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40일 - 손으로 쓰고 그린
밥장 지음 / 시루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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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에서 가장 마음을 움켜잡는다. 동틀 때는 또 어떨지.

벌써부터 설렌다. 평생 우려먹을 이야기 하나를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많이 다니기도 하고, 관련 에세이들도 많이 읽어본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 없이, 글과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여행기는 난생 처음이다.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여행일기이자관찰일기로서 손으로 쓰고 그린 호주의 구석구석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현장에서 손으로 쓰고 그린 페이지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어, 더욱 현장감 넘치고 생생한 일기같은 느낌이다. 여행 에세이이자, 함께 여행하는 인물들의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 르포르타주이기도 한, 독특한 작품이 탄생했다.

밥장은 올해 초 허영만 화백과 저녁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느닷없이 호주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메신저로 왕복 항공권을 받는다. 알고 보니 허영만 화백과 일행들은 오래 전부터 '집단 가출'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었단다. 요트로 우리나라 해안을 한 바퀴 돌기도 했고,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하기도 했고, 뉴질랜드와 캐나다도 다녀왔다고 한다. 올해는 캠퍼밴을 타고 멜버른에서 사막을 가로지른 뒤 다윈을 거쳐 퍼스까지 가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멤버로 밥장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멤버는 총 여섯 명, 형님(허영만), 봉주르(형님의 오랜 친구 김봉주), 총무(아웃도어 브랜드에서 갓 퇴사한 정상욱), 용권 형(사진과 동영상을 맡은 정용권), 태훈 작가(일정 챙기고 글 쓰려고 뉴질랜드에서 온 김태훈) 그리고 막내 밥장까지. 이들은 40일 동안 24시간 내내 차 안에서 먹고 자야 한다. 얼결에 합류하게 된 여행에서 사십 대 후반에 막내 역할을 맡게 된 밥장은, 이 참에 허영만과 형님들을 관찰해보기로 마음 먹는다.

캠퍼밴 생활은 결혼 생활과 몹시 닮았다.

좋아도 같은 공간, 싫어도 같은 공간에서 버텨야 한다.

문제가 생겨도 외부 전문가를 모시거나, 충고를 하거나, 투정을 들어줄 이도 없다.

마치 달 기지에 남은 우주인처럼 같은 물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이들의 여행에 관한 스토리는 허영만 화백의 블로그에서도 만나볼 수 있고, 책으로도 출간되어 있다. 밥장의 책보다 한 달 먼저 나왔다.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여정은 사진으로 기록된 스토리가 메인이고 중간중간 허영만 화백의 만화 일러스트가 추가되어 있는 스토리라.. 밥장의 책과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 호주는 자연이 잘 보존된 아웃백(오지)를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여행지이기도 한데, 이곳에서는 빛나는 밤하늘의 은하수, 그랜드캐니언 마운틴,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룰루와 붉은 사막에서의 석양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캠퍼밴을 통한 여행이라니...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멋지게만 느껴진다. 물론 밥장의 기록을 통해 만나게 되는 정말 리얼하고 상세한 여행기를 보면, 여행이란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현실적인 부분들이 더욱 여행에 대한 생생한 그림이 그려져서 흥미진진했다.

이들의 여행은 멜버른, 애들레이드, 앨리스스피링스, 다윈, 퍼스를 거치는 약 9,000km의 대장정으로 호주 남부에서 중심을 거쳐 북부, 그리고 다시 서부로 내려오는 긴 여정이었다. 밥장이 막내인 덕에 본의 아니게 요리를 거의 담당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자잘한 에피소드들도 너무 재미있었다. 여행이란 진짜 자잘한 허드렛일이 모인 것뿐이라는 그의 멘트가 고스란히 공감되는 에피소드들이었다. 그리고 밥장의 일기 중간 중간에 '영만짤'이라고 허영만 화백이 그날 던진 명대사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우스갯소리처럼 보이지만 너무도 예리하고 은유적인 부분들이 많아 그것만 따로 찾아서 읽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나도 여행을 꽤 다녀봤지만, 항상 '남는 건 사진 밖에 없어.'라면서 어디를 가든, 어느 순간이든 사진 찍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더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더 멋진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 카메라 앵글 너머로만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물론 그게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면 정말 사진으로만 확인되는 순간이 생기게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다 보면, 그 순간을 눈에 담고, 마음에 기록하지는 못하게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나도 다음 번 여행지에서는, 밥장처럼 손으로 쓰고,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조금 더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고, 맛있는 음식들을 눈에도 담아 보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들을 가슴으로도 기억해 보는 거다. 손으로 쓰고 그린 이 여행 에세이는, 내가 그 동안 만나왔던 그 어떤 여행에 관련된 책과도 달랐던 것 같다. 특별한 경험을 통해, 나의 다음 번 여행도 조금 달라지길, 그리고 이렇게 특별해지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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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미중전쟁 1~2 세트 - 전2권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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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파싸움이란 게 조선시대에만 있는 걸로 생각했어요. 어쩌면 일본인들이 조선에 대한 신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당파싸움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생각한 적도 있고요. 그러니 우리 한국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요즘 한국을 보면 모든 면에서 다 찢어져 있어요. 친미와 친중으로, 보수와 진보로, 영남과 호남으로, 노임과 청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사회에 가치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이 다 돈에 얽매여 있어요. 돈이 제일이다, 돈 없으면 죽는다. 대통령도 결국 돈 때문에 탄핵됐잖아요. 그래서 한국은 돈을 많이 벌수록 더 황폐하고 위험해지기만 해요."

육사 출신으로 워싱턴 세계은행 본부에서 특별조사요원으로 일하는 변호사 김인철은 세계은행의 공적자금이 초단기 투기자본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비엔나로 급파돼 비밀리에 자금세탁 관련 조사를 진행하게 된다. 그는 지원금 유용과 자금세탁의 현황을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스타 펀드매니저 페터 요한슨을 소개 받아 다음 날 관련 정보와 증거를 전달받기로 한다. 약속 시간에 요한슨의 회사로 가지만 그는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고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고, 방에는 아무도 들어간 사람이 없는 걸로 보아 자살로 추정된다. 혼자 사무실에 있다가 문을 걸어 잠근 채 자살했다는 건 틀림없이 누군가와 통화를 했고, 그 결과로 자살을 선택한 걸로 보여 인철은 의문의 자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건을 조사하다 조세회피처로 유명한 카리브해의 케이맨 제도에서 거액의 검은 돈을 쫓게 되고, 그곳에서 트럼프의 선거 캠프에서 발생한 회계 부정 사건을 조사하는 FBI 요원 아이린을 만나 함께 추적을 하게 된다.

 

한편, 북한은 풍계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감행해 세계를 놀라게 하고, 트럼프는 김정은의 도발에 맞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완전히 초토화시킬 전쟁 시나리오를 계획해간다. 그때 북한에 대한 공격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건 전쟁 불가를 외치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들은 공격 초기에 한국 대통령이 작전을 막지만 않는다면, 겁낼 일이 없는 거였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완전히 초토화시킬 대형 블록버스터 계획은 그렇게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지만, 사실 트럼프가 진짜로 노리는 것은 김정은과 북한의 핵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중력이고 미국은 양자역학이야. 두 나라는 섞일 수 없고, 따라서 우리로서도 그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어. 사드도 보게.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해주니 중국이 반발하고, 또다시 중국이 원하는 대로 약속해주니 그게 고스란히 미국의 불만이 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중국을 만족시켰다가 다음에는 미국이 좋아하는 걸 내놓는 식으로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쟁이가 되고, 결국 두 나라 모두 우리에게 등을 돌리게 되어 있어."

25년 전 한반도의 핵개발을 소재로 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김진명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미중러일 4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을 그려낸다. 트럼프의 패권주의, 시진핑의 팽창주의, 푸틴의 열강 복귀, 아베의 군국주의 부활 등이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고 있는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다. 팩트 소설이라는 독보적인 장르를 구축한 작가인 만큼 이번에도 거침없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라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특히나 이 작품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싸드>의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그 종결판으로, 30년 작가 인생을 건 소설이라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싸드THAAD'가 주요한 외교문제로 비화되기 전 싸드 도입으로 인해 벌어질 정치적 역학관계를 예측한 작가의 감각으로 북핵을 둘러싼 동북아 패권의 향방을 소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확고부동한 입장 없이 중국과 미국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이대로 가면 앞으로 정세가 어떻게 될 지를 예측하고, 그에 대한 가상의 시뮬레이션으로 미래를 그려내는 건 오직 김진명 작가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미중러일의 이해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한반도에서, 끊임없이 공포를 조장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하니 말이다. 김진명 작가의 말처럼 사드 보복으로 인해 뒤틀려 있는 한중관계도, 북핵 도발도, 트럼프의 불가측성도, 중국의 경제 보복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분명한 시각이나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저 눈치만 본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 소설로 인해 우리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하거나 하진 않겠지만, 이 작품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모든 정치적인 배경을 무대로 펼쳐지는 극중 스토리 또한 매력적인 미스터리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고 있으니,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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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워터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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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일곱 살에 나는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동생을 구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아니다.

세상에는 물에 끌리는 사람들, 물이 흘러가는 곳을 알아채는 퇴화한 원시 감각을 여전히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인 것 같다. 나는 물에 가까이 있을 때, 이 강물에 가까이 있을 때 가장 생기가 넘친다. 이곳에서 수영을 배웠고, 이곳에서 가장 즐겁고 기분 좋은 방식으로 자연이 내 육체에 깃드는 법을 배웠다.

벡퍼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 일명 드라우닝 풀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드라우닝 풀(Drowning Pool)익사의 웅덩이라는 뜻으로, 오래 전 여성 범죄자들을 처형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 웅덩이나 우물을 가리킨다. 16~17세기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마녀로 고발당한 여성의 유무죄를 시험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물에 빠뜨려진 여성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마녀가 아닌 것으로, 물 위로 뜨면 마녀로 간주되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것은 15살짜리 딸을 혼자 키우는 어머니이자 성공한 사진작가인 넬 애벗이다. 그녀의 여동생 줄스는 언니의 소식을 듣고 오랜 만에 백퍼드에 돌아온다. 잊고 싶은 기억만이 가득한 옛 고향으로. 넬은 죽기 며칠 전까지도 줄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고 전화해달라는 언니의 요청도 무시해 왔다.

한편, 넬 애벗이 죽기 얼마 전에 그녀의 딸인 리나와 절친한 친구였던 케이티가 그곳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조용했던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넬은 어린 시절부터 드라우닝 풀에 집착했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 거기서 죽은 사람들 전부에 대해서 취재하고, 그곳의 이미지들을 찍는 일을 해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작업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나 케이티의 엄마는 딸의 죽음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곤 했었다. 형사들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넬이 사고로 떨어진 게 아닌가 질문을 하자, 딸인 리나는 말한다. "엄마는 떨어진 게 아니에요. 뛰어내린 거예요." 사이가 소원해져서 연락 안 한 지 몇년 된 상태였던 동생 줄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언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거예요. 미스터리를 좋아했으니까 미스터리의 중심이 되고 싶었겠죠. 라고. 과연 그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은 무엇일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마을에서 발견된 모든 시신들을 어떻게 전부 추적하겠는가? 마치 <미드소머 머더스> 같다. 다른 점이라면, 사람들이 농장의 분뇨 처리장에 빠지거나 서로 머리를 후려치는 대신, 사고들과 자살 사건들이 일어나고 옛날에는 여자들이 기괴한 익사를 당했다는 것.

<걸 온 더 트레인>이라는 엄청난 데뷔작으로 인상적이었던 작가 폴라 호킨스의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에서는 세 명의 여자를 중심으로 레이첼의 현재 이야기가 진행되다, 일년 전 메건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식으로 각각의 날짜와 시간대를 다르게 한 점 때문에 초반에 굉장히 집중해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의 시간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럴수록 미스터의 해답에 가까워지는데, 누굴 믿어야 할 지 의문스러운 화자들에다, 시점과 시간이 왔다갔다하면서 굉장한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만들어졌던 작품이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화자가 굉장히 많다. 넬의 여동생, 넬의 딸, 케이티의 엄마, 케이티의 동생,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전직 형사와 그의 가족들 등등... 화자도 많고, 각각 숨기고 있는 비밀들도 많은데다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다 보니, 중반 정도 이야기가 진행될 때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열 명이 넘는 화자들의 다양한 시점들 덕분에 분명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현재 벌어진 사건이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한데 좀처럼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호기심은 극대화되고, 지루할 틈 없이 극에 몰입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끊임없이 서로를 오해했던 어머니와 딸,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던 드라우닝풀에 대한 미스터리까지 복잡해 보였던 이야기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로 모아져 굉장한 반전으로 연결된다. 과거가 현재에 미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영향과 사람들이 각자의 시점에서 해석하고 느끼는 감정과 기억의 기만성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300년 전 사악한 마녀로 몰려 강으로 끌려가 죽은 여인, 전쟁을 겪고 완전히 변해 버린 남편을 죽이고 강에 뛰어내려 자살한 여인, 엄마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소년.. 그리고 넬 애벗도 17살 때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13살의 동생 줄스를 구해 준 적이 있다. 거울처럼 잔잔하고 거뭇한 강물 밑으로 사람들을 잡아당기는 것은 무엇일까. 수면 위로 솟아 있는 절벽은 모험을 부추기고 도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수많은 목숨을 빼앗았던 치명적인 장소, 그곳의 미스터리에 매혹된 한 여자와 그들의 삶과 죽음에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입막음하고 침묵시키려는 사람들. 그리고 폭력적인 남성에게 희생되는 여성과 불안정한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전작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폴라 호킨스의 이번 작품은 전작만큼이나 매력적이고 스릴 넘치는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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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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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본 영화에서 어떤 책에 쓰여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어. 인간의 조상은 나무 같은 죽음을 선택해 버린 거지. 하지만 나한테 선택권이 있다면, 난 달처럼 죽는 쪽을 택할 거야."

"달이 차고 기울 듯이."

"그래. 달이 차고 기울 듯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거야. 그래서 아키히코 군 앞에 계속 나타나는 거야."

오전 11, 도쿄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열차 역에서 길을 찾느라 한참 헤매는 한 남자 오사나이. 겨우 호텔 2층의 카페에 도착해 약속된 예약석으로 들어선다. 벽을 등지고 한 쌍의 모녀가 나란히 앉아 있다. 유명 여배우와 그녀의 조숙한 일곱 살 초등학생 딸이다. 소녀는 오사나이를 잘 알고 있는 듯 거침없이 말을 건넨다. 언젠가 도리야키를 먹는 걸 본 적이 있다. 커피는 블랙으로 마시지 않았나. 등등. 오사나이의 죽은 딸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소녀는 과연 그의 죽었던 딸이 다시 돌아온 걸까. 그는 15년 전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한꺼번에 잃었다. 세 사람은 함께 만나기로 약속한 또 다른 남자를 기다리며 두서 없는 대화를 이어간다. 오사나이가 기억 조차 하지 못하는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의 딸 루리는 일곱 살 때 의문의 열병을 앓고 나서, 옛날 유행가를 흥얼거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에 대해 잘 아는 듯이 말해 아내를 걱정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다 급기야 혼자 학교를 빠져나와 전철로 낯선 곳을 찾아 경찰의 연락으로 찾게 된 날, 혼자서 멀리 가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하기로 약속을 하는데, 약속한 해에 졸업식을 마치고는 불행한 사고를 당하고 만다. 차를 운전했던 것은 아내였고, 둘 다 즉사였다.

이야기는 오사나이가 자신이 딸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소녀와 두 시간여 동안 나누는 시간을 순서대로 구성하고, 그 사이사이 과거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서술되며 서로 만나고 벌어지기를 반복한다. 15년 전 아내와 딸 장례식을 마치고 만났던 아내의 친구 동생 미스미, 그와 얼마 전에 만나 듯게된 30여 년에 걸친 긴 이야기. 오사나이의 아내와 딸은 사고 당시 자신을 만나로 도쿄로 오는 도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미스미의 이야기는, 오래 전 딸이 어렸을 때 했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아내가 걱정했던 그것처럼, 과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현재까지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과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스무 살 청년과 스물 일곱 살 유부녀, 그들의 설레는 만남과 가슴 아픈 이별 속에 여자는 남자에게 말한다. 나는 몇 번 죽어도 다시 태어날 거야. 달처럼 죽었다가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 남자 앞에 나타나겠다고. 달이 차고 기울 듯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겠다고.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달의 영휴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 환생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쯤되면 죽은 딸의 환생에 대한 오사나이의 이야기에서 이들 비극적인 연인의 사랑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것으로 이야기의 중심이 옮겨진 뒤이다. 결코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 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도 들었다가, 어느 순간 퍼즐이 맞춰진 듯한 느낌도 들었다가, 다시 또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는 듯한 기분으로 반복되며 펼쳐진다.

"미스미 씨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사람이 한번 죽은 뒤의 이야기니까요. 우리는 아직 죽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사후의 세계는 상식의 틀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밖에 없고, 살아 있는 이상 상식의 틀을 벗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사기 같았어요. 왠지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딸을 도둑맞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제 눈에 비친 현실은 그것하고는 달랐어요. 유괴범에게 도둑맞은 딸이 아니었어요. 루리는 정말로 미스미 씨를 그리워하는 거예요."

아주 오래 전에 이순원의 <은비령>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윤회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다. 하늘에 있는 행성들에게 일정한 공전주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그렇게 일정한 주기가 있다. 윤회에 윤회를 계속하다 제자리로 돌아 오는데 25백만년이 걸린다. 그래서 지금부터 25백만년이 지나면 바로 이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겪었던 일을 다시 겪게 되고..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도 다 다시 겪게 된다는 거다. 죽은 친구의 아내에게서 연정을 느끼게 되는 남자의 감정이 사사로운 욕망의 차원을 뛰어넘어 2 5백만 년이라는 시공과 연계되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 덕분에 2 5백만 년 전의 생애와 그 이후에 돌아오게 되는 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걸 믿긱에는 너무도 과학적인 세상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졌다. 당연히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해 본적 없이 항상 현재를 바쁘게 살아 왔다. 그런데 최근에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어쩌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생애 처음으로 죽음을 너무 가까이서 겪어 보니 그 동안 살아왔던 세상 조차 내가 알던 그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사토 쇼고의 <달의 영휴>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달이 차고 기우는 것으로 은유했다는 설정만으로 너무 궁금했던 작품이었다. 죽음을 슬픔이나 연민이 아니라, 담백하게 풀어낸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건데, 이 작품은 죽음과 환상, 그리고 사랑과 그리움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쳐 드러내는 것보다, 꾹꾹 눌러서 쌓는 것이 오히려 더 폭발하게 만드는 여운을 남겨준다. 그리하여 결국 3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죽음과 환생을 거듭해, 결국 여자가 사랑하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면서 그저 먹먹해지고 만다. 아름답고도 신비한, 환상적이면서도 독특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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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3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통신사 1 - 김종광 장편소설
김종광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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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어르신들, 제가 통신사 이야기를 써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저도 일본 갑니다. 소동으로요. 제가 낱낱이 적겠어요.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 여러 어르신의 이야기, 다 사연을 들어볼 겁니다. 높으신 분들 사연도 듣고 역관 나리들 사연도 듣고 격군 아저씨 사연도 듣고.

……중국이든 왜국이든 사신 다녀오면 꼭 일기 같은 걸 남기는 분이 있잖아요. 사행록 말예요. 근데 그건 높으신 분이 한자로 쓰신 거라 아무리 잘 번역을 해도 언문으로는 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잖아요. 그 책들이 안 읽히는 건 한자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미없기 때문이란 거예요.”

‘조선통신사 기록물 2017 10 31,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외교사절단에 관한 자료가세계의 기억으로 그 보존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한국의 기록자들,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들, 한자로, 언문으로, 심지어는 일본글자 가나로 이러저러하게 끼적거린 글들은 삼백 건이 넘는다. 그런데 이렇게 풍부한 기록물을 가진 조선통신사인데 바로 그 조선통신사의 전모를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아낸 소설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통신사에는 영웅화할 만한 인물도 없고, 여자가 없어 사랑타령이 어렵고, 당파싸움이나 권모술수도 전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종광 작가는 바로 그 없음에 매료되어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역사소설이 바로 왕후장상, 영웅호걸이 나오지 않는 소설이었고, 그런 소설이 가능한 소재가 바로 조선통신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이 작품은 5백만 사내가 3백 일 동안, 1만 리의 여행을 다녀온 일본견문록이 된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사행록의 한두 줄을 재구성한 것이 반, 순전한 허구가 반에다, 박람강기 저술도 1할쯤 된다. 역사적 기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운 작가의 4년 동안의 집념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기대가 되었다. 

조선통신사란 조선시대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파견되었던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말한다.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일본의 각 지역에 상륙하는 경로였다. 실제로 조선통신사였던 500명 가까운 멤버들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한문이라는 외국어로 적을 수 있었던 것은 양반이나 서얼·중인 같은 지식인 계급의 사람들뿐이었다. 사절단의 절대 다수였던 평민과 노비들은 일본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바를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사절단의 절대 다수였던 그들이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덕분에 우리는 조선의 거리에서 활약하던 이야기꾼들, 책벌레들을 만나볼 수 있고, 당시에 유행이었던 책들과 출판 분위기등을 느껴볼 수 있다. 삼국지연의, 수호전, 초한지, 서유기 등등 중국 이야기가 판친 지 이미 수백 년이었고, 그 책들을 모방하고 변형한 조선인이 쓴 중국이야기가 덩달아 판친 지가 백여 년. 게다가 조선의 이야기라는 것도 구전설화를 짜집기 한 게 거의 전부였던 시절, 지금의 시대를 사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뎐이 있었냐는 극중 어린 소년의 목소리야 말로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임취빈이 우쭐대었다. "소설인데 뭐 어때요?"

"동래에서 너는 사실에 충실할 거라고 그랬어. 이런 황당한 얘기는 소설이 아니라고 했잖아?"

"깨달았어요. 변탁 광광 작가님 말이 맞았어요. 사람들은 사실적인 얘기는 좋아하지 않아요. 권모술수, 전쟁, 비밀, 추리, 살육, 삼각 사각 연애, 강간 등등으로 도배되어야 해요. 오랑캐 대왕 관백 보는 날 아무 일 없이 사배만 하고 나왔다, 이런 얘기를 누가 읽어요?"

"최소한의 개연성, 사실성은 있어야 한다. 이건 너무 없다."

"왜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잖아요?"

조선후기 평범한 사람들의 떼거리 여행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역사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런 조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놈 삽사리, 격군 김국창, 소동 임취빈 같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여행의 기록을 남기고 소설을 지어 돈을 버는 세상,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그런 세상 말이다.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조선의 5백 사내들,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오소리잡놈들의 진짜 이야기는 그렇게 실제 역사보다 더욱 그럴듯한 조선의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특히나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대목들이 많았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장면들에서 잔잔한 재미들이 넘쳐 흘렀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다. 이복선 격군 왕초 노릇을 하는 오연걸이 대체 왜 우리 배에는 놀던 놈 하나가 없냐며, 재담꾼도 없고 가수도 없고, 심심한 놈만 모였다고, 아무거나 좀 해보라고 닦달을 해대자, 이광하가 난데없이 책을 찾는다. 책이 있으면 책을 읽어보겠다고. 그가 심청뎐을 꺼내 읽은 지 담배 한 대 참 만에 이복선 격군은 죄 글썽거리기 시작했고, 임경업뎐을 읽자 다들 임경업장군이 된 것처럼 격정에 휩싸였고, 전우치뎐을 읽자 다들 배꼽을 잡고 날아다니는 듯했으며, 콩쥐밭쥐뎐을 읽자 또 한바탕 울음바다가 된다. 그야말로 공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 한 장면 덕분에 나도 작가처럼 이 작품 속 찌질한 오백 사내들이 좋아지고 말았다.

이 작품은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조선통신사가 한양을 출발할 때부터 일본 강호에 갔다가 귀국해 임금 앞에 복명할 때까지의 전 과정을 따라간다. 그들의 희로애락, 그들이 보고 겪었을 별의별 일들을 생생하게 그려낸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조선후기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현재의 우리와 크게 차이가 없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공감대 형성이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주요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어떤 사건을 겪고, 위기를 벗어나는 식의 구조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여러 등장인물들이 한꺼번에 나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이라 다소 산만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마다의 사연과 욕망을 지닌 그 수많은 인물들이 머나먼 길을 함께하는 동안 풀어내는 이야기 보따리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 솟아나고 있었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끝나지 않고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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