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세라피마의 등줄기에 오싹하게 차가운 기운이 내달렸다. 이리나가 말을 걸어 모아 온 소녀는 전부 고아들이다. 아무리 비슷한 처지의 아이가 많은 시절이라곤 해도 이게 우연일 리 없다. 죽어도 슬퍼할 자가 아무도 없는 고아를 저격병으로 키운다는 발상. 즉,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사병死兵'을 키우겠다는 발상 아닌가. 세라피마는 머릿속에 떠오른 잔혹한 발상에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이리나에게서는 그런 인상을 씻어줄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싸울 것인가, 죽을 것인가. 이리나의 가치 기준은 오로지 그것이다.                 p.84

 

1942년 2월, 초목이 움트는 향기와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장작 패는 소리가 들리는 소소한 활기로 가득한 작은 농촌 마을. 이바노프스카야는 주민 수가 고작 마흔에 불과한 마을이다.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열여섯 소녀 세라피마는 단발식 소총을 거머쥐고 사슴을 사냥하는 중이다. 그녀는 고등교육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가을이 되면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전쟁 중이었지만 마을이 위치가 중계 지점이었기에, 사람들은 멀리서 울리는 포성을 들으면서도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엄마와 사냥을 마치고 마을로 향했을 때 그 모든 평화가 사라지고 만다. 마을을 급습한 독일군에 의해 엄마와 마을 사람들 전부가 사살되고, 뒤늦게 나타난 붉은 군대 덕분에 세라피마만 겨우 목숨을 건진다. 저격병 출신의 지휘관 아리나는 세라피마에게 '싸우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 질문을 건네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녀는 저격병이 되어 복수를 꿈꾸게 된다.

 

세라피마는 이리나가 교관으로 있는 여성 저격병 훈련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녀들과 만난다. 모두 적에 의해 가족을 잃었고, 고향을 잃었고, 이리나가 제시한 싸움과 죽음의 선택지 사이에서 싸우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혹독하고,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점차 어엿한 저격병으로 거듭나게 된다. 매일 욕설을 듣고 철두철미한 훈련을 주입 받다 보니 적에 대한 결의만이 단단해졌고, 이탈할 생각할 여유 조차 전혀 없었다. 그 속에서 소녀들은 뜨거운 전우애를 나누며, 서로를 의지하고 마음을 다진다. 그리고 같은 소대가 될 학생들과 동료들, 능욕당하고 살해당하는 여성들이 더 이상 없도록 그들을 지키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라피마가 소속된 저격소대는 드디어 임무를 받고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로 향한다. 그곳은 소련 병사의 평균 생존시간이 24시간에, 7초마다 한 명의 독일 병사가 죽어나간다는 격전지였다. 세라피마는 저격병으로서 전쟁의 끔찍함을 어떻게 이겨내고, 겪어 낼 것인가. 저격병이 되기로 결의했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까.

 

 

 

나는 붉은 군대 병사다. 나는 나치에게 복수하기 위해 싸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는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대답해라.
저는 여성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그래, 나는 여성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야나는 모르는 독일인 소년을 지켜냈다.
여성을 지키기 위해 싸워라, 세라피마 동지. 망설이지 말고 적을 죽여라.
하지만 나는 너처럼은 되지 않아. 너처럼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아.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사람의 도리를 행할 거야.              p.497

 

지금 일본 문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신인 아이사카 토마의 데뷔작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땅에서 80년 전에 벌어졌던 독소전쟁을 소재로 하는 전쟁소설이자 반전소설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3개월 전에 출간되었다. 아마추어로 소설을 쓰던 작가가 현실에서 벌어질 참혹한 전쟁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로 인해 시의성 있게 주목받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과거를 돌아보고, 현실의 전쟁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쟁은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속 풍경들을 산산이 부순다. 공원에서 순진무구하게 노는 아이들, 아무런 격식 없이 다정하게 웃는 연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도시 전체가 불타 무너지고 파괴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 그대로 죽어서 절대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폐허에 둘러싸여 꿈도 희망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전쟁의 참상이다.

 

'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 중 소련만이 그 많은 여군을 전투병으로 동원하였는가'라는 의문을 오래 전부터 가졌던 작가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전쟁을 그린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 속 여성들은 저격병으로 교육받으면서, 전장에 나가 싸우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지. 바로 그 점이 여타의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과의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핑계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상황이 닥쳐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을 지키며 어긋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는 한해 전쟁으로 24만 명이 죽어나가는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가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를 망치는 말 아이를 구하는 말 - 1만 명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범죄심리학자가 전하는
데구치 야스유키 지음, 김지윤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 우리 애 잘 되라고 한 말이죠." 비행청소년 보호자들에게 이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자식 교육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학대한 적도 없고, 부족하지 않게 먹여 살리려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아이를 위해서, 내 아이 잘되라고 잔소리 좀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부모가 참 많았습니다. 그들은 경찰로부터 자녀의 범죄 사실을 들었음에도 충격받은 표정으로 "우리 아이가 그럴 리 없어"라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렇다면 잘 되라고 한 부모의 행동과 말이 왜 아이의 비행과 범죄로 이어지는 걸까요?         p.18

 

지극히 평범한 중학교 2학년인 와타루는 지금까지 특별히 무시당하거나 따돌림 당하는 일 없이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 그의 고민은 자기주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부모님이 말버릇처럼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라고 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친구들 기분을 살피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의견을 말하기 전에도 눈치를 보았고,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습 절도범인 미쓰야와 비밀을 공유하게 되면서 그와 함께 장난처럼 대형 서점에서 책을 훔치기 시작한다. 이후 버릇처럼 절도 행위가 이어지게 되는데, 부모의 말을 잘 듣던 온순한 중학생을 이렇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부모의 생선가게 일을 도우며 자랐던 유카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항하고, 곧바로 식품회사에 취직한다. 그런데 회사 공금을 횡령하다 3년째 회계 감사에서 범행이 발각당하게 되는데, 남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씨의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 외에도 이 책에는 의대를 준비하던 고등학생 코우지는 3D 프린터로 만든 총으로 부모를 공격하고,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삼남매의 장녀가 어느 날부터 원조교제를 시작해 결국 소년분류심사원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밖에 없는 손녀 교육에 온 정성을 다한 할머니의 사랑을 받던 손녀가 대학생이 되어 노인들을 대상으로 투자를 유도해 500만 엔이라는 거액의 사기를 치는 등 이 책에는 별다른 문제 행동이 없던 아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일부는 재구성되었지만, 모두 실제 비행 사례들이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도 자녀교육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육아죠. 사는 일이 바빠 여유가 없으면 "빨리 좀 해!" 재촉하게 되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하며 아이에게 감정을 폭발하는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실수하고 실패도 하면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부모가 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부모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아이에게 심한 말을 하거나 기분 나쁜 말투로 쏘아붙였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바로 아이에게 솔직히 사과하세요... 부모와 아이 모두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p.229

 

자식의 범죄 사실이 밝혀지고 나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주위에서도 '그렇게 착한 아이가 도대체 왜?', '보기만 해도 부러울 만큼 이상적인 가족이었는데...'라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이의 비행 행동에 이르는 심리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1만 명이 넘는 범죄자와 비행청소년의 심리를 분석해온 범죄심리학자이자 아동심리학 교수이다. 그는 폭력이나 방임, 빈곤 등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이 비행과 연관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문제 행동 기저에 ‘부모가 던진 말 한마디’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정한 말이 아이의 개성을 파괴하거나, 걱정의 말이 아이의 공감능력을 방해하는 등 부모가 옳다고 믿는 것이 반드시 아이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부모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을 것 같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심결에 던진 말 한마디가 아이의 미래를 잘못된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부모들이 알게 된다면, 더 늦지 않게 아이와의 신뢰관계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정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육아환경도 다르다. 하지만, 부모와 아이의 단단한 신뢰관계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가정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은 평범한 아이가 비행을 저지르게 된 실제 사례를 분석해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어긋나게 된 결정적인 말, 즉 ‘아이를 망치는 말’에 대해서 알려준다. 아이의 마음과 행동이 궁금한 부모부터 사춘기가 시작되며 아이와 소통이 막막해진 부모 모두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잘되라고 한 부모의 행동과 말이 왜 아이의 비행과 범죄로 이어지는 것인지,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 듦을 받아들일 때 얻는 것들
나카무라 쓰네코.오쿠다 히로미 지음, 박은주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쿠다 : 불필요한 인간관계는 늙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50대부터 하나씩 내려놓으면 편해질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사회인으로서 생활하는 것도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녀들은 부모 품을 떠나 독립하니 지켜야 하는 것들이 점점 적어지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제껏 무리해서 만나야만 했던 사람도 줄어들겠죠.
나키무라 : 그래요. 나이를 들수록 생활을 위해,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참을 일이 점점 줄어들지요...                p.83~84

 

'늙음'은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다.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달로 고령화 사회가 되자, '100세 시대'라는 말로 미리 노후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인생 100세 시대라는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노년기는 한참 일할 때와는 다른 고민과 심신의 변화가 찾아오게 마련이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우리 몸의 시스템은 40대 이후로 확연하게 달라진다고 하던데, 주위를 둘러보면 40대가 되면서 확실히 체력이며, 건강이 달라진 걸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40대가 되면 성호르몬과 신체활동량이 줄어들면서 근육 및 근력이 저하되고 생체 효소의 활성도 떨어짐에 따라 다양한 생리적 변화가 일어난다는데.. 이는 50대, 60대가 되어가면서 점점더 가속화 될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서 좀더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에너지 넘치게 삶을 대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한해 한해 지나며 책임감도, 스트레스도 누적되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아지니 말이다. 그러니 나 자신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조금 더 현명하게 나이 드는 것의 즐거움을 배우고, 그로인해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해 배울 필요도 있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두 저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늘어나는 삶의 경험, 세월과 함께 켜켜이 쌓인 연륜을 고스란히 대화에 담아내고 있어 40대 이후의 독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나카무라 : 그렇지요. 하고 싶은 일을 미루는 것만큼은 피하는 것이 좋답니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마음껏 해보면 좋겠어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요. 보통 우리는 동조 현상에 휘둘리기도 하는데요. 조금이라도 주위 사람과 다르게 행동하면 '괴짜'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말해요. 사회 분위기상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미루는 게 더 좋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었으면 해요. 최대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간다면 평균수명보다 짧은 생을 맞이하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을 거예요.               p.145~146

 

이 책은 90대의 정신과 전문의와 50대 정신과 전문의가 만나서 '어떻게 나이 든 삶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담고 있다. 나카무라 쓰네코는 90세까지 풀타임으로 진료 업무를 계속 했고, 이제 92세로 은퇴하고 평온한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오쿠다 히로미는 원래 내과 전문의였으나 2000년에 나카무라 쓰네코 선생님을 만나 정신건강의학과로 전과했고,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두 사람은 일적으로도 삶적으로도 선배이자 후배로 깊은 교감을 나누는 관계라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책 속 질문과 조언이 더없이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중년과 노년의 변곡점에 서 있는 오쿠다 히로미가 중장년층을 대신해, 90대의 삶도 적극적으로 꾸려가고 있는 나카무라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고, 의견을 구한다. 두 사람 사이에 무려 40여 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있지만, 각자 살아온 삶이 다른 것을 뛰어 넘어 공감되고 교차되는 부분들도 많아서 더욱 훌륭한 대화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요즘은 나이와 상관없이 정정하게 계속 일을 하고, 활동을 해내는 노년들이 많은 편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 싶으면서도, 어느 순간 아직 남아 있는 인생이 더 길구나 새삼 느껴진다.  그렇다면 긴 인생, 나는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노화, 고독, 관계, 죽음 등 누구나 노년을 앞두고 고민하게 되는 부분들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이든다는 것의 의미,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 나이 듦을 받아들일 때 얻는 것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자연에는 미묘한 자력(磁力)이 있다고 믿었다. 오래전부터 가졌던 믿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그 자력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고, 그 방향은 그가 걸어온 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그토록 단순하게 펼쳐진 부처스 크로싱에서 지낸 단 며칠 동안, 자연이 가진 강박적인 충동의 힘은 너무나도 강해서 그의 의지, 습관, 생각에 충격을 주기 충분하다는 걸 느꼈다... 아직 그 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강이 그의 본능이 추구해 왔던 자연과 자유를 그 자신과 갈라놓는 광대한 경계선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60~61

 

대학생인 윌 앤드루스는 자연주의에 빠져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가진 돈을 모아 서부로 향한다. 그리고 캔자스 산골 마을 부처스 크로싱에 도착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하고 평원으로 나가면 신세 망친다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냥하는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삶에서 친숙했던 모든 것 아래 잠재되어 있는 그것, 세상의 원천을 찾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사냥꾼인 밀러를 찾아가 서부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하고, 그에게 들소 사냥에 대해서 듣게 된다.

 

마침 밀러는 작은 규모로 사냥대를 꾸릴 생각이었기에, 앤드루스는 가진 1400달러 중 거의 반인 600달러를 그에게 투자하기로 한다. 그들은 로키산맥에 숨겨져 있다는 들소 떼의 은신처를 습격해 한몫 크게 잡아 보기로 한다. 마을을 떠나기 전 만났던 창녀 프랜신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돌아오겠죠.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젊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졌겠죠." 라고. 어쩌면 그녀의 이 말은 앤드루스를 기다리고 있을 내일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이러한 조언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그들은 긴 여정을 시작하고, 들소 사냥은 앤드루스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경험을 그에게 선사한다. 겨우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고 고귀하며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했던 존재가 속절없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죽은 고깃덩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그는 자기 안에 있던 무언가가 파괴되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가파른 산이 사방을 에워싼 넓고 굽은 고원에서 수 개월을 보내면서 그는 점점 시간 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성을 잃어간다.

 

 

 

"젊은 사람들은." 맥도널드는 업신여기듯 말했다. "찾아낼 무언가가 있다고 늘 생각하지... 글쎄, 그런 건 없어." 맥도널드가 말했다. "자네는 거짓 속에서 태어나고, 보살펴지고, 젖을 떼지. 학교에서는 더 멋진 거짓을 배우고. 인생 전부를 거짓 속에서 살다가 죽을 때쯤이면 깨닫지. 인생에는 자네 자신,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었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자네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 거짓이 자네한테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지. 그제야 자네는 세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 그 비밀을 아는 건 자네뿐이니까.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어. 이미 너무 늙었거든."              p.306

 

<스토너>라는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던 작가 존 윌리엄스의 마지막 미번역작이 출간되었다. 존 윌리엄스는 일평생 단 네 편의 소설만 발표했는데, 데뷔작인 <오직 밤뿐인>부터 <부처스 크로싱>, <스토너>, <아우구스투스>까지 모두 국내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에 나온 <부처스 크로싱>은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를 쓰기 5년 전에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택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는데, 기존에 만났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어떤 이야기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잔혹한 들소 사냥, 대자연 속에서의 험난한 야생 생활, 지옥과도 같은 산속의 겨울을 버텨내고 다시 부처스 크로싱으로 돌아왔을 때 보스턴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 대학생 앤드루스는 무엇을 얻었을까. 그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부처스 크로싱'은 존 윌리엄스가 만든 가상의 산골 마을이다. 하지만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 전반에 걸친 자연에 대한 그림같은 묘사는 우리를 1870년대 캔자스 서부로 데려간다. 2,3000마리나 되는 들소가 이동하는 장면은 페이지로 읽어도 장관이었다. 빽빽하게 자란 소나무 아래, 검은 얼룩이 계곡 위를 움직이는 풍경이라니, 얼룩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에 움직이는 거대한 바다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들소가 나타나기 바로 전 광경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땅의 고요와 정적, 완전한 평온같은 시간이었기에 이 대비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잔혹하지만 우아하고, 고요함 속에서도 드라마틱한 감정 변화를 느끼게 해주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긴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스토너>의 감동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박물관 붉은 박물관 시리즈 1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 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증거품이 여기 오면 나는 그 사건을 한 번 더 검토하지. 물론 검토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어. 그런 관점을 바탕으로 사건을 바라보면 해결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거야."
히이로 사에코가 늘 수사 자료를 읽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미궁에 빠진 사건을 재수사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p.51

 

전 여자친구인 마이코에게 반년 만에 연락이 왔다. '이런 문제로 상담할 수 있는 상대는 당신밖에 없다'는 그녀의 말에 다카미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한다. 그런데 아파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제복 차림의 경찰관이 서 있었다. 4층에 사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뒷마당으로 떨어졌다는 거였다. 불길한 예감에 이름을 확인했는데, 마이코였다. 누군가 그녀를 베란다에서 밀어 떨어뜨린 거였다. 돌아오는 길에 다카미는 노트를 한 권 사서 오늘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마이코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경찰은 믿을 수 없었고, 법학부 학생으로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은 쭉 해 왔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생각이다. 그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범인을 추적하고, 그 과정을 담은 일기를 남긴다. 그러나 '붉은 박물관'에 증거품으로 들어온 그 일기 안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데, 이는 <복수 일기>라는 작품이다.

 

1987년 12월 젊은 남자의 피살체가 하천부지에서 발견된다. 둔기에 의해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고, 피해자의 옷에 다른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용의자가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을 알아내지 못해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십육 년이 지난 현재 한 당시와 같은 나이의 대학원생이 동일한 장소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시체 유기 현황부터 상황, 둔기의 형태, 사망 추정 일시 등 모든 정황이 이십육 년 전 사건과 일치하는 걸로 미루어 수사팀은 동일범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 수사1과는 '붉은 박물관'에 방문해 미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가져가고, 다시 수사가 시작된다. 과연 동일범이 이십육 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두 번 벌인 범죄일까, 아니면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따라한 모방 범죄일까? 범인이 검거되고 나서 이후에 밝혀진 범행 동기가 전혀 예상 밖의 그것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던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 임팩트가 상당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도 있구나 감탄했던 작품으로 <죽음에 이르는 질문>이라는 작품이다.

 

 

 

교환 살인의 공범자가 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돌아가는 JR 사이쿄선의 전차 안에서 사토시는 생각을 해 봤다. 교환 살인의 공범자들은 서로 신뢰 관계를 구축한 운명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부부와도 비슷했다. 아니, 부부보다도 더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이혼할 수도 있지만, 교환 살인의 공범자들은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헤어진다는 것, 즉 상대를 배신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범죄가 발각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결혼식에서 등장하는 이 표현은 부부보다도 오히려 교환 살인의 공범자들에게 더 잘 어울릴 것이다.            p.232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 통칭 '붉은 박물관'은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사건 발생 이후 일정 기간이 경과한 뒤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붉은 박물관의 직원은 아름다운 외모의 관장 히이로 사에코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수사 1과에서 좌천되어 온 조수 데라다 사토시 두 명뿐이다. 히에로 사에코는 커리어라는 고위직 경찰임에도 이곳에서 수년 째 근무 중이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인형같이 차갑고 단정한 외모로 천재적인 추리 능력을 가졌지만 타인과의 의사 소통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데라다 사토시는 형사를 천직으로 여겼기에 언젠가는 수사 현장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어떻게든 범죄 자료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두 사람은 과거 사건 관련 정보들을 등록해 데이터베이스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을 하는 중인데, 수사 서류를 검토하다 미제 사건의 재수사를 하게 되고, 그들의 활약으로 수십 년 동안 감춰졌던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수록된 다섯 작품 모두 예측 불가능한 반전과 트릭, 치밀한 구성과 복선,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수준 높은 추리 과정도 매우 흥미로웠고, 다섯 가지 사건이 연작 형식으로 이어지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완성도가 뛰어나다. 오야마 세이이치로는 본격 미스터리의 거장으로 <붉은 박물관>은 두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붉은 박물관’은 작가가 영국의 범죄 박물관, 통칭 ‘검은 박물관(Black Museum)’이라 불리는 곳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가상의 범죄 자료관인데,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미제 사건을 다루는 추리 소설은 많이 있어 왔지만, 이렇게 범죄 자료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는 거의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독특한 성격의 관장 히이로 사에코도, 그의 조수 데라다 사토시도 생생하게 잘 구축된 캐릭터라 시리즈로 계속 이야기가 이어져도 좋을 것 같다고 읽는 동안 생각했다. 다행히 이미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나와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벌써부터 설레이는 마음이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기억 속의 유괴>도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어서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엘러리 퀸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