똥을 치워야 하는 꽃같은 열 여섯 소녀의 심정을 우리는 알수 있을까. 절망의 순간 단 한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절망을 느끼고 눈물 흘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연호의 담임 선생님의 조용한 눈물이 고마웠다는 건 독자인 내가 몰입해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 마음 조차 받아들이는 법을 모르는 연호는 누구 때문일까.

작가 정신을 나는 치열함이라고 생각한다. 연호의 삶을 들여다 보는 것은 치열함이 필요했다. 연호의 비참한 생활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연호라는 당당한 인물의 성장을 독자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연호를 끝까지 들여다 본다. 바닥까지. 혹은 과로와 영양실조, 스트레스로 쓰러질때까지 지켜본다. 독자는 연호의 입으로, 민기의 눈으로, 준희의 마음으로 연호를 본다.

너보다 비참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엄살 부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연호같은 삶도 우리 곁에는 있다는 것이다. 연호를 응원할 수도 있고 연호의 삶을 통해 기운을 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연호는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 작가는 치열하게 들여다 본다. 힘들었고 눈물 흘렸다는 것은 연호의 삶에 독자 또한 몰입해 있었다는 증거다.

“노래 하고 싶잖아”라는 준희의 말에 연호는 내면에 꼭꼭 숨겨둔 욕망을 발견한다. 엄마 때문에 자신의 처지 때문에 없는 것으로 잊어야 했던 꿈, 혹은 재능을 어둠 속에서 꺼낸 연호를 응원하는 것은 민기나 준희 뿐만이 아니다.

연호의 상처가 드러나있어서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라면 준희의 아픔은 가려져 있다.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더구나 말 할 수도 없는 상처는 곪고 햇볕을 보지 못하면 썩거나 죽는다. 그래서 연호 못지 않게 준희의 아픔도 조용하면서 쌔다.


준희는 공개 입양된 아이다. 커가면서 친부모라고 알았던 사람이 양부모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받을 충격을 막기 위해 입양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버려졌다는 상처는 결코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준희의 경우에는 생모가 누군지 알고 있다. 양부모가 먼저 생모의 연락처를 전해 줄 정도다. 언뜻 보기에 양부모의 행동이 진보적(?)으로 보이고 준희의 입장을 고려한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준희가 아직은 어린 학생이라는 점이다. 부모에게 생떼를 부리고 보호받아야 하는 나이에 비해 너무 큰 선택의 짐이 주어진 것이다.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지만 알아서 할 나이가 아닌 것을 어른들은 모른다. 남부럽지 않게 키워준 양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준희를 더말 할 수 없는 아이로 만든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보는 법, 준희가 연호를 금방 알아본 것도 아마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준희의 엄마도 그렇고 연호의 엄마도 그렇고 부모들은 자식들이 부모 고생을 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모습을 발견한다. 사실이 그러하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어른에게 상처받는지 모르겠다. 준희도 연호도 그들 스스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준희 처럼 사려깊기 까지 하다. 연호는 알아서 제 일을 하고 어른 못지 않게 삶에 최선을 다한다. 두아이의 삶을 망가트린 건 엄마라는 존재다. 등장하지 않지만 아버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가장 소년답게 살고 있는 민기 조차도 기획사의 마케팅으로 상처를 받는다. 아이들을 상처투성이로 만드는 것은 부모라는 존재며 어른들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다.

민기는 연예인으로서 자기가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민기의 누나는 부모 기대와 전혀 다르게 애견 미용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준희도 연호도 뜨거운 상처를 아물게 할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성장은 좌절을 통해 얻을 수 있듯이 세 아이는 좌절을 통해 자신을 알았다.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내 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꿈이 있던가. 혹은 꿈을 꾼적이 있던가. 있다해도 치열하게 마주선 적은 없다. 이건 내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은 꿈대로 현실에 떠밀려 잊거나 미루고 산다.

연예인을 꿈꾸는 것이 아무리 현재의 아이들의 화두라고 해도 불만은 있지만 꿈을 찾는 일은 여전히 소중하다.

연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날아오를 준비를 하겠지만 민기가 궁금하다.

민기는 잘 생긴 외모 말고는 오히려 평범하다. 그런데 민기같은 평범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두드러지게 잘하는 것도 없고 그래서 뭘 해야 할 지 모른 채 갈팡질팡하는 아이들말이다. 공부가 최선이라고 생각해 잠자는 시간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해야하는 아이들이 민기들이다. 그런 민기들이 하나씩 꿈을 찾기를 바란다. 그런데 누가 그 길을 안내해줄까.

부모들은 공부 말고는 대안이 없어보이고 학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사회도 마찬가지다. 꿈을 가지라고 떠밀면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세상이다.

바다로 나가지 못한 채 육지에 붙잡혀 신화 속 고래잡으러 가자는 노래를 하는 아빠를 보면서 민기는 한 발짝 성장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좌절과 후즐근한 모습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는가 보다.

‘그래,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이 나 자신이듯 미래의 나를 만드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야.’

민기는 손을 뻗어 그 아기 고래를 잡아 주머니에 넣었다.

“아빠, 이제 집에 가요. 엄마 걱정하신단 말이야.”

민기는 아빠를 부축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땅의 아이들이 지금 당장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그러기에는 너무 이르다. 시간은 충분히 있다. 지금부터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해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설령 이십대가 되고 사십대가 되어도 고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도 믿고 싶다. 다들 현재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조연을 꿈꾸며 컴퓨터 조립으로 돈을 모으겠다는 현중이도, 우선은 공부를 하면서 정말 무엇이 되고 싶은 지 생각해 보겠다는 민기도 언젠가는 연호처럼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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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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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돌보지 마라’는 제목이 이상했는지 열 살 아들이 갸우뚱 한다. 남은 돌보고 도와줘야한다고 배웠는데 제목이 이상한 모양이다. 엄마가 그런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뭐라 오래 설명하지는 않고 그저 너도 이상하지? 정도로 넘어갔다. 나도 이상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민낯을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비추어 보여준다. 읽다보면 왜 이토록 우리 마음이 아프고 늘 피곤한 지 원인을 알 수 있다. 몸이 상품이 되고 소비가 되는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끝장 모습이다.

그렇다면 해결하거나 혹은 작은 희망의 빛줄기라도 잡을 방도는 무엇인가.

저자는 공동체에서 대안을 찾는 것 같다. 희망과 연대로 뭉친 공동체가 파편화 되고 개별화 된 인간들을 모으고 인간성 혹은 영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아울러 사유 하기를 권한다. 사유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금방 해답이 나오는 문제도 있지만 오래도록 생각해야하는 문제도 있다.

늘 열혈 남아의 고조된 억양에 함께 흥분하며 책을 읽게 된다. 함께 분노하고 가슴을 치며 속상해 한다. 이게 현실이라면 나는 현실을 정말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반성하며 읽는다. 상대적으로 내가 중산층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는 안도감 마저 들게 하면서 또 한번 죄책감에 빠지게 한다.

하자센터나 간디학교에서 실행하고 있는 교육들이 해답처럼 들여오는 것이 나는 왜 불편하고 힘들까. 간디학교에 입학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더 그런 것 같다. 까다로운 심사와 자격 조건이 있어서 마음 하나로는 안된다는 패배감에 빠져버렸다. 분명 잘 모르고 짐작하는 것이다. 아이가 아직 어려 본격적으로 대안교육을 생각해 보지 않는 탓도 있다. 하지만 늘 공동체를 꿈꾸고 대안 교육을 희망하는 사람인데 왜 자꾸 그것 또한 그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지는 지 모르겠다.

뭐든 구하는 자가 얻는 것이 진리라면 내가 구하지 않은 탓이다. 그러면 정말 공교육 현실에서 아이들은 희망없이 공부하는 기계로 조립될 수 밖에 없는가.

모두가 대안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어느 정도 대안학교가 귀족화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다. 투정이나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자의 빈정거림이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떻든 공교육 현장의 아이들도 뭔가 출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바램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아이들이다. 튀거나 문제거나가 아닌 정말로 평범한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은 누가 위로해주어야 하나.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걸 극복하고 함께 하자는 것이 연대일텐데 나는 어디서 연대의 희망을 볼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갑자기 심각해졌다. 희망의 연대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돌보지 마라는 신자유주의의 얼굴에 훅을 날릴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다. 그냥 전전긍긍 누가 날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제는 정말 사유를 하고 선택을 하고 실천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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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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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시골에 쇄석기 공장이 들어선다. 돌을 깨서 돈을 버는 공장이 깨를 키워 깻잎을 따먹고 고추를 키워 고추를 따먹는 시골을 돌가루로 뒤덮어 버린다. 뚜르르르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쿵쿵 돌깨는 소리가 점령했다. 상식으로 안되는 일이가능한 것은 뒷거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마을에 철거민이 되어 떠돌아다니던 영희 철수 부부가 둥지를 튼다.

예고된 것처럼 주민은 ‘디모’를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공장은 잘 돌아가고 시위 참가자들은 벌금형을 선고 받는다. 고난 끝에 낙이 오듯 치열한 투쟁 끝에 공장이 문을 닫을 것을 알면 읽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바램인가. 작가는 이미 실패를 인정한 상태다. 그래서 절망스러웠나하면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사람의 힘, 혹은 인간의 힘이다.

이 소설을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골 사람들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이해와 득실로 사람을 재고 따지는 것은 시골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도시 사람들하고 다른 것이 분명한데 그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다.

나는 그것을 순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상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말 이전의 몸이며 느낌이다. 감각이고 원형이다.

영희를 보고 ‘순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순한 사람의 의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말의 뜻을 모르지 않는다. 그 순한 영희는 할머니를 대신해 위원장 노릇을 하면서 요즘 말로 할머니들의 몸의 말을 설명하고 대변한다. 영희는 그 할머니들의 몸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내 일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게 했다. 그런 영희를 할머니들은 단박에 알아챈다.

<꽃같은 시절>에 등장하는 여인들, 할머니들은 자연 그대로다.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약자로서 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나약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도리짓꼬땡을 하는 남편들의 투전판을 뒤집어 없고 당산나무를 자르겠다는 남편 혹은 새시대의 권력에 온몸으로 맞서며 끝내 당산나무를 지켜내는 여인들이다. 사람이 살 곳에 돌공장(자본)이 들어서면 안된다.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려야 하고 꽃이 피고 땅에서 난 것들을 ‘음석’으로 먹어야 한다. 돌공장이 들어서서 사람이 살 수 없다면 돌공장은 잘못들어선 것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그저 노래를 불러 달랠 뿐이다. 그녀들이 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러해야 하는 당연함 혹은 순리다. 그것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이기는 세상이지만 그녀들은 그런 세상을 거부한다. 바꾸지 못하고 거부할 뿐이다. 1인 시위를 묵묵히 해 내듯 한 사람 한 사람 온 몸으로 살아낼 뿐이다. 그러다 고구마 밭에 몸을 놔두고 혼만 빠져 나간다.

시골은 집이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집도 사람이 없으면 시나브로 꺼져간다. 혼이 빠져나가 끝내 몸이 바스러지듯이 집도 사람이 깃들지 않으면 혼이 깃들지 않으면 몸은 곧 주저앉는다. 도시 반대 쪽 농촌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점점 빈 집이 되어간다고 한다. 도시는 돈없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용산에서 벌어진 일은 돈 없어서 도시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인간이 인간의 조건일 수 있는 것들을 자본에게 넘겨준 대가를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이 되돌려 받는 것이다. 그래서 공평하지 못하다. 순리를 거스른 것이다.

할머니들은 영희 덕분에 꽃같은 시절을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할머니들 자신들이 이미 꽃이다. 영희는 그것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소리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똑똑이들이 많지만 그들이 할머니들을 위해 해준 일은 없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똑똑한 머리를 썼을 뿐이다. 대신 시골 할머니들은 집에 사람이 사는 것이 당연하듯 영희를 받아들인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들은 ‘순한 사람’ 영희를 알아보았다. 그런 할머니들을 알아보는 영희도 이미 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흥미로운 시선은 죽은 혼, 무수굴떠기 김천복의 아내 김오목의 혼이다. 몸을 빠져나간 혼이 집을 내려다 보며 아쉬워 하는 모습도, 조금씩 이승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고요해 지는 과정도, 향기도 서서히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벼워 지는 과정이 나는 아름다웠다. 물론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지만 나는 그동안 죽음 이후를 이렇게 아름답고 생동감 있게 묘사한 글을 본적이 없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될 만큼 이승과 저승의 공간이 아름답다. 그 또한 순리일듯 싶다. 가보지 못한 곳이라 누구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동안 사후세계는 폭력적이다 싶을 만큼 나는 이 소설 속 이승과 저승의 문턱이 좋았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할 것 같다. 그러하다면 몸을 두고 혼이 돌아가는 저승은 무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을 것 같다. 사는 일이 중요하다면 죽는 일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이승의 삶을 마감해야 한다. 자연의 삶에 녹아들어 그 일부가 된 할머니들과 영희와 해정은 그래서 꽃같이 이뻤다. 이런 순한 곳에 들어선 돌공장은 가히 폭력이라 할 만 한다.

작가의 시선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순하다. 철수, 이장, 김오목 여사의 큰아들, 철수의 처남, 해정의 남편, 옥화의 아들은 남자들이지만 검사나 판사, 혹은 돌 공장 사장과 다른 향기가 난다.

그들이 하는 말, 언어는 곧 그들이다. 할머니들을 알려면 그녀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영희를 알려면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 되듯이 판사 말을 들으면 이 땅의 권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라도 방언을 이토록 실감나게 몸의 말로 길어 올린 것은 작가의 힘이다. 데모하지 말라는 딸의 말에 제 엄마가 아무대꾸가 없자 딸이 왜 말이 없냐고 하니 니까 ‘니가 말을 하는데 내가 어찌고 중간에 말을 허냐’고 되받는 공님의 말은 사람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웃으며 깨닫게 한다. 말이 없다고 생각까지 없지 않음을 말해야 무엇하리. 그저 공님을 비롯한 순양면 할머니들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책 한 권을 읽어도 독자마다 다른 것을 본다. 투쟁의 과정에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희와 할머니들이 서로 섞여드는 시간을 보는 것이 좋았다. 산 사람 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좋았다. 나처럼 즉흥적이고 극단적인 사람에게 이들의 우정은 그야말로 이드거니 물들어가는(김영민) 삶이었다. 투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삶에서 이기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승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영희를 이승으로 돌려보내려고 혼엄마들이 노래를 부른다. 이승으로 돌아간 복주어매가 또 어떤 삶을 엮어갈지 독자의 상상에 맡겨졌다. 해정은 아직도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해먹을까 궁금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시골이, 혹은 농촌이 더 이상 망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그곳이 사람 사는 공간을 넘어 원형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임을 확인하고 망가진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농촌이다. 도시에서 안되는 이유는 절대 도시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돌공장이 너무도 많다. 더 이상 들어설 곳이 없어서 농촌까지 밀려가는 것이다. 아마 온몸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4대강으로 망가지는 자연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온 몸으로 먼저 아파하는 것은 내가 그 강의 일부라면 당연한 것이다. 아파해야 한다. 막아설 수는 없다하더라도 지금 아파하는 일 조차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자연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다. 순리에서 많이 빗겨나 있는 것이다.

기운을 차린 영희가 좋아하는 꽃을 마음껏 보고 철수도 마음 잡고 농사를 짓고 이제는 영희가 읽는 시도 함께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뭔일을 하는 지 설명은 못해도 중요한 일인 것을 알아서 떼도 안부리고 잘 커주는 복주가 제 엄마를 닮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가슴을 울리며 돌아가는 돌공장 돌깨는 소리가 매캐한 돌가루먼지에 섞여 논밭을 뒤덮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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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 어울림으로 비평으로 숲으로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그의 비밀(?)을 이제서야 하나 알아냈다. 글 속에 숱한 철학자들의 말과 글이 단 한 순간도 멈춤 없이 오르내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표절을 손으로 축구를 하는 선수는 이미 축구 선수가 아니라는 말로 대신하는 그를 읽으면서 그의 말과 그의 말이 아닌 것을 분명히 가르는 것이다. 학인으로서(그는 학자라는 말 대신 학인이라는 말을 쓰는데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그의 모습을 본다.  

 알면서도 모른체 하기라든가 몸을 끄-을-고, 산책 혹은 몸이 좋은 동무라는 말의 속뜻을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 보다 어려운 부분이 더 많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잘 들으면 곧 알아 들을 수 있다. 그의 글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잘 들여다'보고' 잘 '듣게'한다. 아마 내가 그의 글이 읽기가 힘들면서도 읽고 싶은 이유가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의 글에 나타난 그의 면면을 더듬어 보자면 그는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고 센 사람이다. 그것을 엿볼 수 있어서 좋다. 가령 "우리의 산책은 오직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의 형식이며 그 형식에서 뺄 수 없는 부분이 곧 자본제적 도시다. 도시를 정화할 힘이 없으면 이미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 곳곳에 있다. "산책 하지 않는 자는 결국 인식의 고리나 내성적 자아의 반성에 머무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다.

공부와 삶이 어긋나지 않게 이드거니 어울리며 어리눅어 가기를 희망하는 것 또한 내 공부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카데미 좀비 조차 아닌 평범한 주부지만 주부라고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내 지적 능력으로는 그의 숲 언저리조차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허나 몸을 끄-을-고 나서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러고 나니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 읽게 되었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직도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단 한 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의 책을 몰래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를 그는 뭐라고 할까. 여보쇼 어렵고 이해도 안되는 것 그만 내려놓고 차라리 아침 드라마나 보라고 면박을 줄까. 그렇게 몸을 끄-을-고 읽는 나를 동무로서 봐줄까. 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것이 나의 실재고 나는 내 실재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읽을 권리조차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언젠가는 산책길에 나설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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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ph 2011-03-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부님. 존경합니다.^^ 저또한 철학에 대한 보잘것 없는 바탕지식을 가진 무식한(?) 독자이지만 열심히 밑줄그으며 읽고 있답니다. 김영민 선생님의 책이 철학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히려 부정적으로(저처럼)생각했던 독자에게 열심히 읽히고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내내 강조하시는 '수행성'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철학책'으로 읽히는 게 아니라 실천에 주목하게 되는 '생활의 지혜'로 읽히는게 책을 잘 읽는것 같기도 하고요.

여울 2011-04-1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게 되어 반갑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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