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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ㅣ 아이온총서 1
박인성 지음 / 경진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저자는 선문염송집을 읽다가
조주의 모든 화두 82칙에 손을 댔다.
공안해독과 들뢰즈 철학 연결
저자의 심연을 느껴보노라면
그는 이 코로나 시대 속에 있는거 같지 않았다
고찰 주위로 배우자와 산책을 가는 여유로움이나
세상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나와는 다른 이의 삶의 방식도 짧게나마 공감해 봤다.
다음은 그가 실은 화두 中
법화경을 읽은 적이 있는가란 화두이며
본문 그대로의 인용을 먼저 적어본다.
조주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법화경을 읽은 적이 있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법화경에서 납의를 입고 한적한 곳에 살면서
아련야의 이름을 빌어 세상 사람들을 속인다'고 하는데,
그대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 스님이 절을 하려고 하자,
선사가 물었다.
'그대는 납의를 입고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입고 왔습니다.'
'나를 속이지 말라.'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속이지 않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내 말을 취하지 말라.'
82개의 화두 중 가장 먼저 펴봤던 화두이면서
쉽게 와닿을 수 있는 주제라 선택해 봤다.
모든 원문이 마찬가지였겠지만
이 원문 또한 저자의 해석이 붙어있다.
앞서 저자가 말하길, 자신의 해석적 결과를 취하려 말고
해석적 결과를 내려한 본인의 그 과정을
따라가며 취하는 식으로 책을 읽으라 했다.
결론적으로 난 그 결과마저 모른다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독자로써 순수히 해볼 수 있는 거라면,
그냥 저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풀이한 것과
그것을 내가 내 방식대로 이해한 바를
각각 풀어봐야겠단 생각을 하며
짧게 정리해 본 정도다.
불교적 지식과 상식이 탄탄히 바탕이 된
그런 이해가 아님을 먼저 밝힌다.
일단 짧다면 짧은 원문 안에서,
이해 안 될 단어와 한글문맥은 거의 없다.
납의나 아련아 정도를 빼고는.
납의는 여러 천을 덧대 만든 남루한 옷쯤으로 해석되고
아련아는 산속 고요한 분위기의 암자를 연상케했다.
이의 정확한 의미는 책에 각주처럼 정리돼 있다.
다음은 원문에 이어지는 저자의 해석.
법구경을 인용하며 조주가 말하자
가르침을 받는 그 스님은 일어나 절을 하려했으나,
조주는 오히려 자신을 속이지 말라 제지했다.
이에 추가적으로 방법을 묻는 스님도 없고
앞선 모든 질문거리는 역순처럼 삭제돼 사라졌다고 보았다.
나를 속이지 말라는 말로써 시작돼
조주와 스님의 모든 대화가
역순으로 삭제되며 깨닫는 식.
연기처럼 짧은 대화도 과거처럼 사라진다.
참고로 실린 설두현의 염 속 용두사미가 되었다는 말은,
멋있다는 반어의 뜻으로 이는
이 법구경을 화두로 한 대화에서
취하지 말라는 말이나 앞서 했던 말들과 연결돼 해석됐다.
그렇기에 앞선 대화들은 삭제됐다고
다시 한번 전달하는게 저자의 참고적 풀이.
속세의 일반인으로 보는 내 시각은 좀 달랐던거 같다.
우선 그냥 이 짧은 글 속 그 상황자체가 떠올려졌다.
묻는 스님과 듣고 답하는 조주.
깨달음을 주는 우화같다는 거창함은 없었다.
그냥 이 이야기가, 깨달음을 위한
가정된 상상 속 상황이라고는 전제하지 않았다.
과거 어느 시점 속 실제 상황이라 여기며
그 상황을 본인들처럼 내 안에 그려봤다.
크지 않은 둘만의 어떤 공간,
본인이 참되냐 아니냐를 논해보는 두사람.
누가봐도 납의라 불릴만한 것들은 둘다 입고 있다.
아련아라 불러도 될만한 공간 속 한적한 방 안에
마주 앉아 겉모습 납의를 논하고 환경 아련아를 논한다.
속세의 사람정도에겐 깨달았다 보여지는
겉모양과 처소를 갖춘 수도승들일텐데,
본인들끼리는 서로에게 흉내내기 식이며
이 세계의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쉽게 속이고 대우를 받을만한
선수들끼리의 거짓은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
스스로 자각해보는 선승으로써의
암묵적인 시그널들을 주고받는 그림.
스님은 말했다, 자신은 진심이라고.
걸친 납의도 그저 흉내내고자 입은게 아니니
본질을 찾는 이의 그 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하지만, 조주는 이내
속이지 말고 취하지 말자 한다.
독자로 느끼는 상황 속 이 제안은,
진정 그렇다고 확언도 생각도 하지 말고
조주 자신의 말로 스스로의 확인과 계기를 느꼈다면,
우선 더이상의 진의를 더 찾으려 하지도 말 것이며
마치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세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제안 또한 너무 값지게 담아두려 하진 말고
각자의 길로 잘 가자는 정도로 해석됐다.
즉, 그 정도면 서로에게 족하다는
방향성만을 보고 흉내내기식이 아닌
각자의 길을 가자는 조주 먼저의 천명 같았다.
스님이 보인 절을 하려한 행동에서
조주가 스님의 깨달음 정도는 공감했고,
이에 조주 자신과 같은 사고의 복제품으로써는 아닌
스님 본연의 이해의 길로 들어가는 걸 돕는 식처럼 여겨졌다.
다른 여러 화두들 또한 저자의 풀이들을 읽을 때,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의미를 음미했다.
길고 복잡한 글들은 아님에도
매번 읽다 다시 돌아와 읽게 된 구절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려워서나 생각의 흐름상 이해불가라서가 아니라,
글 자체로는 막히는 부분들이 없어도
문맥적 이해를 위해선 다시 읽기가 자주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유의 넓힘을 불교적 화두를 바라본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