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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 사납고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외 지음, 이수영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경고한다. 이 책에는 사나운 글들이 모여 있다. 여성 독자라면 각오를 하시길. 고삐는 단단히 매셨나? 신경질은 가라앉혔고? 남편에게 허락은 구했는지? '라는 강렬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에는 불안과 공포마저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인 19세기 말에도 독서가 여성에게 해로울 수 있다는 관념이 꽤 흔했을 정도니, 경고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는 이 서문을 읽고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추라일은 가부장제의 희생자로 남자들에 대한 복수를 시행하는 여자야, 내가 말했다. 일종의 페미니스트 아닌가?
하지만 사악한 정령이잖아, 제이나브가 말했다. 성적 자제력을 모르고 매혹적이니까 사악하지.
가부장제의 죄책감이 구현된 존재야, 내가 말했다.
죄지은 남자들이 자신들을 피해자로 투사할 수 있게 해주지, 제이나브가 말했다. - 카밀라 샴지, '보리수나무의 처녀귀신' 중에서, p.68~69
첫 번째 이야기 주자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리스 신화 속 존재인 사이렌을 소재로 선택했다. 상반신은 여자, 하반신은 물고기의 몸을 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뱃사람들을 유혹해 죽였다는 존재. 세이렌은 아름답지만 위험한, 유혹적인 여자라는 의미의 '요부' 혹은 '경보음'의 의미로 쓰인다.
이야기는 '경계의 존재들 뜨개질 모임'에 관한 것이다. 이 모임이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연맹, 클럽, 분과, 조합, 협회, 표준, 정체성, 문화적 틈새, 분류에서 대개 제외되어온 이들을 위해서, 기존에 인정받는 집단에 혹은 학문적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순응하기를 거부한 이들을 위해서이다. 또한 이 뜨개질 모임은 '여성으로 상정되는 이들'을 위한 곳이다.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무시당하고, 추방당하고, 따돌림당하거나 공포의 대상이 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세이렌이 화자가 되어 서양 신화와 민담 속 괴물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그 중 누구를 모임에 끼워줄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아주 임팩트 있는 첫 이야기였다.
이 책은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더 많은 독자에게 닿기 바라는 마음으로 1973년에 설립된 영국 ‘비라고 출판사’ 5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작품이다. ‘비라고virago’는 영웅적이고 호전적인 여성을 일컫지만, ‘말참견 잘하고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키는 드센 여자’를 뜻하는 멸칭으로 주로 쓰인다. 50주년 기념 작품집을 위해 현대 문학의 거장 마거릿 애트우드를 비롯해 앨리 스미스, 엠마 도노휴, 카밀라 샴지, 키분두 오누조, 헬렌 오이예미 등 다양한 국적과 인종, 성적 정체성과 문화를 가진 여성 작가들이 모였다.
시간이 흘러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가자 또다시 나는 잘못되었다. 남자들이 나를 욕망하면 그건 내 잘못이었다. 그들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들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내가 너무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은 내 잘못이었다. 나는 열세 살이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내 잘못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어른 여성이 되어서 아무리 착한 여자가 되려고 노력해도 그들의 선함을 내 진실과 결합시킬 수 없었다. 결국 노력에 지친 나는 한계에 다다랐고 더 이상 속박될 수 없었다. 내가 입을 벌리자 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울려 나왔다. 그리고 진실은 선이었다. - 스텔라 더피, '용 부인의 비늘' 중에서, p.360
50주년 기념 기획을 위해 모인 작가들은 사이렌, 추라일, 웬치, 허시, 버튜퍼레이터 등 여성에 대한 멸칭 하나씩을 선정해 작품의 제목으로 삼고 각각 새로운 작품들을 썼다. 19세기에 여성으로 태어났던 남자, 2차 대전 당시 하녀로 일했던 여성 등 실존 인물을 소재로한 이야기도 있고, 오랜 서양 신화와 민담 속 괴물들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여자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이야기도 있다. 호흡이 짧은 단편 소설이라 가독성도 좋고, 다양한 구성과 문체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각각의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각각의 소재가 된 여성에 대한 멸칭들을 만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부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정화되지 않은 넋'이라는 뜻의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의 전설 속 악령인 추라일, 표독하고 거만하며 잘 싸우는 여자를 뜻하는 테머건트, 촌색시, 시골 계집, 시골 처자 같은 옛날 느낌의 단어이며 성매매 여성을 가리키는 속어로도 쓰이는 웬치, 제멋대로 놀아나는 닳고 닳은 여자, 즉 화냥년, 헤픈 년, 바랑둥이의 뜻을 가진 허시, 남의 흠을 들추어 헐뜯거나 욕을 해댄다는 뜻의 버튜퍼레이터, 마귀할멈, 노파, 할망구 등 나이가 들어서 사납고 보기 흉해진 여자라는 뜻의 해러던 등... 단어 자체는 낯설지만, 뜻은 우리말에도 비슷한 것들이 있어 익숙한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 속 이야기들은 그러한 멸시와 편견의 언어들을 비틀고 파괴하고 전복하며 읽는 쾌감을 안겨주었다.
‘여성의 글쓰기’로 시작해서 ‘우리의 이야기’로 향하고 있어 더욱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넘어지고 일어서며 나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상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 바깥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사납고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여성들을 가두고 핍박해온 단어들이 어떻게 해방시키는 열쇠가 되는지, 유머와 휴머니즘으로 직조해낸 새로운 신화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