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이 났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땀이 흥건하게 났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동료. 그래, 한때 동료였던 녀석이다. 스무살 파릇하던 시절에 건반 치고 드럼 두드리며 돼지 목청 높여 노래 부르던 시절의 동료. 나보다 한 살 어린데다 동향 출신이어서 좀더 정이 갔던 녀석이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녀석은 손에 익은 북과 꽹과리를 놓고 우리 팀에 들어왔고 우린 연습과 공연을 함께 했다. 한참을 연습하다가 시원하게 한 잔 마시는 맥주와 새우깡을 사랑했고 음악을 사랑했고 인생을 사랑했다. 그때의 추억은 아직도 내 마음 한 켠에 소중하게 접혀져 있었고 한동안 펴보지 않았는데 우연히 마주친 녀석 덕분에 기억들이 화들짝 불려나왔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아빠 가게 앞에서 잠시 노닥이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툭 친다. 왠 녀석이지,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니 오랜 옛 동료가 환히 웃고 있는게 아닌가. 내 가운을 훑어보고, 맞은 편의 내 가게를 돌아보더니 누나가 하는거야? 물어본다. 다음에 한번 들르겠다고 했고 그게 오늘이었다. 녀석은 손님인듯 가게를 들어오더니 한다리를 꼬며 편안하게 의자에 앉았다. 대뜸 요새 뭐하냐고 물어본다. 잔가지는 묻지 않는 버릇은 여전하다. 

 

"어..대금..배우는데. 같이 대금 배울래? 너와 대금, 은근히 어울려보여."

 

녀석은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파르르한 까까머리였으며, 얼굴은 여전히 촌놈이었고, 손은 투박하게 큼지막해서 그녀석 손에서 들리는 대금소리가 궁금했다.

 

"대금? 뭐 국악기는 이것저것 다 해봐서.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소리는 날 걸?"

 

가게 한 켠에 놔둔 대금을 꺼내어 녀석에게 건네줬다. 녀석은 그 소리 내기 힘들다는 대금을 그저 휘파람 불듯  휘~ 불었다. 소리가 나지 않을거라 예상하며 웃어줄 준비를 하던 나는 낮게 깔리는 맑은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직도  대금 구멍을 제대로 막지 못해 소리를 제대로 못내는 나와 달리 그 녀석의 굵은 손마디는 사뿐하게 대금 구멍을 막았고 소리는 완벽하게 나왔다.

 

"와. 멋진데? 소리가 아주 좋아. 같이 대금 배우자."

 

"음..난, 그래도 아직까지 노래..하고픈데..실은, 얼마전에 가곡 부르는 모임에 갔던 적이 있거든? 근데 왠지 나와 안 맞아보여서 말았어. 이것저것 재보기나 하고 막상 시작하기가 좀 그러네. 그냥 누나랑 같이 밴드나 만들까? 여전히 신디 잘 치지? 신디는 있어? 난 요새도 가끔 생각해 보는데..내가 그때 음악을 중단한 게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겠어. 아직까지 이렇게 음악을 생각하면 가슴 속이 뜨끈해져 오거든."

 

녀석이 가고난 뒤 주고 간 명함을 봤다. 도예가. 팀해체 후에도 몇 년간 작곡 공부를 더 하던 녀석은 이제 도예가가 되어 있었다. 명함에 적힌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그간 개인 전시회도 열었고 제법 자리를 잡은 눈치다. 도자기를 굽는 손가락은 여전히 작곡의 꿈을 접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그렇게 애틋한 음악이 왠지 예뻐보였다. 갑자기 더워져서 가운을 들춰보니 땀에 젖어 가운이 축축하다. 간만에 몸이 흥건하도록 배인 땀이 반가웠다. 머리도 잊고 가슴도 잊은 음악에의 꿈을 내 몸은 기억하고 있었구나. 스무살의 파릇한 나를 기억해주는 내 몸이라.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반갑다. 내가 나이가 좀더 들어 <은교>의 노시인 만큼 나이가 들어 스무살의 내 기억을 몸이 떠올려준다면, 그때는 혹시 서글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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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04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신디를 다루셨었군요! 와-
약국 문 닫고 밴드 연습하러 가는 달사르님도 근사한데, 달사르님은 다시 밴드할 생각 없으세요? 멋지다..

달사르 2012-05-09 19:28   좋아요 0 | URL
넵! ㅎㅎ 오래전 이야기!

밴드..이제 체력이 딸려서요. ㅎㅎ 제 주위에 보면 트럼펫 하시는 정형외과샘, 밴드에서 기타 치시는 소아과 샘, 첼로 배우는 약사친구 등등이 있는데요. 다들 체력이 좋으시더라구요. 낮에 그렇게 일하고 퇴근해서 또 뭔가를 열씨미 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어요. 저는 지금하는 대금도 벌써 얼마나 많이 빠졌는지..ㅠ.ㅠ

2012-05-09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지 2012-05-0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더워져서 가운을 들춰보니 땀에 젖어 가운이 축축하다. 간만에 몸이 흥건하도록 배인 땀이 반가웠다. 머리도 잊고 가슴도 잊은 음악에의 꿈을 내 몸은 기억하고 있었구나

ㅡ> 얼마 전에 영화를 보는데 예전 나이트 음악이 나오더군요 그때 저도 갑자기 더워지면서 땀에 젖는 똑같은 경험을..시끄럽고 어둡고 멍멍하던 곳에서 지새웠던 그 밤들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더라는;;;

달사르 2012-05-09 19:41   좋아요 0 | URL
ㅎ 신기하지요? 몸이 기억을 하는 옛일을 정신이 뒤늦게 기억하는 걸 체험하고나면, 정신 못지 않게 인간의 육체도 신비한 그 무엇인 있는 거 같애요.

신지님도 같은 경험을 하셨다니 반가운데요? 히힛.

신지 2012-05-04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이 글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또 엉뚱하게 바보같은 댓글을 단 게 아닌지...

제가 대금소리를 알게 된 건 서편제였습니다. 그 후로 국악 cd도 자주 사고 일부로 찾아서 듣곤 하는데 그렇다고 배경지식을 찾아보거나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저는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 직접 보고 싶다, 이런 욕구가 좀처럼 없어서 그점이 저로서는 좀 단점인데) 제가 그동안 느낀 거 하나는, 무사안일로 어영부영 시간 보낸 동안, 나중에 보면 '직접 해보는' 사람들은 차곡차곡 경험이 쌓여서 갑자기 몰라보게 성장해 있더라구요. 뭐든 배우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요

달사르 2012-05-09 19:52   좋아요 0 | URL
아. 서편제. 맞아요. 서편제 나오면서 국악붐이 좀 불었더랬어요. 저는 전설의 고향에서 대금소리를 알았던 거 같애요. 헤.

저도 국악에 대해 배워야겠다, 뭐 음악을 들어야겠다, 란 생각을 안 해봤는데요. 그냥 친구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다 어쩌다..^^ (그래서 그런지 열씨미 다니진 못해요..ㅠ.ㅠ 아..그나저나 손가락이 안 벌어져서 큰일이에요. 수시로 짬짬이 째는데도 어찌그리 안 벌어지는지..저는 중간에 중단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단하더라도 일단 시작했다, 는데 의의를 좀 두는 편이구요. 물론 제대로 못한 게 아깝긴 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한 가지 정도는 하지 않겠나..생각하고 기대를 하는데요. 대금 이걸 좀 제대로 하고 싶은데..손가락이..ㅠ.ㅠ)

탄하 2012-05-0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Mr.Children의 뮤비가 문득 생각났어요.
초로의 아저씨들이 젊은 시절 함께 밴드를 하던 추억으로 의기투합하던...
이 뮤비도 한 때 인기였는데,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 그렇다고 해도 삶 속에서
> 지금 움직이려 하고있어
> 톱니바퀴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 희망의 수만큼 실망은 늘어나겠지
> 그래도 내일 가슴은 떨릴거야
>「무슨 일이 일어날까?」
> 상상해 보는거야
(이게 가사 중 일부였죠)

대금을 배우고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신디에 대금까지...꺄~~!
마침 동료분도 대금을 잘 하시니 함께 퓨전을 하셔도 좋을 것 같은걸요.
혹시 다시 꿈을 펼치게 되시면 그때 공연 티켓 한 장 꼭 보내주세요.^^

달사르 2012-05-09 20:09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하하하. 분홍신님. 제가 이거 보고 아이패드로 지금 검색하고 있어염. 왜냐면, 제가요. 아이패드 샀걸랑요? 에헤헤헤헤헤. 아이패드 사서 뭔갈 빨리 해야는데, 아이패드 배우기 책도 사놨는데, 워낙에 기계치라 뭘하지..뭘하지..하고 있었는데요. ㅎㅎ 유투브! 가 있었군요! 아이패드로 유투브 틀어봐야겠어염. 뉴아이패드! 진짜루 화면이 선명하고 좋은데요.

우헤헤헤. Mr.Children, 음악도 좋군요! 가사는 밴드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진하게 와닿겠어요.

대금..빨랑 운지법을 터득해야는데 손가락이 안 벌어져요, 분홍신님. 흑..

탄하 2012-05-13 11:22   좋아요 0 | URL
오옷! 아이패드! 축하드려요!^^
말씀 속에 마구 상기된 느낌이 전달되 오네요.
그.래.셔. 이번 주말은 아이패드와 함께~!^^

달사르 2012-05-27 22:31   좋아요 0 | URL
^^ 아직도 아이패드 못 쓰고 있어요. 이제 누군가가 퇴원을 곧 하면, 조만간엔 반드시! 불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