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누워 계시던 방의 냄새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오늘도 닦고 치우며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기억했다. 아마도 어머님 홀로 계시다 돌아가셨다면 그런 청소가 되었을 것이다. 요양병원에 계셨더라면 침상 하나를 정리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새벽 2시 방문을 열었을 때 죽음에 이르는 사투를 벌이고 계신 것을 발견했다. 어둠 가운데서 거친 호흡을 내뱉고 계셨다. ‘체인 스톡스 호흡 Cheyne-Stokes respiration’이 시작된 것이다. 임종 직전에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숨을 몰아쉬는 현상이다. 거친 숨과 함께 엄청난 냄새에 당황스럽다. 손을 붙들고 찬송가를 불러드렸다.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함께 울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있다가 용변을 닦아 드리고 새벽 3시가 되어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몸에 밴 희미한 냄새를 느끼면서…·. 그리고 그날 밤 11시 30분에 소천하셨다. 불과 5일 전 일이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방 정리를 하면서도 그 마지막 밤이 계속 떠올랐다. 이미 저만큼 건너 가버린 그 분과 나의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 분 홀로 둘 수 없었다. 고독하고 힘겨운 시간을 함께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 힘겨운 숨을 바라보며 저절로 빨리 평안을 맞이하시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편안한 죽음』을 읽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어머니가 암으로 병원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나의 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리치료사가 침대로 다가와서 이불을 젖히고 엄마의 왼쪽다리를 들어 올렸다. 앞자락이 벌어진 잠옷 속으로 쪼글쪼글하게 주름 잡힌 뱃가죽과 음모가 하나도 남지 않은 치골이 드러났다.」
29p
자신의 엄마는 상처입기 쉬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어떤 창피한 일도 겪은 적이 없다고 한다. 깔끔하고 고상한 취향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의 엄마가 병상의 침대 시트에 배설을 하고 관장을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의 동물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용기였다고 한다.
누구나가 병상에서는 자존심을 세울 수 없다. 의학에 굴복하게 되고 존엄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도 어머니의 배설물을 치우면서 당신이 언젠가 며느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상상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시고 있던 1년 반 동안 목욕도 시켜드리고 가끔 실수하신 뒤처리를 하긴 했지만 죽음을 앞 둔 거의 보름 동안 방문을 열기 전에 나는 쉼 호흡을 해야만 했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성큼성큼 다가서는 죽음의 징후가 내뿜는 악취와 새로운 상황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는 어머님의 두려움과 회환에 같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잘 보내드리자고 다짐을 거듭했지만 마지막 며칠은 긴 시간으로 여겨졌고, 병원에서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로 모실 것을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죽어가는 이 여인에 대해 점점 더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병실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오랫동안 둘 사이에 쌓였던 어떤 회환 같은 것들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꼈다. 」
154p
아마도 어머니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게 된 것은 이러한 의미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이니 어려움의 순간도 있었다. 굳이 대화가 없어도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분의 곁에서 손을 잡고 있었던 그 새벽 나는 눈물을 흘리며 치유를 경험했다.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어머님에게도 회환을 다 놓아버린 순간이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오래 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생각한 인간의 죽음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이었다. 인간의 죽음은 보다 구체적이고 디테일 하다. 병상에서 배설을 하고 악취를 풍기고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는 것은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고 숨소리를 듣는 실재이다. 거실과 방 사이의 방문 하나를 두고 현실과 비현실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죽음을 맞는 사람이나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나 물적인 상황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에서 무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죽음 후 그 존재는 거대한 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보부와르의 말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남겨놓은 물건들을 치우고 냄새를 지우면서, 떠나간 자리에서. ‘그는 그가 없음으로써 완전한 無가 되기도 하고 그가 있으므로 온전히 존재하는 세계마냥, 거대한 존재가 된다.’
「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상에 그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개인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 사건이다. 죽음은, 그가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무엇으로든 정당화 할 수 없는 폭력이다. 」
217p
이런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존엄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몸이 존엄을 잃어버렸을 때, 마지막까지 그 존엄을 지켜주어야 할 사람들은 옆에서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의 삶을 지켜보았고, 삶을 함께 살았던 가족들이 마지막을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죽음을 존엄하게 맞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머니와의 그 새벽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