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을 보내주세요
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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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을까

 

내 손으로 골라 읽기를 원했지만 과연 이것을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사진으로 봤을 때는 무척 두꺼울 것 같더니 받아보니 의외로 얇다. 몸피도 작고.

후루룩 책장을 넘겨본 첫 인상은 예상 밖이었다. 긴 글일 거라 생각했는데 비연속적이고 짧은 글이다. 상대를 잘 모르는 사람한테 짧게 끊어 하는 말은 깊이 쫓아가기가 버겁다.

방법은 있는 힘껏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발이라도 더 거리를 좁히는 것.

 

틈이 보였다

 

표지 안쪽에 저자의 사진을 본다. 오른쪽 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웃고 있다. 손바닥으로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듯, 그 연속적인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목의 주름이 낯설지 않다. 늙음은 어디나 똑같다.

신과 대립하는 것이 신의 부재가 아니라 악마이며, 우정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에 대립되어 있다. 스푼이 포크 덕택에 모성적 부드러움을 보여준다는 저자의 말을 읽으며 비로소 나는 마음이 조금 열렸다. 겨우 그를 따라 상상력을 펼쳐볼 틈을 보았다.

 

거울을 보는 시간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나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여지없이 그곳에 있다. 입꼬리가 쳐져 있어서 더 무표정해 보인다. 내 얼굴과 대립되는 것을 찾아보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재미있지도 않고, 진지해 지지도 않았다. 기어이 생각해 낸 것이 고작 나와 사막, 나와 독서 정도. 이것도 나에 대한 개념 정리가 우선 되어야 한다.

 

저자의 거울은 116개의 개념들을 보여준다. 각각이 개념들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하고 짝을 이룬다. 남자의 거울에는 여자가 비치고, 황소의 거울에는 말이 비친다. 좀 더 본다. 문화의 거울에는 문명이, 순수의 거울에는 순결이, 태양의 거울에는 어둠일거라는 생각을 뒤집고 달이 비친다.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들로 나간 끝에서 보는 거울에는 존재의 얼굴에 무가 비친다.

 

서로 대립되는가 싶은 것들의 닮음과 다름을 저자의 안내를 따라 자각하면서 우리의 상상력은 힘을 얻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 눈과 정신이 ‘블링블링’해 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독자의 소화 능력에 따라 눈부심의 정도가 확연해 진다.

개념을 정리하는 개론서의 성격을 갖겠노라고 했으니 각 개념들의 정의는 분명하되 지극히 문학적이어서 읽기 즐겁다. 스푼과 포크, 지하실과 다락방 같은 글들은 정말 맛있는 글이다.

 

“나무는 수직적이고, 길은 수평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무는 한군데에 붙박여 있는 안정성의 상징이다. 반면 길은 순환의 도구이다.(나무와 길)” 나무의 수직성에서 안정성의 상징을 얻어내거나 수평적 길에서 순환의 의미를 찾아내는 그의 상상력은 나같이 단순한 사람의 뇌를 즐겁게 자극시킨다. 나무와 길로 대립되는 두 개념은 균형을 이루기도 하지만 균형을 잃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도시의 두 가지 기능이 균형을 잃어가는 것이다. 거주의 기능이 순환의 기능에 의해 희생당하고 무시당한다.”

 

희생당하는 것들은 나무들이나, 분수대, 시장, 강둑 같은 것들이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틈이 벌어져 풀이 나 있는 것을 바라보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물론 자동차 바퀴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와 같은 통찰과 유머와 상상력은 이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건 정말 문득 든 사족인데, 거주의 기능을 회복한다며, 시멘트와 전력으로 되돌려 놓은 서울의 청계천을 본다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더러, 특히 광대나 신화적 존재들을 이야기 할 때는 잘 몰라서 머쓱하고 낯설다. 어쩔 수 없는 문화의 차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더라도 깨알 같은 재미가 많은 책이다.

 

그가 단순히 철학적 사유로서 개념을 정리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문제로 상상력을 확대 시켜서 나는 더 좋다. <나무와 길>도 그렇고 <문화와 문명> 같은 글은 두고 두고 생각해 볼만한 개념의 대립이다. 보편적인 것으로 열려 있지 못한 이기적인 문명이 문화를 살해했다는 그의 말이 유난히 자극적이다.

그와 나의 물리적 거리에 대립하여 생각의 거리가 자주 좁혀지는 것을 느껴보는 것도 짜릿한 경험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여행에서 돌아왔다

 

여행은 무엇과 대립할까? 잠? 이 여행을 시작할 즈음 거울에 비춰본 나는 무엇과 대립할까? 이런 질문들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의미까지 있어 보인다.

대립하는 것을 찾는 과정은 한쪽의 개념을 일단 정리해야 가능하다.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 대립한, 혹은 이웃한 개념을 더 많이 알게 된다. 다름을 통해 개별적인 것들의 의미를 알게 되거나 닮음을 통해 편협한 사고를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 사유의 폭이 넓어지고 거기에 상상력이 더해지면 한결 즐거운 여행이 된다.

이 책은 <시간의 거울>로 오래전에 소개되었다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으로 다시 출간되었다고 한다. 훨씬 철학적이었던 제목에서 다분히 문학적인 제목으로 ‘문패’가 바뀐 것 같다.

여행 가방을 정리하면서 여행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지금 내게 무엇이 남아있는지 상관없이 여행하는 내내 나는 즐거웠다. 아, 물론 즐거움과 대립하여 어려움 앞에서 발을 떼기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말이다. 책과 여행은 어떻게 닮아있거나 다른 지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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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 - 이찬수 선생님의 종교 이야기 너머학교 열린교실 6
이찬수 지음, 노석미 그림 / 너머학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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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는다는 것에는, 지금은 완전하게 알 수 없는 부분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긍정적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이나 가치가 긍정적으로 전개되리라 예측하면서 그 예측에 몸과 마음을 용감하게 맡기는 자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4)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너머 학교에서 발간된 책에 실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특히 너머학교 열린교실 시리즈를 빼놓지 않고 읽은 독자로서 이 책에 대한 믿음은 읽지 않았을 때는 98%의 믿음이었고, 읽으면서 의심했던 2%가 채워졌다.

 

 

나는 이 책이 믿음을 주제로 하지만 종교에 대한 것만이 아닐 것으로 기대했다. 위키 백과는 ‘믿음’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로 정의했다.

 

이 책은 종교 뿐만이 아니라 사람, 가치관, 사실에 대한 믿음의 얘기를 하고 있다. 만약 종교‘만’ 얘기했더라면 내 예측은 빗나갔고 2%가 채워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만 믿어지니까 믿었을 뿐인데,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아서 나는 고맙고 즐겁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눈여겨 살펴보고 내적 사유를 많이 한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의 주체는 ‘너’(나의 경우 나의 아들!)다. 나는 너(아들)를 믿고 있는가.

내가 ‘너’를 믿는 것은 네가 나에게 왔기 때문이다. 대상(너)이 없으면 나는 믿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나를 믿는다고 할 때 조차 나는 대상이 된다. 그러니 내 믿음의 원천이 되는 대상, 너(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내가 너를 믿고 싶을 때, 내게 필요한 것은 “지난 경험들에 담긴 의미 혹은 의미 있는 관계를 구체화하려는 의지와 지난 경험에 비추어 2%의 불확실성을 용기있게 받아들이는 결단이“었다. 그리고 ”경험, 의지, 용기는 믿음의 주요 구성요소“다.

 

 

최근에 와서야 나는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아주 조금 짐작하기 시작했다. 의무와 책임을 전혀 이행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조바심으로 야단을 치면서 어느 순간, 내가 아이를 믿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동안 내 입은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했을 터. 나는 내 아이와 살아온 지난 경험을 구체화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 아이가 커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아이의 삶을 바탕으로 그 아이의 앞 날도 긍정적것이라고 믿을 용기와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다.

 

온전히 믿기까지 아직은 부족은 2%를 그 용기가 채워 줍니다. 그 순간 믿음의 내용이 단순히 내 밖의 어떤 대상으로 남지 않고 나 자신의 것이 됩니다.“(50)

 

믿음의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나같은 사람이 많을 것을 알고, 용감하게 결단하라고 충고한다. 가려고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는 말은 옳다. 수학 시험을 50점을 맞아놓고도 자기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기를 믿으라고 너스레를 떠는 아이를 믿겠노라 결단을 못내린다면 나와 그 아이는 싸움 밖에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한들, 아직도 내 마음은 갈등 상태다. 한겨울에도 온종일 운동장에 나가 사는 아이를 감사히 받아들일 것이냐, 끌어다 책상 앞에 앉혀 놓고 그 날 그 날 해야할 수학 문제집을 들이밀 것이냐.

 

그런데 내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려면 즉 내 아이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려면 나는 내 아이를 그 아이 생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과정이 쉽지 않기에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고. 이 과정은 수도승이 그러하듯 나 또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깨닫고자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과정은 신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신을 믿는다는 말은 그 신이 내 안에 들어와 있어서 나의 모든 것이 그와의 관계 속에서, 그와 어울리게 움직이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신이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그렇게 살게 하고, 인류를 나아가 온 생명을 그렇게 살게 하는 분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65)

 

저자의 말에 의하면 근대 이전 서양 세계에서 신을 믿는 것은 자신과 이웃과 사회, 나아가 우주 전반에 어울리는 ‘삶’으로서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 헌신, 경외 등 전인격적인 자세이자 행위였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 믿음은 대체로 종교를 떠올리며 결단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행위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믿는다는 것을 자연법칙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초자연적인 어떤 너머의 존재에 의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자연법칙 안에서 살 때 너도 소중하고 나도 소중하며 만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멋진 믿음의 세계라는 말이 나는 마음에 든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열린 교실 기획이지만 먼저 나온 책들도 그렇고 이 책 또한 일반 독자들도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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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2012-03-2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의 내용을 아드님과의 관계에 적용해 해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 글이 '수수꽃다리'님의 삶을 통해 몸을 입는 느낌이 듭니다. 글은 역시 삶을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더 들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수꽃다리 2012-03-2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찬수 선생님!
어쩌면 이 글을 읽지 못하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반갑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글을 드립니다.(마음은 더 크게 소리지르고 있답니다, 하악,하악 이럴수가. 책의 저자께서 이렇게 글을 남겨주시다니. 제게도 이런 일이^^)
그때 함께 구입한 선생님의 다른 책들은 곧 읽게 되겠지요? 어느 한때에, 제가 선생님의 글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좋은 글(말씀)을 책으로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봄비가 제법 내립니다. 오늘만큼은 어디에 계신지 모르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보낼 것 같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이찬수 2023-12-20 15: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기쁜 마음으로 진작에 읽었는데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좋게 읽어주신 다른 글도 있으시다니 글쓴이로서는 기운이 나면서도 어깨도 무거워집니다. 아드님이 벌써 성인이겠습니다. 더 잘 지내고 계시겠지요. 수수꽃다리님의 삶을 응원하며 댓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김탁환의 쉐이크 - 영혼을 흔드는 스토리텔링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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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샀지?

사놓고도 내가 왜 샀는지 모르는 책을 만났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마흔 넘어가면서 냉장고 문을 열고는 왜 열었지 하는 꼴이다. 생활에서야 그렇다 해도 책까지 이럴 줄이야.

 

굳이굳이 이유를 대자면 ‘스토리텔링’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내 지식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서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는 것 정도. 지긋지긋하게도 책 읽기 싫어하는 모 학생 녀석들한테 절망하고 좌절하다가 읽는 대신 말로 들려주면 좀 들을까 싶어서 이 책 저 책 찍었다 놨다 하던 중이었을 거고.

 

아는 분은 정말 이야기를 잘 한다. 듣다보면 책 한권을 읽고 난 느낌이 들 만큼 거의 탁월하다. 그 양반이 하는 것이 스토리텔링, 이야기 들려주기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어쩌면 내가 이 책을 골라든 것이 좌절의 끝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을 거다.

 

그런데, 이 책은 이야기 들려주기가 아니라 이야기 만들기에 관한 책이다. 김탁환은 소설 대신 이야기라고 했으니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소설이다. 소설 창작에 대한 김탁환의 지상 강의다. 김탁환만의 이야기 만들기 사계절 코스가 준비되어 있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게는 필요 없는 책 아닌가?

처음에는 그래, 한 번 생각 해봐하는 심정이었으나 제2코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접었다.

그래도 도전하고 싶은 독자라면 100권의 책과 10권의 공책을 준비하여 바다를 출발하여 사막에도 가고, 설산에도 오르고 수없이 맞아도 끄덕 없을 자신이 있다면 그가 마련한 코스를 밟아도 된다. 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 산 책인데, 나는 그 어느때 보다 열중하여 읽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나처럼 눈 밝은 독자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이 무척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 만드는 사람의 얘기를 들었으니 만든 사람처럼 읽으면 되는 일. 좀 더 밀착해서 그 작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이야기 하기도 좀 쉬워질래나?

어쨌든 이야기를 만드는 김탁환의 자세를 듣는 동안, 내 비록 이야기를 만들 능력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지만 그 또한 썩 괜찮은 경험이었다. 깨끗하게 마음 비우는 일!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 누군가를 흔들(shake) 힘은 없으나 잘 만들어진 쉐이크를 발견하여 기분 좋게 흔들릴 준비를 한 셈이니 이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내게 처음 다가올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이야기가 끝나자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어서 오라, 새로운 여행이 될 이야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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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의 세 친구 창비청소년문고 3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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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것은 그 실패가 잉태하고 있는 희망의 씨앗 때문일 것이다.

<갑신년의 세 친구>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갑신정변 주요 인물 셋을 다루기는 하지만 갑신정변 자체에 주목하지 않는다. 정변을 일으키고 삼일 만에 막을 내린 젊은 개혁가들의 좌절을 절정에 두되 당대 시대 상황을 면밀하게 그려냄으로서 짤막한 역사적 사건에 살과 근육을 입혔다. 그래서 독자는 빈약한 역사적 사실의 행간에서 살아있는 실체로서의 역사적 당대 현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새삼 안소영의 작가적 능력에 감탄하였다.

 

김탁환은 <김탁환의 쉐이크>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자세로 100권의 책을 준비하라 했다. 이야기 하나를 ‘머뭇거리며’ 준비하는 동안 100권의 책을 준비하여 도움을 받는다고 하였다.

단 몇 줄 기록으로 남은 역사를 재현하고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인데, 안소영이 <갑신년의 세 친구>를 역사적 공간에 재현시키기 위해 참고한 도서 목록은 책 뒤에서 확인할 수있다. 나는 이 아직까지 이야기책 하나를 내기 위해 이토록 많은 자료를 읽고 공부하였다는 기록을 보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를 보면 이 작품의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가치 있고 재미가 있는 까닭은 표정과 목소리와 몸짓으로 살아나는 시간 저편의 인물들이다. 이름 석자로 남은 김옥균은 마치 지금 내 옆에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그릴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수고 덕택이다. 그녀가 참고하고 만들어낸 김옥균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졌으며 호리호리하게 큰 키에 갸름한 얼굴이다. 얼굴빛은 백송 줄기만큼이나 희었고, 가늘고 긴 눈매는 젊은이다운 자신감과 단호함이 어려있다. 책 끄트머리에 실려있는 김옥균은 사실 별 표정이 없다. 하지만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김옥균은 이토록 생생한 젊은이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의 모습을 풍전등화라 하였다. 이 책은 풍전등화의 조선을 글로써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을 암기로 받아들이는 청소년 독자들에게 이 책이 필요한 것은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신년의 그 청년들이 세상을 개혁하지 못했다 하나, 거슬러 박지원의 사랑에 몰려들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던 이덕무, 박제가 그들 또한 실패한 인물들이었다.

완전한 실패란 없기 때문에 실패한 역사 속에서 또 누군가는 희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사랑에서 갑신년의 세 친구들의 운명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안소영의 전작 <책만보는 바보>와 함께 읽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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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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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는 경계의 글이다. 타이르고 주의를 주는 글이라 우화는 두려운 글이다. 그 결과를 비극으로 맺기 때문에 독자는 그 서슬에 놀라 몸과 마음을 단속한다.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화가 현재성을 갖는다는 것이 신기하고 섬뜩했다. 현실의 정곡을 파고드는 작가의 가슴이 그의 손끝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하나같이 새겨 볼 가치가 있는 글들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은 어리석고 나약하고 비굴한 삶을 사는 2011년 지금 여기 대한민국 국민에게 보내는 도끼질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처럼 누구한테도 싫다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늘 끌려다니기만 하던 나 아닌가. 입만 열면 자기 자랑에, 앞 뒷말이 다르고 제대로 속물의 모습을 보여준 이웃 언니한테 ‘난, 당신을 만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하지 못해(사실 쉽게 이런 말 못하지) 찌질하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나다.

싫다는 말을 처음 해 본 사람이 남편이 된 남자다. 그것도 남편이 되고 나서야 감히 ‘싫다’는 말을 했다. 그게 뭐든지 오케이, 그게 내 장점이고, 사람 좋다는 말은 관계 유지를 위해 내가 확보해야 했던 태도였다. 참고 용서하며 살라는 천사의 말에 속아 죽음 직전에야 그걸 깨달은 노인의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개인의 문제보다 더 경계해야 하는 것이 집단의 문제다. 당연히 개인은 집단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자주 그 집단의 논리 속에 개인을 희생당한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늘 희생양을 요구한다. <가위바위보>에서처럼 집단은 개인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바위를 못내는 나약한 개인을 철저히 희생양으로 삼고 그 덕으로 집단은 유지된다. 집단이 공공성을 잃고 전체 권력이 되었을 때 손을 다친 개인은 즉 집단에 끼일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개인은 무력하게 희생된다. 더 우화적인 상황은 1%의 집단을 위해 99%의 개인이 희생당하는 시절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99%의 개인이 그들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결국 공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염소와 늑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검은 염소, 흰 염소 구분 없이 모두 함께 힘을 모았을 땐 늑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을 가르고 한 쪽만 공격했을 때 상황은 검은 염소들이 흰 염소를 돕지 않게 된다. 내가 지금 늑대의 공격을 받는 흰 염소와 동류(동무)라는 걸 잊은 채 늑대에게 희생당하는 흰 염소를 남의 일로 여기는 것. 심지어 흰 염소가 숨어있는 곳을 일러바치기까지 한다. 검은 염소들이 생각하기에 흰 염소가 잡아먹히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늑대는 결코 자애롭지 않다. 오로지 목적은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이다. 흰 염소가 모두 잡아먹히고 힘의 절반이 빠진 검은 염소들도 흰 염소와 같은 운명이다. 검은 염소가 그 이유를 자기들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섬뜩한 경고다.

 

“이제 검은 염소들은 한 마리가 잡아먹힌다면 그놈이 왜 잡아 먹혔는지 알아내느라 대항할 생각도 못할 거야. 뿔이 굽어서 먹혔는지, 다리가 짧아서 먹혔는지, 암놈이라서, 아니면 수놈이라서 먹혔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겠지. 스스로 먹힐만한 이유가 있어서 잡아먹히는 거라고 여기는 놈들을 사냥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끔찍한 상황이다. 실체가 분명한 늑대를 못보고 제 동료가 먹히는 게 이유가 있어서라니, 이렇게 우매한 족속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가난하고, 지방대를 나오고, 외국어를 못하고, 취업을 못하는 그들을 루저라고 조롱하고 비웃지 않았던가. 너만 잘해봐라, 그게 다 노력 부족이라고 개인의 문제로 지적질만 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간교한 늑대였던 것이다. 그 늑대를 바로보고 함께 물리쳐버리리지 못하는 한, 흰쥐, 검은쥐 또한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그림과 글이 적절히 섞여있고 그림의 선이 좋아 책장이 잘 넘어가지만 읽는 내내 우울하였다. 열을 받아 확확 달아오르던 마음이 한 모금의 물로 달래지느니, 차기 추장을 노리는 두 아들에게 물을 길어오라 한 아비가 서로 제가 잘했다고 싸우는 두 아들에게 혀를 차며 이른다.

 

“ 첫째의 맑은 물은 병들거나 너무 많이 쇠약해진 사람들에게 먼저 먹이고, 둘째의 탁한 물은 아직 건강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단다. 한 그릇에 모았다면 모두가 탁한 물을 먹어야 했을 거야.”

 

우화가 전하는 경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혜다. 이 시대의 말로 하면 ‘깨어있는 시민’이 아닐까. 이것과 저것 중에 단 하나만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것의 쓰임이 있고, 저것은 저것의 쓰임이 있는 것이라는 지혜의 말씀은 위안이 된다.

작가의 바람처럼 그의 이야기가 열 번의 도끼질이 되어 너와 내가 ‘이드거니’ 어우러져 서로에게 스며들어 소외받는 개인이 없이 ‘대동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그러자면 우선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가 두루 읽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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