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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고 한다. 타인을 저주하면 결국 자신도 무덤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p32)
그럼에도 저주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삐뚤어진 권력과 가부장제의 폭력, 자본주의의 잔인함이 난무하는 현실 속의 공포이야기다. 읽고 곱씹으면 더 무서워지는 이야기.
색다르고 특이한 열 가지의 이야기가 담긴 단편집이다.
대표작은 <저주토끼>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받은 혹은 누군가에게 건넬 앙증맞은 저주토끼 하나쯤은 갖고 있지않을까. 원망과 원한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오래 전 짚으로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해당하는 인물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등 부속물을 넣거나, 아니면 이름을 적어 붙이곤 저주를 걸었다. “제웅”이라 이름 붙여진 짚인형은 사극에 종종 등장하곤 한다.
어릴 적엔 제웅에 위해를 가하면, 아파하는 대상자의 모습이 무섭기도 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좀 커선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게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서도, 이름을 굳이 빨간색으로 쓰는 것엔 거부감을 느꼈다. 한때 유행했던 <데쓰노트> 도 저주계의 큰 획을 긋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여기 저주계의 떠오르는 샛별이 바로 토끼!!가 아닐까.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갉아먹는 토끼는 서류들이며 목재, 누군가의 기억과 뼈속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권선징악을 사적으로 행하는 것은 어떨땐 통쾌하게 느껴진다. 드라마나 소설 속의 모습들에서 환호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말 통쾌하고 끝인걸까?
결국 그렇게 이루어진 복수들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저주를 행한자들은 결국 잠 못이루며 또 다른 누군가의 저주와 복수 속에 떠돌게 된다.
<저주토끼> 단편을 읽고, 잠든 밤 꿈에서 계속 토끼들이 설쳐댔다. 하얗고 몽실한 꼬리를 씰룩거리며 어디선가 무언가를 갉아먹는 듯한 느낌..누군가의 피눈물이 몽실몽실 하얀 토끼가 되어 떠도는 밤, 왜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뻐야하는지 알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들에서 느껴지는 저주는 낯선만큼 더 두렵고 이해할 수 없는 법.
<저주토끼>는 순한 맛이다. 내가 흘려보낸 배설물들이 머리가 되어 ‘어머니’라 부르더니, 어느 순간 젊은 시절의 또 다른 내가 되어 나타나는 <머리>
이 <머리>의 실체는 변기에 흘려보낸 내 몸의 배설물과 머리카락들.... 영화 <어스>가 생각나는 단편이었다.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 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더냐?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후에도 나를 혐오하고 역겨워하여 줄곧 없애고자 하지 않았느냐? ” (p57)
이 단편을 읽고나서 자꾸 변기를 확인하게 된다..
무성생식의 가상임신 이야기 <몸하다>
완전 쫄면서 봤던 <차가운 손>
인공반려자들의 연대 속에 죽어가는 <안녕 내 사랑>
재물에 눈먼자, 근친상간과 폭력이란 끔찍한 이야기를 동화처럼 풀어낸 <덫>
결국 괴물은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주는 <흉터>
반어적인 <즐거운 나의 집>
초원의 공주를 통해 약간의 희망을 보여준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저주는 풀 수 있으나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눈먼 인간을 눈뜨게 할 방법은 없다. 저들이 언젠가는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을 알고 있었다.”(p292)
그리고 저주 토끼와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 <재회>
“ 내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 애쓰는 것도 이러한 강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워줬으니 감사하라는 말 앞에는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란 단서가 붙어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진심일 것이다. 내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 한국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언제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가 속삭였다.
”묶어줄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p320)
“묶이면 안전하다고 느껴.”
“뭐가 안전한데?”
그가 천천히 속삭였다.
“살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받는 것 같아서.”(p314)
무섭다기 보단 외롭고 쓸쓸한 이야기들을 읽은 느낌이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듯 하지만 감추고 있는 외로움과 고독이 바로 현대인들의 저주이자 공포가 아닐까.
작가님의 말처럼, 권선징악 혹은 복수가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런 필요한 일들을 마친다해도 여전히 세상은 쓸쓸하고 인간은 외롭다.
아래는 작가님의 인터뷰 중에서
“쓰고 싶은 얘기는 굉장히 많이 있어요. 소수자, 고통 상실에 대해 계속 쓰고 싶고 그밖에 다양한 작품을 쓰려고 합니다”
작가님은 여성주의 소설집 “여자들의 왕”을 6월 중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침대 전체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침실 창문 밖으로 셋이 밤의 거리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여섯 개의 다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가로등 불빛이 흔들려 셋의뒷모습이 어둠에 가려졌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묶이면 안전하다고 느껴." "뭐가 안전한데?" III내가 다시 물었다. 그는 언제나 단단히 꽉 묶어주기를 원했다. 묶는 동안에도아픔을 참는 것이 분명했고 풀어준 뒤에는 언제나 몸에 뚜렷하게 자국이 남았다. 아무리 내가 여자고 그는 남자라고 해도, 그를 묶어주는 상대방이 그의 연인이라 해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꽉 묶여 있는 상태가 근본적으로 안전할 리 없었다. 그가 천천히 속삭였다. "살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것 같아서." 그 대답이 어쩐지 가슴 아팠기 때문에, 나는 힘껏 공들여서 그를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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