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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우리는 마음에 있는 생각을 다 말하고 살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침묵과 묵인은 불안이 현실이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이 묵인의 이유가 되고 불안의 원인이 될 것이다. 침묵이 깨지고 숨겼던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수치심이 불안의 자리를 차지한다. 어느 시대나 마음과 양심을 지배하는 관념이 있다. 이 관념은 불안과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조종하여 욕망을 침묵하게 한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소설 속 ‘나’ 지로는 그 시대 기준으로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지식인이다. 사소한 행동과 표정, 억양 하나도 예민하게 알아챈다. 긴장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관조하는 쪽을 택한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응해주거나 피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대한다.
오사카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 지로는 어머니의 먼 친척인 오카다의 집에 머물며 친구를 기다린다. 오카다는 지로의 부모님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다. 그의 집에 머무는 것이 불편하게 보이는 것은 부부 둘만 있는 풍경에 끼여 있는 자신의 존재 때문인 것인지,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던 사람의 덕을 보는 것에 대한 체면 때문인지, 아님 오카다가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처세나 실익에 밝은 사람이어서인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수치심의 문화를 엿보는 것 같다.
친구 미사와와의 사이에서도 예민한 감정의 교류를 본다. 친구가 입원한 병원 다른 병실의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그저 상대방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느끼기만 할 뿐이었는데도 둘 사이에는 묘한 경쟁기류가 형성된다.
[나는 걸으면서 내 비겁함을 부끄러워했다. 동시에 미사와의 비겁함을 미워했다. 하지만 비열한 인간인 이상 앞으로 몇 년을 교제한다고 해도 도저히 그 비겁함을 없앨 수는 없으리라는 자각이 있었다. 나는 그 때 굉장히 불안해졌다. 또 슬퍼졌다. ]
-76p
이 비겁함에 대한 부끄러움은 이 소설의 전반에 걸친 정서이고, 그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감정이다. 그의 불안과 슬픔은 앞으로 올 상황들에 대한 전망이고 암시이다. 비겁하게 될 것이고 비겁할 수밖에 없는…….
집에서 어머니의 가사일 돕는 오사다의 결혼 상대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와 형 내외가 오사카에 도착한다. 형 이치로는 아내와 동생의 관계를 의심한다. 그는 부인하는 지로에게 형수의 마음을 시험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 지로는 형의 요구를 어처구니가 없다고 거절하지만, 결국은 들어주게 된다. 이 집안에서 이치로의 위치와 이치로의 독선적인 성격을 가늠해보게 한다. 이런 요구를 하는 이치로에게서 부끄러움 보다는 분노나 괴로움을 더 보게 된다. 왜일까? 이기심 때문일까? 수치심을 숨기는 것일 수도 있고, 의심과 질투심이 수치심을 이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의 괴로움은 의심 때문일까? 분노 때문일까? 질투 때문일까? 외로움 때문일까? 비겁함에 때문일까? 이것도 알 수가 없다.
형수의 마음이 진짜 지로를 향하는지, 아님 그저 형의 의심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형의 요구에 따라, 형수와 함께 간 여행에서 둘의 대화를 보면 형수의 말 속에서 묘한 기류를 감지하기도 한다. 거기에 지로가 흔들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어머니조차 이 세 사람의 관계로 인해 불안해 하지만 이들 사이에 있는 긴장의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고,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이런 긴장과 불안함, 외로움 때문에 결국 이치로는 신경증 증상을 보인다.
[형의 설명에 따르면 파울로는 프란체스카의 시동생으로 그 둘이 남편의 눈을 피해 서로 사랑한 결과 마침내 남편에게 들켜 죽임을 당한다는 슬픈 이야기인데 단테의 『신곡』에 쓰여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슬픈 이야기에 대한 동정보다는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형의 심사에 대해 일종의 불쾌한 의심을 품었다.]
- 261p
형 이치로는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동생 지로에게 이야기 하고 태도를 요구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시대는 여전히 도덕과 관습이 지배하던 시대이다. 자유롭기를 원하나 관습과 도덕에 지배를 받아 살 수 밖에 없는 집안의 기대를 온몸으로 받던 장남이치로는 안개와 삼줄에 묶여있는 것처럼 느꼈을지 모르겠다. 형은 형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시작은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언뜻언뜻 아내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관습과 도덕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다는 의식 때문에 서로의 감정을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아내 역시 희생자다.
“남자는 싫어지기만 하면 도련님처럼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으니까요. 저 같은 사람은 마치 부모가 화분에 심어 놓은 나무 같아서 한번 심어지면 누가 와서 움직여주지 않는 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어요. 가만히 있을 뿐이지요. 선 채 말라 죽을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어요.”
- 299p
그런데 이 호소의 이면에서 지로는 헤아릴 수 없는 강함을 전기처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강함이 형에게 어떻게 작용할 지에 생각이 미쳐서 오싹했다고 한다.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이치로를 더 답답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치로는 친구 H와 여행을 떠난다. H는 지로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상 행동을 보이는 이치로와 여행에 대해 쓴다. 편지를 통해 이치로가 아내를 구타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반항하지 않는 부인을 보며,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하는 이치로의 고백은 비루하다. 자신의 비루함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치로를 이해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나의 망설임의 이유는 그가 좋아했던 사람은 오사다였다는 사실을 묵묵히 암시하고는,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이치로의 고독과 괴로움이 전달되기 때문인 것 같다.
여행 중 그 어떤 곳도 맘에 들었던 곳이 없는 이치로, 미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예민한 사람 이치로가 택한 삶의 방식 때문에 안타깝다. 말라르메는 의자 하나를 잃었지만 자신은 삶의 거의 전부를 잃었다고 말하는 이치로, “죽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종교에 입문하거나” 세 가지 길 밖에 없다던 그가 안타깝다.
타인의 괴로움의 깊이를 알게 되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없다. 나는 여전히 이치로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는 쪽에 서있다.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비루해질 수 있는지를 헤아린 작가의 고독과 괴로움의 깊이를 가슴 아프게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