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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불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1
니콜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카자크(코사크)는 중요한 연대기의 한 부분을 이룬다. 고골은 이 카자크 소지주의 후손이다.
15세기경부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 자치적인 무장 집단을 형성했다. 카자크란 그 집단과 구성원을 일컫는다. 타타르인의 노예사냥에 대비하여 자신들을 지켜야했고 16세기에 이르러 그들 무장조직은 타타르와 튀르크와 아르메니아인 대상을 습격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이들은 정교(그리스 정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자포로제 시치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시치로 형성된 자치 세력이었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모스크바 공국 사이에서 동맹관계를 유지하거나, 지배를 받았다. 로마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보다는 정교를 믿는 러시아와 유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말 이후 폴란드 왕에게 복종하여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헤트만 페트로 사하이다치니(1614년~1622년 재임)는 귀족출신으로 높은 교육을 받았으나 코사크군에 들어갔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교육, 정교의 진흥에 힘썼다. 그가 세운 비성직자 단체 ‘에피파니 동포단’은 그가 죽은 지 10년 후 ‘키예프 모힐라 아카데미’로 발전했다. ‘키예프 모힐라 아카데미’는 정교의 교육기관이지만 고전과 라틴어, 그리스어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훗날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포함한 슬라브 사회의 가장 중요한 정교의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는다.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개혁을 뒷받침한 인재들이 이 아카데미 졸업생이었다.
1630년대 폴란드에 대한 반란 시대의 코사크를 그린 니콜라이 고골의 『타라스 불바』는 불바의 두 아들이 이 ‘키예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귀향한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카자크의 전사로서 오랫동안 전투에서 삶을 보냈고, 주요 원로 지위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무서울 정도로 완고한”(19p) 불바는 이제 그의 아들들을 ‘자포로제’로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그의 몸은 전쟁을 위하여 태어난 것 같았고, 그의 성품은 남보다 월등히 용감하고 강직했다.”(19p) 불바는 그리로 가야만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포로제로 향함은 전투 참가를 의미한다. 드네프르 강 유역의 자포로제 세치는 카자크의 정신의 산실이다. 출신과 학식, 계급 등에 상관없이 각처에서 모여드는 남자들로 들끓는 용광로다.
자포로제 세치(시치)로 향하는 그들 앞에 펼쳐지는 대초원을 그린 표현들은 아름답다.
“가면 갈수록 대초원은 더욱더 아름다워졌다. 노보러시아로 불리는, 저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땅. 당시의 남부 러시아 전부가 푸른색 하나로 일렁이는 인적이 드문 처녀지였다. 쟁기질 하 번 한 적 없는 대초원은 야생 식물들로 뒤덮여 있고, 그곳을 지나는 말들은 마치 숲 속을 달리는 것처럼 잡초 속에 온몸이 푹 잠겼다. 자연계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대지의 표면은 전부 황록색 바다요, 그 위로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와 있다. ……공중에서는 솔개들이 날개를 펼치고 두 눈으로 똑바로 풀 위를 응시하면서 날고 있다. 날아가는 오리 떼의 우는 소리가 어디쯤인지 잘 모를 저쪽 호수에서 울려온다. 풀 속에서 나온 갈매기 한 마리가 아름답게 날갯짓을 하면서 새파란 공중의 파도 속을 멋지게 헤엄친다. 갈매기는 높이높이 올라가 단 하나의 검은 점이 되어 깜박거린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어 태양 앞을 스치고 날아간다……. 아아, 대초원이여! 어쩌면 그대는 이렇게도 아름다운가!”(37p)
지도를 보면 대 초원을 가로질러 흑해로 흐르는 드네프르 강은 댐이 건설되어 호수의 무리가 되었다. 이 강 상류에는 체르노빌이 하류에는 자포리자(자포로제) 원전이 자리 잡고 있다. 강의 좌안으로는 공업지대와 광산이 개발되어 있다. 쟁기를 두고 가면 풀이 무성해져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비옥한 ‘유럽의 빵바구니’는 약탈과 혁명, 폭격의 전장이 되어 있다. 고골이 노래한 이 아름다운 풍경은 현재의 비극과 대비되어 비애감마저 든다.
자포로제로 들어서는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소리는 대장간에서 쇠망치를 두들겨 대는 우렁찬 소리, 부싯돌과 화약을 파는 장사꾼들, 양고기를 파는 사람들, 길 한복판에서 사지를 뻗고 자는 카자크…… 빈둥빈둥 술에 취하고 노는 일 과 총 쏘는 것 말고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전투로 단련된 거무스름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이곳이 바로 세치다. “사자처럼 건장하고 오만한 모든 사람들이 생성되는 보금자리이자 본바탕이 되는 곳”이다 “굽힐 줄 모르는 굳은 의지와 카자크의 영혼이 모두 다 이곳에서 솟아 나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넘쳐흘렀다!”(42p) 실컷 마시고 취하는 그들의 유흥은 유난히 시끄러웠지만 올바르지 못한 어두운 환락으로 이어지는 유흥은 아니었다. 모임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불바는 전쟁 없이 태만에 빠진 세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마침 폴란드에서 정교도들에게 행한 포학행위가 보고되자 응징하기 위해 출전하고, 폴란드 남서부 지방의 마을을 포위한다. 아들 안드리는 키예프에서 잠시 만나 사랑했던 여인이 그 마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굶어 죽어가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식량을 짊어지고 마을에 잠입한다. 폴란드의 편이 되어 전장에서 카자크와 싸우는 아들을 발견한 불바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 안드리를 죽인다. 큰 아들 오스타프마저 사로잡혀 잔인하게 고문당하다 죽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불바는 다시 봉기한다.
“타라스 불바의 행방이 밝혀졌다. 12만 명의 카자크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에 나타났다. 그 군대는 이미 전리품 때문에 혹은 타타르인을 추격하기 위해 나선 어떤 작은 부대나 지대가 아니었다. 그렇다, 참다못해서 전 민족이 일어난 것이었다. 자신들의 권리가 조롱당하고 자기들의 풍속이 짓밟힌 것에 대항하여, 수치스러운 모욕에 대항하여, 그들의 교회에 대한 모독에 대항하여 봉기한 것이었다.……그리고 오래전부터 카자크 민족의 증오심을 증대시키고 더욱 심하게 그들을 억압해 온 모든 것에 대항하여 복수하려고 봉기한 것이었다.”(209p)
치열한 전투에서 불바는 죽어가면서 멀어지는 카자크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예언한다.“……우리 러시아 땅에도 러시아 황제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 황제에게 정복되지 않은 세력은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220p)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했다. 고골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관리가 되려는 꿈을 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경했던 그가 러시아 문학가로 자리매김한 것은 러시아 안에서 카자크의 서술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니콜라이1세의 보수적인 통치 아래 있었으므로 자기검열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밀히 덧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의 힘을 이겨 낼만한 그런 힘, 그런 고통, 그런 불길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220p)
소설 중 전쟁의 장면은 서사시 일리아스를 떠올리게 한다. 카자크의 분노와 죽음은 아킬레우스와 영웅들을 기억하게 한다. 불바는 후세에 전해질 카자크의 서사시를 생각한다.
“그와 같은 카자크의 영광은 총구에서 나오는 작은 화약 가루처럼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슴가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가진 반두라 악사가 나와서, 아니 원기 왕성하고 예언적인 영혼을 가진 백발노인이 나와서 묵직하고 기운찬 말로 그들의 공적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또 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153p)
드네스트르 강 위에 노를 젓는 카자크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아타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마치고 있다. 카작은 그저 유민들이 모인 집단에 불과한 것일까? 연대기는 그들이 민족이고 주변 국가에 저항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며, 혼란한 역사의 분령기 마다 독립된 국가를 이루기 위한 투쟁해 왔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의 정신이 곧 국가였다.
푸틴은 러시아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한 번도 러시아와 별개의 국가였던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 사용했던 논리다. 민족, 국가 공동체는 과연 무엇일까? 수많은 국가가 소멸하고 다시 세워지는 역사 속에서 과거의 국가가 오늘의 국가인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러시아의 논리와는 반대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가 탄생하고 있는 것을 본다. 코미디언 출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지도자의 위상을 찾는 것을 보았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국민들을 보고 있다. 얼마 전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한 뉴스에서 키예프를 ‘키이우’로 표기 하고 발음하고 있다. 많은 지명이 러시아나 영어식 표기와 발음이었으나, 우크라이나 언어로 바뀌고 있다.(자포로제도 우크라이나어로는 자포리자이다.*우크라이나어: Запоріжжя , 러시아어: Запорожье ) 푸틴의 주장과 달리 러시아의 침공은 우크라이나는 국가였고 국가임을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