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5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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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생각에 의문을 갖게 하는 지점이 많았던 소설이다. 한편, 도스토옙스키가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연루되어서 겪은 극적 경험, 사형수와 유형수로 겪은 고통은 이 작품에도 역시 짙게 배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평생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1869년 네차예프가 자행한 살인사건으로부터 소재를 얻고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는 니힐리스트이며 유럽의 인터내셔널, 바쿠닌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가 있었고, 모스크바에 비밀결사를 조직했던 인물이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니힐리스트는 모든 사상, 의미, 권위 도덕 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급진주의자이다. 그들 학생 운동은 폭력을 동반했다. 이들의 폭력적인 성향은 『백치』에서도 그려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도 서구로부터 들어온 사상 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다양한 ‘사상’, ‘주의’에 대해 부정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서구의 사상이 혼란스럽게 러시아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한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윗세대들(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시기)의 서구사상(자유주의)을 여과없이 들여오고 그들의 삶이 부조리하고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서구로부터 들어온 불온한 사상들에 대항해서 러시아의 정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학자이자 시인인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끼와 같은 사람들이 구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페테르부르크 근처 지방 소도시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개인 연구실(바르바라의 집)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독자에게 수상한 분위기를 전한다. 화자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집 모임은 소문과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소문은 그들 모임이 “자유사상과 방종, 무신론의 온상”이라고 굳어졌다. 그러나 화자는 소문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모임은 “매우 순수하고 온건하며, 순 러시아식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잡담을 나누었을 뿐이다.”(1권 제1장 9. 52p) 학자연하고 사상가인 양 하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 때문에 모인 모임이었다. 소문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를 긴장하게 하고 극도의 흥분과 공포 속에 몰아넣는다. 이런 증상들은 도스토옙스키의 트라우마와 관계있다. 또한 국가, 계급, 개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내포하는 경계와 폐쇄를 나타낸다.

 

소설 전체에서 중반이 지날 때까지 인물 탐색과 소도시의 사람들의 관계에 존재하는 갈등과 원망, 분노, 지배 같은 것들로 연결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스쩨빤 뜨로피로비치의 모임에 참석하던 리뿌찐, 비르긴스끼, 시갈료프, 키릴로프, 샤토프 등은 스따브로긴과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키의 귀환과 함께 그들이 이 소도시로 모여든 목적이 드러난다. 그들은 자유주의 관리, 건축가, 학생이고 슬라브주의자, 인신사상 신봉자,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다. 이들을 소개할 때 그들의 사상이 어떠한가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사상이 범람하던 시기에 사상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풍조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자유주의나 계몽주의에 이어 공산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시대였다.

 

“당시는 특별한 시대였다. 무언가 새롭고 이전의 평온과 전혀 다른 아주 이상하지만 스끄보레시니끼에서조차 감지되는 어떤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소문이 들려왔다. 구체적인 사실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알려졌으나, 이 사실들 외에 어떤 사상들이,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사상들이 그에 수반되어 나타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상들은 뒤죽박죽이어서 어디에 적용시킬 수도 없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1권 제1장 5. 32p)

 

리뿌찐, 비르긴스끼, 시갈료프, 럄쉰, 똘까첸꼬로 이루어진 5인조는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키가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러시아 내 각 지방과 유럽 전역에도 이런 비밀결사들이 존재하고 배후에는 더 큰 조직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 실체를 본적도 다른 조직을 만나본 적도 없다. 이들은 스따브로긴의 외국에서 만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에게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자들에게 스따브로긴은 정신적 지주이고 우상이다. 그 영향력을 뾰뜨르 베르호벤스키가 이용하고 그들을 지배한다.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따브로긴(Nikolai Vsevolodovich Stavrogin)은 소설의 중심인물이고, 모든 관계의 한 가운데 있지만, 그런 그에게서 지독한 허무를 보게 된다.

 

천재적이지만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스따브로긴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말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욕망과 쾌락을 쫓는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의지 선과 악의 팽팽한 대립을 느끼지만 그는 범죄와 쾌락을 선택한다. 첫 번째 범죄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경험한 쾌락은 그에겐 놀라운 것이었고 이후 같은 선택을 반복하게 된다. 여기서 스따브로긴은 그가 추구하듯 자유로운가를 질문해본다. 두 의지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그가 자유롭지 않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매번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마찬가지 결론에 이른다. 습관이나 경향성은 이미 자유롭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구의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그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과 살인 그리고 믿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 자살을 한다. 과연 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질문한다면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들은 스따브로긴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뾰뜨르 베르호벤스키의 정신적 지배를 받고 있다. 그 끝에는 허무와 공허만 있다.

 

그들은 왜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을까? 그들은 결말은 왜 허무일까? 모든 사상이 다 그렇지는 않을텐데, 폭동과 살인, 자살, 공허가 두드러진다. 왜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19세기 러시아에서 원인을 찾는다. 계급의 벽이 높은 사회다. 사상이 뿌리내리고 꽃피우기에는 그 경계가 장애가 된다. 그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가 없다는 작중 인물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식인들의 모임 밖으로 나갈 개방된 출구가 없었다. 방화나 폭동이 사상을 그 방법이자 에너지로 여길 수밖에 없는 사회적 한계가 존재했다는 생각이다.

 

에필로그에 푸시킨의 시와 누가복음 8장 32-37절을 인용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밝히고 있다. 그는 푸시킨의 시로 성경을 풀어, 파괴적인 사상들이 바로 악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폰 렘쁘께는 ‘자레치예’의 화재 현장에서 "모든 것이 방화다! 이것은 허무주의다! 만약 무언가 타오르고 있다면, 그것은 허무주의다!"(3권 100p)라고 외친다. 허무주의라고 번역된 러시아어 Нигилизм(Nigilizm)은 라틴어 Nihil(무, 아무것도 없음)에서 온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급진 세대의 적극적이고 파괴적인 정치·사회 운동. 종교, 도덕, 국가 권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이를 철저히 파괴하려 한 유물론적 행동주의다. 허무주의는 폭력성을 띄는 무정부주의를 향한다. 렘쁘께의 외침은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사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이다.

 

살해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광기를 보이는 비르긴스끼와 럄신이 뒤엉키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절정을 이룬다. 비르긴스끼의 절규와 럄신의 발작은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급진주의 사상의 민낯이다. 한편, 맡겨진 일(범죄)을 무심하게 해내는 에르껠의 모습은 극적 대비를 이룬다. 범죄와 인간의 본성을 소름끼치도록 그리는 도스토옙스키의 탁월함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 살해에 연루된 인물들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미뜨리, 스메르자코프를 떠올리게 한다.

 

파괴와 혁명을 논하던 지식인과 소시민들은 살해 현장에서는 나약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살해, 자살, 도주로 그들의 조직은 와해된다. 그들의 사상이 실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사상이란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욕망으로 연결된다. 인간의 욕망을 무시한 사상이란 공허한 말들에 불과하고, 그것을 무시한 사상의 실행은 폭력이다. 생명을 해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기만 하다. 도스토옙스키가 19세기 러시아에 들어온 급진적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들의 신앙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도 모호하게 보일 뿐이다.

 

스쩨빤 뜨로피보비치 베르호벤스키는 죽기 전 유언과 같은 말에서 “러시아에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의지가 필요하며, 그것이 악령과 모든 불결함, 혐오스러운 것들을 몰아낼 것”(3권 제7장 2. 327p)이라고 한다. 그 자신 또한 책임에서 피할 수 없고 그 선두에 선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스쩨빤 베르호벤스키의 고백과 병행하며 대비를 이루는 것이 스따브로긴의 고백서이다. 그는 과거의 범죄와 이후 연속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글을 세상에 발표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참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파괴적인 행위일 뿐이다. 악령은 그의 내면에 있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가 사상을 ‘악령’으로 보는 것과 비교된다.

 

이렇게 정치적인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소설은 경향소설로 끝을 맺는다. 모든 사상, 이념이 다 폭력적이고 한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사상의 물결이 큰 변혁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불안하고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급변하고 있고, AI 시대를 맞아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정서가 우리를 엄습한다. 이런 세상을 어떤 사유로 바라보아야 하며, 인류가 새롭게 해야 할 사상과 끝까지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인가를 질문 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세대의 이념은 증오와 혐오를 상속하고, 생명을 조롱하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양산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는 현재의 혼란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가치를 잃어버린 증상은 아닌지! 도스토옙스키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우리 시대의 ‘악령’은 무엇일까?

 

나는 자유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하는 생각, 선택, 행동들은 자유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인간은 전적인 자유의지 상태에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하는가?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위해 자유로운 선택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들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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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5-25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도스도옙스키는 어려워요 ㅠ 그간 겁나서 못읽고 있다가 ‘죄와 벌‘ 부터 서서히 시동을 걸려고 하고 있거든요. 악령은 목록에서 뺄까 했는데 기승전결의 연속성을 갖는대서 고민하고 있었지 뭡니까요. 그나저나, 이걸 어찌 해내셨습니까 ㅠ 도스도옙스키 읽으셨거나 읽으시는 분들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건 아닐거에요. 리뷰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6-05-25 16:0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함께 읽고 토론하는 분들이 계셔서 한권씩 해치우고? 있네요 ㅎㅎ
제 다음 책은 <미성년>이 될듯합니다

차트랑 2026-05-25 16:50   좋아요 1 | URL
오... 도스도옙스키를 싹 쓸고 가실 기세로군요!!!
그 깊은 산맥을 죄다 !!!!

도스도옙스키와 마주하니
참여하고 계신 독서팀이 부럽게 생각되기는 처음입니다.
전 아직 독서팀을 부러워해본 적은 없답니다!!

미성년도 대박 두껍던데,
미성년 리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악령의 리뷰는 저를 까마득하게하여 기운이 빠졌는데
미성년을 읽으신다니 그 기세가 다시 저의 전투력 게이지를 상승시키는군요!!!)



에로이카 2026-05-25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안녕하세요? 시간이 나시면 르 귄의 <빼앗긴 자들>을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요. <악령>의 영어판 제목이 Possessed이고,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르 귄이 쓴 책이 Dispossessed, 곧 <빼앗긴 자들>(로 제목이 잘못 번역된 책)이라고 해요. 그레이스님께서 두 책을 읽으시면 한층 더 풍부한 말씀을 하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

그레이스 2026-05-25 16:04   좋아요 2 | URL
아!
감사합니다.
본 책인듯 하네요,,, 생각이 안나네요
악령을 생각하면서 보면 깊이가 다를듯요^^
감사합니다
 
알고 싶지 않은 마음 - 탈진실 시대 무지의 전략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정영목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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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이나 제노사이드가 있었던 지역에서, 또는 이민자에 대한 편견에 작용하는 무지는 많은 경우 선택과 의지에 의한 것이다.처리하기 힘들정도로 너무나 많은 정보가 들어오거나, 새로운 정보나 아직은 대응할 능력이 없는 정보를 대할 때 무지로 반응한다. 모두 공감되나 평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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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싫다’가 먼저였던 것 같다. 그리고 ‘문학 읽기 권태기’가 왔다. 계속 비슷한 주제에 도달하게 되는 소설에 식상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다. 그려지는 일상과 대화들은 빠른 속도로 훑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순간이 잦아졌다. 결말을 알 것 같은 전개와 혹은 중요한 메시지임에도 작가의 의도가 미리 읽혀지는 머리 부분에서 ‘계속 읽어야 하나?’ 하는 갈등을 하곤 했다. 나름대로 내린 처방은 문학이 아닌 난이도 있는 책 읽기와 두꺼운 책 함께 낭독하기였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다. 사이즈도 크고 페이지도 많지만, 읽지 않고 모셔두기엔 너무 비싼 책이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어둠이 내리는 길을 걸어서 만나기로 한 카페를 향했다. 마음이 설렜다. 달리기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지나 천변 길을 걸어서 카페에 도착했다. 다행히 카페는 한산했다. 창가 테이블이 자리를 잡고 짊어지고 간 무거운 책을 꺼냈다. 함께 읽기로 한 독우(讀友)를 기다리며 ‘이 두꺼운 책을 3권까지 무사히 읽을 수 있을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걱정보다는 기대, 드디어 읽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더 컸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카페에서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서론부터 읽어나갔다. 번갈아가며 조용한 목소리로 빠르게 읽다가 중요한 문장에서는 속도를 줄이며 줄을 치고,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만나면, “이 문장 이해되세요?” 하고 다시 새겨 읽고, 서로 설명을 덧붙였다.(길지 않게) 한 사람이 읽고 있는 듯이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너무 좋은데!’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함께 한 독서 친구여서 그런가? 이전에 함께 낭독으로 읽었던 경험도 있어서 서로에게 갖고 있는 믿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잡담 없이 계속 읽어가며 나는 “이 부분 재밌네요.”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독우의 책에 대한 조용한 열정과 성실함 때문에 완독의 전망이 높아진다. 불가피한 일 때문에 빠질 걸 예상하고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만나서 읽기로 했다. 돌아오면서 시간을 두고 여유 있게 즐기면서 하자고 생각했다. 이제 해가 길어지고 오고 가는 길이 조금 더 밝을 것이다.

 

그렇게 1장의 반 분량을 읽고 이번 주 다시 이어서 읽게 되었다. 아직은 그리 어려운 철학 용어들이 등장하진 않지만,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본질을 탐구했던 고대 과학과 철학에 대해 잘 전달하는 에코의 문장도 우리가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접근도 신선하고 흥미를 끈다. 그렇게 특이하지 않음에도 그의 글에는 관심을 끄는 새로움이 담겨있다.

 

그는 아르케(arche), 아페이론(apeiron), 그리스어(mythos)에 담겨 있는 신화(myth)의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현대의 철학자들의 해석도 간략하고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서론 부분에서 가장 눈길을 끈 내용은 “인간이 경이로움을 경험하면서 이에 대한 반응으로 철학을 시작했다(8p)”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인간은 경이로움을 만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경배를 하거나, 질문을 한다. 경이로움에 대한 과학이나 철학적 반응은 질문이다. 고대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질문들은 과학이 답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고, 이어지는 질문들은 철학의 영역에 해당한다. 철학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생각의 훈련이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그리스와 시칠리아 아프리카 북부, 이오니아 지역의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지도를 보며, 그동안 읽어왔던 서양 고전 독서가 이 책을 쉽게 읽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 두꺼운 책의 1장 부분이 『수학의 정석』 「집합」이 될지도 모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철학적 용어들이 멈추게 할지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모르는 것은 놓고 갈 예정이다. 내일 만나서 읽을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맘이 편해진다. 준비도 예습도 없이 책만 지고 가서 반가운 친구와 앉아서 읽다가 올 생각을 하니 그 만남이 기대된다.

 

또 다른 모임에서도 낭독을 하고 있다. 중고등학생 남자아이 둘과 헤로도토스 『역사』를 낭독하고 있다. 읽고 설명해주고 지도나 역사와 인물설명을 해야 해서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지만 덕분에 나는 세 번째 읽고 있고, 눈으로 읽고 정리할 때와 달리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을 발견한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는 미술 모임에서 한 주에 한 장씩 요약 발표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그 모임 회원과 한 번쯤 읽었던 몇 사람이 낭독만 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져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독서가 기대했던 것 보다 큰 효과가 있어서, 처음 읽었던 때와 달리, 시대별 정리가 되고, 보이지 않던 그림이 보이고, 또 곰브리치의 작은 오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과 관람했던 전시들을 통해 얻은 지식과 보는 눈이 생겼음을 스스로 느낀다. 격려가 되는 독서다.

 

바르트의 책(『영도의 글쓰기』)이 잘 읽혀지는 것을 보니, 이 처방이 맞나 보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주문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은 1장 부분만 읽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오래 전에 읽고 참고했고, 거기에서 멈췄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만 읽고 만다고 어디에선가 읽고 공감되서 웃었었다. 이번 기회에 읽어버려야지 했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 꺼내놓다 보니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버렸다. 이번엔 성공하길! 『말과 사물 강의』를 사야할까? 생각 중이다.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할 소설이 있긴 하다. 왜 권태기가 왔을까? 글쓰기도 식상하고……. 생각하는 틀이 고정되어 있고 깊어지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그래서 아무래도 지금은 이 책들을 읽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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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4-28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권이 겹치네요..ㅎㅎ
서양미술사는 저하고 판본이 똑같고...<시각예술의 의미>는 2주 전에 구매했습니다..ㅎㅎ지각의 현상학과 말과 사물은 엔날부터 있던 책인데..ㅎㅎ에코가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도 썼군요! 에코의 전집이 있는데, 저 책은 없습니다. 사후에 출간된 책인 듯합니다..어쨌든 소설이 읽기 싫은 때가 있죠. 그레이스 님은 어려운 책을 읽으시는군요! 저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봅니다..ㅎㅎ

그레이스 2026-04-28 09:37   좋아요 0 | URL
야무님은 철학과 미학에 있어서는 선배님이신듯요^^
파노프스키가 잘 읽혀서 신기했어요.
처음에 읽을땐 조금 힘들었거든요.
<도상해석학 연구> 읽고 이 책들은 읽다가 말았어요.^^

그렇게혜윰 2026-04-28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서로 다른 판본으로 친구랑 번갈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재밌었던 경험이에요. 어려운 글일수록 소리내어 읽으면 좋을 것 같은데 독우가 있다니 참 부럽습니다! 전 요즘 도통 어려운 책은....뇌휴식기인가봐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6-04-28 17:57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읽어보니,,, 좋더라구요...^^ 귀한 벗이죠~~감사합니다.
그렇게혜윰님도 화이팅입니다.~^^

이소 2026-04-30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우라니. 오늘에야 듣게 되는. 새로운 세상 이야기. 부럽네요.

그레이스 2026-04-30 20:23   좋아요 0 | URL
오래된 독서 모임과 친구가 있어서 넘 감사합니다 ~♡
 
연매장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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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는 길에 버려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흙으로 덮고 장사지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 고대의 비극이나 서사시에서는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희생을 치르고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아킬레우스에게 고개를 숙인다. 성경에는 먼 거리를 밤새도록 달려가 사울의 시신을 찾아왔다는 기브아 사람들 이야기도 있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시신을 구했을까? 인간의 육체와 죽음 그리고 사후(死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를 썩고 분해되어 기본적인 물질로 환원되는 것으로만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후세계나 부활과 관련된 특별한 신앙이 없더라도, 생전에 함께 하고 사랑했던 존재의 틀(혹은 그릇)을 안타깝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끼던 물건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쉽게 함부로 버리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의 육신이지 않은가.

 

평생을 기억상실인 채로 살았던 딩즈타오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연매장은 안돼!”라고 외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도 “연매장되기 싫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연매장이란 시신을 관에 담거나 시신을 감싸는 어떤 것도 없이 매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학살, 혹은 예를 갖출만한 여력이 없는 극단적 상황을 내포한다. 학살은 시체들을 묻고, 시간은 그들을 발굴한다.

 

195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지주(地主) 계급의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하는 대규모 토지 재분배 정책인 토지개혁을 한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지주가 학살되거나 숙청되었다. 딩즈타오는 이때 가족과 재산을 다 잃고 혼자 살아남아서 강에서 구조된 여성이다. 그녀의 아들 칭린은 아버지의 일기, 기억을 잃은 어머니의 분절된 말들, 직장상사인 류샤오찬의 아버지 류진위안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인연과 그들이 겪은 시대적 아픔을 알게 되고, 어머니가 상실한 기억의 진실과 고통의 근원 가까이에 다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처럼 그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지 않고 덮어두려 한다.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진실의 모든 것을 연매장 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432p)”

 

그 진실을 추적해 쓰는 것은 칭린의 친구 룽중륭이 한다. 칭린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지만, 룽중륭은 싼즈탕 지역과 그 장원과 사건을 추적해서 쓴다.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와 고통의 진실이 매장된 채로 모든 것이 풍화되기를 바랐지만, 룽중륭은 역사는 진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444p)”라고 말한다. 칭린은 냉소하며 생각한다.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느냐고, 세상의 어떤 일도 진정한 진실을 가질 수 없다고….

 

작가가 이 시대 토지개혁과 관련된 개인적 경험을 듣고 ‘연매장’이라는 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이 단어는 시대적 비참을 품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도 수많은 연매장이 있고, 진실이 묻혀 있는 평토장 무덤들이 있다. 이 땅에는 여전히 감자를 먹지 못하는 많은 순이 삼촌들이 있고, 멸치도 못 먹는 유가족들이 있다. 자신의 손으로 묻은 가족들과 죄의식을 기억의 심연에 매장한 딩쯔타오처럼 침묵으로 아픔을 묻고 침묵하도록 강요받았던 사람들이 있다.


칭린이 진실을 밝히길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알려하지 않는 것이 강함의 표현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나? 칭린과 룽중륭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칭린의 태도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알지 않으려 하는 게 강함의 표현이라고? 자라면서 알고 있던 부모의 정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흔드는 것일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감춘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아픔을 느끼지만 그는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중국인들이 문화혁명과 같은 부조리한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같은 태도를 본다. 과거의 역사를 대하는 그런 방식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유물론적이고 실용적이 그들 나름의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칭린에게서는 진실을 완벽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패배의식도 엿보인다. 그러나 진실에 연루되어 있는 칭린보다는 자유로운 룽중륭은 연구자와 작가로서 탐사를 계속한다. 작가는 칭린을 이해하는 듯 쓰고 있지만, 사실 그의 태도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룽중륭을 등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비중이 적은 제3자로서의 룽중륭은 작가 자신이라고 짐작된다. 룽중륭의 등장은 기록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작가 자신에게 확인시키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호메로스나 그리스 비극, 특히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다보면 사람들의 주검에 대한 예(禮)는 시대, 지역, 문화마다 조금씩 상이하나, 그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사회에서 화장은 선호하는 장례방식은 아니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시대의 변화와 문화에 따라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훼손되고 함부로 매장된 육체는 경악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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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6-04-23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런 내용이었군요. 어쩌면 어느 시대에나 통할 수 있는 이야기겠네요.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외면은 자기기만일 수도 있지만 들추면 닥칠 혼란,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자기방어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국도 이념에 의해 많은 이들이 강요당하여 학살당한 이들이 있고 묻혀 있는 진실들이 많죠.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뷰 감사합니다. 언젠가 읽어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6-04-23 10:26   좋아요 0 | URL
4.3과 5.18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가족의 유해를 찾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도 그렇구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6.25나 일제강점기 양민학살 사건 등,,, 우리에게도 있는 같은 사건들이 계속 생각나네요.
감사합니다. 거리의 화가님은 역사를 많이 아시니까 깊은 독서가 되시리라 생각되네요.
 
영도의 글쓰기
롤랑 바르트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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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 스띨, 에크리뛰르, 작가가 말하는 언어, 문체, 글쓰기의 정의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작가의 문체가 완성되도록 하는것, 그것이 영도의 글쓰기다. 발자크, 졸라, 플로베르의 글을 비판적으로 읽게되고, 까뮈의 문체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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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4-01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만 한가요? 롤랑바르트 번역본들은 전부 읽을 수 없는 수준이던데요...저두 3권 있었는데 읽다가 전부 버렸어요..^^;;

그레이스 2026-04-02 09:19   좋아요 0 | URL
가끔 Gemini한테 의미를 물어봐야하긴 했어요.
스띨과 에크리튀르를 조금 혼용해서 번역해서...
위에 저 언어, 문체, 글쓰기 만 이해하면 그때부턴 읽을만해요.
바르트 책 중에서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예요.
비평에세이도 좋았구요.

yamoo 2026-04-02 09:37   좋아요 1 | URL
헛! 그런 번역본이 있단 말이죠? 저도 한 번 보겠습니다. 서점에서 몇 페이지 읽어보고 일을만한 번역이라면 구매해야 겠어요. 경험상 열받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서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