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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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시간의 계곡>은 이러한 삶의 속성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질서와 혼돈의 경계의 기로에 있는 우리는 "예견된 상실"이라는 삶의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하는가?



소설에는 현재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20년 전의 과거동쪽으로는 20년 후의 미래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이 등장한다마을과 마을 사이는 엄격히 단절되어 있고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이들에게만 애도를 위한 시간여행이 허락된다현재를 변화 시키기 위해서는 질서를 파괴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야 하고이는 세계 전체의 혼돈과 절멸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소설 속 세계에서는 상실에 대한 고통과 슬픔도 사회가 의도하는 잣대로 평가되고 통제된다주인공 오딜은 이러한 사회질서에 순응하며 성장해온 인물이다오딜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지만'슬픔과 후회의 감정은 이미 수년 전에 말라붙어 각질처럼 벗겨진 지 오래 (p.260)'라며 과거나 미래를 방문한다고 해도 진정한 위로는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연히 사랑하는 이의 예견된 상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오딜은 운명적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아직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어둠 속에 가둔 채 (p. 140)'비록 허구라 할지라도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연약한 현재 (p. 133)' 속 질서에 안주할 것인지아니면 참혹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상실과 슬픔의 감정을 마주하고혼돈 속에서 거짓을 꿰뚫고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것인지... 단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오딜은 '결과를 결정하는 건 자신의 몫 (p. 452)'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빨간 알약을 삼키고 진실을 택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혼돈 속으로 뛰어든다그러면서 누군가 그어 놓은 선 너머를 보려는 노력을 통해 진실의 조각에 가까워질 수 있고그 경계를 넘어서야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삶에 대한 아포리즘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키워드는 '상실'이다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실'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시킨다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기도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현재의 내 것 같지는 않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것이다살아가면서 상실과 결핍을 대면하게 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은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인간이란 저마다의 상황 속에서 그만의 역사와 고유한 존재 방식중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개개인이 켜켜이 쌓아올린 저마다의 사연들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을 머금은 채 조용히 빛난다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이유상처와 결핍을 가진 하나의 ''이다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경계들그리고 그 수많은 경계에도 불구하고 맺어지는 수많은 관계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아픔을 매개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한다이런 의미에서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또한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제각기 저마다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하지만 별들은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게 된다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번째 심장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위대한 개츠비中에서 



<시간의 계곡>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상실과 결핍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계속해서 과거로 떠밀려 가는 현실의 삶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 감으로서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삶에 대한 체험적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나 자신을 밸리와 밸리를 잇는 또 하나의 팽팽한 실이라고수백 개의 선택지 중 하나의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p. 441)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시작 (출생)과 끝 (죽음)이 있고그 사이에 수많은 선택들이 존재한다는 것삶을 수용한다는 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그 책임이란 다름 아닌 강인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일 것이다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공포가 상존하고 있다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점과 선들그 수많은 가능성들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삶을 살아가야 할까중요한 것은 상실의 두려움 앞에서 절망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단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발걸음을 내딪는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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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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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시간의 계곡>은 이러한 삶의 속성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질서와 혼돈의 경계의 기로에 있는 우리는 "예견된 상실"이라는 삶의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하는가?

소설에는 현재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20년 전의 과거동쪽으로는 20년 후의 미래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이 등장한다마을과 마을 사이는 엄격히 단절되어 있고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이들에게만 애도를 위한 시간여행이 허락된다현재를 변화 시키기 위해서는 질서를 파괴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야 하고이는 세계 전체의 혼돈과 절멸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소설 속 세계에서는 상실에 대한 고통과 슬픔도 사회가 의도하는 잣대로 평가되고 통제된다주인공 오딜은 이러한 사회질서에 순응하며 성장해온 인물이다오딜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지만'슬픔과 후회의 감정은 이미 수년 전에 말라붙어 각질처럼 벗겨진 지 오래 (p.260)'라며 과거나 미래를 방문한다고 해도 진정한 위로는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연히 사랑하는 이의 예견된 상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오딜은 운명적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아직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어둠 속에 가둔 채 (p. 140)'비록 허구라 할지라도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연약한 현재 (p. 133)' 속 질서에 안주할 것인지아니면 참혹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상실과 슬픔의 감정을 마주하고혼돈 속에서 거짓을 꿰뚫고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것인지... 단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오딜은 '결과를 결정하는 건 자신의 몫 (p. 452)'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빨간 알약을 삼키고 진실을 택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혼돈 속으로 뛰어든다그러면서 누군가 그어 놓은 선 너머를 보려는 노력을 통해 진실의 조각에 가까워질 수 있고그 경계를 넘어서야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삶에 대한 아포리즘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키워드는 '상실'이다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실'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시킨다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기도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현재의 내 것 같지는 않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것이다살아가면서 상실과 결핍을 대면하게 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은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인간이란 저마다의 상황 속에서 그만의 역사와 고유한 존재 방식중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개개인이 켜켜이 쌓아올린 저마다의 사연들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을 머금은 채 조용히 빛난다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이유상처와 결핍을 가진 하나의 ''이다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경계들그리고 그 수많은 경계에도 불구하고 맺어지는 수많은 관계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아픔을 매개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한다이런 의미에서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또한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제각기 저마다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하지만 별들은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게 된다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번째 심장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위대한 개츠비中에서 

<시간의 계곡>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상실과 결핍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계속해서 과거로 떠밀려 가는 현실의 삶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 감으로서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삶에 대한 체험적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나 자신을 밸리와 밸리를 잇는 또 하나의 팽팽한 실이라고수백 개의 선택지 중 하나의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p. 441)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시작 (출생)과 끝 (죽음)이 있고그 사이에 수많은 선택들이 존재한다는 것삶을 수용한다는 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그 책임이란 다름 아닌 강인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일 것이다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공포가 상존하고 있다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점과 선들그 수많은 가능성들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삶을 살아가야 할까중요한 것은 상실의 두려움 앞에서 절망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단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발걸음을 내딪는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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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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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평등'과 '정의'를 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곳곳에 보일듯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서로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가르는 차이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보편성을 공유하지만, 서로가 가진 정체성과 상황에 따라 다양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 다양성은 때론 우리를 빛나게 하고 우리 존재가치를 드러내주기도 하지만, 차이와 차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해 주목하고 표면화된 차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차별의 이야기는 단지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로 표상되는 특정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별은 드러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선량한 시민이고,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도 명명한 이유이다. 지금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수많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상처와 피해를 주고 있다. 이러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다음은 내가 차별과 부조리에 대해 인식하게 된 하나의 사례이다.


"당신 정말 육아휴직 갈꺼니?"


딸이 태어났을 때 축하인사 다음으로 회사의 경영지원부문 임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회사는 남성육아휴직을 지원하기로 하였지만 아직 안정적으로 정착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인사와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경영지원부문 임원의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건넨 말 한마디는 내게 항거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 약속,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말을 일상에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평범한 남자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느끼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나는 다른 모든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로서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지길 바란다. 딸이 성장해나가면서 가장 많이 받게 될 질문 중 하나는 꿈과 장래희망에 대한 것일 것이다. 아이에게 꿈이 무엇인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건 상당히 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는 딸이 성장해가면서 '너는 도화지와 같아서 어떤 그림으로든 완성될 수 있단다.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맘껏 펼쳐보렴'에서 "이제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 정해야 하지 않겠니?"로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인 네가 그걸 한다는 게 가능할까?"로는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여성들은 일상의 부조리 앞에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살아왔다. 기득권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를 잃을까 전전긍긍할 때 피해자인 여성들은 삶의 전부를 잃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로와 보복, 무력감 속에서 괴로워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사에 남성 육아휴직을 신청하였다. 이는 물론 태어난 아이를 위해 앞으로 일정부분 여성이 아닌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아내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 또 다른 여성으로서 살아갈 내 딸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이 조직 구성원들의 부정적 인식을 전환시켜 육아휴직제도가 안정화되고 나아가 조직문화가 개선되는데 미약하나마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소수자이며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정신이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p. 190)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아내와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삶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작지만 끊이지 않는 목소리들이 우리 모두를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임을 믿는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의 삶에 행복이 깃들길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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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 뮤지엄 - 소품을 넘어 예술품으로 거듭난 부티크 문구 컬렉션
정윤희 지음 / 오후의서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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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뮤지엄이라니… 책 내용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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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장편동화 재미있다! 세계명작 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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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인 동시에 시대를 거슬러 우리 곁에 있는 동화처럼 동심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모든 “어른 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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