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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나투라 논 파싯 살룸(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글의 힘이 강하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을 이야기하며, 긍정의 힘과 끈기와 불굴의 의지를 이야기하겠지. 그의 우생학관련 일들은 소소하게 치부하며 그의 공적을 높일 수도 있겠지.
이 책의 저자 룰루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루이 아가시같은 이들이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자연의 사다리를 걷어찬다. 그런 사다리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명에 순위는 없다.
그릇된 신념을 가진 자가 큰 힘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일 때, 그것은 폭력을 부르고 악몽을 만든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물고기에게만 이름을 붙이고 이름표를 꿰맨 것이 아니다. 인류에게도 자신이 가진 그릇된 기준을 가지고 순위라는 이름표를 꿰매려 했다.
우생학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스파르타에서는 태어난 아이가 연약해보이거나 장애가 있으면 절벽에 밀어 죽여버렸다.
우생학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히틀러다. 그런 우생학의 시작이 미국이라니 의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인종의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라인 미국은 1차대전에서 승리하자 이 모든 영광은 백인들의 몫이라 말하며 이민금지법을 발의했다.
진화가 진보라고 믿는 그릇된 신념, 진화를 인간의 힘으로 앞당길수 있다는 오판, 진화가 무조건 옳다고 믿는 잘못된 전제조건하에서 그들은 과학을 끌어와, 우생학이란 신념을 만들었다.
무서운 것 중 하나가 잘못된 신념을 가진 살인마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으로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건 위대한 신념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믿었고, 자책하지도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았다. 이런 신념을 따르는 이들은 늘어나면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지적능력도 도덕적 판단도 모든 것이 유전의 힘이니, 열등한 이들이 더 이상 자손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처음에는 불임시술이었다. 그 다음 독일의 히틀러치하에서는 불법불임시술뿐만 아니라, 살 가치가 없는 이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장애, 유전병, 심신박약, 병역기피자, 유대인, 그리고 치매환자와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까지 점점 범위는 확대되었다. 그 범위가 자신들의 앞마당을 넘보자 그제서야 그들은 우생학에 의구심을 가졌다.
미국에 우생학이 인기를 끌던 시절, 엄청난 발전은 이루어졌지만 빈부격차는 날로 심해졌고 가난한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해지기만 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그들의 가난이 사회나 제도, 혹은 가진자들의 욕심이 아닌, 게으름의 유전자와 열등인자들이 원인임을 주장하는 우생학은 달콤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소록도가 생각났다. 나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그리고 여기서도 자행된 우생학의 그림자.
일제강점기 나병환자들을 치료한다며 소록도에 세운 병원.
그들은 그 곳에서 자식들과 헤어져야 했으며,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가끔 얼굴을 보며 그리워해야 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그들의 처우는 여전했다. 온갖 약속들을 걸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고, 먹을 것도 부족했다. 위생은 엉망이었고, 제대로 된 치료도 없었다.
간척사업에 동원되어, 어느날은 엄지를 잃었고, 어느날은 코를 잃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수술대에 눕혀졌다. 엄마가 아빠가 되고 싶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그런 바람은 그 곳에선 죄악이었다.
(옆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병에도 미추가 있다. 나병을 일으키는 나균과 결핵균은 아주 유사하다. 그럼에도 병상의 증세로 인해 나병은 온갖 오해와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하늘이 내린 천형이라며 괴롭혔다. 하얀얼굴과 말라가는 몸으로 각혈을 하는 결핵균은, 그 모습으로 온갖 문학과 예술에서 칭송받는 질병이 되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창백하게 얼굴이 하얗게 되어 죽어가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개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생학이란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살인과 범죄가 저질러진 지금도 신나치와 백인우월주의가 설치는 세상이다.
지금은?
비만유전자를 제거하고, 키가 큰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들이 연구되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그들은 보기좋은 키와 질병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게 된다. 새로운 신우생학이다. 단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다.
유전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믿던 시대가 있었다. 환경이 더 많은 것을 좌우한다고 믿던 시대를 지나, 이제 유전자를 맞춤으로 주문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자연엔 순위가 없다. 다윈이 말한 것처럼 문명화된 인간들은 약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최대한 자제하려 한다고 말한다. 어울려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것, 무엇인가에 우위를 나누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모양의 대형망치다.(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