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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서 지식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말이다. 과학, 예술, 철학의 길이 궁극적으로 한 지점에서 만난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과학적 개념에 충실하면서,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허구를 썼다고 한다.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일 위험성을 걱정할 정도로 플롯에 개연성이 있다. 천재적 몰두와 발견의 순간, 작가의 펜은 인간의 나약함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는 어려운 과학이론과 나의 천박한 지식의 간극을 역사와 보편성으로 메꾸면서 이끌어 갔다.
18세기 디스바흐에 의해서 우연히 만들어진 안료 ‘프러시안 블루’가 최초로 사용된 <그리스도의 매장>(피터르 파데베르프,1709)은 인류의 비극을 애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1782년 셸레는 이 ‘프러시안 블루’에서 시안화물을 분리해내고, ‘프러시안산(酸)’이라고 명명했다. 1907년 프리츠 하버는 화약과 폭약의 원재료인 질산염의 공급을 위해, ‘공기 중 질소 채취 연구’를 한다. 그 연구는 비료 생산에 공헌을 했고, 그는 “공기에서 빵을 이끌어낸 사람”이 되었다. 1915년 역사상 처음으로 자행된 가스공격을 감독한 그는 시안화물을 이용한 살충 훈증제 ‘치클론’을 발견했다. 이 살충제는 나치가 자신의 친족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름다운 프러시안 블루는 아우슈비츠 가스실 벽에 참담한 푸른빛을 남겼다. 인류의 우연한 발견은 양면성을 띈다.
전쟁터의 참호에서 일반상대성 방정식에 대한 최초의 정확한 해를 구한 슈바르츠실트의 풀이법에는 일반상대성의 신빙성과 물리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특이점이 존재했다. 그가 전쟁터의 침상에서 죽기 직전까지 빠져나오지 못한 이 심연은 후에 블랙홀의 존재로 밝혀진다. 수학의 심장부에 가까이 간 그로텐디크는 광기에 휩싸인다. 입자가 파동을 따라 서핑을 하듯 운동한다는 루이 드 브로이의 양자이론은 상상할수록 아름답다.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다 정신을 잃는 그의 모습은 스탕달 신드롬을 떠올리게 한다. 과학자의 광기는 스스로를 소진시키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를 닮았다.
슈레딩거 방정식은 “아원자 영역의 어둠을 흩어 신비의 세계를 드러내줄 프로메테우스의 불”(118p)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이 불을 거부하고 ‘불확정성’을 주장한다. 양자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기존 물리학의 토대를 흔드는, 이 이론을 보어는 “새로운 물리학의 주춧돌”(217p)이라 여겼다. 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격돌했다. 오랜 질의와 응답과 토론 끝에, 아인슈타인은 항복했고, “신은 우주를 놓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소!”(227p)라는 말을 던진다. 보어는 “신에게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229p)라고 답변한다. 천재도 항상 창조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격물치지에서 더 나아가 왕양명은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이라고 했다. 지식을 넓히는 것은 사물을 바로 잡는 데 있다는 뜻이다. 사물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는 한계 밖의 것을 그대로 둠, 그대로 수용함이 아닐까 한다. 끌어들여와 현재의 지식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 앎과 모름의 경계가 명확해 지고, 그 경계는 한 걸음 내디딜 시작점이 된다. 그렇게 지식은 넓혀져 갈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세계의 정원사라고 할 수 있겠다. 가지가 부러지도록 레몬이 달리는 “죽음을 앞둔 풍요”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이면을 지시한다. 가지를 잘라보지 않고서는, 얼마나 살지 알 방법이 없다. 이 정원에 존재하는 것들은 “내가 보여주는 세상은 당신이 나를 적용하면서 생각하는 세상과 같지 않다"(200p)고 경고한다. 정원사는 그 정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정원사가 할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