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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칭 더 보이드
조 심슨 지음, 김동수 옮김 / 리리 / 2023년 6월
평점 :

대강의 이야기로만 이 실화를 접한다면
조난, 생존기 정도로 회자될까봐 안타깝다.
읽는 내내, 나랑 다른 관점을 지닌 조의 생존기는
처음엔 적응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조의 상황판단과 행동들은
여지껏 살아오면서 봐왔던 방식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만의 것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등반하지 않은 설산의 한쪽 면을
두 친구는 알파인 방식으로 등반하기로 한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초면인 리처드에게
자신들의 베이스 캠프와 짐을 부탁하고
아래는 여름, 위에는 겨울인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조와 사이먼.
이 둘은 산을 몇일을 두고 올라간다.
알파인 방식이란게 후퇴나 쉼은 없는데
그저 오르기로 한 그 지점까지 계속
오르는게 다인 전진방식이라서다.
아무도 오른 적 없는 그 빙벽을 용케 성공해 낸 둘.
등반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하산길은 더 위험할 수 있기에 둘은 만전을 기한다.
그러다 결국, 미끄러지게 된 조.
한쪽 다리 골절을 입는데 정도가 매우 컸다.
조의 자력으로는 하산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둘이 가진 로프를 하나로 길게 묶어,
조가 먼저 아래로 내려가면
사이먼이 위에서 버티면서
조의 하산을 돕는 방식으로 결정한다.
조는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심했고
사이먼은 눈벽을 파고 로프를 잡고 버터준다.
한번 내려가면, 준비해 다시 내려가는.
그러다, 결국 조에게 다시 사고가 생긴다.
미끄러지면서 허공에 매달리게 된 것.
지지할 곳이 없는 조로써는 할게 없었다.
위의 사이먼까지 50m 가까이 되는 수직거리라
밑의 상황이 위에 있는 사이먼에게 전달되지 못한채
느낌만으로 둘 모두가 위험한 상황이란 걸
결국 사이먼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왜냐면, 계속 진행되던 하강느낌이 아닌,
자신의 버티는 힘을 넘어서는 중력으로
아래로 딸려 내려가듯 끌려가게 돼 버려서.
결국, 둘은 무언의 그 상황인식을 공유했다.
둘을 이어줬던 로프가 끊어져야 한명은 살 수 있다는 인식.
머뭇거리고 괴로워 해야하는 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고립된 공간.
짧은 고민 후 사이먼은 로프를 끊었고 조는 추락한다.
그 자리에서 홀로 남아 눈구덩이에서 비박을 하게 된 사이먼과
빙벽 틈새로 떨어진 조는 순간 운명이 갈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얘기는 지금부터다.
조는 살아남았다.
기적이라던지 놀라움의 순간도 없다.
옆으로 떨어졌다면 더 깊이 빠졌을 상황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곤
사이먼도 불러보지만 결코 들리지 않을 깊이.
빙벽용 도끼로 기어올라 보지만 그것도 실패.
아픈다리를 이끌고 기어오르는 대신,
반대로 줄을 타고 내려가기로 선택하는 조.
깊이를 알 수 없는 그곳으로 말이다.
불가능한 오르기 대신 차선의 길로써 선택된
미지의 하강코스.
이 실화가 한편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고 느끼게 하는 건,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그 후로도 이어지는
조의 끝모를 하산기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길을 선택하고 잘 해냈지만,
그게 성공했을 땐 또다시
다른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들이
계속 그의 앞에 놓여져 있었으니까.
이 스토리를 읽는다면 누구나
계속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보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들이나 자신의 모습 중
그 어떤 것도 조의 결정과 행동에서 공유되는게 없을테니까.
조는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화를 내기도 하지만 타인을 향한 탓은 아니다.
자기 혼자만 남겨뒀다고 울부짖거나,
하나의 시련이 끝나니 다른 시련이
또 등장했다고 몸서리치거나,
신을 원망하지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다.
크레바스에 처음 빠졌을 때 스스로 생각해보며
독실한 신자 집안 출신이지만 신을 찾지않는
스스로를 느끼게 된다, 이런 순간일 때
신을 찾을지도 궁금했었던 그였다.
죽을 수 있게 된 상황임을 인지하지만
그냥 내생은 없는 현 존재의 끝만을 인식한 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찌할 것인지만을
자신의 방식으로 궁리해 본다.
위로? 원망? 생각? 이유? 후회?
그런건 조에게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책의 말미에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언급하면서,
현실에서 이 용어가 쓰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
전쟁의 상황 이후에도 살아낸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용어를 쓰지 않고도 잘 살아낸 역사가 있는데,
되려 현시대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런 용어로
힘듦을 표현하듯 사는 걸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에게도 이런 평가가 내려지는 걸 수긍 못한다.
강하고 담대한 조의 이야기는
오히려 뭉클함을 넘어서는 극한이 존재한다.
전혀 다른 관점을 느껴볼 수 있는 삶이란게 뭔지를
실화로써 몸소 보여주는 이야기였기도 하고.
단순히 불굴의 의지나 용기를 다룬 책이 아니라,
자신을 오로지 스스로 책임진다는게 어떤 건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서사를 띄고 있기 때문같다.
하물며, 줄을 자른 사이먼조차 느낀 점은 또 있다.
예를 들면, 정말 너무 괴로웠다거나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이나 책임이 다가 아닌
자신이 조와 입장이 바뀌었더라도
그또한 수용했을거란 것을 인간됨에서 느낄 수 있었으니까.
다른 듯 같은 둘의 솔직함과 담대함을
누군가는 인정머리 없다고 할까?
현실같지 않은 현실을 겪었던 20대의 조.
그도 지금은 60대가 되어있다.
전설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써야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