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소녀 혹은 키스 사계절 1318 문고 109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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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소녀 혹은 키스8편의 단편을 아우르는 제목으로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멋있다. 멋있다는 우리말보다 스타일리시하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이 작품집에는 온통 상실감과 외로움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끝내 누군가의 손을 잡거나, 함께 울거나, 드디어 고백하거나, 잘 이별해서 안심한다.

읽으면서 할 말이 생기거나 읽고 나서 남은 말이 없도록 독서 행위의 여러 가지 양상은 작품 안에서 해결된다. 읽고 있는 그 순간 자체가 독서 행위의 모든 것이 되는 신기한 체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 상황에 따라 다른 감정들을 표현한 언어들에 꼼짝없이 끌려들어간다.

흠뻑 빠졌으나 도취되지 않을 방법도 가뿐하다. 가볍게 책장을 닫으면 된다. 감정이 책 밖으로 흘러나와 독자를 사로잡지 않는다는 것도 신기한 체험이다. 작품 안에서 알뜰하게 갈무리해서 샐 틈없이 마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는 흐르는 바람에 찰랑찰랑 머릿결을 맡긴 채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걷기만 하면 방금 전 읽은 책에서 떠나올 수 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다시 책을 열면 고스란히 되살아날 외로움, 상실감, 울음 같은 한없이 촉촉한 생의 감정들이 다시 독자를 괴롭힐테니까.

최상희에게 놀라는 것은 흔한 이야기를 특별한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남은 사람들의 상실감은 낯익지만 상실감이 깊어 생기는 강박적 불안이 방주를 만들게 하는 과정을 따라간다거나(방주) 사고로 정지된 한 남자의 시간과 최선을 다해 발레를 했으나 그만 두어야했던 소녀의 시간을 무언가를 안 한 십 년과 무언가를 한 십년을 나란히 놓고 이제 함께 시작하는 시간 앞에 둔다거나(잘 자요, 너구리) 다른 작품들이 말하는 사랑 이야기의 또 다른 변주들이 그렇다.

그것은 사랑 혹은 사건이 놓인 상황에 맞는 어조와 선택된 언어들로 표현되고 특히 뜻밖의 선택으로 독자를 긴장시킨다. 대체로 그들의 선택은 어둠이 걷힌 뒤 나타날 길을 가늠케한다.

말했다시피 여기 실린 작품들은 상실감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위로, 회복의 가능성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을 모으며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느끼는 것이고 우리는 안심하는 것이다. 작품이 불안하게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책을 덮는 것이고 작품 안에서 위로 받았기 때문에 찜찜하지 않을 수 있었다.

상실의 문, 외로움의 문을 열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은 흔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늘 강력한 힘으로 독자를 설득시킨다. 최상희는 그 사랑의 형식을 눈물, 고백, 첫 인사 등으로 달리 표현한다.

좋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그림을 보고 특별한 인상을 받는 것처럼 이번 작품들은 읽는다기보다는 느낀다는 감각에 더 가깝다.

사계절 1318문고 시리즈를 잇게 되었으나 자기감정 읽기나 표현하기가 어렵고 서툰 사람들에게도 품을 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제의식이나 강한 시대정신의 맥이 약하지 않은가 할 수도 있겠으나 한없이 출렁이는 감정에 다소 어지러울 뿐, 우리 시대가 예상치 못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그로 인해 파괴되는 개인의 미래에 대해 작가가 위로를 보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집이 자리한 곳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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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 아니고 똥푸 - 제17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초승달문고 41
차영아 지음, 한지선 그림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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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똥을 싸고, 반려견과 이별하고, 생존을 위해 모험을 하는 일을 하찮지 않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 문학이겠다.

작품 속 생활을 좀 더 엿보자면 쿵푸~는 결혼 이주민 엄마를 둔 아이가 문제적이고, , 미지의 택배는 새로운 가족 형태인 반려동물의 죽음에 따른 어린 아이의 상실감, 라면 한줄은 인간의 타자-약자로서 동물의 삶과 그들의 연대를 다룬다. 이것을 문학화하기 위해 이 작품들은 판타지, , 의인화 장치를 선택했다.

똥푸맨의 판타지는 불가능의 가능을 경험케 하고 꿈은 치유의 방법으로 선택되며 생쥐와 고양이의 의인화는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

여기까지의 낯익은 음계를 한 두 음 올리는 것이 이 작품집만의 개성이다.

그것은 문자를 읽지 않고 말을 듣는 것 같은 발랄한 대사와 청각적 언어, 상상과 이해의 범주 안에서 널뛰기하는 귀여운 과장과 허풍, 허를 찌르는 반전 묘사가 주효하게 작용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철학적 깊이 혹은 작가의 세계관을 가늠케하는 문장들이다. 그들로 인해 얇디얇은 단편이 겹으로 깊어지고 풍요로워진다.

 해피엔딩이 어설프지 않고 치유의 가능성이 독자에게 전해지고 연대가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이 문장이 머금은 힘들 때문일 것이다. 그 어렵다는 재미와 감동이 모처럼 한 작품에 녹아 있다.

잡소리나 사설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이런 낯선 문장을 눈여겨보게 하는 것, 이것으로 생활동화의 밋밋함을 잊게 하는 것이 이 작품집만의 개성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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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 창비아동문고 287
진형민 지음, 주성희 그림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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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공부방은 자본으로부터 배제된 아이들을 위한 게토느낌이 드는 공간이다. 기표로서 공부방 아이들은 학원에 진입하지 못한 아이들, 돌봐 줄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 이주노동자 자녀들로 등치 되는 인상이다.

공부방이라는 장소와 그 장소의 주체로서 초원, 상미, 용수의 등장이 우선 반갑다. 이 작품에서 공부방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세 아이의 사회적, 물적 토대로 설명에 앞서 많은 이해를 내포한다. 그리고 이 세 아이는 공부방 아이들의 거세된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적극적이다. 짐작한대로 그 욕망은 실패할 것이다. ‘아직은언제나가 될지, ‘언젠가는으로 뒤집어질지는 모르지만 당장의 욕망은 실패하였으나 아이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흐뭇해할 수 있는 이유다.

공부방 삼총사인 세 아이에게 용수에게 축구화 사주기라는 공통의 요구가 생겼다. 용수가 규도 대신 배식 줄을 서주고 돈을 받는 일이 용수의 축구화를 사기 위한 공동의 욕구로 발전하여 급기야 셋은 돈 25천원을 욕망하게 되는 과정은 돈을 버는 일(빈 병 줍기, 줄 서기, 삥 뜯기)과 돈 버는 일의 어려움(빈 병도 주인이 있고, 줄 서는 건 자기 욕망을 배신하는 것이며 삥 뜯기는 삥 당하기), 겨우 1만원으로 좌절하는 것인데 전체적인 어조가 발랄하다. 세 아이들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빨리 선택하며 자기 욕망을 먼저 알아본다. 억지로 참지도 않고 자기들 처지를 슬퍼하지 않는다. 이미 내면화 되었다는 것인가, 처음부터 그랬기 때문에 불만이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겹치지만 이 작품이 아이들을 계급으로 나누지 않으려는 것만은 확신한다.

그저 돈의 가치에 대한 입장 차이, 돈으로 교환할 수 없는 노동의 대가 혹은 양도할 수 없는 욕망, 돈 버는 일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대체할 수 없는 초등학생의 욕망, 돈 없이 불가능한 아이들의 현실 등을 슬쩍 배치할 뿐이다.

아이들은 돈 벌기에 실패했고, 치킨 한 마리를 셋이서 나눠 먹는 장면은 어쩔 수 없이 맛있다. 축구화에는 반도 못 미친 돈이지만 셋이 행복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돈에 닿은 것이다.

현실적으로 초등학생 아이들이 돈을 벌기란 불가능하다. 작품에도 그렸듯이 공부방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은 집 안에서 돈 벌기도 가능하지만 그건 돈을 버는 일이 아니다. 돈을 벌 수 없고 돈을 줄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욕망하는 것이 있다는 것.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욕망에 끝내 가능한 차선을 선택하는 아이들의 건강함은 이 작품이 보여준 최선이다.

정치적 주체(<기호3번 안석뽕>, 분배에 따른 공동체 감각(<소리질러, 운동장>)에 이어 이번 작품은 경제적 나눔의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본다. 진형민의 작품이 늘 경험 혹은 연습으로서의 가치에 있다고 보는 나로서는 공부방 아이들의 건강한 나눔의 방식에 찬성한다. 나아가 이 공부방 아이들의 정체성이 미래세대가 되는 것도 슬쩍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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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의 선택 - 제17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70
김태호 지음, 노인경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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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적인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연애하는 개, 사람과 동거하는 모기, 말하는 나리꽃, 간을 갈구하는 용왕, 사람으로 변신하는 쥐는 어불성설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의 잣대에 따른 것이며 신화의 눈은 존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개나 모기, 꽃으로 범주화 하지 않고 연애하는 개와 사람과 동거하는 모기, 말하는 나리꽃으로 구체화된 대상은 과학이 가려놓은 또 다른 세계다. 김태호의 작가적 태도는 이 세계의 드러냄에 있는 듯 보인다.

제후의 선택도 독자를 강타하는 한 방의 위력은 여전하다. 대개는 인간의 눈-기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한 독자들이 이 펀치를 맞고 휘청할 것이다.

변치 않은 듯 약간의 변화로 반가웠던 것은 그의 목소리가 단선적이지 않다는 것. 유머가 부족한가 싶었지만 통쾌하지 않을 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강렬해서였지 사람의 일에도 관심이 깊음을 알겠다. 옛이야기를 변주하되 현재의 이야기를 넣음으로서 연속성을 유지하는 변주도 의외의 재미였다. 그러니까 이 작품집은 그의 관심사와 표현 가능성의 지도 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혼나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그가 묻고 있는 존재의 이유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내게는 중요한데, 신화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삶의 리얼리티, 모든 존재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그가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불편했던 까닭은 인간의 눈에 대한 맹신과 맹목에 회초리를 들이대고, 그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던 자가 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이 모든 존재에게 위협의 근원지라는 인식, 인간의 맹독성, 폭력성, 이기심은 인간이 다른 종에게 저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자신에게도 가해지므로 더 위험하다. 그들은 늘 약한 자, 장애가 있는 자, 벌거벗은 자, 아이들, 끝내는 가장 비극적인 방향인 자기 자식을 향한다.

그럼에도 존재해야 할 이유를 되묻고 그런 존재조차 품어야하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의미를 밀고 나가는 것, 어렵지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김태호의 작가적 태도와 방향을 믿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 될 것 같다. 약간의 의심과 주제의식에 치우친 것 같아 불편했던 독자의 심기가 작가에 대한 기대와 신뢰로 전환되는 지점이 여기다. 그러니까, 사실, 아토인은 당신들과 함께 사는 것은 원하지 않지만, 지구인이 또 다른 행성을 찾아 헤매다 우주에서 사라져 가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습니다. 이 넓은 우주에 지구인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꽃지뢰, 157)라고 말하는 여기.

그가 과학의 눈을 버리고 신화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그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도구를 사용해 물건을 만드는 브리꼴뢰르가 된다. 나목이처럼 과잉이 되기도 하지만 나리꽃은 지지 않는다처럼 아름다운 환상이 연출되기도 한다. 아마 인간의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세상 보기를 가장 잘 하는 작가가 현재로서는 김태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하니. 거기에 삶을 들여다보는 깊이(특히 구멍 난 손은 힘 있는 문장과 함께 인식의 깊이가 주는 위로가 인상적이다.)까지 확보했으니 흔한 말로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가 된 것일까.

시의 압축성은 한 가지 정서로 모아지면서 시의 심장되기로 이어지는데 김태호 작품의 힘 또한 작품의 심장, 즉 주제가 선명하다는 것이다. 주제 의식의 과잉은 자칫 독자를 가르치는 훈육의 길로 들어설 위험도 있고 불편함의 또 다른 근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용한 것이 문학의 쓰임(김현)이라면 과한 주제의식이 책 읽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덜어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이 작품집에 대해서만큼은 애써 찾은 티끌임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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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보이스 문지 푸른 문학
황선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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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의 17년은 버려지기의 연속이다. 지속적으로 버림받는 김무를 겨우 버티게 하는 건 분식집에서 때운 라면 한 그릇이다. 그런데 김무는 불행의 쓰레기통 같다. 엄마의 원망, 이웃집 동생의 죽음, 보육원과 위탁 가정에서 받았던 정신적, 육체적 폭력, 감출 수 없는 몸의 상처, 해리를 버렸다는 자책. 그래서 그 모든 불행의 시작인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나야한다.

겨우 17년 인생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이렇게 가혹하다. 친구들은 또 어떤가. 유학에 실패하고 주식 도박을 하는 기하, 가난을 편집증적 지식으로 포장하는 도진, 학업 스트레스로 욕설을 하는 틱 장애를 가진 윤, 할아버지에게 정신적, 육체적 겁탈을 당한 해리 등. 이들을 돕는 어른은 없으며 오로지 인물들이 겪고 있는 삶이 참으로 힘겹다.

서사의 흐름이 악화일로를 겪어야하는 것은 이야기의 운명이다. 결국 무는 아버지를 넘어섰고, 이웃 집 동생의 죽음을 넘어섰고 엄마와 화해하고 해리의 가족이 되어줌으로써 쓰레기통 같은 삶을 비워냈다. 틈새 분식집에서 만나고 헤어진 주변 인물들이 겪을 삶의 리듬도 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으로 황선미가 무에게 보여준 것은 그림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언가다. 그게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다.

이 정직하고 뻔한 서사를 의식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것은 궁상떨지 않는 인물들 때문이다. 최소한의 말로 의사소통을 하며, 눈물과 악다구니를 싹 거둬낸 장면들은 거추장스럽지 않다. 극적인 화해도 없고 엄마라는, 선생이라는, 친구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선의, 희생, 감상적 위로들이 없어 전체적으로 세련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나마 무와 윤이 주고받는 문자나 사소한 선물, 미술학원 선생님이 보여준 관심에 마음이 출렁이는 무가 이 냉정하고 이성적인 이야기에 약간의 물기를 느끼게 할 뿐이다.

자기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의 보호권 안에 있지 않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어른들과 청소년의 관계는 그렇다. 어른도 삶이 힘들고 완전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좀 더 나아간 지점이 여기다. 이제 삶 앞에서는 어른과 청소년이 대등하며 이 작품이 인식하고 보여주는 것도 그것이다. 어설픈 위로나 교훈이 없다는 것, 적어도 이 작품 안에서 무와 도진, 기하, , 해리는 이제 살아도 되는, 괜찮은 삶을 시작하려는 입구에 막 들어섰다. 오로지 자기 힘으로 겪어 냈다. 도움은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면 되는 친구 정도.

해리를 데려 간 무가 엄마에게 밥이나 먹고 난 뒤 혼을 내라는 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거기서 뭔가 생겨날 것 같은 기운 때문이다. 문학은 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그 끝까지 가서 거기서 생겨나는 뭔가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가족을 찾아 헤매던 해리와 무가 엄마라는 불완전한 존재에게 깃들어 이제 같이 만들어 갈 가족의 다음. 텅 비운 사람들끼리 채워갈 공간들이 어떤 색으로 물들어갈지. 그 작은 기대만으로도 독자는 안심을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고 말해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라는 불행 덩어리가 그 불행 덩어리를 어떻게 덜어내는지 보여줄 뿐.

청소년소설은 점점 세련되어 간다. 너무 어른스러워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지. 아이가 크면서 어려워진다고 말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른으로 대접한다는 마음과 함께 아이 시기가 주는 어떤 것들이 사라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청소년소설의 매력은 그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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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주 2016-11-2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초등6학년을 둔 엄마로써 수수꽃다리님의 글을 읽고, 개인적으로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