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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평점 :
그는 자연에는 미묘한 자력(磁力)이 있다고 믿었다. 오래전부터 가졌던 믿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그 자력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고, 그 방향은 그가 걸어온 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그토록 단순하게 펼쳐진 부처스 크로싱에서 지낸 단 며칠 동안, 자연이 가진 강박적인 충동의 힘은 너무나도 강해서 그의 의지, 습관, 생각에 충격을 주기 충분하다는 걸 느꼈다... 아직 그 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강이 그의 본능이 추구해 왔던 자연과 자유를 그 자신과 갈라놓는 광대한 경계선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60~61
대학생인 윌 앤드루스는 자연주의에 빠져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가진 돈을 모아 서부로 향한다. 그리고 캔자스 산골 마을 부처스 크로싱에 도착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하고 평원으로 나가면 신세 망친다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냥하는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삶에서 친숙했던 모든 것 아래 잠재되어 있는 그것, 세상의 원천을 찾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사냥꾼인 밀러를 찾아가 서부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하고, 그에게 들소 사냥에 대해서 듣게 된다.
마침 밀러는 작은 규모로 사냥대를 꾸릴 생각이었기에, 앤드루스는 가진 1400달러 중 거의 반인 600달러를 그에게 투자하기로 한다. 그들은 로키산맥에 숨겨져 있다는 들소 떼의 은신처를 습격해 한몫 크게 잡아 보기로 한다. 마을을 떠나기 전 만났던 창녀 프랜신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돌아오겠죠.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젊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졌겠죠." 라고. 어쩌면 그녀의 이 말은 앤드루스를 기다리고 있을 내일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이러한 조언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그들은 긴 여정을 시작하고, 들소 사냥은 앤드루스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경험을 그에게 선사한다. 겨우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고 고귀하며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했던 존재가 속절없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죽은 고깃덩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그는 자기 안에 있던 무언가가 파괴되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가파른 산이 사방을 에워싼 넓고 굽은 고원에서 수 개월을 보내면서 그는 점점 시간 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성을 잃어간다.
"젊은 사람들은." 맥도널드는 업신여기듯 말했다. "찾아낼 무언가가 있다고 늘 생각하지... 글쎄, 그런 건 없어." 맥도널드가 말했다. "자네는 거짓 속에서 태어나고, 보살펴지고, 젖을 떼지. 학교에서는 더 멋진 거짓을 배우고. 인생 전부를 거짓 속에서 살다가 죽을 때쯤이면 깨닫지. 인생에는 자네 자신,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었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자네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 거짓이 자네한테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지. 그제야 자네는 세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 그 비밀을 아는 건 자네뿐이니까.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어. 이미 너무 늙었거든." p.306
<스토너>라는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던 작가 존 윌리엄스의 마지막 미번역작이 출간되었다. 존 윌리엄스는 일평생 단 네 편의 소설만 발표했는데, 데뷔작인 <오직 밤뿐인>부터 <부처스 크로싱>, <스토너>, <아우구스투스>까지 모두 국내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에 나온 <부처스 크로싱>은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를 쓰기 5년 전에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택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는데, 기존에 만났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어떤 이야기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잔혹한 들소 사냥, 대자연 속에서의 험난한 야생 생활, 지옥과도 같은 산속의 겨울을 버텨내고 다시 부처스 크로싱으로 돌아왔을 때 보스턴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 대학생 앤드루스는 무엇을 얻었을까. 그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부처스 크로싱'은 존 윌리엄스가 만든 가상의 산골 마을이다. 하지만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 전반에 걸친 자연에 대한 그림같은 묘사는 우리를 1870년대 캔자스 서부로 데려간다. 2,3000마리나 되는 들소가 이동하는 장면은 페이지로 읽어도 장관이었다. 빽빽하게 자란 소나무 아래, 검은 얼룩이 계곡 위를 움직이는 풍경이라니, 얼룩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에 움직이는 거대한 바다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들소가 나타나기 바로 전 광경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땅의 고요와 정적, 완전한 평온같은 시간이었기에 이 대비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잔혹하지만 우아하고, 고요함 속에서도 드라마틱한 감정 변화를 느끼게 해주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긴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스토너>의 감동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