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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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지나가도 만나면 또렷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탁동철 이름 석자도 그렇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보리출판사에서 어른용으로 내는 잡지 <개똥이네 집>에서다. 딱 한번 이름을 보았고 그 때 그는 그림책 <야쿠바와 사자>를 읽고 아이들과 무슨 연극을 하였다고 했다.

그즈음 나도 그 책을 읽고 이 좋은 그림책을 아이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그의 글은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인상에 남았다. 글로 남은 사람을 <달려라 탁샘>의 저자로 확신한 것은 자세하게 말할 수 없다. 그냥 그랬다.

 

교사가 쓴 교단 일기는 학생과 교사에게 우선 소용된다. 그 학교의 학부모까지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 들어간다면 독자의 자리는 조금 더 밀려난다. 그러나 교단 일기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독자에게 이 책은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시골 분교 학교 아이들과 생활하는 탁쌤은 자주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이들과 선생이 투덕투덕 싸우는 것은 다반사고 더러 선생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학생과 맞짱을 뜨기도 한다. 학교 운동장에 쓰레기를 버리는 얌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일이 편지를 쓴다. 아이들을 몽땅 앞세워 경찰서에 가서 시위도 한다. 막대과자 주는 날에는 애들하고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데, 이 과정도 볼만하다. 우선 읍내에 맛있다고 소문난 집 세 군데를 정해서 그 집 떡볶이를 맛본다. 물론 차비는 탁쌤이 낸다. 그대로 따라 하거나 입맛대로 손맛을 내도 된다. 이렇게 모둠이 만든 떡볶이는 급식소에 가서 전문가(?)에게 심사를 받는다. 빼빼로데이가 어쩌구저쩌구 잔소리는 단 한마디도 없다. 그냥 그날은 지들 멋대로 맛대로 떡볶이를 만들어 먹은 날이다.

 

우리 동네 알아보는 사회시간에는 누구는 어른들의 별명을 조사하고, 누구는 처마에 무엇이 있나 조사하고 누구는 김장을 몇 포기 했고 거기에 무슨 재료가 들어갔나 조사한다. 옛날에 쓰던 농기구에 대해 알아볼 일이 있으면 아이들을 앞세워 동네 아저씨를 찾아간다. 아저씨는 말도 천천히, 친절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아이들의 일일 선생님이 되어준다.

 

밤낚시도 가고 밤 떨어지면 밤주우러 가고 눈 내리면 비료푸대 들려서 눈썰매 타러간다. 온도에 따라 물고기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보려고 얼음과 실험도구를 챙겨 냇가로 간다. 직접 잡아 실험하고 냇가에 다시 풀어준다.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는다. 일이 생기면 바로 토론에 들어가고 반장은 일주일씩 돌아가며 한다. 사정에 따라 상황극을 펼쳐 한 가지 일을 여러 가지로 경험하게 돕는다. 방학숙제도 시 몇 편 쓰겠다하면 그게 그 아이의 방학숙제다. 단 30편을 쓰겠다하고 세 편만 써오면 30편을 다 쓸 때까지, 쓰지 못하고 졸업해도 반드시 채워야한다. 맨 이런 식이다. 짧은 사건들이 수도 없이 많다. 웃기고 신나고 재미있다. 사계절의 변화가 교과서고 그와 아이들이 사는 동네가 교실이다.

 

부럽다고 하고 말 일이 아니고 시골이니 그렇게 즉석 현장 체험이 가능하지 하고 말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교사로서 학생을 대하는 태도이며 부모로서 자식을 대하는 태도다.

 

학생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직접 보았어도 그 아이가 끝내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는 그 아이가 충분히 고통 받았음을 이해한다. 말을 안 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말을 하라고 하지 않고 싸우는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아이의 이유, 아이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제 할 말을 못하고 기계적으로 사는 것을 싫어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거짓으로 꾸며 사는 것을 못견뎌 한다. 헐렁해보이지만 그 속에 단단한 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교사 생활을 한 양양은 그의 고향이다. 마을 어른들은 학교 선배이거나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는 그 선배의 아이들이다. 그 상황이 어색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그가 마을을 교실로 삼고 마을어른들을 다 선생님으로 생각하는데 그가 선생입네 고개들고 다닐 위인이 아님은 당연하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자신의 말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의 마음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말하라는 그의 다그침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어린 학생이었을 때, 나에게 그런 가르침을 준 선생님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모범생 딱지가 부끄럽다고 느낀 것은 얼마나 최근 일인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래도 어찌어찌 지금껏 읽어온 책 속의 스승에게 들은 말이 아니던가.

 

아직 어린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마음을 다 알리라고는 그도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좋은 선생이 되고 싶지만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하리라 마음 놓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사람에게 존재 이유가 있다면 증명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할 줄은 안다. 나는 못하고 산다는 것도 알고 그걸 하며 사는 사람을 알아볼 줄도 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사는 사람이다. 가슴을 탕탕 치면서, 더러는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부당한 일을 보고서야 어찌 가만히 있어야하느냐는 그의 말을 따라 내가 한 짓거리를 고백한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어’ 하는 마음에 저지르는 어설픈 짓거리다.

지난 일요일,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끓이자해서 동네 슈퍼에 갔다. 라면을 사들고 나오는데 부동산 앞에 늘 있던 차 한 대가 턱하니 눈에 들어오겠다. 보니 그곳은 인도요, 아이들이 학교가고 올 때 드나드는 길이다. 가뜩이나 좁은데 덩치 큰 차가 길을 반 넘어 먹고 있다. 이것들이.

경비 아저씨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다. 말 해도 듣지 않고 상가 건물이라 할 말도 없다나. 그렇겠지. 차 주인에게 차를 여기다 두는 게 옳으냐 물으니 아니라고 하고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물으니 아파트 주차장을 못쓰게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나 참, 이사람들이.

관리소장에게 말하겠다 하고 돌아오는데 아차, 우리 집 아파트 그 부동산에 내 놨는데, 그럼 그 차 주인이 부동산 사장의 남편인가. 뭐야, 이거 집도 안나가는데 입방정을 떤거야? 처음부터 관리소장에게 말하거나 조용히 관리관청에 신고전화를 할 걸. 그나 저나 내가 왜 이랬지? 이게 다 탁동철 그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가만 두지 않을꺼라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한 거야. 계속 가? 그래도 차 주인한테 항의라도 했으니 그도 괜찮다고 할까? 그래, 그 정도면 적어도 말이라도 했으니 됐소라고 인정해줄까?

나는 이러면서 머리를 쥐어 뜯었다. 훈련 받지 못하고 억압된 권리는 이렇게 맥을 못쓴다. 이만한 일에도 겁을 먹으니. 그리고 권리와 이득 앞에서 저울질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비겁하다. 움추러든 마음이 펴지질 않는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와 임길택이 겹쳐 보인다고 하는데 동의한다. 자연스러움과 체하지 않는 모습, 자신 또한 한 사람의 욕망 덩어리요,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낮은 마음, 아이들에게 ‘나 좀 가르쳐 다오, 오늘 내가 너에게 배웠다’ 하는 모습은 내가 아는 임길택과 탁동철이 통한다.

밑줄 그을 데가 많고 배꼽 잡을 때 또한 많은 책이다. 너무나 친근한 내 고향말도 눈에 띄어 더 반갑다.

마음에 새기고 싶어 여러번 되돌아 읽은 부분을 다시 잊지 않으려고 옮겨적는다.

 

“이제부터 2학기다. 또 시작이 아니라 세상에서 처음 맞는 시작이다. 굳지 않은 말, 닿아 있는 말들로 잇고 쌓아서 세계를 새로 지어 나가고 싶다.(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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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가지 행동 - 김형경 심리훈습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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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나는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여 오랫동안 열등감에 빠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열등감에 빠져 있어서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인가.

심리훈습에세이라는 낯선 이름표를 단 김형경의 <만가지 행동>을 읽고 내가 얻은 결론은 후자인 것 같다. 마음이라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행동대로 하면 되는가 했는데 실천이란 그 마지막 단계다. 누구나 알되 실천하지 못하는 한계와 만나게 되어 있다. 이 책은 그녀가 앞서 쓴 심리에세이 완결편인데 산 정상을 앞두고 마지막 힘을 써야 하는 것 만큼 큰 고비로 다가왔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정신분석에 대해 이미 가진 지식이 있는 사람한테 해당한다. 즉 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난관에 부딪혔다. 실천의 방법은 너무 높이 있는 것 같고, 나는 아직 내 마음 조차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다. 그 사이 몇 년이 흘렀는데,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나는 ‘살았는가, 살아졌는가’. 이런 반응 뒤에 또 허겁지겁 이것저것 말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밑줄을 그으며 오래 새기고 싶은 말들이 많다. 위로를 받을 만한 조언들도 많다. 프로이트와 융, 예수와 부처, 혹은 요가수행과 노자, 장자, 그리고 수많은 여행에서 그녀가 경험한 내적인 사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지금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에서 맺어진 결과 혹은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오랜 훈습 과정을 겪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과정이 어디 쉬이 나오는 것이던가.

이건 분명 ‘저항’의 마음인 것 같다. “흠, 당신은 이토록 많은 공부와 여행,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인류에게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사람들이 한 말의 본질에 다가갔군요. 그런데 오늘도 내 마음이 왜 이런지도 모른채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기회가 전혀 없잖아요. 그 사람들은 몰라서 행복할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차라리 마음이고 뭐고 그런거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죠 뭐. 그럴 수 있다면. 문제는 그런 사람들과 난 좀 달라 하는 저 같은 사람은요, 도무지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쑥대밭이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지 알고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도움을 받아야하나요? 혼자 책읽고 공부하는 것도 제자리고요. 여행은 꿈도 못꾸지요.” 이런 말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

늘 이랬던 것 같다. 당신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마음 밑바닥에는 열등감이 자리했다. 누가 나 같은 사람의 말이나 마음에 관심을 두겠는가 하는 마음 안에는 인정받고 지지 받고 싶은 어린 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생각 속에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는 마음도 있지만 낮은 자존감은 그 마음 조차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찐득허니 자라지도 않고 딱 그만큼으로.

김형경은 원인을 어려서 부모에게 사랑과 지지와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서 찾는다. 아마 내가 또다시 울고 말았던 대목이 여기쯤이었다. 친정 엄마와 가족에게는 단 한번도 내색해보지 못했던 깊은 우물 속 자갈처럼 분명한 마음의 돌. 확실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내 부모의 처지 또한 가엽다는 것이 내가 조금 변한 부분이다.

책의 어느 대목 쯤에 안 좋은 상황이 3대쯤 세습되면 그 3대 누군가에게 정신병증이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몰래 안도의 숨을 내 쉰 것은 내 부모가 열등감을 물려주었으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더 나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과 나는 내 아이에게는 절대 이것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십 년이 흘러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의 원인을 안 것은 꽤 지난 일이다. 늘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좋은 사람이라는 페르소나를 갖게 한 것이 이 열등감이다.

남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마음을 갖는 것 또한 분별하는 마음이라고 해석해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이 생기고 나를 사랑하게 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정답을 알려주듯이 보편적인(그런것이 있을수가 있겠는가마는)행동 강령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은 저자 자신이 훈습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라 그것을 나에게 적용해도 되는 지 의문이 생기고 말았다. 그 전의 책에서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 그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고 얻은 결론은 처음부터 다시였다.

이미 김형경은 정신분석을 끝내고 어느 단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녀는 독서모임을 통해 분석가 혹은 치료자의 위치에 서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그 단계인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다. 어느 위치, 어느 단계는 꿈도 못꾸고 다만 현재의 내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알아내서 내게서 끝나게 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내 가족이 나를 규정지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그 대가로 누리는 지금의 여행이 즐겁다는 칠십 대 할머니 같은 존재감을 획득하고 싶은 것이다.

정신분석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대상이 신이라는 결론에 동의하면서 특정 종교가 아닌 일반적이 종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아주 소박하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인정하는 것,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래도 된다는 것, 좋은 사람 페르소나에 억압되어 있는 자유 의지를 이제 꺼내어 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만가지 행동>을 읽으며 프로이트나 융, 예수, 부처, 노자, 인도의 수행자 같은 대상들을 걷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들에게 기대 내 마음을 들여다 볼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책과 나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이해하려면 그들을 다 알아야 하는가라는 저항의 마음이 책을 다 읽을 즈음에 가서야 이런 마음으로 바뀌었다. 즉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이기를 한 것이다.

가장 소중한 거둠은 유효기간이 또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마음과 접속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마음의 변화에 집중하고 묻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위로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전이와 역전이가 일으키는 소란스러움 혹은 싸움들도 줄어들기를 기대한다.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어른이 되고 힘있게 늙어가기를 희망한다.

내 삶의 결론은 죽음으로 끝날테고 죽음의 순간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단계를 소망한다.(가장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다.)

많은 감정의 입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테지만 <만가지 행동>을 읽는 과정 속에서 생긴 지금의 마음을 기록하는 일에 의미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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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0-26 14:32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빌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여행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
빌 브라이슨 지음, 이미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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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읽는 것은 단연 가보지 못한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직접 체험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리만족으로도 충분하다. 지리적 체험과 함께 문화적 체험도 가능하다는 것은 여행기의 더 큰 매력이다. 그런 매력이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에는 더욱 도드라진다.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원제목은 태양에 타버린 나라라고 하는데, 나는 이제목이 훨씬 근사하다고 느꼈다)는 대단한 호주에 대한 이야기이고 여행기로서도 대단한 이야기이다.

호주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정보라는 것이 딱 초등학교 수준이어서 캥거루와 코알라 그리고 커다란 섬이라는 것 말고는 끄집어 낼 것이 별로 없다. 짐작하겠지만 브라이슨의 여행기에는 캥거루나 코알라 얘기는 거의 없다. 그것 말고도 대단한 것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은 읽다보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는 호주를 동서로 종단하고 남북으로 횡단하고 해안선을 훑어가며 부지런히 차를 몰고 다닌다. 동서로 종단을 할 때는 물론 기차를 이용한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가 하면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과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쉬어가기도 한다. 그의 화법은 직접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고 무척 재미있다. 유머와 재치가 넘친다고들 하는데,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몸에 밴 여유로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가이드 없이는 호텔 밖에도 나가지 못하는 소심한 여행가에게 현지인을 만나는 일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일단 달려가서 묵을 곳을 정하고 나면 어슬렁거리며 여행지를 걷는다. 때로는 몇 시간을 걷기도 하는데, 최대한 맛있는 것을 먹을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특히 내가 그의 여행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느긋한 태도 때문이다. 그렇게 찾아낸 음식점에 들어가 그는 할 일없는 사람처럼 신문을 보거나 식당 안을 구경하거나 메모를 하고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는다. 물론 그의 손에는 맥주가 항상 들려 있다. 호주를 여행하면서 그는 거의 모든 여행지에서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일몰을 구경한다.

크게 일정은 세우지만 방향만 정해놓고 여행의 순서나 시간은 자못 즉흥적이다.

몇 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 여행지는 늘 그렇듯이 좋거나 별로다. 그가 유럽을 산책하면서는 굉장히 투덜댔던 것 같은데, 스스로 호주를 사랑한다고 말했듯이 호주는 여러 가지로 대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덩달아 독자도 호주를 대단하게 느끼게 된다.

 

사실 이 책은 굉장히 긴 여행기다.(400쪽이 넘는다) 글씨도 빽빽하고 보통의 여행기 책에서 제공하는 사진 한 장 없다. 자주 지도를 꺼내보고(호주가 하도 넓어서 감이 안잡히는 상상력 부족한 독자인 나는 특히나 지도를 옆에 놓고 읽었다) 인터넷으로 검색도 하면서 읽어야 한다. 작가도 수다스럽고 독자도 이것저것 수고를 하며 읽는 여행기다. 단, 그의 여행에 간접적으로나마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는 독자라면 말이다. 그만큼 책에 담긴 내용이 많다.

 

지루해도 그의 수다를 끝까지 들어볼 가치가 있다. 그는 자기가 여행하고 있는 대상, 즉 호주라는 나라를 통째로 들어보이며 “이것이 호주라는 나라입니다.” 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최초로 호주를 발견한 쿡 선장부터 시작해서 호주의 역사, 문화사, 인류사, 자연사를 각각의 대상을 만날 때마다 말해주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호주라는 나라를 눈여겨 보게 한다. 그의 말처럼 세계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고 위협적이지도 않는 이 거대한 섬 나라가 얼마나 매력적인 나라인지 말이다. 그는 여행하는 나라에 대해 정말 많은 공부를 한다. 거의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가 호주를 좋아하고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여행자와 여행지 사이의 거리를 개인적 감정으로 좁히거나 넓히지는 않는다. 호주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다.

 

 

캥거루나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코알라 정도 만큼만 알았던 호주가 매력적인 나라로 새롭게 기록된 것은 확실하다.

자연사의 귀중한 자료가 여전히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은 채 조용히 멸종해 간다는 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수억 년 동안 바람에 풍화되어 뼈만 남은 것 같은 거대한 울루루 바위가 있는가 하면 역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데 35억년 전, 지구 생명이 탄생하는데 필요한 산소를 공급했던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지금도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호주다.

 

아는 만큼 보이고 마음 가는 대로 보는 것이 여행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도 비록 책이기는 하지만 여행자의 자세로 읽기를 권한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이 고단한 하루 여행을 마치고 퍼브에 앉아 시원하게 맥주를 마실 때는 독자도 한 잔 마시기를. 내가 마신 맥주는 사실 별 맛이 없이 밍밍했지만 여행지에서 마시는 맥주 맛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책이 사실은 10년 전에 씌어졌다는 것이 새삼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어찌 지금 신간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아주 조금 궁금했다. 왜 나는 2011년 혹은 2012년 현재의 호주를 생각했을까. 신간이지만 이미 10년 전 호주 이야기라는 것이 약간의 혼란스러웠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호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조금더 사람들로 북적대고 그래서 조금 많이 오염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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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 - 야생의 순례자 시턴이 기록한 북극의 자연과 사람들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 지음, 김성훈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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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캐나다 중부 지역의 자연 환경을 상상하는 일은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어려운 일이다. 세계지로를 펼쳐 놓고 한 눈에 들여다봐도 지리적 공간을 상상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현재의 속도와 도구를 버리고 1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시턴의 북극 탐험에 동반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잠깐의 낯섦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시턴의 카누에 속도를 맞추게 된다. 동물학자로 알았던 그의 이력에 에세이스트라는 작가에 가까운 호칭이 붙는지 금새 이해가 된다. 그의 탐험 기록은 정확하고 생생하고 유머가 넘치며 재미있다.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은 그의 나이 사십대 중반(시턴은 1860년에 태어났고 이 탐험은 1907년에 이루어졌다), 도보로 캐나다 북서쪽 끝을 탐험한 기록이다. 탐험 기간은 약 6개월이며, 이 기록은 그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몇 년 후에 작성되었다.

북극이라고는 하지만 에스키모나 얼음집이 곧바로 떠오는 극지방이 아니라 캐나다 중부 지역의 대초원지대다.

탐험 목적은 순록을 관찰하고 개체수가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지만 그의 말마따나 온갖 종류의 자연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호수를 관찰하여 지도를 마무리하고, 다른 호수도 탐사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온전히 걷거나 카누를 타고 진행된다.

모든 여행이나 탐험이 그렇듯이 목표와 목적지는 분명하되 이런 이야기가 독자의 흥미를 끄는 이유는 과정이 주는 재미일 것이다. 특히 쉽게 가보지 못할 곳이거나 처음 발견되는 곳으로 안내를 받을 수 있는 행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런 탐험 기록을 읽는 특별한 맛이다.

시턴의 북극 여행은 그런 욕구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동물학자로서 시턴을 상상할 때, 나는 그가 당연히 동물을 죽이거나 식용으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박제를 만들어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그는 여러 종류의 동물을 죽인다. 식용을 위해 동물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목적 이외에는 동물을 죽이거나 잡지 않는다.

 

탐험의 길목마다 현지 안내인을 고용하는데, 그들은 인디언들이다. 이 탐험 기록에는 꽤 여러명의 인디언이 등장한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독자에게 100여 년전 그들의 모습은 시턴의 말처럼 ‘혼혈’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미국대륙에서 인디언들이 자신의 땅을 백인들에게 내주고 보호구역에서 살아야 했던 것처럼 비극적인 인디언 역사는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시턴은 ‘혼혈’이라는 말로 인디언을 자주 표현하는데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역시 미국 인디언의 역사와 다르지 않았음을 상상해 볼 뿐이다. 그렇게 백인과 섞여 살면서 여행자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인디언들은 착하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하고 부지런하기도 하고 뻔뻔하기도 하다. 아무튼 시턴을 돕기도 하고 골치를 썩히기도 하면서 함께 탐험을 하는 인디언에 대해서도 시턴은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시턴은 그림을 잘 그렸던 모양이다. 부모는 그를 화가로 키우고 싶었으나 동물과 식물을 너무 사랑한 시턴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화가로서 그의 장점이 탐험하는 동안 유감없이 발휘된다. 사진도 찍지만 그는 탐험의 기록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박물학자인 그에게 커다란 축복이었을 것 같다. 이 책에도 여러 장의 그림이 실려 있다.

시턴은 걷거나 카누를 타고 6개월 동안 탐험한 것들을 탐험 기간 동안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엄청난데, 살펴보면, “600쪽에 달하는 지질학, 식물학, 동물학 관련 관찰과 발견의 기록들, 그리고 500방이 넘는 그림, 온갖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꼼꼼히 기록한 값진 것들, 아름다운 나이얼링 강에서 발견한 것들과 컴퍼스 측량 기록들, 두 개의 거대한 북쪽 호수를 컴퍼스 측량한 기록들, 북쪽의 큰 강 두 개와 많은 호수를 발견한 기록들, 그리고 남들에게는 흥밋거리이고 나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수천 가지 발견의 기록들”을 세 권의 일기장으로 남겼다. 그 발견의 대상들은 박제가 되어 후에 미국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고 그가 오랫동안 글을 쓰는 자료가 되는데 자칫하면 시턴은 빈 손으로 돌아올 뻔 했다. 이 모든 기록들이 돌아오는 길에 사라질 뻔했던 것이다. 이번 탐험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엄청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 기록을 찾기 위해 함께 탐험하던 대원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던 모습을 따라 독자도 함께 동분서주 했다면 에이 설마하겠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한 것은 그의 글 솜씨다. 생긴 것 처럼 말쑥한 글쓰기도 호감이 갔지만 군데 군데 묻어나는 유머가 매력적이다. 사이 사이 그림이 있다고는 하지만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시간의 한계와 공간의 거리를 좁히고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글이 주는 힘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36장 ‘북극 대초원과 최북단 지역’은 가장 인상적인 글로써, 언어가 시공간을 이처럼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는 박물학자로서 시턴은 그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기록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 같다. 시턴은 눈과 귀를 비롯해 온몸으로 자연을 읽고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하지 않고서야 똥무더기를 헤집고 쥐똥 알갱이의 모양이나 색깔을 보고 그 똥이 겨울형인지 어찌 알아낸다는 말인가.

미국의 버펄로가 대량학살된 것을 두고 미국의 대초원을 욕보였다고 말하는 그의 시선이 그가 박물학자로서 훌륭한 학자였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한 세기의 시간이 흐른 지금 시턴이 걸어서 탐험했던 그곳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그의 걱정대로 많은 동식물이 사라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중 몇 몇은 멸종의 위기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불과 100여 년 전에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같은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 불현듯 낯설게 다가온다. 물론 지금도 그런 곳이 있겠지만 시턴을 따라 북극을 탐험하는 동안 그것이 너무나 빨리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주 오래된 북극>의 기록은 시턴이 여행에서 돌아오고 4년 후의 기록이다. 그리고 시턴은 그 몇 년전의 시간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독자는 그야말로 아주 오래된 북극의 기록을 읽으며 시턴과 같은 마음이 된다. 원시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감동과 그리움,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시턴과 내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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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04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학교에서 읽으려고 가져갔다가 첫 페이지 펼쳐보고는 바로 닫은 후에 책상 서랍에 몇 주동안 묵혀두고 있어요. 제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은 제가 서울대에 입학을 한 다음 날일 겁니다... 너무 어려워 보였어요. 지레 겁먹고 물러서버린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냥 다시 꺼내서 도전해볼걸...

수수꽃다리 2012-04-0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내 얼굴을 못보고 말아서 서운한 것(^^)처럼 말이지요?!
뭐 어때요, 이 책이 소이진씨에게 가지 않은 것이지요. 어휴, 읽다가 만 책이라면 저는 할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늘 관심을 가져주어서 그동안 참 많이 고마웠어요. 저는 11기는 신청하지 않으려고 해요. 내 속도로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고통이었답니다^^ 그래도 소이진씨 글이 올라오면 반가울거예요. 명랑하게,신나게, 건강하게!
 
스프링벅 창비청소년문학 12
배유안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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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

스프링벅은 남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영양의 일종이다. 초식동물인데 이들은 무리가 거대해지면 이상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마리씩 모여들어 거대한 무리가 형성되면 갑자기 한 마리가 껑충 뛰어오른다. 그러면 옆에 있던 동료가 같이 뛰고 어느새 이 무리 전체가 다같이 껑충껑충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선두를 따라 계속 달리는데 이들은 이미 풀에는 관심이 없다. 풀을 뜯는게 그들의 목적임을 잊은 채 이들은 계속 뛰어오르며 달려간 사이 절벽에 다다른다. 위험을 알고 선두가 멈추지만 뒤이어 달려오는 동료들에 밀려 떨어지고 그러기를 되풀이하면서 스프링벅은 속절없이 절망의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

소설 <스프링벅>은 삶의 원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 없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습관 혹은 습성이 목적이 되었을 때 생기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스프링벅의 절망을 거부하려는 아이들의 간절한 외침의 기록이다.

청소년들에게 성적, 좋은 대학은 그들이 선택한 목표가 아닌데도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그 목표를 향해 현재의 삶을 누리고 생각하지 못한 채 앞으로만 달려갈 뿐이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스프링벅의 슬픈 운명이 사람살이에서도 똑 같이 일어나고 있다.

 

 

2.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야기는 고등학생 동준이의 형 성준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동준과 형 성준은 여러면에서 서로 다르다. 모범생(몹시 잘난 형) 형 성준과 평범한(잘난 형 동생) 동준이지만 정작 형 성준은 동생 동준에게 “네가 부럽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도 둘 사이는 차별과 질투 그런 말이 끼어들 틈이 없이 좋다. 잘난 체 하지 않고 아주 착한 형과 자유롭고 긍정적인 동생이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동준이는 그런 형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그 형이 죽었다. 이해되지 않는 죽음이어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데 형의 죽음에 다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이제 동준과 엄마의 갈등이 시작된다.

형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대리시험으로 합격한 대학에 대한 죄책감이었고 절망의 언덕으로 내몬 사람이 엄마임을 안 동준은 혼란과 원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대학에 대한 집착이 대리 시험이라는 부정을 선택하고 그 길은 절망으로 향해 있는 길이라는 것을 형 성준이 죽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대학이 지나온 학창시절의 결과물이고, 미래의 성공 열쇠가 된 우리의 현실이 빚어낸 비극이다. 그 참담한 현실의 피해자인 성준은 부모에게 반항 한 번 해보지 않은 착한 아들이다. 동생에게 잘난척 한 번 하지 않은 맘 좋은 형이다. 나쁜 현실의 피해자가 착한 사람이라는 상황이 이야기 흐름에 더 빠져들게 하고 감정이입하게 한다. 우리 모두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 대부분은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현실이고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그 길로 들어서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다. 또한 그 나쁜 일의 결과로 우리가 결코 행복해 지거나 그 일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뻔뻔하게 살아남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성준이 더 안쓰럽다. 자식을 위한 일이 자식을 죽게 한 것에 대해 엄마가 겪어야하는 고통 또한 나쁜 일에 대한 대가로 충분할 만큼 가혹하다.

성적과 대학에 대한 집착으로 아들을 공부로 내몰고 결국 그 아들의 손에 죽음을 맞은 한 어머니의 비극적 결말이 겹쳐진다. 성준의 엄마가 평생 안고 살아야하는 고통과 엄마를 살해한 아들의 고통이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이만큼 현실의 모습을 담아낸다.

 

 

3. 연극 <스프링벅>과 현실의 ‘스프링벅’

동준은 연극을 한다. 연극을 잘해서라기 보다는 좋아서 하는 경우다. 우연히 주인공 역을 맡은 창제가 가출을 하고 그 역을 맡으면서 연극에 몰입한다.

공동 창작극인 <스프링벅>은 비보이를 꿈꾸는 주인공 ‘미키’ 이야기다. 연극에는 다양한 현실의 모습이 겹쳐진다. 1등을 하지 않으면 팀을 해체하겠다고 협박하는 교장은 성적과 1등 지상주의 학교의 모습이다. 하버드에 입학하는 것이 최고 목표인 미키의 아버지는 당연히 미키의 희망을 무시한다. 연극 속 미키와 동료들은 교장과 아버지에게 맞서면서 꿋꿋하게 자신의 희망을 찾아 대결한다. 연극 속 인물들은 현실의 인물과 닮았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꿈과 희망을 말한다.

연극 <스프링벅>의 주인공 미키는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대입된다. 특히 성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미키와 성준이 여러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결과도 다르다.

연극 속 ‘미키’는 현실의 성준이 엄마 같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자기를 이야기한다. 때로는 아버지의 관심과 간섭을 당당히 거부한다. 아버지가 가꾸는 정원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실의 성준이는 엄마에게 정원수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과 대비된다.

이유도 모르고 오로지 하버드가 목표가 되는 현실을 거부하고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미키는 풀을 찾는다.

동준이는 형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엄마에 대한 미움으로 괴로운데 연극은 형의 죽음과 엄마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연극 <스프링벅>은 동준의 현실을 담아내는 상황극 역할을 한다. 상황극은 극도의 정신적 혼란을 겪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상황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입장을 바꾸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하고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람이 되어 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체험하고 느낀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잠시 멈춤의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4.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

청소년과 성인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갈등의 원인도 다양하고 입장도 분명하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어른은 애들을 괴롭히는 존재다. 어른의 눈에 보이는 청소년은 잘못된 길로 가는 어리석은 스프링벅이다.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의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그 가짓수는 몇 개나 될지 궁금하다. <스프링벅>에 등장하는 애들 괴롭히는 어른 하나는 자신의 권위에 반발하는 학생의 뺨을 때려 자존심을 세우는 지학 선생이다. 애들이 보기에 지학 선생은 수업은 하지 않고 끊임없이 헛소리만 하는 선생이다. 그걸 꼬집는 똑똑한 학생 현우에게 어른이 한 짓은 뺨이 부풀어 오르도록 때리는 것이다.

아내의 자질과 능력을 무시하는 예슬이의 아빠도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이다. 밤늦도록 아들을 감시하는 창제의 엄마, 아들이 하는 일은 죄다 대학가는 일에 도움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애들 괴롭히는 어른’이다. 사는 일에 바빠 아들에게 관심을 쏟지 못하는 민구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가장 극단적인 인물이 대리 시험을 쳐서 아들을 대학 보낸 동준의 엄마가 아닐까. 그 바탕에 사랑이 없는 부모가 없는데 아이들은 그 사랑을 괴롭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괴롭힘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 사이에 무엇이 빠진 것일까?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등장하는 손장하 선생과 정미은 선생의 모습이 <스프링벅>에서 찾은 해답이 될 것이다. 손장하 선생의 말대로 현실에는 더 많은 성숙한 어른을 찾을 수 있다.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들의 상처를 달래고 보듬는 어른도 있다. 길은 항상 두 갈래 길이고 어느 길을 선택할 지는 그 길 앞에 선 우리의 몫이다. 다만 그 길이 과연 그 길이 맞는 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것이다. 둘 다 못 가본 길이니 말이다. 아마 많은 아이들이 이 순간 앞에서 혼란스러워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애초에 길이 딱 두 개 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매 순간 길은 갈래가 나있고 우리는 늘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잘못 선택한 길 앞에서도 또다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갖는다면 단 한번, 단 하나의 답답함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단 하나, 단 한 번의 몰아침이 가져온 결과가 성준의 죽음이다. 성준의 엄마가 또 하나의 길로 재수를 선택할 용기가 있었다면 성준은 그의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최고인 단 하나의 대학에 대한 집착도 벗어냈더라면 말이다.

성준의 죽음과 성준 엄마의 잘못된 선택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아닐까. 손장하 선생과 정미은 선생 같은 완충 작용 혹은 가교 역할을 하는 어른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이유도 모른 채 절망의 벼랑을 향해 뛰기만 하는 스프링 벅의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연극 <스프링벅>이 동준에게 대리경험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준 것 처럼 독자는 소설 <스프링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소설은 현실에서 빗겨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담으려고 노력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5. <스프링벅> 심화학습

연극반 아이들은 연극을 하면서 연극을 재해석하고 인물을 재구성하면서 연극과 현실의 간격을 좁혀간다. 미키 아버지 역을 했던 민구가 연극 속 미키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현실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동준 또한 주인공 미키 역을 하면서 형의 슬픔을 이해한다. 미키 아버지를 통해 엄마의 고통을 생각한다.

연극에 참여하는 인물들의 자기 고백은 연극을 통해 들여다 본 자기 마음의 고백이 아닐까?

물론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것이겠지만 당연하게도 연극은 아이들을 치료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 결과는 연극 공연을 통해 이뤄낸 관객과 배우의 공감으로 나타난다.

소설 <스프링벅>이 성준의 죽음으로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무겁지 않은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건강한 아이들 때문이다.

동준이는 형 그늘에 가려 제 높이를 모르는 것 같지만 긍정적 힘으로 자기를 잘 키워가고 있다. 질투하고 부정하기 보다 형을 자랑스러워하고 형과 같아지려고 하는 대신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연극을 통해 모두가 뛰는 순간, 나의 풀을 뜯는 것의 기쁨을 알아간다. 여자 친구 예슬이와 만들어 가는 이해와 공감의 관계도 제법 보기 좋다.

자신 또한 부모 이혼과 재혼으로 아픔을 겪었지만 소설가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예슬이는 친구의 고통을 나눠가질 만큼 성숙하다.

엄마의 간섭을 참을 수 없어 가출한 창제는 비리 청소년의 전형을 보기 좋게 거부한다. 창제가 가출해서 찾아간 곳이 치매 노인들을 보호하는 곳이라는 것은 ‘애가 어떻게’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래, 가출한다고 다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이 아닐지 몰라’라고 생각하는 기회가 된다. 다만 그 ‘생각할 시간’을 본인과 부모가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공부하기도 바쁜데 무슨 생각할 시간이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창제는 생각할 시간을 가졌고 충분히 생각한 결과를 얻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돌아온 창제가 단단해졌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엄마와 진짜 화해를 할 수 있는 힘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고무신 바꿔신지 않고 기다려준 창제의 여자 친구 수정이도 멋진 드러머로 성장할 것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함께 연극을 하는 연극 부원 모두가 건강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다. 아, 우리도 이런 연극부 만들고 싶은 생각에 가슴 설렐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한 까닭은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연극부원은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 주인공이 없이,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말은 그래서 당연하다. 이 말에 이 소설의 핵심이 담겨 있다. 한 편의 연극(하나의 사회)이 완성되는 것은 연극을 구성하는 모든 부원들이 자기 몫을 다 할 때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과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 호흡이 맞아야 연극은 비로소 완성된다. 각자 자기가 뜯어야 할 풀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관객의 반응이다.

관객이 외면하면 연극은 완성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연극을 준비하고 마음을 모아 연극에 몰입하는 관객이 있어야 완성된다. 각자의 역할에 몰입하고 각자의 역할을 이해하고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마음을 열고 몰입할 때 감동적인 연극이 완성된다.

소설은 동준과 엄마가 극적으로 화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분명한 결말(극적화해와 해피엔딩)을 원하는 독자는 불만이겠다. 하지만 이 또한 엄마의 선택 동준이의 선택이 필요한 갈래길이다. 아프지 않고 형을 기억할 수 있기 위해 이제 두 사람의 선택이 남아있다. 물론 동준의 아버지도 이 길에 함께 있다. 희망을 대신해 소설에 담겨 있는 시로 대신하면 어떨까?

예슬이가 동준이를 위해 쓴 시, 사실은 김오민 시인의 시 <저녁바다>에 실린 한 구절이다.

“그대는 지금 젖어 있을 뿐이다. <중략> 지금 잠겨 있는 것은 절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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