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잠 - 이보다 더 확실한 행복은 없다 아무튼 시리즈 53
정희재 지음 / 제철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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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이 세 출판사가 의기투합하여 진행하는 프로젝트성 에세이 출판물이다.


📖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아무튼‘은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라는 타이틀로 지금까지 53개의 시리즈를 내놓았고, 이어 12개의 신작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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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재의 <아무튼, 잠>은 제목에서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잠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14개의 에세이를 통해 신변잡기적 경험에서 인문학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잠에 대한 폭넓고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 책 뒷표지
˝잔다는 건 결핍과 욕망의 스위치를 잠깐 끄고 생명력을 충전하는 것. 잡념을 지우고 새로운 저장장치를 장착하는 것. 쓰라린 일을 겪고 진창에 빠져 비틀거려도 아주 망해버리지 않은 건 잘 수 있어서다. 잠이 고통을 흡수해준 덕분에 아침이면 ‘사는 게 별건가‘ 하면서 그 위험하다는 이불 밖으로 나올 용기가 솟았다. 잠은 신이 인간을 가엾게 여겨서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소제목은 ‘이보다 더 확실한 행복은 없다‘이다. 작가는 잠이란 단순히 육체적 휴식에 그치는 행위를 넘어 우리 인간적 삶의 행복을 위한, 그리고 행복에 향한 의미를 무겁지 않게 잘 풀어낸다.


그리고 독자는 잠에 대한 개인적 사색에 충분히 잠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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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아무튼 시리즈>를 알게 되었고, 나는 그 중에 유독 ‘잠‘에 관한 에세이를 탐독하게 되었다.


왜 잠이었을까?

나는 잠을 배척하는 경향이 심하다. ‘잔다‘는 자체를 인생에서 하나의 낭비로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잠이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잠은 ‘죽음‘과 맞닿아있다. 사실상 둘은 별개지만, 내게 있어서는 동급인 것이다.

다만, 죽음은 그 자체로 완결이지만 잠은 유보된 완결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죽음이 끔찍하게 두려웠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난 죽음을 잠과 연관지어버렸고 잠이 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망상에 깊이 젖어 있었다.

그래서 잠자리에 눕는 순간부터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애써 잠에 빠져들지 않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당시 취침시간은 부모님에 의해 정해졌고, 식구가 자리에 눕게 되면 자연스럽게 형광등 불은 꺼졌고, 이내 방은 어둠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잠을 견딘다는 것은 어린 나이에 여간 버거운 행위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버틸만큼 버티다 뜬 눈으로 아침이 오는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버릇으로 나는 어두운 방에서 천정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왜 죽음이 그토록 끔찍했는지, 왜 죽음과 잠을 동일시했는지, 왜 그토록 잠들기를 고통스러워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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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물리과목 선생님은 특이한 분이셨다. 그 분은 선생님이라기 보다는 담당하는 과목이 물리라서 그런지 괴팍한 과학자에 더 가까운 이미지였다. 지금 그 선생님의 모습은 전혀 기억조차 없지만,

˝나는 하루에 1시간만 잔다. 1시간도 사치스러울 때가 있다.˝

라던 말만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에 그 말이 어찌나 신비로웠던지, 그야말로 부러운 지경을 넘어 경이로움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하루 1시간만 자보고자 무던히도 시도하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코 해내지는 못했다. 아예 잠들지 않을 수는 있었는데, 1시간만 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1시간만 자고 싶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 잠이 많다는 현실은 참 이율배반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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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재의 <아무튼, 잠>에서와 같이 잠을 찬양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 아직은 거리가 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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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단편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3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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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헤밍웨이 단편선 1>을 읽고 온통 지루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기억을 안고 도전한 <헤밍웨이 단편선 2>였다.

다만, 이번은 그 지루함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다소 난감한 질문이지만, 이번 독서는 책의 뒷부분에 실린 ‘작품 해설‘을 먼저 충분히 섭렵한 후 진행했다.

그럼에도 지루함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못한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의 독서취향을 재발견한 나름으로 의미있는 기회였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 취향은 플롯에 중심을 둔 서사구조의 텍스트를 선호한다는 것, 반면에 인물 또는 인물의 성격, 감정 등의 묘사에 치중된 텍스트에는 거리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미국식으로는 전자를 오 헨리 전통이라 하고 후자를 헨리 제임스 전통이라고 한단다. 또는 유럽식으로는 전자를 기 드 모파상 내지 객관적 전통이라 하고 후자를 안톤 체호프 내지 주관적 전통이라고 한단다.

여기에서 헤밍웨이는 제3의 전통을 수립한 작가라고 옮긴이인 김욱동은 평가한다. 즉 객관적 전통과 주관적 전통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둘에 다 관심을 가지면서 헤밍웨이 전통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다.

하지만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제3의 전통을 보였다기 보다는 어느 단편은 객관적, 어느 단편은 주관적 식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면에서는 과연 그것을 제3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다.

어쨌든 나라는 개인은 오 헨리 또는 기 드 모파상의 텍스트에 끌리는 유형이라 할 수 있고, 헨리 제임스 또는 안톤 체호프의 텍스트를 꺼려한다는 결론이다.

단편 텍스트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헨리 제임스‘ 단편집을 무턱대고 주문해 버렸다. 그 주관적 전통을 제대로 느껴보고 배워야겠다 싶어서...

헨리 제임스의 작품은 세상에 나올 당시 혹평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당시에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헨리 제임스는 그가 사망한 후에 가장 지적인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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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2-07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 헨리 또는 기 드 모파상이네요^^
지난번 헤밍웨이의 소설은 잘 읽히던데... 작품마다 역시 편차가 있는것 같네요
명쾌한 정리 이해가 매우 잘 됐습니다^^감사합니다~~
 
검사의 죄
윤재성 지음 / 새움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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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사의죄
#윤재성
#새움
@saeumbook
@saeum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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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명징한 답을 내릴 사람이 과연 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정의란 개념 자체가 지극히 추상적이라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정의를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라 사전은 정의한다. 하지만 이 말마저 추상적이라 ‘그래, 바로 그거!‘라 할만한 명쾌함이 없다.

1971년에 발표되어 당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후로도 정의를 논할 때마다 여지없이 교과서적 기준이 되고 있는 그 유명한 존 롤스의 <정의론>조차도 21세기에서는 어느 정도 한계를 드러내는 이론이라 치부되고 있다.

그 선상에 마이클 샌델이 존재한다. 샌델은 바로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인물이며, 21세기를 대표하는 정의론 설파자이다. 그러나 그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발표하여 21세기형 정의를 논하지만, 결국 정의에 대한 확고한 답은 내리지 못한다.

이렇든 저렇든 무지의 발로라 할지라도 이쯤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절대적 정의란 존재할 수 없다.˝일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정의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대적 정의에 대한 혼란에서 그 중심을 잘 잡아야 할 테니 말이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티빙의 <돼지의 왕>과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를 생각해보면 상대적 정의에 대한 고민의 필요가 생생해질 것이라 생각된다.

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학교폭력 피해자다. 그리고 주인공이 성인이 된 후 과거 학폭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복수라는 그 자체는 불의의 개념이지만 주인공들의 과거와 그들의 고통스런 삶을 조명하게 되면 그 복수가 과연 불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두 드라마에서 주목해야 할 포인트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는 말했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라고.

학폭에 시달려 지옥보다 더 고통스런 삶을 버티고 견뎌야만 했던 피해자의 입장을 보듬어보면, 오죽하면 그래야만 할까 싶다. 더군다나 가해자들이 과거에 대한 일만의 반성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과연 하느님은 존재하기나 하는지 울화가 치밀지 않을까...

어찌보면 이러한 복수라는 개념도 주인공들에게는 나름의 상대적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죄를 지었으니 죗값은 치르게 하는 것이 정의일 테니 말이다.


......


✏️ 정작 윤재성 작가의 <검사의 죄>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서론이 참 길기도 하다.

<검사의 죄>는 바로 이 상대적 정의에 대한 고민을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요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책의 뒷표지에는 독자가 이 책을 읽고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한다.


📖 책 뒷표지
당신이 검사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검사의 죄

검사라서 지을 수밖에 없는 ‘원죄‘
힘 있는 자에 관대하고 약한 자를 엄벌하는 죄
법집행의 수단으로써 불법과 위법을 저지르는 죄
대의를 위한 ‘내부고발자‘를 경원시하는 죄
정권에 따라 척결의 대상을 달리하는 죄

여기, 그 죄를 딛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한 평검사가 있다.

평검사 권순조. ‘법전과 합법‘만으로는 세상의 ‘거대 악‘을 단죄할수 없다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 어릴 적, ‘보육원‘에 불을 지르고 12명의 원생을 살해한 원죄에 묶인 심신불안증 환자. 그가 탈법과 위법의 경계를 위태하게 넘나들며 정계와 재계, 언론이 결탁한 공고한 카르텔 속으로 뛰어든다.


✏️ 극히 핵심적 요약이지만, 이 책은 이러한 제시로 말미암아 독자들로 하여금 바로 소설 속으로 뛰어들 열정을 심어준다. 그리고 읽어보면 바로 알게 되겠지만, 숨 막히는 이야기 전개로 인해 책에서 눈을 뗄 여지조차 찾기 힘들어진다.


📖 231쪽
타협 없는 정의는 나약했고, 나약한 정의란 불의와 같았다.
‘내 한 몸을 바쳐서라도 검찰을 바로 세우려 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 흔쾌히 목을 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약자의 목숨과 빈자의 목숨. 서울에서 밀려난 일개 평검사의 목숨은 평등하게 하찮았다.


✏️ 모순에 찬 이 부분은 독자들이 고민해야 할 상대적 정의에 대한 고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한다.


📖 책 뒷표지
적법하나, 힘이 약한 ‘선택적 정의‘
위법하나, 강한 법집행의 ‘보편적 정의‘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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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시의적절한 책이지 않을까 싶다. 요즘같이 자유와 공정이 왜곡되고 정의와 상식이 혼란을 겪는 즈음에 ‘정의‘에 대한 절대적 가치와 상대적 의미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무엇보다 시대를 읽고 시대가 요구하는 고민의 지점을 통찰하며 대중들에게 그 고민을 함께 하자고 과감하게 덤벼든 윤재성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한 이러한 작품을 출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읽을 기회를 제공한 새움출판사에도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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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들인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가치를 획득하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간의 무게를 더해야 마음에서 무슨 일인가가 생긴다. 인생이란 시간의 소비 그 자체니까.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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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단편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2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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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동안 예상치 못하게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니까, 고전으로까지 인정받는 굵직한 명작들을 남긴 인물이니까, 어쨌든 헤밍웨이니까... 독서 좀 한다 하면 마치 관례처럼 거쳐야 할 작가라는 생각에 호기롭게 덤벼들었다.

무엇보다 일전에 <노인과 바다>를 읽고서 처음으로 헤밍웨이를 접한 감동에 젖어있던 터에, 어줍잖긴 하지만, 헤밍웨이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세계적 평가에 대해 나름의 확인을 해보고 싶은 마음마저 한몫을 하면서 헤밍웨이의 작품세계에 빠져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단편부터 차근히 만나볼 냥으로 <헤밍웨이 단편선 1>을 의기롭게 펼쳤으나...

책에 수록된 20편의 단편들은 참으로 지루하고 재미없고 읽는 내내 힘겨웠다.

마치 참된 인내를 배우자 하여 덤빈 고행의 시간이었다라고 할까... 비록 나의 순수한 의지는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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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무작정 책을 펼친다 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사람마다 편차는 있을 것이다. 나처럼 헤밍웨이에 대한 구체적 사전정보도 없이 독서를 진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작가나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를 확보한 후에 독서를 진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독서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헤밍웨이만큼은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헤밍웨이의 단편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나는 강조한다.

옮긴이 김욱동은 ˝헤밍웨이의 산문 스타일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이다.˝(<헤밍웨이 단편선 2> 작품소개 中에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단편적인 비유겠지만, ‘산문 스타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경지에 있는 독자라면 굳이 헤밍웨이에 대한 사전정보가 필요하지는 않겠으나 나와 같은 문외한에 가깝다면 사전조사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헤밍웨이 단편선 1>을 접히면서 내가 겪은 그 지루하고 버거움에 막막해지는 경험도 해봄직하지 않을까랄 수 있겠다. 말리지는 않을 것이며, 한 번쯤은 해볼 필요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스스로 깨달아가는 과정도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

세상에는 확고부동의 명확한 방식이란 없다. 있다면 그렇게 믿고 싶은 바람일 뿐이지 않을까. 아무튼,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독서에 대한 각자의 방식을 갖춰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게 지금까지의 횡설수설에 대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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