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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행복을 풀다 - 구글X 공학자가 찾아낸 불안을 이기는 행복 코드
모 가댓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8월
평점 :
자신의 학문적 기호를 가볍게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공학, 수학, 논리, 과학을 좋아하며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스스로를 평한다.
아버지 또한 유명한 공학자였는데
그 공학이 어떤 엔지니어링을 말하는진 정확히 모르겠으나
모 가뎃의 집안에 흐르는 지적 수행능력과
관심있는 공부의 주된 궤적은 분명 공학 같다.
공학...
행복을 말하려는 책에서
먼저 공학을 말해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있다.
사실, 책전반에 행복이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지도 않다.
그러나 다 읽고 나면,
어느 부분을 순서없이 읽더라도
결국 이 모든 걸 하나로 묶는 흐름은
개인의 행복추구 쪽으로 가고있다고 느끼게 된다.
행복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저자 모 가뎃은 심리학자가 아니다.
그저 필요한 심리학 부분을
자신의 공학적 접근법에 근거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아들 알리의 죽음을 모티브로
심리학이 아닌 공학자로써
심리학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마치 프로그래밍 언어로 조립하듯
한땀한땀 엮어낸 게 바로 이 책이다.
비전공자가 쓴 심리학이라서
신빙성이 떨어지게 느껴질까?
전혀!
오히려 어떤 심리학자나 상담가,
의사가 쓴 글보다 훨씬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매우 훌륭한 기승전결이 존재한다.
여기서 주의할 건,
그의 논리가 명쾌하고 탁월하다고 해서
그런 뼈대와 박식함으로 인해
심리학적으로 전달되는 그 지식들이
과연 완전무결하다 할 수 있는가는
한번 생각해 봐야할 문제라는 점 같았다.
내게 판단을 맡겨준다면
순수하게 난 그의 생각이 옳다고 본다.
프로이트의 이드-자아-초자아 이론을
교류분석의 부모-어른-아이의 이론과
빗대어 설명하는 걸 봐도
이 사람의 심리학적 접근은
단순히 심리학 이론의 짜집기나
지적수행력이 뛰어나서 보일 수 있는
본인의 장점을 이용한 의견표출 정도는 아니다.
맥락있고 근거있는 심리이론의 논조를 확립했다고 느꼈다.
심리학을 자신의 영역으로 가져와
그만의 서술로써 '행복을 풀다'란 책의
2번째 시리즈까지 낸 사람...
비슷한 제목의 전작 '행복을 풀다'를 먼저 읽어봤다면
훨씬 평하기가 좋고 정확 할텐데,
일단은 아쉽지만 '다시 행복을 풀다'를 읽은게 다여서
이 책의 범위안에서만 느낀 바를 남길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여러 주제와 키워드들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장 핵심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고방식의 익숙함으로 인한 발생되는
문제의 발단을 스스로 자각해 내라는 부분.
알고 있지만 아는게 아니고
모르는거 같겠지만 사실 안다고 보는 것,
이런 류의 것들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내적 오류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본다.
논리를 좋아한다는 그가 설명하는
트라우마에 관한 설명도 들어보자.
트라우마를 느끼는 자체에 관해
논리적인 면에서의 접근이란,
스스로 근거없는 환상을 피할 수 있고
뇌가 그걸 믿게 만드는 수준보다
사실은 자신이 훨씬 안전하다는 걸
자각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는 것.
즉,
치유되지 않는 심리적 외상이거나
그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장애라 판단된 경우라도,
그것 자체가 아닌 부차적으로 고통을 주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환자 본인의 상황은 실은 안전하다 봐야한다는 사실.
두렵게 하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에 촛점을 두지 말고,
자신 스스로가 두렵게 하는 대상을 생각하는데
현재 뇌를 극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본질 자체가
그런 생각에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할 수 있는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은
충분히 안전하다는 분명한 증거라는 것.
굉장히 심리학스러운 이야기를 하는듯 하지만
논리적인 관점으로 그만의 방법을 구사하며,
의학적이거나 심리적인 부분으로써 보단
논리적 구조가 그걸 뛰어넘기에 공감을 주고 있다.
이걸 내 식대로 바꿔 본다면,
한국식으로 바꿔 본다면,
과하게 자신의 안위에 매몰되어
실제 발생될 경우의 수보다
훨씬 부정적인 측면에 많은 비중을 두어
자신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 같았다.
더 나아가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 인간본능이긴 하나
인간이라면 어떤 식으로던
비슷한 생물학적 죽음을 맞는단 결론을 생각할 때,
마치 어떤 무형의 힘이 안좋게 작용해
자신에게 해가 될까봐 걱정하는 건
트라우마로 포장된 자신의 안위를 향한
너무나 끔직이 보호되고 싶어하는
일종의 신념과 다를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모 가뎃의 논리라면 말이다.
저자는 또한 불행한 사람은
다음 3가지 A들 중 하나로
삶에 적응한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
혐오(Aversion)
애착(Attachment)
만연한 불만(All pervasive dissatisfaction)
그 중 애착에 관해서는,
엄마와 아이의 관계 안에서나
연인관계 등에서 보이는 애착보다는
폭넓게 인간의 소유욕과 연결시켜 이야기 했다.
집착을 버리고 실제 소유한 것들과 결별할 수 있어야
빈 공간이 주는 상황하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것.
끊임없는 생각의 되풀이에 관해서는
굳이 반추(rumination)이란 용어보다는
강박적 되새김(obsessive rumination)이란
번역된 글을 읽음으로써
영어원문보다 훨씬 이해가 잘 되었다고 본다.
소개된 모 가댓의 책 전부를 번역한 이가 동일인인데
저자의 책과 철학에 관한 이해도가 돋보이는 부분이라 느꼈다.
giving도 "배풂"이란 속깊은 느낌으로 번역한 그.
그렇다면 정작 저자 모 가뎃 본인은 행복한건가?
자신의 소중한 아들 '알리'를 잃고
팔자에 없었을지 모를
이런 책과 이론들을 성립했지만
그의 삶은 과연 어떨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한마디로
수용과 전념, 이 두단어로 이해시켰다.
수용과 전념은 다른 단어지만
모 가뎃은 수용 뒤 그를 따르는 행위 자체를
전념(commitment)로 연관지어 설명했다.
아들을 잃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수용했지만
거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게 하나 더 남았다.
그건 아이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
그것에는 '전념'할 수 있다는 일종의 현실 속 실천.
그에게 이 책과 관련된 시작은
결국 아들 알리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좀더 넓게 그를 보고 우리를 보면
누구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니
그만의 슬픔 또한 그만의 특별한 아픔은 아니다.
또 모 가뎃이 죽고 우리가 죽는다면
남겨진 누군가는 모 가뎃이 느꼈던
그런 비통함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를 잃은 부성의 심정을 주로 많이 넣었을 거 같았지만
자신의 한풀이가 아닌 깊은 사색을 느낄 수 있도록
훨씬 고결한 내용을 담고 있어 많이 배웠고 감사했다.
힘든 상황하에 자신의 능력을 끌어내
그 결과물을 공유한 성실함에 또한 감사한다.
난 모르지만 그의 아들 알리에게도 감사했다.
아들 알리는 생전에 나이에 비해 꽤 성숙했던듯 하다.
마치, 어린 나이에 성밖을 나와 중생의 고통을 보며 괴로워하던
석가모니의 왕자시절을 보는 듯한 비슷한 사례들도 있었다.
아들이 떠난 후 아내는 아들의 소지품 전부를
알리를 소중히 생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알리가 소유했던 책이 사라지고
생전의 옷들과 물건들이 사라지면서
저자는 그런 아내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다시 한번 의료사고로 떠난 알리에게 감사함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