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사냥꾼 - 박물학자를 꿈꾸었던 국문학박사의 자연이야기
기태완 지음, 기성재 그림 / 보고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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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수줍은 곤충 사냥꾼!

지금 너는 나보다 훨씬 더 어른이 되어있겠지만 책 속이니까 나도 나이를 바꿔 네 나이가 되어보고 싶어. 친구 먹자는 얘기야. 괜찮지?

 

봄부터 겨울까지 일년 내내 너는 참 재미나게 지내는군.

별 놀이거리가 없었겠지. 그래도 사냥꾼은 좀 달랐던 것 같아. 전문가의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공부도 많이 한 것 같고. 남다른 눈을 가진 것 같아 부럽더군.

이 책을 읽으면 곤충 사냥꾼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도 너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 할 것 같아. 만약 어른들이 읽는다면 어린 시절 자기를 닮았다고 오랜만에 추억에 잠길거야. 아이들이 읽으면 당장 잠자리채를 들고 참나무 숲으로 가자고 할지도 모르지. 가까이 참나무 숲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 아이가 도시에 산다면 맥 빠질거야.

그만큼 곤충 사냥꾼의 생활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더군.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모두 사냥꾼의 놀이였잖아. 놀이 같은 삶!

 

벌집을 건드렸을 때는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 했어. 황구렁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나도 소름이 돋았지. 나도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뱀이거든.

나도 밭에 가려면 산길을 걸어가야 했어. 그런데 그 길에는 뱀이 꼭 나타났지. 산 입구에 들어서면 돌맹이를 하나 보지 않고 뒤집어. 속으로 비는 거지. 오늘은 뱀을 보지 말게 해주세요. 효험이 있는지 모르지만 뱀을 보지 않았지.

누가 뱀을 잡아 나뭇가지에 걸어놓으면 그게 말라 쪼그라질때까지 매달려 있어. 그 밑을 지나가려고 하면 그게 내 머리꼭지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후다닥 지나가야 했지.

아무튼 나는 뱀이 무섭고 싫어.

 

그나저나 너는 정말 곤충을 좋아했나봐!

나 같으면 좀이 쑤셔서 몇 시간 씩 개미 군대의 싸움을 들여다 보지 못할 거야. 사슴벌레를 사냥하는 법도 모르지.

사슴벌레를 사냥하고 기르면서 이것 저것 먹을 것을 갖다 바치는 사냥꾼 모습이 웃겼어. 사냥꾼 말처럼 처지가 바뀌었더군. 가재 잡는 데 개구리 뒷다리를 미끼로 쓰는 건 처음 알았어.

 

삼촌이 좋은 분이셨나 봐. 나는 삼촌이라고 부른 사람이 없어서 잘 몰라. 함께 토끼를 잡고 연을 만들어 날리는 삼촌이 있는 사냥꾼이 부러워지더군.

 

설마 곤충 사냥꾼의 이야기를 곤충 과학책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없겠지?

절대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래. 이건 과학책이 아니라 이야기니까 말이야. 곤충을 지독히 사랑한 소년의 이야기. 그래서 곤충사냥꾼을 통해 자연의 이야기를 듣기를 바래. 소년과 자연이 어떻게 사랑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고 풍요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지.

나는 오랫동안 곤충 사냥꾼을 기억할 것 같군. 언젠가 참나무 숲에 갈 일이 있으면 저녁때를 기다려 나무를 한 번 흔들어 볼 생각이야. 도토리가 떨어져 있으면 그 주변도 한 번 둘러봐야겠지? 혹시 거위벌레가 드릴로 구멍 내는 걸 보는 행운이 올지도 몰라. 돋보기가 없어서 힘들까?

곤충사냥꾼이 나비잠자리라고 부르는 잠자리 있잖아. 책 표지를 꾸미고 있는. 어쩌면 그리도 매혹적인 날개를 가진 잠자리가 있을까!

우리 동네에는 나비 잠자리와 아주 조금 닮은 물잠자리가 있었어. 그 잠자리도 너무나 가볍고 재빨라서 손으로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지. 나도 잠자리를 제법 잡는데, 그 잠자리는 어찌나 도도한지 쉽게 잡히지 않아서 애 좀 탔어. 어쩌다 잡으면 전혀 느낄 수 없는 날개의 가벼움에 분명 손에 잠자리가 있어도 없는 듯. 까만 날개의 물이 손에 들까봐 약간 겁나기도 했었던 기억이 나네.

 

사실은 내가 살던 동네를 떠나 온지 오래 되었어. 잠자리를 잡으러 돌아다니는 꼬마들이 있기나 할까? 멱 감던 아담한 도랑도 진즉 없어졌지.

그래서 더욱 사냥꾼 이야기가 나를 안달나게 하는가봐.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놀이들이, 그 호기심이, 영영 추억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아무튼 곤충사냥꾼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무척 행복했어. 수줍은 것 같으면서도 완전 날쌔고 치밀한 사냥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모습도 놀라웠지. 넌 좀 멋있었어!

 

뭐니 뭐니 해도 곤충 사냥꾼이 말한 그 많은 곤충을 사진이 아닌 손그림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사진보다도 훨씬 생동감이 느껴지더군. 멋진 동무를 두었나봐.

 

더 긴 이야기를 나눌려면 아마 너를 만나야겠지? 그럴 수 없으니까 이쯤에서 마음을 접고 이제 작별 인사를 해야겠군. 생각나면 책을 들쳐보면서 사냥꾼을 불러볼게.

수줍은 곤충사냥꾼! 널 만나서 반가웠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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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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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사제지간이 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강릉과 서울을 사이에 두고 일 년에 한 두 번 문안 삼아 뵈었다. 서울에 터를 잡아 살면서도 만남의 횟수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오월에 한 번,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 그나마도 그 중 한번은 그냥 지나친다.

스승의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제자는 그냥 아줌마가 되었다. 차마 제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나 말고도 시를 쓰는 제자들과 직장 생활을 하는 제자들이 시인을 함께 만난다. 금대봉 산행을 계획한 것은 지난 5월, 헤어지기가 아쉬워 다음 만남을 약속하자는 성화에 못 이겨 스승이 정한 일이다. 스승의 안내를 받아 지난 8월 25일과 26일 금대봉에 다녀왔다. 아랫녘으로 태풍 볼라벤이 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출발했다. 다행이 날이 좋았다.

 

 

그즈음 읽기 시작한 책이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정민, 문학동네, 2011)이다. 이제 막 어린 황상이 주막집에서 다산을 만났다.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도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고 스승에게 묻는다. 스승은 빙그레 웃으며 어린 황상에게 <삼근계>를 써준다.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는 게지.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구멍을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도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진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35쪽-36쪽)

 

시 쓰는 재주를 인정받은 황상은 스승에게 받은 삼근계를 평생의 길잡이로 삼았다.

스승은 어린 제자를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잠시라도 허튼 기색이 보이면 다산은 벽력같이 호통을 쳐 제자의 마음을 다잡는다. 새신랑 황상이 공부를 게을리한다 생각하여 절로 보내버리고 이 제자는 아무 말 없이 스승의 말을 따른다.

어린 제자가 사회비판적인 시를 써 올리자 스승은 제자의 앞날을 걱정해 그 시를 절대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는 자신 또한 제자가 쓴 시와 같은 시를 써 보내 시 공부를 시킨다. 그 시가 <애절양>이다. 어린 아이까지 세금을 내야하는 현실을 비관해 젊은 아비가 자신의 양물을 자르고 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시인을 젊어서는 스승으로 알았고, 결국 주례로 모셨다. 맥이 풀리고 사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스승의 주례 말과 시는 내가 걸어갈 이정표와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 엄마로서, 아내로서 내 자리를 지키게 해 주었다.

그보다 앞서 언젠가 세상에 혼자인 것 같아 떨고 있을 때, 서울에서 제자들이 모여 스승을 뵈었다. 어두운 밤, 헤어지는 길 위에서 스승은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무 말 없이 잠시 잡았다 놓아 준 그 손길은 그 후로 오랫동안 나를 잡아 주었다. 꺼내 말하지 않은 일이다.

 

 

이번 금대봉 산행은 가을꽃을 보기 위함이다. 열매를 맺기 전에 피는 것이 꽃이라 이미 여름꽃은 졌다. 가을꽃을 보려면 지금이 적기다.

시인과 걷는 산행은 느리다. 꼭대기를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대봉 초입부터 꽃들이 만발이다. 스승이 꽃 이름과 그 내력을 설명하고 어른 제자들이 세상 처음 듣는 얘기 인듯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따른다. 고등학생 딸을 둔 제자도 열심히 듣는다. 지난 밤 만남의 회포를 푸느라 약주가 과했는가 날숨에 취기가 진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열심히 스승의 꽃 이야기 듣는다.

금대봉 가을꽃은 이질풀, 쥐손이꽃, 투구꽃, 진교, 곤드레, 잔대, 오이풀, 톱풀, 눈빛승마, 마타리, 물봉선, 그 중에서도 스승이 특히 아끼는 참취가 한창이다. 돌배가 떨어졌는데 그 향이 무척 진하다.

간밤에 맷돼지가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몹시 분주했는가, 여기 저기 흙이 파헤쳐져 있다. 금대봉을 가로질러 가는 길에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피고 자라고 지는 꽃들이 어디 이것들 뿐이랴. 스승의 말은 길고 풍부했지만 미련한 제자가 기억하는 게 많지 않아 딱할 뿐이다.

금대봉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나마 사람 발길에 망가지지 않은 곳이다. 그래도 대형버스로 실어나르는 등산객을 받느라 금대봉 등허리도 하루 종일 바쁘다.

서너시간을 걸어 내려온 곳이 이번 산행의 목적지 검룡소다.

검룡소는 한강이 발원하는 곳이다. 대개의 발원지가 생각보다 협소해서 심심했는데, 내가 본 검룡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장했다. 하루에 뿜어져 나오는 물의 양이 천톤 단위라고 하였다. 보는 눈이 없다면 그 물을 떠 마시고 싶었다. 얼마나 시리고 차고 달까 싶어서 꾹꾹 참은 갈증이 더 심해졌다.

그러나 차마 그 물에 내 손을 담글 수가 없었다.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함부로 손을 담글 수 없을 것 같았다. 검룡소에서 한참을 머문 뒤에 내려오기로 하자 참았던 비가 쏟아졌다.

길게 쏟아지는가 싶어 서둘렀는데 산자락을 미처 다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그쳤다. 선배 언니는 검룡소에서만 비가 내린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 책을 마저 읽다보니, 황상과 정학연, 혹은 다산이라면 이번 여행을 틀림없이 시로 남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늠되지 않는 상상일 뿐이다.

 

 

황상은 다산의 큰아들과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유배지에 아버지를 보러 온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과 함께 공부하고 산행도 다녔다. 그때마다 그들은 꼭 시문을 써 문답했다. 다산이 사망하고 정학연 마저 사망하자 늙은 황상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자기의 시를 읽어준 유일한 사람이 없으니 쓸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다산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다산의 제자답게 살다 간 사람은 황상이다. 아전의 자식이라 벼슬길에 한계가 있지만 스승은 끝까지 공부하고 과거를 보라고 채근한다. 황상은 자신의 재주가 모자람을 내세워 끝내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승의 소망을 대신하여 유인으로 살다 간다. 산속으로 들어가 일속산방을 열고 그곳에서 시 쓰고 공부하다 늙어 생을 마친다.

스승은 제자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더러 제자에게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질투를 하기도 하고 아프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스승은 복숭아뼈에 구멍이 날 만큼 무섭게 공부하고 글을 쓴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묵묵히 따를 뿐이다.

이 모든 삶의 과정을 스승과 제자는 산문으로, 시로 남겼다. 몇 달이 걸려 도착하고 또다시 몇 달이 걸려 답장이 도착하는 식이었다. 그 사이 없어지는 편지도 있었다.

이 책에는 다산의 생얼굴이 많이 보인다. 아비이자, 스승이자, 유배 죄인이자 지식인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다. 스승을 꼭 닮은 제자 황상은 다산의 얼굴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서로 닮아가고 앞서간 스승의 길을 제자가 꼭 그 걸음으로 뒤따르는 그림을 보여준다. 몹시 부럽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금대봉 산행은 여행기이면서 그 흔한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꽃 몇 장을 찍었지만 나 혼자만 보기로 했다.

금대봉에 오르기 전에 함백산에 들러 반만 살아 있는 주목을 보았다. 사방이 트여 가슴이 뻥 뚤리는 것 같은 함백산 정상에서 일행은 모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겹겹이 쌓인 산자락이 마치 그림 같았다. 황홀한 눈길을 날카롭게 가르며 아프게 들어오는 스키장, 그것은 산의 속살이었다.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어떻게 그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기어코 산을 파헤칠 생각을 하였을까.

일행은 깎아 내린 산자락을 보며 인간이 참으로 못됐다, 못됐다 몇 번씩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깎이고 파헤쳐지고 그야말로 인간의 손에 유린당하는 강과 산을 볼 때마다 어찌 견디시는가 물었더니 스승은 그냥 하루 종일 걷는다고 했다.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가 영 안되면 검룡소를 찾기도 하고 꽃을 보러 간다고 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스승이 금대봉 꽃을 보러 오면 이곳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드물었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금대봉에 사는 온갖 꽃의 사진과 찾아가는 길이 안내된다.

꽃 사진을 함께 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스승의 말을 따르고자 함이다. 그저 마음에 담아가면 된다는 말에 그리하기로 한 것이다. 저희들끼리 꽃피우고 씨 퍼뜨리며 사는 곳에 우리는 잠깐 들렀다 가는 셈이다. 그 길은 조심스러워야 함이다.

황상이 스승을 모시고 이곳을 다녀간다면 꼭 시로 남겼을텐데, 나는 그럴 재주가 없다. 그저 꽃을 마음에 담아가라는 스승의 말을 기억할 뿐이다.

자연이 아플 때마다 ‘걷는 것’으로 화를 식힌다는 스승의 말을 귀담아 들을 뿐이다. 그 걷기가 미안함을 대신하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 장하고 장한 검룡소를 마음에 넣어둘 뿐이다. 그리고 스승의 시를 다시 꺼내 읽는다. 어리석은 제자 또한 스승을 따라 하리라 마음 먹으면서.

 

기분이 우중충하여/ 궂은 추억만 불러내는 날이면/ 기분전환을 위해 생각한다/ 검룡소의 맑고 시원한 물맛을/ 만회할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한 후회가/ 울적한 슬픔으로 가라앉을 즈음/ 마음을 추스르려고 떠올린다/ 한강이 발원하는 검룡소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샘물을/ 솟구쳐 암반을 세차게 타고내려/ 시내가 되는 모습을/ 먹고 싸고 마시고 씻는/ 일상사를 온전히 의탁한 /한강의 주민으로서/ 세상을 사느라 맡은 배역이/ 누추해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문득 한 마리 물고기 되어/ 한강 천삼백 리 거슬러/ 태백의 금대봉 골짜기를 오른다/ 서해 용이 승천하러 오른다는 전설의/ 검룡소를 찾아가/ 시원의 약물 마시며/ 오장에 스민 병을 다스린다

<<검룡소>> 전문, 최두석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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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0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걷는 행위 속에 여러 가지 처방이 들어있음을 저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수수꽃다리 2012-09-03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하이네라고 불러보게 되는 님!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걷는 행위 조차 게으름으로 그만두고 마는 저라서 심하게 부끄럽습니다, 저는!
들어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걷습니다. 목적을 정해두지 않는 그 행위를 이해하려면 제가 더 '우중충'하거나 만회할 수 없는 잘못을 더 저지르거나 해야하는 건지^^

이진 2012-09-03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수수꽃다리님 오랜만이예요.
<북항>리뷰를 보고는 처음인 거 같은데 그새 리뷰를 두 개 정도 쓰셨군요+_+
오랜만에 인사하니까 좋은걸요, 되게!

수수꽃다리 2012-09-0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되게라는 말은 우리 강원도에서 정말로 자주 쓰는 말이랍니다. 되게 많이 쓰지요^^
늘 소이진씨 보고 있어요.
어디 끼이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라 쭈뼛거리다가 나와버리는 일이 많지만.
항상 놀랍고 감동하며 지켜보고 있으니 늘 건투를!!!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접시 위에 놓인 이야기 5
헬렌 니어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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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과 요리를 잘하고 싶어하는 사람, 세 번째 부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하면서 잘하려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데 헬렌 자신이 세 번째 부류다. 그들 부부의 삶 자체가 평범한 삶이 아니라 실천가적 삶이다. 그러니 헬렌이 자신을 그렇게 분류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대충 말고 철저하게 살자. 부드럽게 말고 단단하게 먹자. 음식에서도 생활에서도 견고함을

추구하자. 이 책은 육신에 영양을 공금하기 위해 식사할 뿐 미식에 빠지지 않는 검소하고

절제하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는 말은 그들 부부가 실천가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헬렌 니어링이 주장하는 소박한 밥상이란 채식 위주의 제철 재료를 가지고 최소한의 조리기법으로 원재료의 맛을 살리는 요리, 적게 먹고, 단순하게 먹는 것이다.

주부가 요리를 하느라고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신 간단하고 소박하게 먹고 시간

을 아껴 개인의 발전을 위해 시간을 쓰라는 말은 반복되는 부엌일에 지친 주부들을 위로하

기에 충분하다.

 

헬렌 자신이 윤리적 소비 개념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실천한 생활 자체가 윤리적 소

비다. 즉 탄소가스 배출의 주범이 되는 수입 재료 안쓰기, 제로 거리를 실천한다. 자급자족

생활화, 비윤리적인 육식 거부 등은 윤리적 소비를 생각하게 한다.

 

굽기, 튀기기를 생략하면 냄비와 팬을 끝없이 닦아야하는 고역도 줄어든다. 접시나 그릇 하

나로 먹자. 음식 준비뿐 아니라 불필요한 도구와 그릇의 사용도 과감히 줄이자.(28쪽)는 주장은 주방 세제를 쓸때 마다 죄책감이 드는 주부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제안이다. 이렇듯 그녀가 말하는 견고함을 추구하자는 것은 실천가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드는 음식은 각종 조리료를 넣어 “맛”을 낸 것 보다는 당연히 “영양가가 우선이다.(28쪽)”

 

영양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나아가 생식을 주장한다. “조리는 파괴하는 것이요, 재로 만드는 것이다. 음식을 조리하면 정말로 음식이 죽게 될 수 있다.(37)

생식은 수행자들의 수행법중 하나다.

 

그러나 가족, 특히 어린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주부가 헬렌이 주장하는 섭생법을 얼마나 따

를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고 그녀가 앞뒤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다. “음식을 먹는 방식은 음식을 먹는 사람의 의식에 따라 상대적이다. 매사에 철저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세상에 가능한 최소의 피해를 끼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다.(70쪽)”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의 경우,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수입품이 아니라 협동조합 제품을 사용하는 것. 적게

먹는 것, 커피를 줄여 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생각은 있어도 실천은 어렵다. 헬렌을 존경하는 이유가 그들 부부가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을 인간의 노예로 만든다.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해서 동물의 노예가 된다. 목축업자, 우유 짜는 이, 양치기, 목동, 농부, 도살자 모두 가축의 시중을 드는 일에 관련된 노동을 한다. 키우고 돌보는 데 쓰는 시간과 노력을 더 나은 인간을 키우고 돌보는 데

쓰면 좋으련만.(71쪽)“ 이라고 안타까워 하는데 이는 윤리적 소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도 그렇게 주장한 바 있다.

 

조금 더 들여다 보면 그녀는 음식을 만들 때, 조미료를 쓰지 말 것. 재료 자체의 풍미를 즐길 것, 소금 후추 양을 줄이거나 거의 사용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재료 자체의 염분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빵은 먹지 말고, 과일과 야채를 먹고 이것만으로도 수분 섭취는 충분하니 물도 더 먹을 필요가 없다.

 

헬렌의 밥상을 따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가족의 동의다. 가족 모두 소박한 밥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장기 아이를 둔 부모는 더 고민이 많다.

야채와 과일을 일년 내내 공급하기 위해 과일 나무와 채소 밭이 있어야 한다. 나만의 텃밭

이 있어야 가능한 생활이다. 도시 생활에서는 어려운 점이 더 많다.

야채와 과일 값이 비싸다. 견과류도 값이 비싸다. 오히려 고기 값이 싸서 가난한 도시 서

민들은 값비싼 채소, 과일, 견과류를 먹는 대신 고기를 먹는 일이 생긴다.

음식 종류가 다르다. 쌀이 주식인 우리 식단은 익히고 찌고 무치는 음식이다.

 

그러나 나물 반찬을 할 때 화학 조미료를 넣어 똑같은 맛을 내지 않고 최소한의 소금과 기

름만으로 나물 맛을 살리는 조리법은 응용 가능하다.

기본은 같다는 것. 즉 모든 음식은 원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 그것은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이기도 하면서 재료 자체가 가진 생명력을 살리는 것과 같다.

자연 상태에 가까운 재료를 먹는 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조리 과정을 거치면 거칠 수

록 원료의 맛은 떨어지고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해 가능하다.

백미 보다 잡곡을 먹는 것은 그녀의 말대로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이다. 우리 식단의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요리 전문가 임지호는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든다. 헬렌이 요리를 못하고 싫

어 하는 사람이라면 임지호는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다. 그가 재료를 얻는 방식은 헬렌과

닮았다. 사는 곳 주변에 있는 다양한 풀(이끼 조차)이 음식의 재료가 된다. 못 먹는 것이

없다. 거리가 거의 없는 음식이다.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도 같다. 조미료는 하지 않는다.

나물 삶은 물로 밑물을 하는 것도 같다. 최소한의 양념을 하고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에

충실한다. (그의 책 <방랑식객>, 문학동네, 2011에 잘 나와있다)

그러나 고기를 먹는다. 생선도 먹는다. 즉 임지호는 모든 것이 음식의 재료다. 그 음식

을 먹는 사람이 원하면 그 재료를 사용하되 살아있는 영양을 고스란히 먹을 수 있게

만든다. 전문 요리가로서 임지호와 실천가로서의 헬렌은 같은 입장이면서도 만드는

것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누구의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제철 음식, 손에 닿는 것은 모두 먹을 수 있다는 것, 최소한의 조리 단계, 원 재료의 맛을

살리는 살아있는 음식, 그러나 임지호는 음식은 보는 것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진심으로 먹는 것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음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이 같다는 것.

생활에서 우리가 할 일은 헬렌의 말처럼 “창의적으로 응용하여 각자의 레시피를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내가 먹기 위해 만드는 음식과 남을 먹이기 위해 만드는 음식은 질과 양이 다르다.

나 혼자 먹는다면 찬 물에 밥 말아 먹는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가족을 먹이려고 음식을 만들 때는 들이는 정성이 다르다.

헬렌 니어링에게 성장하는 아이가 있었다면 좀 더 혁명가적 실천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먹으려고 소박한 밥상을 차릴 수는 있으나 가족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거나 가족을 설득해야 한다.

 

정재승은 최근 진중권과 함께 쓴 책 <크로스 2>에서 ‘육식’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복잡한 미각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자연 생태계 전체에서 인간은 유일한 미식가다.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왕성한 식욕과 잡식 능력은 그 자체로 유일하며 위대하다는 얘기다. ...지난 3만 년간 느리면서도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은 잡식 동물의 몸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육식을 포함한 인간의 미각은 인정 받아야 하는 진화의 산물이다. 그런데 육식이 공공의 적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그것에 대해 그는 “인간이 동물의 눈을 직접 보지 못하면서” 생긴 기업형 축산업의 폐해를 말한다. 육식은 건강하지 못한 식재료가 아니라 육식고기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헬렌의 밥상은 그래서 선택의 문제다.

 

다시 정재승의 말을 옮기면서, 나도 그처럼 ‘언젠가의’ 희망사항으로 또박또박 읽어본다.

“도시에 사는 인간은 점점 음식사슬이 긴, 그래서 세상에 의존도가 높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음식 사슬이 짧은 식사생활을 꿈꿔본다. 내가 재배한 것을 먹고, 직접 사냥한 무언가를 요리하고, 채집해 얻은 것으로 식사를 하는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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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 - 제5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43
김이윤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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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 책은 버림받은 책이다.

이제 막 중학생 딱지를 뗀 녀석들한테 이 책이 막 나왔을 때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대뜸 자기들은 이런 소설이 영 마음에 안든단다.(물론 대표성은 전혀 없다. 우연히 거기 모인 다섯명의 소녀들이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우선 성장 소설이 강요하는 모범적인 성장 과정.

이런 저런 곡절을 겪어내고 극복한다는 필연적 과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항변이었다. 나아가 작가들이 뭘 모른다는 얘기다.

 엄마는 말기암 선고를 받고 얼마 살지 못한다는데, 딸이 드럼을 배우러 다니는 일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되물어왔다. 게다가 미혼모의 딸이기도 하다는데 어떻게 나쁜 일이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이 생기냐는 것이다.

 

 그 말은 자기들처럼 평범한, 즉 부모도 살아계시고 집도 지지리 궁상이 아니고 공부도 딱 중간 정도 하는 자기네 얘기는 왜 없냐는 하소연이다. 자기 같은 아이들도 열심히 사는데, 사느라고 힘들어 죽겠는데, 왜 자기들 보다 엄청나게 재수 없는, 혹은 운 없는 아이들만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가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그게 문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책읽기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 더 밀어 붙일 수 없어서 물러났다. 그러고 나니 나도 미뤄두었다가 오늘에서야 손에 들었다. 대단히 감동적인 소설은 아니었어도 그래도 그 아이들에게 좀 더 세게 밀어붙일 걸 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주인공 여여를 두고 말이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여가 누구인가. 그 전에 여여의 엄마, 경주씨가 있다. 당찬 미혼모, 능력있는 한 부모, 페미니스트 사진작가, 열린 생각과 감성으로 딸과 동지애를 맺고 사는 엄마, 딸이 없어 섭섭한 나는 엄마와 딸이 보여주는 끈끈한 동지애적 믿음과 사랑이 부러웠다. 여여를 둘러싼 분위기는 아버지가 없는 것 말고는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경제적 어려움도 없어 보인다. 엄마 친구 정화이모, 삼촌, 엄마의 동료들은 합리적이면서도 지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여여는 독립적이면서도 똑똑하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처럼 당당하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고등학생이다.

 여여의 단짝 세미는 여여의 소울메이트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만 빼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던 여여다. 그래서 말기 암 선고를 받고 곧 죽음을 맞게 되는 엄마의 운명은 느끼고 인식하기 전에 끝나버린 일이 되어버렸다.

  죽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은 채 인간으로서 당당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의연하게 보내주는 여여의 모습이 새로웠다.

 아빠인 서 이사를 만나서도 부녀지간을 밝히지 않은 채 사귐의 시간을 갖는 것도 그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은 악다구니도 없고 미움이나 복받치는 설움도 없다. 감격적인 재회도 없고 격정의 순간도 없다. 용서하고 사과하면서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언젠가는 죽음으로 이별하지만 너무 이른 이별이라 당황하고 두렵다. 준비하지 않은 채 만나게 되는 이별이 여여 엄마의 죽음이다. 그 이별 앞에서 여여는 끝내 담담하다. 사촌조카들과 장난을 칠정도로. 엄마의 죽음이 각성되지 않은 상태이겠지만 고3 현실로 들어서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책을 소개만 듣고 거부했던 그들의 입장에서 읽어보았다.

그들은 여여를 좋아할 수 있을까? 언니이거나 누나이거나 동생인 여여를 보면서 그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현실에 없는 인물이라고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제 고아인데, 아버지를 눈앞에 두고서도 아닌척 해야하는 여여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여여의 상태는 극복하고 이겨냈다기 보다는 아직 실감하기 전의 얼떨떨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여여의 모습이 성장이라는 과정으로 이해되기 바라는 것은 또래 독자들에게는 가혹한 요구다.

어른이 아닌 아이에게 어른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이겨내라고 하는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두려움과 질이 다르다. 여여가 그것을 감당하게 한 것은 가혹한 일이고, 아이들이 대충 소개만 듣고도 열을 올려 거부한 것은 당연하다.

 

어른 독자인 나는 여여가 기특하지만, 또래 독자는 가혹하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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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항 문학동네 시인선 20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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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폭이 얼마나 되나 재보려고 수평선은 귓등에 등대 같은 연필을 꽂고 수십억 년 전부터 팽팽하다

 

사랑이여

나하고 너 사이 허공의 폭을

자로 재기만 할 것인가  

                                              - <폭> 전문

 

 

주부로 살면서 절실한 것은 내 말을 하고 싶은 상대다.

남편 흉 말고, 아이 비교 말고, 시댁 갈등 말고 오로지 지금의 나와 너 얘기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 주부의 사회적 관계망은 학교와 같은 반 엄마들, 혹은 학원에서 더 이상 확대되지 않는다. 그 핵심에는 아이와 엄마 혹은 학(부)모가 있을 뿐, '나'는 늘 흐릿하다.

 

그래서 '등대 연필'로 수십억 년이나  팽팽하게 바다의 폭을 재고 있는 수평선의 시적 허용을 공감할 상대를 만난다는 일이 더없이 감사할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시집은 내가 한없이 흐릿해져 가던 시절, 그야말로 우연히 내게 온 그녀가 선물로 주었다. 안도현의 목소리와 그녀의 목소리가 이중주로 들려오는 책읽기가 되었다.  

 

 이 시집을 내게 준 그녀와 아직 이 시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아줌마의 무딤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녀를 만나면서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그녀를 통해 늘어진 내 삶의 고무줄이 한줌은 당겨졌음을,  안도현의 시집을 함께 읽을 책 동무로 나를 초대해 준 그녀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이글을 쓴다.

 

 손으로 만든 것 같다는 안도현의 이번 시집은 그래서 조금 힘주어 펼치면 책장이 후루룩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롭다. 하여 더 조심하게되는데, 투박한 느낌이 말만큼이나 새롭다. 20년 전, 열심히 시집을 사보던 젊은 시절의 책을 다시 만나는 것 같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번 웃었다. 여러번 눈을 비볐고, 여러번 놀랐고, 여러번 기뻤고, 여러번 미안했고, 여러번 민망했고,  여러번 좋았다. 잠시 결별했던 것 같은 시를 다시 만난 것이 가장 크게 기뻤다.

 

눈이 밝지 못한 나같은 독자에게 시는 좋은 것과 모르는 것 두 가지다. 시인이 하는 말을 알것 같으면 좋은 것이고, 도무지 잡히지 않는 시는 모르는 것이다. 표제작인 <북항>은 그래서 여러번 읽어야했으나 여전히 '부강'이라고 말하는 '너'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그 시의 속살을 전혀 보지못해서 시집을 덮고 나서 가장 낯선 시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시집을 읽고 나서 감히 한동안 다른 시들은 좀 싱거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시적 상상의 폭이 넓고 깊었다.  크고 작은 것 사이의 넒나듦은 자유롭고 날카로웠다.

 

바다의 폭과 너와 나 사이의 폭을 가늠해 보거나(<폭>), 옥수수 한 알을 심는 행위에서 시작해 드디어 옥수수 그림자를 경작하는 사람으로의 확대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파종의 힘>), 얼갈이배추 씨에서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안쪽까지 내 소유로 만드는 발견(<재테크)>, 박쥐똥을 쓸면서 박쥐의 배변주기를 생각하는 서생의 양심(<박쥐똥을 쓸며>)을 따라가다 보면 시 읽기는 재미와 함께 발견의 기쁨까지 얻게 된다.

 

이번 시집에서 비교적 짧은 시들(<등> <폭> <찔레꽃> <비켜준다는 것> <문경옛길> 등)의 시적  표현들은 왜 시를 읽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이 어디까지 기쁨을 줄 수 있는지도 함께. 응축된 몸집 안에 담긴 사유의 힘이 시의 외형임을 잘 보여주는 시들이었다.

 

이미지 보다는 이야기의 기능이 강한 긴 시들은 그만큼 사유가 더 확장된 시들이다. 시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고 느껴지는데, 역시 더 큰 힘이 느껴진다. (<설국><말뚝> <연륜><영산홍>) 

 팽팽해진 긴장을 나긋나긋하게 풀어주는 것 또한 이번 시집을 읽는 또하나의 재미다. 유머나 위트가 아니라 연륜이 느껴지는 여유라고 말하고 싶다.

 

 시는 시인의 일상에서 길어올린 발견이고 깨달음이다. 당연히 사적일 수 있는데, 그의 사생활을 살짝 엿보는 일도 나쁘지 않다. <송찬호 형네 풀밭에서>나 <백석학교>가 특히 드러나게 사생활을 보여주는 시들이다. 시인 송찬호의 풀밭을 독자가 언제 볼 수 있겠는가 싶으니 그의 집에 마실을 가서 한나절 놀다 왔을 시인의 모습 또한 시만큼 발랄하고 좋을 뿐이다.

 백석을 좋아하는 시인들을 모아 백석학교라 이름지을 만하니, 올해 100주년 기념 동창회에 모인 그들의 수다가 궁금하다.

 

 시는 언어가 빚어내는 '잘 만들어진 그릇'이다. 그의 진면목을 보는 것은 보는 이의 내공에 따라 다를 것이다. 결국 발견하고 읽어야 그것이 나에게 시로 다가오는 것일터.

 온전하지는 못해도 어쩌다 '화안하게' 내 마음에 들어오는 시를 만나는 일이 즐거워서 아마 나는 시를 읽는 모양이다. 가령 이런 시!

 

         어제 저녁 영하 이십 도의 혹한을 도끼로 찍어 처마 끝에

      걸어두었소

         꾸덕꾸덕하게 마를 때쯤 와서 화롯불에 구워 먹읍시다

      구부러지지 않고 요동 없는 아침 공기가 심히 꼿꼿한 수

     염 같소

        당신이 오는 길을 내려고 쌓인 눈을 넉가래로 밀고 적설

     량을 재보았더니 세 뼘 반이 조금 넘었소

       간밤에 저 앞산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가 숨깨나 찼을 것

    이오

     좁쌀 한줌 마당에 뿌려놓았으니 당신이 기르는 붉은가슴

   딱새 몇 마리 먼저 이리로 날려 보내주시오

     또 기별 전하리다, 총총

                                             <일월의 서한(書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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