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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작품을 읽으면 타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 자신이 타자였고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 시켰던 경험을 숨기지 않고 있다. 더불어 가장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서는 이산의 아픔과 가족들에 대한 죄의식이 드러나 있다. 그의 죄의식은 잔지바르의 혼란한 시절 동안 겪었던 이슬람 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있다. 소설 사이사이 등장하는 탄자니아의 현대사를 통해 당시 그들의 고통을 가늠하게 된다.
영국에서 유학 중에 잔지바르 혁명이 일어나고, 라시드는 망명자가 된다. 영국인 그레이스와 만나 함께 살다가 헤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어린 시절 보았던 형 아민의 사랑을 기억한다. 그들의 삶을 이끌어갔던 이슬람 관습 안에서 부적절하고 수치스러운 아민의 사랑은 곧 부모의 설득으로 끝이 났었다. 용케 단념하고 내색하지 않았던 아민의 마음이 사실은 많이 힘들었다는 사실을 라시드는 아민의 편지를 받고서야 헤아리게 된다. 아민은 편지를 통해, 자밀라의 외할머니 레하나와 영국인 피어스의 사랑, 피어스를 따라 뭄바사로 간 레하나의 불행한 삶에 관해 알게 된다. 잔지바르의 청소년 시절 라시드에게 그들은 그저 타자일 뿐이었다. 이제 라시드는 그들의 사랑에 대해 쓰면서 자신의 아픔을 전치하고 있다.
“보시다시피 이 이야기에는 ‘나’가 있지만 이것은 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 파리다와 아민과 우리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 자밀라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것, 그 이야기들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무질서한 흐름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고 영원이 얽매는가에 관한 것이다.(173p)”
그의 글에서 첫 번째로 마주하게 되는 사실은 여성들의 지위다. 여성에 관한 단어 중 두드러지는 것은 ‘수치’다. 부모님을 여읜 레하나와 같은 여성은 남동생의 보호아래 있어야하고, 과년한 상태로 결혼하지 못하면, 수치스러운 상황을 만날 수 있다. 그 수치를 피하기 위해 나이가 차기 전 결혼을 해야 한다. 잔지바르 술탄국이던 시대로부터 시간이 흘러, 3대가 지난, 1950년대가 되어도 여성의 지위는 그리 나아지지 못했다. 부친이 교사인 파리다와 같은 경우,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자 애쓰지만 떨어진다. 그녀에게는 사범학교에 입학한 아민처럼 공부에 열중할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생활이 있다. 자밀라는 레하나와 유럽인의 부도덕한 관계에서 탄생한 혈통을 받은 여성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다.
두 번째는 독립 후에도 여전히 식민지인의 자아상과 꿈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끝나는 시대와 시작하는 시대 사이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받아왔던 학교 교육, 식민 교육의 영향일 것이다.
세 번째는 잔지바르, 탄자니아의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현대사다. 영국이 잔지바르에서 떠나고, 1964년 잔지바르 혁명이 일어난다. 오랜 세월 정착해서 살고 있던 많은 이슬람 인들이 추방되거나 압제를 피해 아라비아나 인도로 탈출한다. 잔지바르는 탕가니카와 연합해 탄자니아가 되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면서 탄압을 받는 이슬람 인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제 라디오가 망가져서 우리는 뉴스를 듣지 못한다. 급수장의 뭔가가 고장 나고 수돗물이 거의 하루 종일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뭔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심지어 비누 한 개나 면도날 한 팩조차도, 어쩌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다다를 때가지 내버려 두었을까?(358p)”
시인으로 성공한 누나 파리다가 보내온 형 아민의 일기에서 자신이 없는 동안 형과 가족들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읽는다. 실명한 아민,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의 오랜 고통, ……, 영국에서 보낸 자신의 편지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무심하게 들렸을지, 그 두서없는 편지를 읽고도 형(아민)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실연한 그의 편지에 답장을 하는 형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눌러두었던 자밀라에 대한 슬픈 기억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가족들에게 죄의식을 느낀다.
영국에서 작가로 성공한 라시드는 컨퍼런스에서 우연히 피어스의 외손녀 바버라 터너와 만난다. 그들이 레하나와 피어스의 삶을 되짚어 가던 중, 피어스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레하나가 임신 중이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한다. 그가 훌쩍 떠나가고, 뒤에 남은 여성만 수치심을 떠안는, 그런 시대였다. 영국이 갑작스럽게 떠나버리고 혼란에 빠진 잔지바르와 같다.
형의 공책을 받아서 읽은 라시드는 “가족들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했었음을 알았다.(365p)” 그는 형이 자밀라를 잃었던 고통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가족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형이 실명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이후 그는 형의 편지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누나의 성공한 시집에 실려 있던 헌사 중 “우리를 떠난 적 없는 라시드에게”라는 말은 그를 당혹스럽게 한다. 자신의 마음은 많은 시간동안 가족들을 떠나 있었고, 부모가 기원하던 성공을 위해 몰두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소박한 무관심의 삶(322p)”에 도달했다. 어느새 사랑하는 사람이 진저리치는 혼자 떠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서 자신의 무심함에 대한 용서를 빌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마음의 무게가 다가온다.
『낙원』에서의 환상적 분위기, 『바닷가에서』의 비판적 시선, 『그 후의 삶』에서의 상호텍스트성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담담한 고백과 참회가 있다. 지나치게 담담하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서, 그가 고백한 무정, 무심함이 괴롭게 다가온다. 한편,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자기고백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혈육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모국어만의 정서가 있을테니.
인간은 낯선 땅 뿐 아니라 모국, 고향, 가족, 그리고 자신에게조차 영원한 타자일까? (함께 가기를 원하는 바버라에게 라시드가 한 말은 이런 질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