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민주주의 유혹하는 권위주의
앤 애플바움 지음, 이혜경 옮김 / 빛소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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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아고라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인 앤 엘리자베스 애플바움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일대학과 런던정경대를 거쳐 이코노미스트에서 언론인으로서 첫걸음을 뛰게 되는데요. 이후 워싱턴 포스트에서 칼럼을 기고하고, 미국 정치적 현안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을 언론을 통해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에 대해 미국의 포퓰리즘 정치의 출현을 크게 우려했었는데요. 이 글을 통해 스스로 중도 우파라고 밝히고 있듯이, 조지 W. 부시와 네오콘이 자행한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광범위한 고문에 크게 충격을 받아 아마도 미국의 양당 정치에 적지않은 회의를 느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 사실적 서사가 가미된 르포 형식의 이 책을 통해 그녀의 유럽의 엘리트 인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요. 사실상 현재의 엘리트 정치의 쇠퇴에 따른 공격, 그리고 극단주의 정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마 저자인 애플바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물론 이러한 정치 변화에 대한 시대적 흐름도 이 책이 잘 조망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우리가 앞으로 이 권위주의 정치에 직면할 수 없는지에 대한 꽤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싶었습니다. 바로 저 부분이 이 책을 통해 얻게되는 소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Twilight Of Democracy"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유럽에 비로소 정치적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에 따른 극단적 정치, 반이민 정서와 인종적 혐오주의의 상황에 대해 저자인 애플바움은 이를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쥘리앙 방다의 '클레르 clerc'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프랑스어로 성직자를 뜻하는 이 단어는 방다가 규정하는 타락한 지식인의 전형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한데요. 여기 방다를 통해서 '진리 추구'라는 지식인의 책무를 저버리고 비타협적인 종교적 교리만을 추종하는 성직자들처럼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맹목적인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클레르에 대해 좀 더 면밀히 논해 본다면, 저자의 설명대로 스스로에게 합리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던 지식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이익과 그에 따른 맹목적인 결과물을 얻기 위해 어떻게 변절했는지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거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6장에서 그녀는 "모든 권위주의는 사람들을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누고 양극화하고 대립시킨다"고 강조하는데요.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저 클레르들이 소위 권위주의에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부역하여 사회를 극단주의의 경연장으로 만드는 데 한 몫을 해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의 이 클레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기존의 엘리트 정치나 엘리트 권력이 오로지 사사로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몰두하게 만드는 능력주의와 자유지상주의 같은 터무니 없는 왜곡된 가치들이 공적인 의미로서의 사회를 사실상 파탄에 이르게 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반강제적으로 강요된 능력주의와 그에 따른 엘리트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다수의 그렇지 못한 계층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는 식의 논리는 작금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거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자원이 전무한 사람들의 자유는 거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연이어 글 3장에서 저자는 오늘날 직면한 광범위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널리 퍼진 정치적 불신으로 이를 설명해내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요. "유럽의 젊은 계층이 스스로의 정치적 의견이나 경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정치인을 선호하게 된다"는 진술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누군가의 정치적 행동에 있어 그 숨겨진 의도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파고드는 것을 마냥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권위주의 정치 자체에 대해 그저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인용에는 얼마간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불어 4장에서도 저자는 시민의 권위주의적 성향을 연구한 카렌 스테너의 "권위주의적 성향이 엄밀히 말하면 폐쇄적인 마음 상태라기 보다는 단순한 마음 상태에 더 가깝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권위주의를 옹호하거나 그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리가 그와 같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최근에 이르는 권위주의 정치 자체가 그러한 체제 가운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앞선 체제를 온전히 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인식의 도입 부분을 뒷받침하는 근거러도 읽힙니다. 반대로 현대의 민주주의 자체가 다소 혼란스럽고, 거기에 논리적이고 명확한 의견을 서로간에 교환하는 것 자체에 대한 피곤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언급하는 부연 설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와 독재 정권이 도덕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는 자들의 "도덕적 등가성"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과거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과거 오랜 냉전시기의 대결구도에 엄청난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존재했고" 사회적으로도 그러한 경직된 모습이 시민들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텐데요. 물론 후쿠야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승리가 꽤 명예로운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내부적으로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포스트 민주주의'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자 역시 당연하게도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크나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일차적으로 수긍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자인 애플바움은 우리가 현재 고통을 받고 있는 이 펜데믹 상황이 아니더라도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적 위기는 분명 겪게 되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었는데요. 앞선 현대적인 클레르들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폴란드의 '법과정의당' 그리고 헝가리의 제2의 푸틴, 오르반의 출현은 단순히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게 하는 권위주의를 넘어 극단주의적 정치의 도래는 그야말로 '세계의 파행적 재편'이라고 불릴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예외주의와 동일한 부분텐데요. 더욱이 '스페인을 더 위대하게"라고 주장하는 스페인 복스 당의 소위 '정견'과 보리스 존슨으로 대표되는 브렉시티어 등의 출현은 그동안 유럽이 전세계의 '자유 민주주의'의 텃밭으로 여겨졌던 종래의 견고한 토대를 한순간에 흔들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애플바움은 이에 "민주주의-권위주의-다시 민주주의'로 일면적으로는 정치 지형이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만,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서 히틀러가 세운 나치 독일이 전세계에 어떠한 파급을 미쳤는지는 우리 모두가 충분히 기억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다시 한번의 권위주의를 지나 새로운 민주주의를 또 세우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경고하는 것으로도 읽혀집니다.

그저 스스로 존경이나 받고 싶어하는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어떻게 보면 준비된 총리는 아니었습니다. 드널드 트럼프 역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양자는 브렉스티어와 대안 우파들의 압도적 지지를 등에 업고 정치 일선에 등장합니다. 물론 보리스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두 사람이 현 시대의 문제에 대한 어떤 명확한 관념이나 해결의지를 갖고 기존 정치 무대에 나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더 염두해 두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트럼프의 경우는 자신이 포퓰리즘적 선동으로 기존의 체제를 비웃듯 백악관에 입성했지만 기존 엘리트 지배체제를 온갖 불신의 미사여구를 사용해 반대급부를 얻었다면 스스로가 종교 지도자와 같은 겸허한 도덕성과 선구적 의지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줄곧 인종차별주의적인 부동산 개발업자의 정체성을 전혀 변화없이 유지하는데 이릅니다. 보리스 존슨 또한 유럽을 취재하는 언론인 시기에 교묘하게 거짓을 섞은 기사로 주목을 받았으며, 스스로가 정치를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데 사용하는 수단으로 치부하는 데 그치고 있어 그에게 정치인의 어떠한 소명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과정과 방법이 정당하다면 충분히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정치입니다. 그 숱한 명분 싸움과 소모적 논쟁이라 일컬어지는 대화의 넘나듦을 터부시하고 건전한 공론장의 유명무실화를 주장하는 클레르들이, 헝가리의 오르반에 협력해 사법체제를 무력화 시켜 그의 권력을 위해 동원되는데 이론적 근거를 자발적으로 제공한 이력이 있습니다. 오로지 클레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죠. 그러므로 이러한 반정치적 기미가 현재 유럽 곳곳에서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고 봐도 가히 지나치지 않을텐데요. 과거에 대한 향수, 즉 정치적 노스탤지어의 유산을 그리워하는 적지 않은 시민들이 오히려 권위주의 정치를 촉발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분석에 조금 이해가 되었던 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인 '레트로토피아'에서도 그런 유사한 관점의 노스텔지어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펜데믹 사태가 가속화되고 유럽의 펜데믹 사태가 이슬람 이민들 때문이라는 '거짓말'이 마치 진실처럼 읽혀진다면 정말로 시민들의 정치적 분별력이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무척이나 중요해지는 시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도 언급되듯이, 헝가리의 클레르들이 "미국 민주당이 조지 소로스 손에 넘어간지 오래다"라는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양산하는 상황에 "정말 그러했던 것인가"로 음모론에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정치적 의견이라든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떠한 관념이 있을겁니다. 하지만 과거에 민주주의를 위해 일했던 자들이 극단주의 정치와 권위주의에 더 많은 자신의 이익 가능성을 놓고 변절하게 된 상황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이 듭니다. 과거 냉전시기였다면 저 변절자들이 어떠한 판단을 체제로부터 받았을지는 거의 명확해 보입니다. 물론 개인의 정치적 의견이 이데올로기로부터 탄압을 받아서는 안되겠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던 자가 권위주의로 새정치(자신들의 입으로)를 찾는 것 자체가 우리 정치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겠죠. 어떻게 보면 과두제도 이러한 맥락 가운데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윌리엄 서머셋 몸이 위기를 머금은 시대의 하늘에는 숱한 까마귀 떼들이 날기 마련이다는 수사에 현 시대를 비교해 보는 것이 지나친 저의 기우일까요. 그저 단순한 걱정으로 끝나기를 오직 바랄 뿐입니다.



-네오콘보다도 더 수준이 낮은 자가 미국 정치무대에서 기웃거렸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 정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바로 그 자의 이름은 스티브 배넌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상황은 아니겠지만 사법부의 과도한 정치화 혹은 노골적인 정치주도는 민주주의 쇠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저자의 연계대로 권위주의적 정부가 사법권을 좌지우지 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맞닿아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말이죠.


선동가를 추종하거나 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을 때 더욱 큰 위안을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선동 정치가 승리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는 권위주의가 1940년대 당시, 분노와 열패감을 느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스스로 지배자가 될 자격이 있는 데다가 그리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사법부 장악, 언론 왜곡, 그리고 엘리트 를 공격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낄 것이다

최근의 권위주의적 흐름은 지난 10년 동안에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다. 그것은 신비한 과거의 "유령" 때문이 아니라, 현존 민주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면서 생겨났다

그리스 역사는 순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지만 그다음에는 과두제가 등장할 수 있고, 그러다 다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올 수도 있다

폴란드의 법과정의당, 영국의 브렉시티어,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공무원과 외교관을 대상으로 공격적 언사를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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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업 콜 - 서구는 왜 코로나19에 힘없이 무너졌고, 어떻게 일어설 것인가?
존 미클스웨이트.에이드리언 울드리지 지음, 송대원 옮김 / 따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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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공저자중 한 사람인 존 미클스웨이트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옥스포드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이후, 미국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서 2년간의 근무를 시작으로 경제 분야에서 일을 해왔는데요. 그는 1987년에 이코노미스트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언론사에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현재는 블룸버그 뉴스의 편집장으로 2015년 2월부터 일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ABC, BBC. PBS 등의 방송에 자주 출연하여 대중들에게도 얼굴을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공저자인 에이드리언 울드리지는 현재 이코노미스트 정치부서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데요. 그도 마찬가지로 옥스포드에서 수학하고 최종적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버클리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후, 2009년 7월까지 이코노미스트의 명예로운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영국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여러 비판적인 글을 기고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Wake-up Call"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우는 미국과 유럽의 민낯을 낱낱이 전세계에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그러한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두 공저자는 이 글의 1장과 2장에서 과거 서구 유럽이 어떻게 자유주의를 발전시켜 번영해 왔는지를 먼저 서사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토머스 홉스에 일견 대립되어 보이는 존 스튜어트 밀과 제러미 벤담의 자유주의를 분석하고, 더 나아가 왜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왜 '작은 정부론'을 옹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반을 먼저 분석하고 있는데요. 당시 밀의 자유주의 국가가 개인의 권리 보장이라는 목적하에 일종의 개혁을 단행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가 달성되었고, 이후 자유주의 내부에서 또 어떻게 분화가 되었는지에 대해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통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는가?" 에 대한 해법 찾기로 존 스튜어트 밀의 죽음 즈음에 사회는 정부가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는 식의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고 저자들은 새롭게 밝히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은 독일의 부흥을 이룬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노선에도 연계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공공의 증진'이라는 가치 아래 독일인들이 스스로의 정부 운용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영국과 프랑스와는 사뭇 다른 번영을 이룩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자유주의의 양상은 영국에서 분화되어 정부론에 대한 각국의 다른 양상을 잉태하게 된 것인데요. 이것은 현재 펜테믹 사태에 따른 미국과 유럽의 자유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염병 사태를 기화로 강화된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그리고 프랑스의 극우 포퓰리즘과 만나 그 공포가 더욱 사회 전체에 기승을 부리는 형태로 확산되었고, 이와는 반대로 효과적인 정책으로 방역에 나서고 있는 한국과 싱가포르, 타이완 등의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과 빗대어 '진정한 정부의 역할론'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위기를 경험했던 1920년대의 세계 경제 대공황 당시, 미국의 수많은 엘리트들은 겸허한 자세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많은 이가 정부에 투신을 하게 됩니다. 소위 이 시기는 엘리트주의에 있어서 공익을 위한 사명감이 존재했던 때로 많은 인재들이 당시에 직면한 미국의 문제에 엘리트들 스스로가 소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5장에서 조지 W. 부시가 아라비아말협회 회장을 지낸 마이클 브라운을 연방재난관리청에 임명해 그가 허리케인 카타리나에 대한 정부 대응을 엉망으로 만들게 한 일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이기도 한데요. 미국인들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거대한 정부가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우려가 위기 상황에 정부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겪게 되는 막대한 피해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현 사태에 대한 주요한 관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한가지 깨닫게 된 점은 시대의 변화에 발을 맞추지 못한 자유주의가 점점 더 공익에 멀어짐으로써, 정치 불신을 넘어서 기득권 정치를 증오하게 만든 포퓰리즘을 초래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 글의 1장에서 희화화 되고 있는 "가난한 뉴욕 시민이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받는 단 하나의 방법은 부유한 시민 가까이서 기침을 해대는 것"이라는 이 해방된 신자유주의의 논법이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요. "소위 부유층들은 국가가 법과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동안 그들의 세금이 최하층 사람들에게 허비되고 있다고 불평"을 해대는 상황에까지 이릅니다. 어떻게 보면 콜린 크라우치가 경고한대로 "신자유주의와 포퓰리즘이 화해하여 밀착하는 날"이 허무맹랑한 상상으로 끝나지 않을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미국의 여러 인사들과 유럽의 정치인들은 이 코로나 사태에 대한 원인으로 베이징을 지목하면서 그 분노를 중국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한에 대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5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이러한 "비난"만을 일삼은 도널드 트럼프와 보리스 존슨은 정작 중요한 방역 정책에는 소극적이고 거의 손을 놓았던 점에 공저자들 역시 이들에게 낙제점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세계의 경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2008년 뉴욕 발 금융위기에 대해 당시 네오콘들과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그들의 잉여 자본으로 인해 미국이 그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과 마찬가지인데요. 당시 미국인들의 무분별한 신용 생활을 중국의 저축금 때문이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바로 미국과 영국은 이러한 소모적인 비난에 중요한 시간을 허비하고 결국 펜데믹 파국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정부의 크기 그리고 무엇보다 무기력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한가지 희망을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이러한 펜데믹 상황에서 권위주의적인 국가들 보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이 더 나은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인 통제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 중국과 같은 케이스와는 달리 민주주의 국가들, 특히 서울이나 타이베이와 같은 세계화 된 도시가 파리나 런던보다 얼마나 안정적으로 대처를 하고 있는지 찬사와 함께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서구인들의 무지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몰이해를 강조하기 전에 지금 미국과 유럽의 근본적인 문제는 민주주의적인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통제를 백안시하고 오히려 공공의 이익이라는 담론을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정치학적인 관점으로 다시 풀어본다면 과거 평등이 매우 급진적인 사상으로 취급을 받았듯이 신자유주의와 노골적인 기득권 정치를 비판하고자 하는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일부 엘리트 계층과 그것에 부역하는 다수 지식인들의 터무니없는 우려는 이러한 위기 상황임에도 축적된 불평등에 대한 일종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자유를 침해한다는 담론'으로 불을 피우면서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이 특별한 케이스로 들고 있는 싱가포르의 사례는 유럽의 전철을 전혀 밟지 않는 고유의 정치체제 물론 그들의 행보가 전부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례로 취급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주목할 만한 것으로도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과거 유럽은 자유주의의 전통 뿐만 아니라 공공선에 대한 함의도 중요하게 여겼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계몽주의적 전통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평등의 대담한 출현도 바로 유럽의 토양에서 잉태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공화주의적인 토대이며, 비범한 사회계약의 출현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말할 수 있는 서구 민주주의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전부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의 펜데믹이 미국과 유럽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에 의해 괄시받은 민주주의를 이 참에 회복할 명분도 서구 유럽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훌륭한 정치적 토양을 갖고 있는 유럽이 전염병 사태만으로 스스로의 운명에 대못을 박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해야될 일을 하는 정부의 책무를 사악한 것이라 몰고가서는 안되는 것이겠죠. 아마도 밀턴 프리드먼이 죽기전인 2004년에 중대한 정치적 변모를 스스로 인정하게 된 것은 바로 정부가 갖는 이런 딜레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결국 지금 유럽의 가장 큰 문제는 공익을 위한 통제에 따른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수수방관하다 극우 포퓰리즘에 따른 제2의 파시즘을 도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미 유럽은 중대한 기로에 와 있다고 보는 것이 어찌보면 타당한 논리인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이것이 음모론으로 끝나길 바랄 뿐입니다. 


-글 중간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자신들 스스로가 보수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고 나오는데요. 특히 저자들은 밀턴 프리드먼을 뭔가 철지난 낭만주의자로 보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과연 그와 같은 자유지상주의자가 낭만 정도로 치부될 수 있을지는 뭔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19가 다시 정부를 중요한 존재로 만들었다. 정부는 다시 강력해졌을 뿐만 아니라(대단한 힘을 과시했던 기업들이 정부의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보라), 절대적으로 필요해졌다

비록 중국이 코로나 19와 관련해서 미국보다 전반적으로 잘했지만,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중국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다

물품을 나라 곳곳에 운반하기 위해 고속도로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군산복합체가 필요했다

그때쯤에는 자유시장이 격퇴되었다고 말하는 게 안전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이미 오랜 전에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한 힘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세계경제를 결딴내 놓고도 구제받은 은행가들 같은 세계 엘리트에 대한 분개였는데, 특히 그들이 실패를 하고도 더 좋은 일자리를 얻는 일이 되풀이되는 실태에 대한 분노였다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기득권층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고 우리의 번영과 안전은 고스란히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서구는 이런 조치들을 무시했다. 얼마든지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바이러스를 이주민 탓으로 돌렸다

또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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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7 1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혹시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책 중에
베타라이프님 기준으로 별 넷 책 추천 좀 해주실 수 있는지요? ㅎㅎ
전 안희경님의 오늘부터의 세계 정도도 좋았습니다. 유현준 교수의 공간의 미래도 나름 건축학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베터라이프님 추천 책도 읽고 싶어요,

베터라이프 2021-08-07 22:12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초딩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공저로 참여한 ˝코로나 19 자본주의 모순이 낳은 재난˝ 을 읽어볼까 하는데요. 요즘 핫한 우석균 교수도 집필진으로 참여해서 괜찮은 모양이더라구요. 캘리니코스가 신자유주의에 매우 비판적인 사상가라 뭔가 그림이 그려지기도 해요. 그외에는 제가 읽었던 코로나 관련 글들은 여기 서평이 다입니다 ^^; 참, 샹탈 무페가 코로나 관련 글을 쓸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어떻게 된건지는 모르겠네요. 만약그렇다면 정말 흥미로울 것 같은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번역본이 바로 나올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샹탈 무페의 관련 글은 영문 기사로 본 것 같은데 찾아봐야겠어요. 제가 착각한 것일수도 있어요 ^^;; 그리고 지금 이 책도 유럽의 현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라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것 같아요!

초딩 2021-08-08 09:5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님!!!
이렇게 종종 책 자문 구할게요~
저도 짧지만 책 언급하면서요
시원한 하루 되세요~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 우리시대의 신앙이 되어버린 '발전'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질베르 리스트 지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질베르 리스트는 스위스 제네바에 소재한 국제발전학대학원의 명예 교수로, 일전에는 유럽-제3세계센터의 연구소장을 지내기고 했습니다. 그는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연구와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 이론, 개발론과 발전이 중요시되는 체제 전반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는데요. 특히, 그의 여러 논저들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미국에서도 '발전론'과 관련해 그의 글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제3세계를 비롯한 과거 식민지배 국가들이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진입하지 못한채, 아직도 심각한 빈곤 상황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맥락은 지구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혜택이 모든 나라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찾아보고자 하는 그의 학문적 욕구가 '발전학 담론'에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Le developpement: Histoire d’une croyance occidentale"로 2007년에 초도 출판되었고, 2013년까지 4차 개정이 이뤄집니다. 이에 국내판은 아마도 2013년의 개정된 영문판인 "The History of Development : From Western Origins to Global Faith"를 번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국내 번역판은 2013년 4월, 초판이 발행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번역된 제목이 글의 지향점과 다소 상이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인 질베르 리스트는 이 책을 통해 주요하게 담고 있는 발전과 발전론에 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제4정책'이후로 본격적으로 발전론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격적인 경제 담론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그는 보고 있었는데요. 글은 전반적으로 서구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인간의 이기심과 이기주의와 관련해서는 2장에서 사회진화론의 발전과 그 승리를 중요한 정치사회적 관점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리스트는 허버트 스펜서로 대표되는 이 사회진화론이 사실상 계몽주의와 공공의 복리와 맞붙어 승리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산업적으로 뒤쳐진 국가"라는 오명은 제국주의 시기에 중요한 가치 문제로 여겨지며, 당시 프랑스와 같은 중견국 이상의 국가는 산업화와 국가사회적 발전이라는 욕망에 제국주의와 마땅히 타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산업적인 발전을 위한 담론임과 동시에 사회진화론이 융성하던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회진화론의 승리에 따른 폐해는 사회에서의 인간의 권리를 축소시키고 왜곡한 데 있습니다. 더불어, 종래의 다윈의 논리를 왜곡하여 받아들였던 점도 학문상 최소한의 진실 추구를 이익에 따라 위반하는 행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2장에서 저자가 논하는 이 "왜곡된 발전 이데올로기"는 제국주의와 이후 서구 자본주의의 비정상적인 함의와도 맞닿아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기의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자유무역을 강조했던 이들은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보호무역을 일종의 공공선에 반하는 문제로 여겼던 듯 싶습니다. 이 책에서 주로 논하고 있는 인간의 진보라는 것을 명확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진보와 발전이라는 가치 자체가 서로 아주 관련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발전 자체가 명확하게 "빈곤의 퇴출"이라는 사활적 문제에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었는데요. 저자인 질베르 리스트가 이 두꺼운 분량의 글을 통해 발전과 관련된 여러 인식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이 '빈곤의 추방'을 중요한 관점으로 두고 일관되게 논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는 '경제학의 보편적 권위'에 대해 대체로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는 경제학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 및 현상을 아우르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의 역사적 맥락과 사회학적 관점 및 인간 진보의 측면에서의 다양한 해석 수단이 필요하다는 등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케인스주의와 고전경제학의 틀이 현실화된 자본주의 전반을 명확하게 제대로 다룰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발전과 관련된 자본주의의 체제 변화를 오로지 경제학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며, 경제와 그에 따른 발전의 맥락에 인문학과 심지어는 사회학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분기의 가능성이 있었고 유일 학문의 권위를 오롯이 하는 이익보다 경제학의 한계에 대해 더 많은 논의와 토론을 하는 것이 '진정한 발전'에 더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개인적으로는 그리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발전/저발전의 담론은 1950년 이후의 냉전시기에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데요. 여기에서 인용된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에서도 "제3세계 국가들이 기존의 산업 국가들을 비난하는 연유에는 서구화 때문이 아니라 서구화를 할 수단을 더 빨리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 역시 일정부분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단견이라기 보다는 과거 식민지배체제의 계몽적 착취에 기반한 서구 열강의 자국 보호주의에 따른 사회적 여파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반대로 유럽의 인종주의자들은 제3세계의 무능력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이것을 여러 편견으로 빗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는 "권위주의 정권이 통치하는 저임금 국가"를 이용했던 미국과 유럽의 노골적인 이해가 있었던 것인데요. 약간 다른 예시이지만 현재 중동의 많은 시민들이 미국과 유럽을 좋아하지 않는 연유에는 이들이 국제 무대에서 줄기차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쳐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미라는 이유로" 이 지역의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는데 막대한 정치적 지원을 해왔던 것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거 식민 지배에 있던 국가들의 착취에 따른 광범위한 이득이 실질적으로 민간 기업을 제외하면 증명된 바가 없다고 인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만, 당시 영국이 자신의 제국을 위해 인도인들을 병사로 징집한 것과 마찬가지로 체제의 결속을 위한 숱한 무형적 착취가 기반해 있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로지 재화로 표시되는 착취로 비롯된 이익을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뒤르켐식의 실증으로 빗대어 증명하기를 이들 식민지배 국가들은 원하겠지만 제국주의가 초래했던 수많은 비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그저 눈을 감을 수는 없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저의 개인적 관점은 리스트의 의견과 동일한 부분이 있는데요. 발전 전반에 대해 그가 보이고 있는 도덕적인 관점은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에 어떠한 식으로 기여"했는지에 대한 그 반대의 결과물을 논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수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는 동일하게 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과 앞선 논리들의 전개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진실일겁니다.


뒤이어 리스트는 한때 각광을 받았던 제3세계의 종속이론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자립주의 모델들을 살펴보면서 한계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데요. 사실상의 자유 무역체제에 따른 국제 경제의 기조가 많은 국가들에게서 갈라파고스 제도처럼 보호 무역이나 자립으로 빈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뒤에 14장에서 2008년의 거대 위기를 통한 충격적이며 개혁적인 반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일부 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신자유주의 모델이 즉각적인 생명을 잃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리스트의 해석대로라면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어떻게 하면 도덕적 가치들을 수렴하거나 혹은 인정하게 될 것인가를 논하는 게 진정한 발전에 있어 더 중요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절대선이라고 믿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을 설득해 내거나 그것이 안된다면 더이상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세계에 대한 헤게모니를 손에 쥐어주지 말아야 하지만 신자유주의화가 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과거와는 그 양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애초에 발전 단계에서 보이는 포드식의 대량 생산을 언제까지 소비가 맞춰줄 수 있겠느냐, 혹은 소비의 끝엔 과연 뭐가 있겠느냐는 필연적인 의문에 대해 현재의 자본주의에서는 더이상 반박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인류의 진보적인 측면에서 남반구 북반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번영을 이루게 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적 명제가 있었지만 정확하게는 자본주의 착취와 독점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이 착취와 독점에 준하는 여러 불법적인 행태들이 시장 자유라는 미명하에 부득이한 부분으로 치부되기 일상이었죠. 한때는 이러한 체제에 슘페터식 민주주의로 자본주의를 개선시켜 나가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발전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공감대가 더욱 커졌습니다. 대니 로드릭은 이를 좀 회의적으로 보긴 했습니다만 근래에 코츠와 같은 학자들이 개선된 이론을 펼쳐내고 있으니 우리에게 아예 희망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겁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월터 로스토의 '경제성장단계론'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에 대한 리스트의 분석이 발전론의 전개에 대한 주요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는데요. 이 장을 통해 로스토의 이론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의 분석이 전개되고 있습니다만 특히, "모든 사회가 똑같은 욕망을 품고 똑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이 경제사학자는 일종의 사회중심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회가 경제적 이득만을 보고 나아간다는 것과 유사한데요. 어떤 사회는 공공선을 목적으로 또 어떤 사회는 기초 단계인 가정의 안정을 목적으로 사회 정책과 그에 따른 사회적 진화가 이뤄져 나가기도 합니다. 물론 발전론의 기본적인 개요를 소개하고 있는 로스토의 주장들은 분명 참고할 만하지만, 그가 반공시대의 인물로서, 이데올로기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장 자유주의에 경도된 보수주의자들이 더욱더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발전을 해석하는 바로메타에 이념이 덧씌워지는 것은 역사 진행의 결과물들을 무시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일정부분 치우친 이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자인 리스트는 거의 2장에 걸쳐 월터 로스토를 분석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리스트는 서구 문명의 전반적인 우월성에 대해 반대하면서 모든 국가의 문화나 문명은 그 나름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서구 중심의 근대화에 대해 많은 비판과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근대화가 나중에 제국주의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이제와서 근대화의 한계라고 말하기는 우습지만 보편적인 인간 모두의 이익이 되지 못했던 것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합니다. 다만, 저자는 현재의 경제적 패러다임 자체를 유지시켜야만 하는 것에 대해선 달리 이견이 있다고 볼 수는 없었는데요. 특히,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가 따로 언급되지 않은 점은 아쉬웠습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것에 대한 대안은 있을 수 없다고 강고하게 주장하는 것 만큼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시도하는 학자들 조차 없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즉, 시민들이 현 체제에 대해 수용할 밖에 없는 강고한 분위기와 40년이 넘도록 민주주의가 조금씩 무력화 되었기 때문에 '시민의 전투적인 야생성'이 시장 자유주의에 뒷전으로 밀려난 것도 현재의 기조가 적지 않게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실 제가 이 부분을 왜 굳이 업급했냐 하면 저자가 줄곧 인권을 논하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해 가타부타 어떠한 의견이 없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유지되고 있는 단일한 경제학 모델(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 과연 모두의 발전이 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일견 명확하고, 그런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개선과 최소한의 민주적 대안이라도 저자가 내놓길 바랐지만 분석의 주체가 정해져 있었고 그런 가운데 광범위한 명제들을 다뤄야만 했으니, 아마도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검토는 약간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물론 전방위적인 국제 체제 내에서의 협력과 앞으로의 이러한 시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분석이 있는 것은 고무적이라 할만 한데요. 어차피 여기에서 소개되고 있는 현대 경제학의 흐름이 중요한 골자는 거의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문제는 서구의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다른 문화의 사상적 측면과 연원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일종의 문화적 상대주의와 유사한 관념 체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만드는 이러한 기반이 상대의 다른 관습과 도덕적 체계 또한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인데요. 아예 서구 모델이 아니라 토착 모델의 발전론이 어디에선가 탄생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세계화가 너무 이상하게 진행된 상황이라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는 이론이 탄생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스템으로 발생되는 이익 전반이 시민들 대부분에게 돌아가지 않고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빈곤이 퇴출되지 않은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 극명한 차별을 소위 북반구가 남반구를 착취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발전 담론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인식이 기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의 국문 제목은 바로 이것을 꼬집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글 말미에 나오는 발전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로베르토 웅거가 조만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데요.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은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조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힘이 너무나 강대하기 때문에 단합된 시민들의 힘이 아니라면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근래 딱히 즐거운 일이 없었는데 그렇게 고대하던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는 무척 기쁘기도 했습니다. 다만, 온라인으로는 전혀 구매가 되질 않아서 분당까지 나갔어야 했는데요. 아무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그런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됐든 귀한 책을 구한 것으로 만족해 보고자 합니다.




남반구 위원회의 보고서는 발전을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고 자신감을 키우며 존엄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며, 인간을 결핍과 착취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이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운동이다. 정치적 독립은 발전을 통해 그 진정한 중요성을 획득한다. 또한 이것은 성장의 과정이며, 발전하는 사회의 내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운동이다"라고 정의했다

대리모나 정자은행의 관행은 상품의 형태가 사회적 관계의 모든 영역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다윈의 저작과 관련된 생물진화론(다윈이 말한 것은 ‘진화‘가 아니라 ‘자연선택‘이었다)과 사회진화론을 주의해서 구분해야 한다

프랑스 여론이 식민지 건설의 장점을 납득하는 데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발전‘이 인류의 집단 과제인 것처럼 여겨지도록 만드는 데도 같은 기간이 요구되었다

발전도상국들에 대한 자금지원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국제적 연대뿐만 아니라 계몽된 이기주의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총계(노동력, 완전고용, 저축)도 ‘저발전‘국가에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실물과 금융 앙쪽에서. ‘저발전‘국가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경제의 전반적인 맥락을 따지지 않고는 ‘저발전‘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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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6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분야 지식이 짧다는 것을 감안해주세요 ㅎㅎㅎ
통독하며 느낀 것은
희망고문처럼 빈곤의 탈출, 발전 등의 기치를 내세우지만, 이면에 전혀 상반대는 제국 주의의 작은 가능성마저 싹뚝 잘라버린 열강의 무리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시카고 곡물 사일로처럼
결국은 기승전 약탈 이었던 것 같아요
내전과 분쟁도 그 산출물 같습니다.

베터라이프 2021-08-06 01:16   좋아요 1 | URL
초딩님의 댓글을 보고 엉망진창인 글을 또 수정해 나섰습니다 ^^;; 사실 쓰신바와 같이 프랑스와 벨기에와 같은 국가들은 식민지배와 관련해 도의적인 책임은 지겠다고 했지만 식민지배 국가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은 어렵다고 밝힌 바가 있지요. 저는 이러한 맥락이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독일의 사례가 너무나 희귀했던 것이지 과거 대부분의 제국주의를 신봉했던 국가는 다 저런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자들이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대는 것이겠죠. 누가 말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을 극한의 빈곤 상태로 몰아서 우리는 뽈을 수 있을 만큼의 이익을 얻는 체계를 신봉한다˝고 했었는데요. 극단적으로 들리실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또한 그러한 맥락으로 움직이고 있죠. 돈을 가진자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와 그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의 질이 여타 시민들의 그것들과는 매우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권리를 가질 권리 -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스테파니 데구이어 외 지음, 김승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미국 오리건주 세일럼에 소재한 월라밋 대학과 포틀랜드 주립대학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미국 내의 저명한 한나 아렌트 권위자들의 소산입니다. 여기에 집필진으로 올린 연구자는 스테파니 데구이어, 알라스테어 헌트, 라이다 맥스웰 그리고 새뮤얼 모인입니다. 이들은 각기 전공이 상이한 학자들이기도 한데요. 한나 아렌트는 세상을 떠난 1976년 이전에 그녀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역설적으로 '인권'의 개념을 알린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녀가 정치적 다원성을 필생의 연구로 삼았던 것에 비해 한 절반 정도 한나 아렌트의 손을 거친 이 '인권'의 개념은 책의 주요한 논점인 '권리'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펼쳐보기 전에 단순히 '성소수자'들이 받아야 될 마땅한 권리를 위한 일종의 제언인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공화주의의 연원까지 가봐야하는 다소 가볍지 않은 정치철학을 다룬 논저임을 알고 잠시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연구하는 독자들에겐 이 책의 일독이 꽤 중요한 과업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랍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난 2018년에 원제, "The Right To Have Rights"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과 더불어 필자들이 주로 논하고 있는 '권리'에 대해, 한나 아렌트의 중요한 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 제6장에서 짤막하게 등장하는 '권리들을 위한 권리'가 사장되었다가 최근에 난민과 국민국가의 한계를 통해 새롭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에 의해 '배제된 유대인'으로 규정되어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서 그녀는 스스로 보장 받지 못하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 애써 멀리했지만 (에드먼드 버크와 마찬가지로 권리에 대한 이상주의적 환원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녀를 연구하는 후학들에 의해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 글이 그러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기본적으로 아렌트는 자신이 국민국가라는 소위 '정치 공동체'에서 폭력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상실했다고 여겼습니다. 즉, 4장에서 역설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인종주의적 견해와 맞물려, "영국 백인들만의 권리라는 것이 당시 귀족 계층이 누리고 있던 것을 사회 전체의 백인들에게까지 확장 되기도 했다"는 지점에서 막연하게 인식되고 주장으로 설파되는 반대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어떻게 불명확한지 드러내기 위해 비교 분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종주의의 해악성을 새삼스레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인종주의적인 강조가 제국주의 시기의 영국을 거쳐 "국민국가"의 개념으로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면 타당하게 보입니다. 물론 지금 대두되고 있는 인종주의 관점이 과거의 귀족의 권리와 혜택이라는 사회경제적 담론을 승화시키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엄밀하게 분석해보면 도널드 트럼프가 견지하는 인종주의는 특권과 인종 혐오가 더욱 가미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앞서 짧게 언급해 봤지만, 이 권리에 대해 에드먼드 버크는 막연한 이상주의적 관점이라고 평가하면서 "권리가 박탈되어야만 권리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있다"는 식의 냉소로 일관하게 됩니다. 그가 프랑스 혁명을 혐오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1789년의 프랑스 인들은 마땅히 귀족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안정적인 사회경제적 지원이 있어야만 한다고 파악했던 점을 한나 아렌트의 권리에 대한 특별한 한계, 즉 "권리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경제적 지원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는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그녀는 "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가 꼭 자유로운 국가일 필요는 없고 자유로운 국가가 꼭 복지와 부를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우려했다"는 것에 '정부가 시민들을 위해 복지를 보장'하는 것에 왜 부정적으로 판단했는지 반추할 만합니다. 진정한 인간과 인류의 개념이 칸트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아렌트가 그것이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되어 오늘날까지 막연하게 인식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권리라는 단어가 매우 모호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공화주의적 권리"라고 한정해 의미를 명확하게 했다면 그녀가 우려했던 사회경제적 복지라는 담론을 다시금 논의라도 해봤을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정부가 복지를 위해 '시민의 자유'를 임의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장 자크 루소 조차 우려했던 부분으로 '모든 개인의 동등한 자유의 보장'이라는 것이 막연한 도덕주의적인 관점의 권리에 상대적인 대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우려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주장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와 마땅히 결별하여 다시금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일 자체"가 어떤 식으로보면 자유의 진정한 회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아렌트는 정치에 있어서 다원성의 확립이야 말로 제일 중요한 과제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자크 랑시에르는 한나 아렌트가 시민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너무나 극명하게 대립시켜 인식해 몰두해 온 결과가 그녀의 사상 자체에 경직성을 띠게 되었다고 보는 듯했는데요. 지금 광범위하게 발생되고 있는 난민의 상황은 이들이 '정치적 공동체'에서 유리되어 조르지오 아감벤이 인식한 '일종의 벌거벗은 생명"이라 보는 것과 동일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왜곡된 자유주의의적 사고의 결과물인 자유와 권리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지점은 시민들을 논의에서 격리시켜 결국 파편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권리를 어떤 정치체제든 간에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은 논의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즉, 정치체를 잃어버리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능력도 잃게 된다는 아렌트의 주요 논리는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권리가 자연적으로 주어졌다는 도덕적 해석"에 너무 매몰되어 시스템 자체를 숙고해보지 않게 되는 문제는 아렌트의 앞선 우려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태어났을 때부터 권리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 비판당하는 연유에는 한편으론 현실의 문제를 등한시하는데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 문제를 공화주의적 관점으로 한정시켜 권리 본연의 문제를 정치의 다원적인 틀로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난민의 권리 문제를 견고한 국민국가주의적 시스템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국제사회와 인간 본연의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인종과 종교의 차별 없이 모두가 인간의 가치"로 개념화 하는 것이 시민 전체로 봤을 때도 이것이 이득이 될 수 있을겁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매우 노골적으로 자본에 의한 계급화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권리 자체에 대한 새로운 규명이 현시점에서 매우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우리가 자주 읊어대는 '보편적 권리'라는 구절의 도덕주의적 애매함으로 인해 그동안 보수주의적 정치인들에게 멸시를 받아왔다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너에게 어떠한 권리가 있느냐"고 되묻는 이러한 보수주의적 시스템의 터무니없는 반문은 한나 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상주의적 관점으로 너무 매몰차게 치부되어 왔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여기에는 칸트를 뭔가 보수주의의 화신으로 해석하는 몰염치한 지식인들의 행태와 권리를 요구하는 행위가 정부에게 우언가를 강요하는 행태로 이해되는 요즘의 세태에서 루소의 말대로 "법을 인간의 위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게 할지라도" 법이 나서서 이것을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혹여 자연 상태의 미덕이 인위적인 것이 전부 배제되어 스스로의 삶을 가진 자원대로 결정하게 하는 '자유의 원칙'같은 것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을 위하는 것, 시민을 위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지지와 확신이 재차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뭔가 버크의 역설 같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나 아렌트의 이 "권리를 가질 권리"가 이제야 새롭게 세인들의 입에 오르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법적 평등이 깨어진 상태에서 나중에 국민 국가가 그것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회의적으로 본 아렌트의 고찰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렌트가 규정한 '시민권'의 개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 글은 거의 전적으로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키기 위한 의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권리를 가질 권리'자체가 한나 아렌트의 재해석을 포함해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를 효과적으로 탈각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소위 ‘인간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로서만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권리는 그것을 상실하고 나서야, 즉 그것을 잃은 사람들이 갑자기 수백만 명이나 생기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권리다

일단 법적 평등의 원칙이 깨어지고 난 다음에 국민국가가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아렌트의 입장이 심지어 더 회의적이다

이렇게 권리를 정치적인 의미로 보면 천부권으로 볼 때만큼 도덕적인 안심이나 위안을 얻게 되지는 않는다

특히 아렌트는 역사적으로 권리들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 국민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국민국가였음을 지적하면서, 권리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렌트가 인권 정치가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오만을 우려한 것은 전후 유럽의 무권리자, 무국적자, 그 밖의 박해받는 사람들을 염두해 둔 것이지만, 권리가 다원적인 주체들에게 동질화를 강제하는 속성을 갖는다는 아렌트의 견해는 권리 정치가 제국주의적이고 차이를 파괴하는 속성을 갖는다는 오늘날의 비판과도 상통한다

냉전이 끝나고 인권 옹호자들은, 이제는 초국가적인 규모에서 경제적, 사회적 권리라는 의제로 뒤늦게 다시 돌아왔다. 아렌트가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했던 복지 국가가 한때 가졌던 호소력을 상실하고 내부로부터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외부로부터는 ‘세계화‘에 의해 잠식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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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관계 - 인식, 쟁점, 그리고 한국의 대응
진창수 지음 / 세종연구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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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주로 남북관계와 대일, 대중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세종연구소의 연구원들이 근래 관심을 갖고 있는 중일관계를 주제로 쓴 논문 4편을 실었습니다. 특히, 근래 변화되고 있는 중일관계에 따른 우리나라의 정치외교적 함의 등도 간략하게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이 글의 중요한 목적은 급격한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배타적 국익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과 2010년에 중국에게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타이틀을 빼앗기고 난 이후, 일본 내에서 대두되었던 여러 위기감과 미일 안보 동맹을 바탕으로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지역의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일본을 분석하고 예측가능한 양국의 관계 변화에 대해 일종의 로드맵을 그려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날이 자신들의 합당한 지위를 국제사회에 요구하고 있는 중국은 근래 남중국해의 도서 지역의 불법 점거에 따른 군사적 요새기지화와 일본과의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에서의 영토 분쟁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남중국해의 자신들의 방공식별구역 지정과 더불어 마찬가지로 센카쿠/댜오위다오에 대한 소위 영토 회복에 있어서 시진핑 주석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타국과의 갈등 문제를 물리력 행사로 해결하려고 했던 중국 군부의 경향들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 이 지역의 큰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센카쿠/댜오위다오 지역에 대한 미일 안보 동맹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다는 점을 재차 천명하기도 했는데요. 다만, 일전에 아베 정권의 센카쿠/댜오위다오에 대한 국유화 과정에서 중국의 극렬한 반대와 더불어 당시 지역 내의 안보 불안정성을 일정 부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의 센카쿠 열도 영유권 (sovereignty)이 아닌 행정 관할권(administration)만 인정하고 있다"고 1장에서 인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미국의 대응은 실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일본의 입장에서 외무성 관리들이 정말로 중국과 군사적 대결까지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각오 유무를 떠나서 중국과의 문제는 대체로 미국에게 달려 있다 봐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일본은 집단 자위권 개념을 받아들여 미국과의 군사 동맹과 더불어 '집단 안보 체제'를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평화헌법 개정에 따른 보통 국가화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 것인데요. 일정 부분 미국의 국무부는 일본의 역량을 키워 중국의 지역 패권국화에 대응하게 한다는 식의 메모 랜덤을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에 저팬 핸들러들에 의해 추진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외교적 선결 조건으로 한미일 간의 삼각 연계에 따른 아주 긴밀한 공조가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2장에서 자세히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아베 정권이 출범한 이후, "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게 됨으로써" 한일 관계는 사실상 파탄이 난 것입니다. 당시 우리 외교부 당국과 정권 고위층들은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모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만류하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고이즈미와 마찬가지로 일본 내 극우들을 위해 단행한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이 글에서는 이 참배에 대한 자세한 배경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짧은 일본 민주당 정권 시절에 한국과 중국에 대한 온건한 정책으로 역사 문제가 더 수렁에 빠졌고 오히려 양국이 일본의 과거 침략 전쟁을 다시 끄집어 냄으로써 그것이 일본 극우들에게는 '국격의 상실'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베는 극우의 대변자가 되었다고 분석하는 것인데요. 아베가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미 그 이전부터 아베는 극우의 신봉자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 회의와 그의 관련성을 되짚어 보면 이 부분은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2장에서 분석되는 중국의 적극적 방어 전략과 대응되는 일본의 적극적 평화주의는 양국 간의 군사력 증강으로 뒷받침되는 배타적 군사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일관계는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개입에 따라 물리적 충돌이 현실화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미국과 중국의 충돌은 사실상의 제3차 대전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데요. 현재 대만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무력 통일 기도는 미연에 미군의 개입을 방지하고자 평택과 요코스카에 둥펑 미사일을 발사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데요. 평택에 둥펑 미사일을 맞은 우리 정부의 대응과 확전의 가능성에서 얼마 만큼의 군사적 위해를 지역 당사국들이 감당할 수 있는가에 전쟁 여부가 결정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중국 경제의 자유주의적 경제 기조에 밀접한 상황과 아세안을 비롯한 해당 지역 국가들이 중국과의 교역이 경제 전반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발발이 그리 호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 일본은 한국이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우려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국내에 친일 정치인들만이 장단을 맞춰주고 있습니다. 일본이야 자신들의 국익에 따라 한국이 중국과 대결에 이르러 총력전에 나서길 바라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국익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죠.

끝으로 3장 후반부에는 "만일 한일 관계가 정상화가 된다면 한미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상화가 되고 한중 관계도 과도한 중국 밀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종의 제언을 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여기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매번 일본의 인식대로 우리가 중국과 밀착되고 있다고 공격하는데 이것은 국익이 뭔지 모르는 자들이 앵무새처럼 내뱉는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현재 중국과의 교역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인데 기업들의 이익을 후퇴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중국과 거리를 둬야한다는 소리는 앞뒤가 다소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특히, 이러한 인식을 기화로 저는 한국이 한미일 삼각 동맹에 참여 내지는 대중국 공동 전선에 나서야 한다는 것에는 더욱 반대합니다. 북쪽에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중일 관계에 따른 여러 외교적 지향의 변화의 불안정성을 일부러 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미 동맹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고 동일한 측면에서 소위 중립 외교라는 게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여기의 필자들은 미일 안보 동맹이 이 지역에서 일종의 공공재 역할을 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중국과 일본 양자가 함께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라 입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1972년 당시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와의 회담에서 중국 측은 일본의 재무장 우려에 대해 키신저는 우리가 일본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 우려를 일축시켰는데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중국 쪽에서는 미일 안보 동맹을 일종의 공공재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이 받아들이는 맥락은 이처럼 상이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이 자리를 빌어 언급하고 싶은데요. 물론 합사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영내에 류슈칸(遊就館)의 존재입니다. 이곳은 일본 제국주의와 태평양 전쟁을 미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곳으로 야스쿠니 신사에서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하는 시설입니다.

일본이 지향하는 중국과의 관계는 미일협조에 기초한 중국과의 포괄적이고 기능적인 협력이다

중국 공산당은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왔지만, 점차 경제발전에 따른 국제적인 질서 속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일본 정치권에서 한일협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친한파 그룹의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일본 정치권의 극단적인 대응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군사력 증강과 공세적 안보정책 추진에 대해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고 판단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은 여러차례 군사력을 사용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관계 정상화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 아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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