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히키코모리
사이토 뎃초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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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제일 중요한 요소는 루마니아어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 서점에는 관련 서적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대학에서도 전문적으로 배울 곳이 없었다. 애초에 루마니아어 자체를 아는 사람이 적었다. 같은 로망스어군, 위에서 언급한 두 언어나 프랑스어와 비교하면 지명도가 천지 차이다. 세계적으로 봐도 그랬다. 아무도 루마니아어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마이너한 언어를 배우려는 나, 완전 힙해…. 이렇게 나는 루마니아어라는 드넓은 바다로 헤엄쳐 나갔다. 루마니아어로 시작한 나의 언어 학습은 극에 달했는데, 결과로 말하자면 지금은 완전한 어학 오타쿠다.                 p.58~59


이 책의 원제는 <지바에서 거의 나가지 않는 히키코모리인 내가 한 번도 외국에 가보지 않고 루마니아어 소설가가 된 이야기>이다. 한국어판은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라는 제목에다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히키코모리'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런데, 루마니아어라니... 대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희귀 언어를 홀로 독학해서 그 언어로 소설을 써서 발표하는 일이 가능한 걸까. 


이 거짓말같은 이야기가 실화라니 뭔가 비현실적인 농담같았다. 하지만 일본인 히키코모리 루마니아어 소설가는 실존하고 있으며, 이 책에 쓰인 모든 이야기는 진실이라는 것! 개인적으로 이 책을 쓴 작가처럼 어학 오타쿠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히키코모리에서 시작해 수천 편의 영화를 보고 글을 쓰다, 루마니아 영화에 나오는 루마니어와 사랑에 빠져 홀로 독학을 하게 된 과정이 정말 드라마틱했다. 특히나 루마니아어가 완전히 마이너한 언어라 정보가 너무도 없었는데, 페이스북에서 루마니아인 3,000명과 친구가 되고, 인터넷 뉴스 기사로 각종 슬랭과 문법을 공부 하는 등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독학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 더할나위없이 즐겁게 느껴졌다. 





나는 루마니아'어'로 이민하는 것이다.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외국어를 할 때 원어민 같은 완벽함을 추구하는데, 내 목표는 그게 아니다. 나는 외부인이기에, 언어 이민이기에 할 수 있는 것으로 한 방 먹이고 싶다. 완벽함 같은 것은 오히려 내다 버렸다. 나만의 루마니아어를 만들고 싶다.

이 여정은 아마도 평생이 걸려도 끝나지 않겠지.

그러니까 굉장히 두근거린다.               p.197


사실 어학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꾸준하고 고독한 일이다. 중도포기하거나, 의욕을 잃어버리거나, 좌절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은 어학 공부의 경우 더 그렇다. 희귀언어, 소수언어를 배운다면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이 가르쳐주는 것은 당신이 혼자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라는 문장처럼, 오히려 그걸 즐긴다면 그 언어가 자신만의 독특한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쓴 사이토 뎃초처럼 말이다. 돈 없고, 직업 없고, 친구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히키코모리였던 그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나는 일본인입니다. 그렇지만 루마니아어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소설도 씁니다. 정말 악마적으로 멋있지 않습니까?" 라는 문장에 담긴 의지와 자기애가 정말 근사하게 느껴진 것은,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학을 좋아해서 뼛속까지 어학 오타쿠라고 스스로 말한다. 노르웨이 영화와 인도네시아 영화에 빠졌을 때는 노르웨이어와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고, 프랑스인과 데이트했을 때는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자신의 소설이 라트비아어로 번역되었을 때는 라트비아어 교재를 사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어학 참고서들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공부용이 아니라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되어 몇 번이나 들춰본다고 하니, 정말 제대로 된 어학 오타쿠구나 싶었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든, 낯선 어느 곳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뭐든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뭔가가 되긴 하는 것이다. 그저 멈춰 있지 말고,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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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루나파크 일력 (스프링) - 매일매일 심력 충전
루나(홍인혜) 지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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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쌀쌀해지니 이제 슬슬 내년 일력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시인으로 글을 쓰고, 만화가로 말풍선을 채우며 여러 분야를 넘나들어온 루나(홍인혜) 작가의 첫 일력이 나왔다. 수많은 이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했던 루나파크 명문들을 한데 모아 보고 싶다는 팬들의 성원으로 만들어진 일력이라 루나파크 캐릭터를 좋아했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아이템이다. 




박스 패키지를 열면 주7일 무사기원 부적 포토카드 7종과 오늘이 행복해지는 4컷 만화 스티커 1종, 루나파크 손편지(인쇄) 1종과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로 스프링 제본된 일력이 나온다. 뜯어서 버리는 일반적인 일력 형식이 아닌 튼튼한 스프링 제본으로 되어 있고, 사이즈도 콤팩트해서 탁상형 일력으로 사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원하는 곳 어디에 두어도 자리를 많이 차지 하지 않아 실용적이다. 


일력에는 루나파크 미공개 일러스트가 373개나 수록되어 있고, 일과 여행, 직장생활과 집순이 라이프, 인간관계와 성취, 우정과 사랑, 술과 음식 등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들을 만화와 글에 담아 선보인다. 위트 있는 말과 격조 높은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사람들을 사로잡아온 루나 작가의 글들을 일력을 통해서 만나게 되면 매일이 행복해질 것 같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크고 작은 행복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음이 단단해 질 것만 같다. 매일 매일 아침마다 하루의 마음을 다잡는 목적으로 한 장씩 넘겨 본다면 2025년의 매일은 조금 더 특별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늘 반복되는 일상이 허무한 날이 있는가 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을 것이다.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그 일상들 속에 따뜻함도, 뭉클함도, 서글픔도, 쓸쓸함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그렇게 하나뿐인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테니 말이다. 무심코 지나치는 매일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종종 잊어 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그 사소한 일상들이 쌓여,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어 나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일상을 지키는 데 가장 필요한 힘은 뭘까? 체력? 능력? 모두 중요하지만, 루나 작가는 마음의 힘이 있어야 다른 모든 힘이 의미 있어 지기 때문에 '심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력 속에 심력 충전을 위한 365개의 응원을 담았다. 루나파크 일력과 함께 매일매일을 잘 넘기며, 마음에 마음을 쓰는 한 해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사치스럽게 낭비합시다, 날 고용한 당신은 인복에 겨운 사람입니다, 과도한 책임감 금지, 집단 식사의 의무에서 벗어나보자, 혼술이 별것 아님을 체험해보자, 좋아함은 귀하고 소중해서 아껴줘야 해, 마음을 닳아 없어지게 하는 사람과는 멀어질래... 등등 하루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마음의 힘을 키워주는 문구들을 만날 수 있다. 마음에 힘이 되어주고 싶은 가족과 친구에게 선물하기에도 너무 좋고, 마음 충전이 필요한 스스로를 위해 준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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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 사납고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외 지음, 이수영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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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경고한다. 이 책에는 사나운 글들이 모여 있다. 여성 독자라면 각오를 하시길. 고삐는 단단히 매셨나? 신경질은 가라앉혔고? 남편에게 허락은 구했는지? '라는 강렬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에는 불안과 공포마저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인 19세기 말에도 독서가 여성에게 해로울 수 있다는 관념이 꽤 흔했을 정도니, 경고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는 이 서문을 읽고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추라일은 가부장제의 희생자로 남자들에 대한 복수를 시행하는 여자야, 내가 말했다. 일종의 페미니스트 아닌가?

하지만 사악한 정령이잖아, 제이나브가 말했다. 성적 자제력을 모르고 매혹적이니까 사악하지.

가부장제의 죄책감이 구현된 존재야, 내가 말했다.

죄지은 남자들이 자신들을 피해자로 투사할 수 있게 해주지, 제이나브가 말했다.                - 카밀라 샴지, '보리수나무의 처녀귀신' 중에서, p.68~69


첫 번째 이야기 주자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리스 신화 속 존재인 사이렌을 소재로 선택했다. 상반신은 여자, 하반신은 물고기의 몸을 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뱃사람들을 유혹해 죽였다는 존재. 세이렌은 아름답지만 위험한, 유혹적인 여자라는 의미의 '요부' 혹은 '경보음'의 의미로 쓰인다. 


이야기는 '경계의 존재들 뜨개질 모임'에 관한 것이다. 이 모임이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연맹, 클럽, 분과, 조합, 협회, 표준, 정체성, 문화적 틈새, 분류에서 대개 제외되어온 이들을 위해서, 기존에 인정받는 집단에 혹은 학문적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순응하기를 거부한 이들을 위해서이다. 또한 이 뜨개질 모임은 '여성으로 상정되는 이들'을 위한 곳이다.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무시당하고, 추방당하고, 따돌림당하거나 공포의 대상이 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세이렌이 화자가 되어 서양 신화와 민담 속 괴물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그 중 누구를 모임에 끼워줄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아주 임팩트 있는 첫 이야기였다. 




이 책은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더 많은 독자에게 닿기 바라는 마음으로 1973년에 설립된 영국 ‘비라고 출판사’ 5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작품이다. ‘비라고virago’는 영웅적이고 호전적인 여성을 일컫지만, ‘말참견 잘하고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키는 드센 여자’를 뜻하는 멸칭으로 주로 쓰인다. 50주년 기념 작품집을 위해 현대 문학의 거장 마거릿 애트우드를 비롯해 앨리 스미스, 엠마 도노휴, 카밀라 샴지, 키분두 오누조, 헬렌 오이예미 등 다양한 국적과 인종, 성적 정체성과 문화를 가진 여성 작가들이 모였다. 




시간이 흘러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가자 또다시 나는 잘못되었다. 남자들이 나를 욕망하면 그건 내 잘못이었다. 그들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들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내가 너무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은 내 잘못이었다. 나는 열세 살이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내 잘못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어른 여성이 되어서 아무리 착한 여자가 되려고 노력해도 그들의 선함을 내 진실과 결합시킬 수 없었다. 결국 노력에 지친 나는 한계에 다다랐고 더 이상 속박될 수 없었다. 내가 입을 벌리자 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울려 나왔다. 그리고 진실은 선이었다.              - 스텔라 더피, '용 부인의 비늘' 중에서, p.360


50주년 기념 기획을 위해 모인 작가들은 사이렌, 추라일, 웬치, 허시, 버튜퍼레이터 등 여성에 대한 멸칭 하나씩을 선정해 작품의 제목으로 삼고 각각 새로운 작품들을 썼다. 19세기에 여성으로 태어났던 남자, 2차 대전 당시 하녀로 일했던 여성 등 실존 인물을 소재로한 이야기도 있고, 오랜 서양 신화와 민담 속 괴물들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여자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이야기도 있다. 호흡이 짧은 단편 소설이라 가독성도 좋고, 다양한 구성과 문체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각각의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각각의 소재가 된 여성에 대한 멸칭들을 만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부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정화되지 않은 넋'이라는 뜻의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의 전설 속 악령인 추라일, 표독하고 거만하며 잘 싸우는 여자를 뜻하는 테머건트, 촌색시, 시골 계집, 시골 처자 같은 옛날 느낌의 단어이며 성매매 여성을 가리키는 속어로도 쓰이는 웬치, 제멋대로 놀아나는 닳고 닳은 여자, 즉 화냥년, 헤픈 년, 바랑둥이의 뜻을 가진 허시, 남의 흠을 들추어 헐뜯거나 욕을 해댄다는 뜻의 버튜퍼레이터, 마귀할멈, 노파, 할망구 등 나이가 들어서 사납고 보기 흉해진 여자라는 뜻의 해러던 등... 단어 자체는 낯설지만, 뜻은 우리말에도 비슷한 것들이 있어 익숙한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 속 이야기들은 그러한 멸시와 편견의 언어들을 비틀고 파괴하고 전복하며 읽는 쾌감을 안겨주었다. 


‘여성의 글쓰기’로 시작해서 ‘우리의 이야기’로 향하고 있어 더욱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넘어지고 일어서며 나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상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 바깥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사납고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여성들을 가두고 핍박해온 단어들이 어떻게 해방시키는 열쇠가 되는지, 유머와 휴머니즘으로 직조해낸 새로운 신화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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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 사납고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외 지음, 이수영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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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한다. 이 책에는 사나운 글들이 모여 있다. 여성 독자라면 각오를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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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우화 - 4천년 전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우화
얄와츠 우랄 지음, 에르도안 오울테킨 그림, 이희수 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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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수메르에는

사자도 하이에나도 없었답니다.

늑대도, 들개도 살지 않아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걱정할 일도,

켕게르족의 적도 없었답니다.

                     수메르 시인


우화는 구전이라는 전승 방법을 통해 동물들을 등장시켜 사람들에게 도덕적 교훈과 고결한 삶을 영위하는 원칙을 가르치는 인류 초기의 이야기 방식이다. 우화의 전통이 이솝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최초의 우화는 이솝이 아니라 4천년 전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수메르 우화는 이솝보다 천년 전에 살았던 수메르의 필경사들이 설형문자로 쓴 역사상 최초의 동물 이야기이자, 점토판이라고 불리는 흙으로 만든 책에 옮겨져 있다. 수메르인들의 초기 문학 텍스트가 들어 있는 점토판은 현재 튀르키예 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된 책은 튀르키예 아동문학의 권위자인 얄와츠 우랄이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재구성한 46편의 ‘수메르 우화’를 감각적인 그림과 함께 엮은 것이다. 


특히나 일러스트들이 인상적인데, 수메르의 조형물과 동물 형상에서 찾은 수백 개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연구해 그 시대를 반영하는 스타일로 그려냈고, 점토판의 느낌을 살리고자 연한 갈색 계열의 컬러로 채색했다. 우화 한 편마다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각각 덧붙여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이 읽기에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몇 날 며칠 목구멍으로 고기 한 점 넣지 못한 상태였던 사자가 수풀 속에서 누워 잠들어 있다. 배고 고프고, 피곤한 데다 잠도 잘 자지 못해 짜증이 났다. 그런 사자 앞에 피골이 상접한 어미 염소가 나타난다. 사자의 점심이 굴러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염소는 말한다. 뼈와 가죽뿐인 자신을 잡아먹어봐야 뭐 하겠냐고, 배를 채울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만약 자신을 잡아먹지 않으면, 개나 양도 없이 아무도 지키지 않는 살찐 양들이 있는 목장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이다. 그 양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때 자신을 잡아먹으라는 염소의 말에 사자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고민한다. 결국 '살찐 양들'이라는 말에 넘어간 사자는 염소를 따라 목장에 도착한다. 높은 울타리가 튼튼하게 쳐진 곳이었다. 배고파 미칠 지경이었던 사자는 어서 가서 그 살찐 양들을 잡아오라고 말했고, 울타리를 훌쩍 넘어 들어간 염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자의 큰 덩치로는 높이 뛰어오를 수 없었던 울타리였다. '꾀 많은 염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침착한 기지를 발휘해 사자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자와 염소, 여우와 늑대, 멧돼지와 코끼리, 민물 거북이, 당나귀, 고양이, 들쥐 등등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60여 마리의 동물들은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오만한 여우와 이기적인 늑대, 꾀 많은 염소, 투덜이 하이에나, 게으른 물소, 분수를 모르는 개 등 인간들의 어리석은 면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짧은 이야기들 속에 각각의 교훈이 담겨 있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이솝 우화 속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고 느껴지는 것들도 있는데, 이는 이솝 또한 그곳에서 수메르 필경사들이 남긴 점토판을 읽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수메르의 동물 이야기들이 이솝 우화에 영감을 준 것이다. 책 속 동물들은 인간 삶의 명과 암을 비틀어 풍자하고 있다. 저자는 간략한 요약과 교훈으로 이루어진 이솝 우화의 딱딱한 방식을 벗어나 재미있는 시적 산문 방식으로 우화를 풀어냈는데, 그래서 더욱 잘 읽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이솝 탄생 천년 전에 시작된 우화의 기원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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