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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다시쓰기 - 고전소설을 읽는 욕망에 관하여
노지승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3월
평점 :
여성의 다시쓰기
한때 다시쓰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계모의 숨겨진 이야기라던가, 뺑덕어멈의 이야기, 혹은 동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흑설공주 등이다.
고전동화라 불리는 이야기 속에는 그 시대상과 그 시대가 원하는 인물들이 영웅이 되고 미화가 된다. 그런 영웅이나 미화된 인물들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악당들이 필요한 것.
그 시대 그들은 정녕 할 말이 없었을까.
작가는 약자들, 주인공이지 못했던 이들은 다시 쓰기를 통해 서사의 주체가 된다고 한다. 결국 약자들의 다시쓰기는 그 자체로 저향의 행위라고 말한다.
중학교때쯤 심청은 정말 효녀인가 란 주제로 국어시간에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난다.
참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엔 효녀지만 지금은?
실제로 그 당시에도 효녀란 생각은 들지 않았고, 심봉사에 대한 분노만 느꼈던 기억이 난다.
실제 심청은 시대가 원하는대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강조되었다. 효녀란 허울좋은 타이틀을 갖고, 가부장제에서 더 이상 물질적 책임을 질 수 없는 가장의 책무를 대신 짊어지면서 오히려 대접도 받지 못한 딸들.
우리 역사엔 팔려가고, 끌려가고, 혹은 스스로 그것이 효라 믿으며 보따리를 싸서 인당수 대신 공장, 버스 안내양, 기생, 여급이 되어야 했던 수 많은 심청들이 있다 . 그들에게 돌아온 건 효녀대신 가족을 부양하고도 부끄러운 딸이 되는 것, 함부로 해도 되는 누나였다.
계모는 왜 언제나 악독한가?
남성이 자원을 배분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경계의 대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사랑이든 물질이든 내 몫이 줄어드니 반가울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잔인한 계모서사 또한 가부장제가 만든 서사이다. 여성들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유일하게 인정받는 것이 정처가 되는 길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자신이 오기 전의 여자들 흔적 지우기에 골몰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장화홍련이란 비극이 생겨났다고 작가는 말한다. 상속문제로 불거진 갈등이 결국은 살인과 원한으로 이어진 것, 이런 비극 사이에 아버지의 존재는 미미하다. 원인은 제공했으나 결과나 과정에선 뒷짐을 질 뿐이다.
남자들의 일방적 판타지이자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춘향을 이야기한다. 순종과 절개의 여신, 영화로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실제 유명 기생들이 출연하기도 했다. 이는 기생에 대한 엿보기적 욕망을 채워준 예라고 본다.
춘향은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킴으로서 가부장제의 최고 보상인 예찬과 숭배를 받았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춘향은 정절을 지킴과 동시에 남편의 과업을 이어받아 달성하길 바라는 여성성으로 변모했다. 사회주의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에도 자신을 기다리며, 자신과 함께 혁명과업을 수행하고,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과업을 대신하는 여성을 욕망한 것이다.
6.25전쟁 후에는 또다른 의미로 여성의 정절을 중요시여겼다. 그들은 늙은 시부모에게 꼭 필요한 노동력이었기에, 홀어머니의 성공담이나 미담은 의도적으로 널리 퍼져갔다.
춘향의 정절은 이렇듯 사회의 요구조건과 남성들의 욕망과 기대치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들이다. 대부분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이야기, 혹은 커서 고전으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들 속에 숨은 이들을 찾아 복원하는 것,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바로 그 시대 약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며, 제대로 바로 읽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 하게 되었다.
춘향이야기에 여성들은 열광했고, 장화홍련은 특히나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크나큰 사랑을 보냈다고 한다. 그 이야기들 속엔 사랑과 자매애, 연대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사랑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마음을 드러냈다. 남자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통속적이라 폄하한다. 그렇기에 여성은 그런 폄하된 이야기들 속에 자신들의 분노와 원망을 맘껏 드러냈다고 한다.
이런 서사엔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의 스펙트럼이 담겨 있다고, 그런 스펙트럼은 다시쓰기를 통해 널리 퍼질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엔 소개되지 않지만,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고전소설은 별주부전이었다. 별주부전 속의 풍자와 통렬함이랄까.
실제 토끼는 꾀를 부려 권력에 눈 멀어 영생을 바라는 용왕을 구워삶는다. 그래서 나름 신뢰를 얻게 되며, 그 덕에 자라를 골려먹는다. 용왕에게 자신의 간을 먹기 전에 자라를 먼저 드셔야 효과가 크다고 말할까 하며 협박을 한 것, 단 자라의 아내를 빌려주면 용서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토끼는 자라의 아내와 잠자리를 하게 된다. 자라의 아내는 처음에는 거부한다. 하지만 사랑없이 결혼한 자라보다, 토끼의 잠자리 스킬? 과 재담에 홀딱 반해버린다.
결국 토끼와 자라는 뭍으로 가고, 그 후부터 자라의 아내는 토끼가 보고싶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용궁사람들은 자라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다 죽었다 생각하고 열녀문을 세워 그 넋을 기린다. 열녀문에 대한 풍자와 사랑없는 결혼, 여성의 욕망....생각보다 별주부전은 괜찮은 이야기꺼리가 많다. 결말은 세 가지 정도의 판본이 있지만, 토끼와 자라부인만 기억에 남아, 자라 부인에 대해서만 누군가 글을 써 주면 좋겠다.
이외에도 여성의 상속, 사랑과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과 고전소설 속 인물들이 영화와 연극, 시대상에 맞춰 변용된 모습등을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질서를 흔들고, 정숙하지 않은 여성들은 악의 축이자 언제나 고약한 인물들이었고 권선징악에 의해 벌을 받았다. 지금은 어떨까....
“모든 여성 가운데서 정절을 지키는 여성의 목소리만을 신뢰할 수 있다는 논리는 여성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데롤로기와 결합 가능하다. 사실 식민지 시기 근대적 사랑을 신봉하던 모던한 남성 엘리트 작가들에서부터 춘향은 신여성들의 자유분방함과 대비되는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이상적 여성상이 될 수 있었다. 춘향은 여성의 육체와 사랑이 어떻게 모든 주류 이데올리기에 의해 보수적으로 형상회되어 전유될 수 있는지, 즉 젠더 트라우마의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춘향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의 춘향이지만 춘향을 자신들의 여성상이라 우기고 이를 특정 이데올로기에 프로파간다로서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p130
여성 수용자들이 이 소설들을 소비하는 것에는 단지 ‘읽는 행위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구술을 듣는 행위도 포함된다. 고소설들가운데서 특별히 여성들의 이야기인 춘향전, 장화홍련전, 심청전은 여성들의 위험한 욕망과 유교적 가부장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텍스트였다. 양반의 처가 되고자 했던, 기생의 딸 춘향의 욕망은 정절을 지키는 열녀로 포장되어야 했고, 가문의 인정을 받아 집안에서의 지위를 지키고자 고투했던장화 홍련의 계모는 전처의 아이들을 살해한 혐의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가난한 집안의 딸인 심청은 아버지의 허세로 인해 인신매매되었지만 ‘효’라는 명분은 심청의 희생을 미화했다.
에니크의 후처 콤플렉스는 언뜻 보면 이전에 자기 자리를 차지했던 여성에 대한 후발 주자 여성의 질투를 콤플렉스‘, 즉 병적인 심리로 치부하는 듯하다. 그러나 남편 혹은 연인의 합법적인, 유일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은 단순히 비정상적인 병적 심리가 아니라 실은 남성에게 의존해서만 생존이 가능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절박한 심정에 가깝다.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에서 경아, 영자 등으로 명명된 개인들은 특정한 일개인이 아니라 어떤 그룹의 집합적 경험collectiveexperience을 반영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의 삶은 한국 사회의변화와 그 궤적을 같이했지만 한국 사회가 지금도 누리고 있는화려한 성공 서사와는 관련이 적었다.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그들이 어떤 폭력에 노출되었고 어떻게 유혹되었으며 어떤 보상을 받고 싶었는가를 서술하고 있는 20세기 심청들의 이야기이다.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 도시로 온 여성들의 이야기인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유혹과 폭력으로 이루어진 산업화 시대 ‘심청‘의 생애사라 할 만하다.
이러한 기사들이 미담의 예로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20세기전반부에도 열녀 예찬이 광범위하게 존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간지에서 기층 민중의 열행을 미담으로 유포한 것은 조선총독부와 유림층의 일치된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필요에 따라 유교를 효과적인 통치 전략으로 사용했고 이러한 전략은 근대적 지식인의 출현으로 권위가 흔들린 유림층의호응을 이끌어냈다. 지역 유지들과 같은 민간이나 도의회, 도청그리고 조선총독부가 과부들에 대해 ‘열부, 절부, 효부 등의 명목으로 표창한 사례도 있었다. 열녀와 같은 유교적 덕목을 내세워 여성들을 순치하는 전략은 이렇듯 유림층과 총독부의 공통적인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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