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 - 제5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43
김이윤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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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 책은 버림받은 책이다.

이제 막 중학생 딱지를 뗀 녀석들한테 이 책이 막 나왔을 때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대뜸 자기들은 이런 소설이 영 마음에 안든단다.(물론 대표성은 전혀 없다. 우연히 거기 모인 다섯명의 소녀들이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우선 성장 소설이 강요하는 모범적인 성장 과정.

이런 저런 곡절을 겪어내고 극복한다는 필연적 과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항변이었다. 나아가 작가들이 뭘 모른다는 얘기다.

 엄마는 말기암 선고를 받고 얼마 살지 못한다는데, 딸이 드럼을 배우러 다니는 일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되물어왔다. 게다가 미혼모의 딸이기도 하다는데 어떻게 나쁜 일이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이 생기냐는 것이다.

 

 그 말은 자기들처럼 평범한, 즉 부모도 살아계시고 집도 지지리 궁상이 아니고 공부도 딱 중간 정도 하는 자기네 얘기는 왜 없냐는 하소연이다. 자기 같은 아이들도 열심히 사는데, 사느라고 힘들어 죽겠는데, 왜 자기들 보다 엄청나게 재수 없는, 혹은 운 없는 아이들만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가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그게 문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책읽기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 더 밀어 붙일 수 없어서 물러났다. 그러고 나니 나도 미뤄두었다가 오늘에서야 손에 들었다. 대단히 감동적인 소설은 아니었어도 그래도 그 아이들에게 좀 더 세게 밀어붙일 걸 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주인공 여여를 두고 말이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여가 누구인가. 그 전에 여여의 엄마, 경주씨가 있다. 당찬 미혼모, 능력있는 한 부모, 페미니스트 사진작가, 열린 생각과 감성으로 딸과 동지애를 맺고 사는 엄마, 딸이 없어 섭섭한 나는 엄마와 딸이 보여주는 끈끈한 동지애적 믿음과 사랑이 부러웠다. 여여를 둘러싼 분위기는 아버지가 없는 것 말고는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경제적 어려움도 없어 보인다. 엄마 친구 정화이모, 삼촌, 엄마의 동료들은 합리적이면서도 지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여여는 독립적이면서도 똑똑하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처럼 당당하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고등학생이다.

 여여의 단짝 세미는 여여의 소울메이트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만 빼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던 여여다. 그래서 말기 암 선고를 받고 곧 죽음을 맞게 되는 엄마의 운명은 느끼고 인식하기 전에 끝나버린 일이 되어버렸다.

  죽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은 채 인간으로서 당당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의연하게 보내주는 여여의 모습이 새로웠다.

 아빠인 서 이사를 만나서도 부녀지간을 밝히지 않은 채 사귐의 시간을 갖는 것도 그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은 악다구니도 없고 미움이나 복받치는 설움도 없다. 감격적인 재회도 없고 격정의 순간도 없다. 용서하고 사과하면서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언젠가는 죽음으로 이별하지만 너무 이른 이별이라 당황하고 두렵다. 준비하지 않은 채 만나게 되는 이별이 여여 엄마의 죽음이다. 그 이별 앞에서 여여는 끝내 담담하다. 사촌조카들과 장난을 칠정도로. 엄마의 죽음이 각성되지 않은 상태이겠지만 고3 현실로 들어서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책을 소개만 듣고 거부했던 그들의 입장에서 읽어보았다.

그들은 여여를 좋아할 수 있을까? 언니이거나 누나이거나 동생인 여여를 보면서 그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현실에 없는 인물이라고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제 고아인데, 아버지를 눈앞에 두고서도 아닌척 해야하는 여여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여여의 상태는 극복하고 이겨냈다기 보다는 아직 실감하기 전의 얼떨떨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여여의 모습이 성장이라는 과정으로 이해되기 바라는 것은 또래 독자들에게는 가혹한 요구다.

어른이 아닌 아이에게 어른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이겨내라고 하는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두려움과 질이 다르다. 여여가 그것을 감당하게 한 것은 가혹한 일이고, 아이들이 대충 소개만 듣고도 열을 올려 거부한 것은 당연하다.

 

어른 독자인 나는 여여가 기특하지만, 또래 독자는 가혹하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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