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났다. 낯선 곳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간이역에서 환승기차를 기다릴 때의 풍경은 미리부터 눈이 시려오는 예감을 품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각자 제 갈 길을 떠날 사람들이 잠시 모여있는 간이역엔 그 흔한 자판기도 없다. 전봇대처럼 우뚝 솟은 기둥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차량 번호판 앞에 서 있었지만, 그러나 기차는 한참 일찍 정지했고 우린 우리 번호판의 차량을 찾아서 뛰어야 했다.

환승기차 안은 고즈넉해서 기차바퀴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다. 우리 뒷좌석엔 엄마와 아기가 타고 있었고 엄마는 아기에게 조용조용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기의 옹알이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우린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낯선 역에 내린 우리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었다. 하늘에 박힌 해는 열기를 지상에 고스란히 뱉었고 우리는 통구이라도 좋다며 역 밖을 나왔다. 생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의 어깨를 스치며 거리를, 거리를 걸어다녔다. 교차로 한 귀퉁이가 훤해서 쳐다보니 공원이다. 공원 입구는 산을 깍아내려 절벽처럼 되어 있었고, 꼭대기에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니 한 눈에 들어온다. 개략의 위치를 잡은 우리는 내려와서 다시 걸었다. 가보마, 했던 곳을 가던 중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지명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길을 물어보려는 나를 친구가 제지한다.

 

"묻지 마"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길은 한 쪽은 도로가 넓게 뚫렸고 높은 아파트가 줄을 지은 신도시였고 반대쪽은 오래된 허름한 집들이 단층으로 모여있는 옛집들이었다. 우린 옛집들 거리로 걸었고 조금 걸으니 나즈막한 구릉을 오르는 길이 보였다. 친구가 먼저 그 길로 들어섰고 나도 따라 걸었다. 지도팻말이 있었고 지도상으로 목적지는 아주 멀어 보였고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야 되는 듯했다. 목적지를 포기하고 우리는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얕은 구릉지에 드문드문 무덤들. 여러군데서 올라올 수 있게 만들어놓은 나무계단들. 구릉지 바깥쪽으로 구릉지를 보호하듯 밀집해있는 대나무들. 어린 죽순은 대나무 숲을 벗어나 나무계단 근처까지 진입을 해서 낯선 객의 시선을 끌었다. 조금 걷다가 보니 잘하면 이 길이 목적지와 연결될 수도 있겠다, 란 생각이 들었고 우린 모험을 계속 하기로 했다. 구릉지 여기저기엔 마을 청년들이 앉아서 쉬기도 했고, 어른들이 죽순을 캐기도 했으며, 노인이 농사를 짓기도 했다. 바닥에 깔린 작은 돌길을 걸으며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물었으면 이 길을 못 찾았을 거야."

 

옛날 선조들이 걸었음 직한 옛길을 걸으며 나는 묻지 않는 것, 말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금 갑갑하더라도, 시간에게 기다림을 주는 것이 어쩜 새로운 길로  인도해주는 삶의 비밀스런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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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6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7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2-06-07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차여행 좋지요~ 전 아주 옛날에 워싱턴 DC에서 뉴욕의 Penn Station으로 가는 밤차를 타고 이모댁에 간적이 몇 번인가 있어요. 식당차에 앉아서 책도보고 맥주도 한잔하면서 나름 낭만을 만끽했었던 것 같아요, 겉멋에..ㅋ 나중에 기회가 됨 한국 기차여행, 그리고 미국의 대륙간 기차여행 (2박3일이라고 하네요)을 하려고 합니다. 근데, 길은 좀 물어서 찾아다녀야 해요 전...ㅋㅋ

달사르 2012-06-07 12:15   좋아요 0 | URL
ㅎㅎ 버스와 달리 기차는 정말 낭만이 있는 거 같애요. 기차간에서 보는 책과 기차간에서 마시는 맥주, 기차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선 어떤 특별함이 있는 것 같애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존재들이 특별함으로 다가올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바로 기차여행의 묘미같애요. 이모댁이 뉴욕이시네요. 이모댁 가는 길. 왠지 하나의 수필 제목 같애요.

대륙간 기차여행은 생각만으로 두근거립니다! 저도 이담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꿈꾸고 있긴 합니다만, 체력이..ㅠ.ㅠ
 

 

 

음악가에게 관심이 생기는 건 무엇 때문일까. 여타의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그 작품이 청자(혹은 독자)에게 어떤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 작품을 접하고서는 과거의 자신과 조우를 한다든지,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든지, 혹은 아득한 그 무엇을 느낀다든지. 내가 무언가를 느꼈는데 그 대상에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무엇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니겠나.

 

 

선물받은 쇼팽 곡은 즉흥곡과 전주곡 모음이었다. 아, 즉흥환상곡도 있었다.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워낙에 유명한데다 조금이라도 피아노를 만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쳐봤음 직하겠다. 내게도 역시나 너무나 익숙한 곡이어서 옛 생각을 잠시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들었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24개의 전주곡(프렐류드)들을 귀를 열어놓고 그냥 들었다. 몇 개쯤 들었을까. 갑자기 공기의 떨림이 생겼다. 어떤 한 음이 지속적으로 똑똑 떨어지면서 닫힌 창문임에도 어디선가 부는 바람이 느껴졌다. 의아한 생각에 창가를 기웃거려봤지만 열린 곳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원한 청아함이 느껴졌다. 다시 여기저기를 훑어보다가 그제서야 알았다. 오디오에서 들리는 소리의 청량함 덕분에 내가 착각했다는 것을.

 

 

 

 

근무 중 어떤 생각이 떠오른 나는 집에 오자마자 집안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러니까 만화책 몇 권이더라..카이가 폴란드에서 열리는 쇼팽콩쿨에 나간 후의 일이니까 15권 전후겠구나..아..16권이다. 맞네. 이 부분. 내가 젤루 좋아하는 부분. 곡제목이 뭔지 알기도 전에 카이의 연주하는 장면만으로 감동받아 좋아했던 곡이었어. 이 곡을 연주하는 카이의 회상에 무척 공감이 되어 상상만으로도 멋졌고 슬펐고 눈물이 났었지. 음악은 귀로도 듣지만 마음으로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랄까.

 

빗방울이 듣는다. 맑은 호수에 한 방울 또르르, 코에 걸친 안경에 한 방울 또르륵, 연인의 머리 위에 툭툭, 하나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이내 대지를 적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적신다. 그리움은 바람결 따라 저멀리 쇼팽의 고향 지인들에게도 가닿는다. 그리움은 먼지의 냄새를 눅힌다.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아직 버티고 있구나. 요양하러 간 휴양지에서 연인(조르주 상드)을 기다리며 내리는 빗방울에 젖어들어 느꼈을 어떤 감흥.

 

 

                                  

 

                                       

 

 

                                  빗방울전주곡

 

 

 

유투브에선 ben kim의 곡을 찾지 못해  alfredo perl 의 연주를 올린다. 이 사람 연주도 아주 느낌이 좋다.

 

 

피아노를 치는 손가락이 매우 잘 보인다. 빗방울 소리는 왼손의 A플랫으로 설정이 되어있으며 때론 부드럽게 때론 아주 애절하게 터치를 하면서 빗방울의 굵기를 달리 나타낸다. 오른손의 멜로디 라인 사이사이에 들리는 A플랫음은 멜로디의 보조음(통상적으로 왼손이 담당하는)이 아니고 오히려 소리가 들리는 공간을 너른 들판으로 확장시킨다. 만화 특유의 과장된 표현법이 통한다, 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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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2-06-0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같이 쾌적하고 좋은 밤에도 의외로 잘 어울립니다.
빗방울이든, 추억이든, 행복이든...잔잔히 젖어들게 되네요.//
A플랫 설명, 최곱니다! 손가락도 열심히 보며 감상했어요.
(혹시 맨 아래 동영상이 달사르님일까? 기대해봤지만 아니군요..ㅠ.ㅠ)

달사르 2012-06-01 20: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연습을 해볼까? 생각하면서 아래 동영상을 좀 열씨미 보고 있슴돠. 히히히.
그나저나 여행길에 이 음악을 아이폰에 좀 넣으려고 했더니만, 컴사장님의 복귀가 이제사 이뤄져서 재촉하기가 좀...아..컴맹의 비애..ㅠ.ㅠ
 

 

 

책 읽는 맛이 조금 느껴진다. 방금 먹은 요플레의 달콤한 맛처럼.

 

 

오늘은 간만에 목욕탕에 다녀왔다. 시골 목욕탕은 달목욕하는 사람이 많아서 가서 앉아있으면 다 아는 형님이고 아는 동생이고 아는 새댁이다. 나처럼 아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도 운이 좋으면 요플레를 공짜로 먹을 수가 있다. 달목욕을 끊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은 자주 무언가로 한 턱을 낸다. 손주가 성적이 잘 나오는 경우에도 한 턱을 쏘기도 하고 서울에서 자식이 내려와서 용돈을 받은 경우에도 그러하다. 오늘도 누군가가 한 턱을 냈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나중에 친한 멤버들끼리 찜질실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속에 그 이유는 나올 터이다. 나 같은 뜨내기는 그냥 속으로 축하만 하고 기분좋게 먹을 뿐이다. 하긴 나도 예전에 한 턱 냈던 적이 있다. 이유는 내가 엄마랑 같이 목욕탕에 왔다는 것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가 통한단 말인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하고 요플레를 목욕바구니 한 켠에 얌전히 놓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사소한 그 무언가가 나를 스쳐갔다.

 

집에 와서 엄마방 컴터를 켠 후 요플레를 뜯었다. 숟가락이 없어서 국물 먹듯 후르륵 먹었다. 물론 뚜껑에 묻은 건 혀로 싹싹 핥아먹었다. 용기 바닥에 남아있는 요플레를 어찌 먹을까. 부엌에 나갈까.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는데 일어서기 싫다. 목욕을 한 노곤한 몸은 쉬어줘야 한다. 스윽 둘러보니 뻥튀기 과자가 보인다. 엄마가 컴퓨터로 맞고를 치면서 간식용으로 놔둔 모양이다. 묶은 매듭을 풀어 하나 입 안에 넣어보았다. 스르륵 녹는다. 맛있다. 한참을 먹다가 보니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뻥튀기로 수저 모양을 만들어 요플레를 떠먹어보았다. 묘한 맛이다. 요플레도 익숙한 맛이고 뻥튀기도 익숙한 맛이었는데 둘의 조합은 묘한 맛이다. 어떤 묘한 그리움의 맛.

 

 

<화차>를 읽었다. 절판된 어떤 책을 중고로 주문하기 위해 금액을 맞추려다 같이 장바구니에 들어간 <영웅의 서>를 읽으면서 미미여사를 알게 되었고 특유의 어떤 밝음을 느꼈다. 거창한 서사로 사람을 유혹하지도, 세밀한 은유로 사람을 매혹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잘 읽힌다. 첫 장면은 영화처럼 그림이 그려진다. 주인공 혼마 슌스케는 전철을 타고 있고 전철 맨 앞 차량의 가운데 출입문 옆에 서 있다.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긴 우산을 짚고서. 그 우산은 마치 지팡이처럼 혼마를 지탱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빈 의자가 많다. 앉을 곳이 많은데 혼마는 왜 서 있는 걸까. 급히 내리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앉기 귀찮아서일까. 그러나 실은 혼마는 물리치료를 받고 귀가중이다. 수사 과정 중에 다리에 총을 맞은 혼마는 물리치료 후 근무처인 수사과에 들렀으나 환대와 함께 귀가를 재촉받는 느낌을 받고 썩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굳이 전철 출입문에 서 있는 혼마의 마음을 엿보면서 나는 이 소설의 맛을 알았다. 실종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휴직계를 내고 있는 형사라는 직업이 필요했을 것이고 쉬고 있는 형사의 갑갑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전철에서 아픈 다리에도 애써 서있는 형사의 모습을 그려보는 일까지는 생각이 쉬이 미친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미야베 미유키는 두 가지 장치를 쓴다. 우선 직접적으로 갑갑한 마음의 표현이다.

 

 

 

일은 정정당당한 운동경기와 달라서, 페널티를 받아 퇴장하면 자기 대신 뛸 교체선수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바뀌어서 포지션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휴직하지 말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순간 처음으로 따끔한 후회를 맛보았다.                                                                                  p.8

 

 

나는 저 '따끔한' 이란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가 휴직을 생각해보지만 또한 이런저런 갖가지 이유로 휴직을 하지 못할 터이다. 아니 자영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잠시 몇 달간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끊임없는 올라오는 카드전표처럼 밀려온다. 반대로 혼마처럼 갑작스런 이유로 휴직을 하는 경우에도 역시나 마음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쉬어보지 않았지만 쉬이 상상이되는 일이다. 일이란 건 쉬는 동안에 규칙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종류일 뿐 아니라 아예 내 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는 종류라는 사실이 저 '따끔한' 이란 표현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모든 걸 다 던져버리는 경우에 되려 강한 희열이 느껴지기도 하나보다. 어쨌든 혼마는 휴직을 후회하는 중이며 다친 다리의 더딘 회복에 갑갑해하면서 되려 반대의 행동을 한다.

 

찜찜한 기분 탓에 혼마는 아픈 다리에도 애써 서 있다. 전철에 서 있는 것이 마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듯이.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실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기 때문에 혼마는 아픈 다리로 서 있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당히 힘들어 보이시는데요, 하는 말을 들을 염려가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불현듯 옛날 일이 떠올랐다. 오래전 소년과에 근무하던 무렵 선도했던 아이 중 상습절도범 소녀가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지만, 솜씨가 좋은 아이였다. 친구의 밀고가 없었다면 아마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젊은이들 취향의 고급 브랜드 전문점에서 도둑질을 했지만, 훔친 옷을 입고 남들 앞에 나설 수는 없었다. 과감하게 팔아치울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꼬리가 잡힐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대신 아무도 못 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커다란 전신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번갈아 입어보았다. 이런저런 코디네이션을 궁리해보고, 옷뿐만 아니라 시계나 액세서리까지 완벽하게 맞춰 패션잡지 모델처럼 꾸민 후 포즈를 취했다. 오로지 자기 방의 거울 앞에서만. 그러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핀잔을 들을 염려도 없으니까. 정작 밖에 나갈 때는 늘 무릎이 튀어나온 청바지만 입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자기주장을 한다.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다 그렇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소녀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중략)

 

가메이리 역에 도착하자 승객 몇 명이 올라탔다.                                             p.9

 

 

아무도 자기를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곳에서, 애써 아픈 다리에도 우산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혼마의 심정은 과거의 한 사건을 들려주면서 더 실감이 난다. 과거는 죽은 시간이 아니다. 과거는 현실로 불려져 나오면서 살아있는 시간으로 변한다. 본인이 직접 겪었든 타인의 경험을 들었건 간에 과거의 사건은 기억의 저 편에 언제까지라도 저장되어 있다 적절한 순간에 살아 펄떡이며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위안을 준다. 과거의 힘은 그런 것이다. 두번째 장치이다.

 

혼마는 자기가 보기에도 쓸데없는 고집이라 생각되는 행동을 계속 한다. 그럼으로써 길어지는 휴직에의 불안함에 대한 위안을 얻으려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무언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과거는 그의 머리 속 영상으로 재연된다. 풋내기 형사 시절 그저 하나의 일화로 남아있던 그 과거는 불현듯 혼마에게 찾아들어 그를 위안한다.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상습절도범 소녀의 마음까지 이해된다. 애써 훔친 옷가지들을 걸치고 거리에 한 번 나가보지도 못하는 간이 작은 소녀가 집 안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기묘한 일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혼마의 마음에서 이해가지 않는 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숨겨져 있었을 것이고 그 궁금점은 오랜 시간이 지나 역시 혼마 자신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보면서 스스로 풀려버렸다. 과거는 이렇듯 스스로 그 해결점을 들이밀어 현실의 자신을 위로하는 경우가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의 시작에서 아주 멋지게 이 장치를 이용했다.

 

물론 이 장면은 뒤에 나올 소설의 줄거리를 위해서 또한 필요한 장치이다. 죽은 부인의 사촌의 아들의 약혼녀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맡게 되는 혼마 형사가 실종된 약혼녀를 찾는 과정에서 다시 나온다. 약혼녀는 왜 스스로 실종을 자처한 것일까. 삭막한 현대의 도시가 피붙이가 전혀 없는 약혼녀를 다시금 혼자되는 과정인 '실종'으로 밀어붙인 것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자기주장을 하는 현대인들의 고독이 약혼녀의 실종을 찾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불려져 나온다. 현대인의 질병이라고 해도 무방할 카드빚을 빌려 이 고독은 가시화되며, 고독하지 않는 방법은 소설 중간중간에 별사탕처럼 흩뿌려져 있다. 별사탕을 얼마만큼 찾는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고서.

 

 

엄마가 목욕탕에서 돌아오자마자 물어보았다.

"아까 그 아줌마가 왜 한 턱을 쏘신거야?"

"으응. 오랜만에 와서 반갑다고. 반가운 턱을 낸거래."

 

요플레에서 났던 묘한 그리움의 정체를 왠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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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5-28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테고리 이름처럼 책 속에 숨은 이야기 맞네요 ^^
책 속 주인공 뿐 아니라 책을 쓴 이의 심리까지 읽어내시는군요. 거기에 자신의 경험까지 섞어, 좋은 에세이 한편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달사르 2012-05-29 18:38   좋아요 0 | URL
^^ 리뷰 쪽으로 써보고 싶은데, 쓰다보면 이상하게 매번 에세이 류가 되는 거 같애요. 책 속의 숨은 이야기가 이런 게 아닐까..라고 상상하면서 책을 읽으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도 좀더 잘 되더라구요. 히.

미미여사의 책은 그저 쉽게 읽고마는 베스트셀러 류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글 중간중간에 삶의 통찰이 엿보여서 기분좋게 읽고 있어염.

이진 2012-05-28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말에 동감해요. 저는 화차의 첫 부분을 읽으며 사실 지루하기까지 하다 생각했는데 달사르님께서는 아주 캐치를 잘하셨군요. 캐치를 잘했다기보다 나인님 말처럼 읽어내셨군요. ㅎㅎㅎㅎ
낮에 폰으로 목욕탕 부분을 읽으며 흐뭇했어요. 다 아는 형님이고, 다 아는 동생이고 하는 부분에서 딱 맞다,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ㅎㅎㅎ

달사르 2012-05-29 18: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이진님. 책이란 게 신기해서 어떨 때는 저런 게 눈에 잘 들어오고 어떨 때는 눈을 씻고 봐도 하나도 안 보이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이번 휴일에 작정하고 읽었는데 예상외로 잘 읽혀서 무척 기분이 좋네요. 캐치란 단어, 아주 적절한데요. 히히.

ㅎㅎ 소이진 님도 얼핏 듣기로(읽기로)는 시골 어드매쯤 ( ") 계신다고 들었어요. ㅎㅎㅎㅎ 공감이 절로 되지여? ^^

자목련 2012-05-31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읽고 있어요. 요플레를 먹을 때마다, 달사르님이 생각나고 목욕탕이 생각날 것 같아요. 목욕탕이라는 말이, 정겹게 느껴져요. 요즘엔 시골에서도 목욕탕은 사라지고 찜찔방이나 불가마 같은 게 많아요.문득 벌개진 얼굴로,요구르트 하나를 먹으며, 고개 숙인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고 싶어요.

미미여사의 책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는데,화자는 영화로도 평이 좋은 것 같아 궁금하네요.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인데, 비가 오면 더 좋겠어요.^^

달사르 2012-05-31 16:27   좋아요 0 | URL
음악 좋지여? ^^ 좋은 음악은 틀어놓지 않았을 때 귓가에 계속 남아 흥얼거려지는 거 같애요. 요녀석도 그런 종류 중 하나!
맞지여. 시골에도 목욕탕이 사라지는 추세지요. 제가 다른 지역에 잠시 있을 때도 같은 걸 느꼈거든요. 근데 이 고향 동네엔 여전히 목욕탕이 대세라서 참 이상타, 생각했거든요. 알고봤더니 어르신들이 목욕탕을 목욕개념이 아니라 친목도모 의미로다 달목욕을 끊고서 다니시더라구요. 무슨 계추 하듯이 말에요. 이게 어른들만 그러면 몇 년 지속되다 말 터인데 이 모임이 재미있는지 젊은 새댁들이 속속 가입해서는 무슨 동호회 하듯이 목욕탕들끼리 계파가 나뉘어서는 봄이면 꽃놀이도 다니고 무슨 행사도 많이 하고 그러더군요. 참 희한한 동네다..생각했는데 요새 들어서는 정감있는 동네다..로 바뀌고 있슴돠. ㅎ

맞지여. 목욕을 하든 찜질을 하든 벌개진 얼굴로 먹는 요구르트, 겁나게 맛있잖아요. 이런 일상적인 조용함이 점점 좋아지는 걸 보니 이제 나이가 들긴 드나봐요. 하하하.

화차는 책이 느낌이 좋아서 영화가 저도 궁금해요. 아마 dvd로 볼 거 같애요. 자목련님도 한 번 보시어요.
 

 

 

 

땀이 났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땀이 흥건하게 났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동료. 그래, 한때 동료였던 녀석이다. 스무살 파릇하던 시절에 건반 치고 드럼 두드리며 돼지 목청 높여 노래 부르던 시절의 동료. 나보다 한 살 어린데다 동향 출신이어서 좀더 정이 갔던 녀석이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녀석은 손에 익은 북과 꽹과리를 놓고 우리 팀에 들어왔고 우린 연습과 공연을 함께 했다. 한참을 연습하다가 시원하게 한 잔 마시는 맥주와 새우깡을 사랑했고 음악을 사랑했고 인생을 사랑했다. 그때의 추억은 아직도 내 마음 한 켠에 소중하게 접혀져 있었고 한동안 펴보지 않았는데 우연히 마주친 녀석 덕분에 기억들이 화들짝 불려나왔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아빠 가게 앞에서 잠시 노닥이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툭 친다. 왠 녀석이지,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니 오랜 옛 동료가 환히 웃고 있는게 아닌가. 내 가운을 훑어보고, 맞은 편의 내 가게를 돌아보더니 누나가 하는거야? 물어본다. 다음에 한번 들르겠다고 했고 그게 오늘이었다. 녀석은 손님인듯 가게를 들어오더니 한다리를 꼬며 편안하게 의자에 앉았다. 대뜸 요새 뭐하냐고 물어본다. 잔가지는 묻지 않는 버릇은 여전하다. 

 

"어..대금..배우는데. 같이 대금 배울래? 너와 대금, 은근히 어울려보여."

 

녀석은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파르르한 까까머리였으며, 얼굴은 여전히 촌놈이었고, 손은 투박하게 큼지막해서 그녀석 손에서 들리는 대금소리가 궁금했다.

 

"대금? 뭐 국악기는 이것저것 다 해봐서.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소리는 날 걸?"

 

가게 한 켠에 놔둔 대금을 꺼내어 녀석에게 건네줬다. 녀석은 그 소리 내기 힘들다는 대금을 그저 휘파람 불듯  휘~ 불었다. 소리가 나지 않을거라 예상하며 웃어줄 준비를 하던 나는 낮게 깔리는 맑은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직도  대금 구멍을 제대로 막지 못해 소리를 제대로 못내는 나와 달리 그 녀석의 굵은 손마디는 사뿐하게 대금 구멍을 막았고 소리는 완벽하게 나왔다.

 

"와. 멋진데? 소리가 아주 좋아. 같이 대금 배우자."

 

"음..난, 그래도 아직까지 노래..하고픈데..실은, 얼마전에 가곡 부르는 모임에 갔던 적이 있거든? 근데 왠지 나와 안 맞아보여서 말았어. 이것저것 재보기나 하고 막상 시작하기가 좀 그러네. 그냥 누나랑 같이 밴드나 만들까? 여전히 신디 잘 치지? 신디는 있어? 난 요새도 가끔 생각해 보는데..내가 그때 음악을 중단한 게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겠어. 아직까지 이렇게 음악을 생각하면 가슴 속이 뜨끈해져 오거든."

 

녀석이 가고난 뒤 주고 간 명함을 봤다. 도예가. 팀해체 후에도 몇 년간 작곡 공부를 더 하던 녀석은 이제 도예가가 되어 있었다. 명함에 적힌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그간 개인 전시회도 열었고 제법 자리를 잡은 눈치다. 도자기를 굽는 손가락은 여전히 작곡의 꿈을 접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그렇게 애틋한 음악이 왠지 예뻐보였다. 갑자기 더워져서 가운을 들춰보니 땀에 젖어 가운이 축축하다. 간만에 몸이 흥건하도록 배인 땀이 반가웠다. 머리도 잊고 가슴도 잊은 음악에의 꿈을 내 몸은 기억하고 있었구나. 스무살의 파릇한 나를 기억해주는 내 몸이라.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반갑다. 내가 나이가 좀더 들어 <은교>의 노시인 만큼 나이가 들어 스무살의 내 기억을 몸이 떠올려준다면, 그때는 혹시 서글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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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04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신디를 다루셨었군요! 와-
약국 문 닫고 밴드 연습하러 가는 달사르님도 근사한데, 달사르님은 다시 밴드할 생각 없으세요? 멋지다..

달사르 2012-05-09 19:28   좋아요 0 | URL
넵! ㅎㅎ 오래전 이야기!

밴드..이제 체력이 딸려서요. ㅎㅎ 제 주위에 보면 트럼펫 하시는 정형외과샘, 밴드에서 기타 치시는 소아과 샘, 첼로 배우는 약사친구 등등이 있는데요. 다들 체력이 좋으시더라구요. 낮에 그렇게 일하고 퇴근해서 또 뭔가를 열씨미 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어요. 저는 지금하는 대금도 벌써 얼마나 많이 빠졌는지..ㅠ.ㅠ

2012-05-09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지 2012-05-0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더워져서 가운을 들춰보니 땀에 젖어 가운이 축축하다. 간만에 몸이 흥건하도록 배인 땀이 반가웠다. 머리도 잊고 가슴도 잊은 음악에의 꿈을 내 몸은 기억하고 있었구나

ㅡ> 얼마 전에 영화를 보는데 예전 나이트 음악이 나오더군요 그때 저도 갑자기 더워지면서 땀에 젖는 똑같은 경험을..시끄럽고 어둡고 멍멍하던 곳에서 지새웠던 그 밤들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더라는;;;

달사르 2012-05-09 19:41   좋아요 0 | URL
ㅎ 신기하지요? 몸이 기억을 하는 옛일을 정신이 뒤늦게 기억하는 걸 체험하고나면, 정신 못지 않게 인간의 육체도 신비한 그 무엇인 있는 거 같애요.

신지님도 같은 경험을 하셨다니 반가운데요? 히힛.

신지 2012-05-04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이 글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또 엉뚱하게 바보같은 댓글을 단 게 아닌지...

제가 대금소리를 알게 된 건 서편제였습니다. 그 후로 국악 cd도 자주 사고 일부로 찾아서 듣곤 하는데 그렇다고 배경지식을 찾아보거나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저는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 직접 보고 싶다, 이런 욕구가 좀처럼 없어서 그점이 저로서는 좀 단점인데) 제가 그동안 느낀 거 하나는, 무사안일로 어영부영 시간 보낸 동안, 나중에 보면 '직접 해보는' 사람들은 차곡차곡 경험이 쌓여서 갑자기 몰라보게 성장해 있더라구요. 뭐든 배우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요

달사르 2012-05-09 19:52   좋아요 0 | URL
아. 서편제. 맞아요. 서편제 나오면서 국악붐이 좀 불었더랬어요. 저는 전설의 고향에서 대금소리를 알았던 거 같애요. 헤.

저도 국악에 대해 배워야겠다, 뭐 음악을 들어야겠다, 란 생각을 안 해봤는데요. 그냥 친구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다 어쩌다..^^ (그래서 그런지 열씨미 다니진 못해요..ㅠ.ㅠ 아..그나저나 손가락이 안 벌어져서 큰일이에요. 수시로 짬짬이 째는데도 어찌그리 안 벌어지는지..저는 중간에 중단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단하더라도 일단 시작했다, 는데 의의를 좀 두는 편이구요. 물론 제대로 못한 게 아깝긴 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한 가지 정도는 하지 않겠나..생각하고 기대를 하는데요. 대금 이걸 좀 제대로 하고 싶은데..손가락이..ㅠ.ㅠ)

탄하 2012-05-0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Mr.Children의 뮤비가 문득 생각났어요.
초로의 아저씨들이 젊은 시절 함께 밴드를 하던 추억으로 의기투합하던...
이 뮤비도 한 때 인기였는데,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 그렇다고 해도 삶 속에서
> 지금 움직이려 하고있어
> 톱니바퀴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 희망의 수만큼 실망은 늘어나겠지
> 그래도 내일 가슴은 떨릴거야
>「무슨 일이 일어날까?」
> 상상해 보는거야
(이게 가사 중 일부였죠)

대금을 배우고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신디에 대금까지...꺄~~!
마침 동료분도 대금을 잘 하시니 함께 퓨전을 하셔도 좋을 것 같은걸요.
혹시 다시 꿈을 펼치게 되시면 그때 공연 티켓 한 장 꼭 보내주세요.^^

달사르 2012-05-09 20:09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하하하. 분홍신님. 제가 이거 보고 아이패드로 지금 검색하고 있어염. 왜냐면, 제가요. 아이패드 샀걸랑요? 에헤헤헤헤헤. 아이패드 사서 뭔갈 빨리 해야는데, 아이패드 배우기 책도 사놨는데, 워낙에 기계치라 뭘하지..뭘하지..하고 있었는데요. ㅎㅎ 유투브! 가 있었군요! 아이패드로 유투브 틀어봐야겠어염. 뉴아이패드! 진짜루 화면이 선명하고 좋은데요.

우헤헤헤. Mr.Children, 음악도 좋군요! 가사는 밴드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진하게 와닿겠어요.

대금..빨랑 운지법을 터득해야는데 손가락이 안 벌어져요, 분홍신님. 흑..

탄하 2012-05-13 11:22   좋아요 0 | URL
오옷! 아이패드! 축하드려요!^^
말씀 속에 마구 상기된 느낌이 전달되 오네요.
그.래.셔. 이번 주말은 아이패드와 함께~!^^

달사르 2012-05-27 22:31   좋아요 0 | URL
^^ 아직도 아이패드 못 쓰고 있어요. 이제 누군가가 퇴원을 곧 하면, 조만간엔 반드시! 불끈!
 

 

1. 잠시

 

잠시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 아니, 세상이 여전히 그대로인 게 이상하다. 나는 바뀌었는데, 세상이 그대로인게 당황스럽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다시 생각하니, 세상이 그대로여서 고맙다.

 

내가 바뀌는 잠시의 시간은 고작 1분일 수도, 한 시간일 수도, 하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잠시의 시간을 우리가 가지는 건 무척 어렵다. 그 잠시의 시간을 위해서 때론 1년이, 때론 10년이, 때론 평생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난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변하는 잠시를 가지게 된걸까.'변하는 잠시'.. 좋다. '변하는 잠시'가 있기에 변하지 않는 것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잠시와 영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엔, 이 둘은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 '변하는 잠시'를 통해 변하지 않는 자연의 소리가 간혹 들리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

 

내가 얼마나 변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오래 바라던 일 일수록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 변화 이전이 도리어 실감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다시금 아플 수도 있고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판단을 전적으로 내가 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갑자기 부지런해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좀더 느리게 갈 확률이 크다. 순간과 영원이 같다면야 느리게 가는 발걸음이 더 빠를 수도 있게 되니까.

 

 

2.

 

퇴근 후 내 방에 들어온 나는 친구와 약속한 도선생의 <죄와 벌>을 펴들었다. 5월 1일부터 같이 보기로 했지만 미리 한 페이지를 들춰보고선 약간 실망을 했기에 호기심이 반감된 상태였다. 첫 페이지는 이랬다.

 

 

 

 

7월 초 굉장히 무더울 때, 저녁 무렵에 한 청년이 S 골목의 세입자에게 빌려 쓰고 있는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듯 천천히 K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청년이 주인공인 듯한데, 세를 얻어사는 눈치다. 그렇담 '세입자에게 빌려 쓰고 있는' 이 아니고 '세입자로서 빌려 쓰고 있는' 이라든지, 그냥 세입자란 단어를 빼고 '빌려 쓰고 있는' 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님 혹시 골방의 주인이 따로 있고 이 골방을 세 든 사람이 또 따로 있어, 우리의 주인공이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골방을 소위 말하는 전전세로  빌렸단 말인가. 하..러시아에도 전전세의 개념이 있단 말인가..그치만 골방 따위를 전전세로 빌릴 것 같지는 않은데, 책을 더 읽어봐야겠지만 그래도 전전세는 왠지 아닐 거 같다.

 

두번째로 실망한 건, 지명(도로명, 골목명, 다리명 등)을 약어로 지칭한 부분이다. 우리나라 책이든 외국 책이든 소설 류는 특히나 읽을 때 지명을 중요시하며 읽는 내 습성으로 봤을 때 이런 약어가 나오면 책을 조용히 덮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 친구와 같이 읽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대충 읽어본 명작을 다시 제대로 정석으로 읽어보고픈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투정을 부렸더니 친구는 약어로 된 부분을 숨은그림찾기 하듯 찾아보는 재미를 가지라고 조언을 해준다. 내가 워낙 지도를 좋아라하고, 지도를 펴놓고 소설을 보는 스타일임을 익히 아는지라..

 

 

흠..그러지뭐. 내가 죄다 원래 도로명, 원래 골목명, 원래 다리명을 알아내고야 말겠어!! 불끈!

 

 

정자세를 하고 첫페이지를 다시 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옷매무새부터 남루했고 돈까지 없어서 휴학생 신분이었다. 그나마 과외도 끊겼고 집에서 근근이 붙이는 돈도 오지 않아 방값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요행히 팔아치울 물건은 있어서 노파가 운영하는 전당포에 들러 물건을 맡겼고 받은 돈으로 술집을 들렀다. 이때부터 라스콜니코프에게 쯧쯧..소리가 나왔다. 이놈이놈..20대 파릇파릇한 놈이 과외 좀 끊겼으면 노가다라도 해서 학비를 마련하든지 해야지. 벌써부터 전당포나 들락거리고..게다가 그 돈으로 술이나 퍼마시다니..

 

집에 돌아온 라스콜니코프는 전보를 받는데 이 전보 내용에 아..나는 감동을 했다. 우리나라 식 귀남이 신파와 비슷한데 아들 귀남이를 위해서 누이 후남이가 희생을 하고 엄마가 희생을 해서, 엄마는 삯바느질로 번 돈을 귀남이 학비에 보태고, 후남이는 싹퉁머리 부자집에 들어가 힘겹게 과외를 해서 번 돈을 귀남이 생활비로 보내고, 그 와중에 후남이는 추문에 쌓이지만 꿋꿋하게 견뎌내어 오해를 풀고 좋은 집에 혼담이 오고가고, 신랑 될 사람이 후남이를 위해 손을 써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둥, 우리 집의 보물 귀남아, 너를 위해서라면 우리들은 이 시련을 참을 수 있어, 괜찮아, 사랑한다 귀남아..식의 전보였는데 아직도 내 주위에는 이런 엄마(아빠)들이 많다. 사고뭉치 아들을 위해 늙은 육신을 아직까지 꿈지럭거리며 노동을 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주위의 엄마(아빠)들을 보면서 한심하면서도 그 애틋한 마음에 답답했는데 으매...러시아에도 저런 엄마가 있었단 말이지. 에이구..짠해라..

 

내가 두 눈이 크게 떠진 건 이 감동적인 전보를 읽고난 라스콜니코프의 반응부터다. 전보를 읽자마자 미안해하기는 커녕 분개해하는 라스콜니코프는 누이의 결혼에 반대표시를 하면서 그 이유를 열 개도 더 대며 조목조목 (혼자 속으로) 따지기 시작한다. 누가 법대 휴학생 아니랄까봐. 말은 잘한다. 머릿 속에서 생각이 타래처럼 흘러나오는 걸 보면서 누이에 대한 애정으로 인한 분개인지,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인한 분노인지, 자신의 삶에 대한 슬픔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감정들이 뭉뚱거려지면서 엉뚱한 쪽으로 사건이 터지는데, 돈많은 전당포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죄목을 씌워버린 것이다.

 

돈이 너무나도 필요한 라스콜니코프.

돈은 많지만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전당포 노파.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에게 후원해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고 있고,

노파는 자신의 사후를 관리해줄 무덤 관리자 등을 바라며 자신의 돈을 쓰려고 하고 있고,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돈도 아니면서 노파의 허투루 쓰는 듯한 돈에 분개해하고 있다.

그럴 듯한 대의명분까지 만든 라스콜니코프는 한달에 걸쳐 생각을 했고, 생각만으로 이미 죄의 굴레를 덮어쓴 듯 수시로 흠칫거리며 놀라게 된다.

 

노파의 살해는 꿈처럼 몽롱하게 이루어진다.

자다 깨어 꿈결처럼 길을 걷다 노파의 살해 시각을 정하고

또 자다 깨어 살해 도구인 도끼를 얻는 일이라든지 살해 후 집 앞에 사람이 있었음에도 운에 운을 거듭해 아무에게도 눈에 띄이 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든지.

그리고선 다시 잠에 빠지다 깨다를 반복하며 살인의 증거품들을 처리한다. 역시나 꿈인 듯이.

 

열과 오한을 반복하는, 이제는 살인자인 라스콜니코프의 불안한 마음은 읽는 사람을 역시나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덩달아 무서워져서 읽다마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라스콜니코프의 저 살인도 '변하는 잠시'에 들어갈까. 라스콜니코프는 이제 절대로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할텐데. 그의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묘사는 너무 리얼해서 읽다가 깜짝깜짝 놀란다. 내 옆에 살인자가 있는 듯해서 자꾸 두리번거려진다. 이제 1권의 절반도 안 읽었는데 많이 무섭다. 친구가 각오를 하고 읽는다고 한 말의 이유를 알겠다. 근데 무서운데도 나는 오늘 밤에도 조금은 읽을 것 같다. 스스로 선택한 '변하는 잠시' 를 지나친 라스콜니코프의 이후가 궁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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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2-05-0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아내고야 말겠어!! 불끈!에서 그만 하하 웃음이 나와버렸습니다.^^
사실 저도 좀 놀랐는데요, 고전문학에는 K시니 R거리 같은 표현이 없을 것같았거든요.
이런 걸 좀 현대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나봐요.

'변하는 잠시'를 통해 변하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말씀에 참 공감되네요.
이렇게 평소 익숙했던 시간의 개념이 다르게 다가오는 거, 상당히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예요.
좋을 때도 있지만 꼭 좋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고...
다만, 운명같은 뭐에 의해 불행하게 변한 적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무서운 책이지만 무사히 완독하시길..^^

달사르 2012-05-09 20:25   좋아요 0 | URL
이히히히히. 분홍신님, 알아냈어염!!! 이거 자랑해야는데, 빨랑 포스팅 해야는데 말이죠. ^^
제가 하도 갑갑해서 민음사 출판사 말구요. 열린책들 출판사 거도 질러버렸는데요. 거기도 K시니..로 되어 있더군요.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책들은 다 지명이 있었는데 말이죠. 아마 너무 지엽적인 지역이라서 그냥 이니셜로 하고 말았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랬나, 또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자의적으로 수정을 했나..생각 정도 하고 말았어요. 암튼, 나는 알아냈으니 말이죠. 힛.

넵! 변함과 변하지 않음. 이 부분이 저는 늘 궁금해요. '사랑'도 '우정'도 변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변하는 부분이 있어야하니까요. 그래야 자연의 성장 속도에 맞춰서 인간도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연의 여름처럼 인간의 여름, 자연의 가을처럼 인간의 가을, 그리고 다시 봄. 이 회전 속에 변하는 잠시와 변하지 않는 세계가 공존한다 생각해요.

맞지요. 좋을 때도 있지만 꼭 좋지만은 않은 경우도 많은 거 같애요. 후자가 점점더 많아지는 것이 어쩜 인생일지도..

넵! 일단 한 번 다 읽었구요. 다시 한 번 더 읽으려구요. ^^

transient-guest 2012-05-3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쓴 리뷰를 볼때마다 난 뭘 쓰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에 좌절이...ㅋ
죄와벌은 후기 여러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대작이죠. 완독한지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살인'을 전후로 하는 심리묘사이상 그 시대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한줌의 귀족과 토호들 빼고는 모두가 지독하게 가난했던 제정 러시아의 비참함 같은거. 그나저나 '아들'하나에 모든 기대를 걸고 뒷바라지를 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 그렇단 말이죠...

달사르 2012-05-31 19:22   좋아요 0 | URL
이 리뷰도 정식 리뷰와는 느낌이 다르지요? ^^; 리뷰를 쓰다 쓰다 안되서 요새는 그냥 내 스타일대로 막 써버려요. 쓰다보면 대개 에세이 느낌이 나는 잡종리뷰가 되긴 하지만, 그래도 뭐.. (히히. 근데 트란님(애칭 괜찮죠?)이 잘 쓴 리뷰라고 해주시니 어깨가 으쓱으쓱. 하하.)

넵. 전 죄와벌이 '살인' 사건을 다룬 거라는 것도 모르고 읽다가 엄청 무서웠는데요. 후반부의 심리묘사는 무섭기도 했지만 몰입되는 부분이 있어서 후다닥 읽었어요. 트란님은 제정 러시아의 비참함 쪽까지 읽으셨군요. 책을 세밀하게 다시 읽어보면 저도 그런 부분 찾을 수 있을 거 같애요. 안그래도 한번 더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맞죠! '그놈의 아들'이 뭔지..그 아들을 위해 딸이 자신을 희생하는 장면, 그것도 아주 기꺼이..성스럽게..희생하는 장면은 참..안좋더란 말이죠. 쩝..(참, 요새 러시아에선 이혼을 그야말로 밥 먹듯 한다던데 요새는 여성의 인권이 많이 올랐구나..싶어서,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하더군요. 좀 이상한 말이긴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