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교양 이론 (양장) - 지식사회의 오류들
콘라트 파울 리스만 지음, 라영균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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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빌라흐 출신의 콘라드 폴 리스만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로 그는 모교인 비엔나 대학에서 오랫동안 윤리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철학 심포지엄인 '필로소피쿰 레흐'의 학술 책임자를 맡았고 오스트리아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역사가인 프리드리히 히어의 연구 재단의 책임자라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비엔나 대학의 철학과 교육 과학의 연구 책임자로 재직하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동 대학의 교육 과학 학부의 부학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요.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방송의 토론 패널로도 참여해 대중에게도 얼굴을 알린 지식인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대중 매체들을 통해 자신의 모국과 유럽 전반의 인문학 쇠퇴에 대해 수차례 경고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전통을 갖고 있는 유럽 대학의 소위 '미국화'에 대해 그는 날선 비판을 해왔으며, 대학이 시민의 교육 문제에 등한시하고 연구비를 위한 기업들의 연구소화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우려깊게 바라보고 있는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전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문학 쇠퇴에 대해선 모두가 할말이 많겠지만 그는 이 글을 통해 가장 큰 주범으로 '신자유주의'를 꼽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된 문제는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orie Der Unbildung"으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듯이 리스만은 이 글을 통해, 근래들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지식 정보 사회'의 진면목과 그에 따른 허상과 각 국가들의 중요한 교육을 책임져야만 하는 대학들이 어떻게 자본과 신자유주의에 의해 변질되어 왔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문법인지에 대해 저자는 매우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진정한 지식을 위한 학문적 토대를 찾아 볼 수 없는 작금의 유럽 현실에 대해, 역자의 해석이긴 하지만 '몰교양'이라는 단어로 빗대어, "정신의 실종 혹은 정신의 부정"으로 마찬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글의 3장에서는, 사실상 교양을 갖춘 시민 계급은 현재로선 사라졌다고 봐야 하며, 노골적인 자본의 재창출과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마치 적법한 공장의 노동자를 찍어내는 것과 오늘날의 허망한 지식 사회와도 맞닿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진정한 지식의 실종을 인문학의 부활로 해결해야 한다는 예측할만한 주장을 저자는 펼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진정한 지식의 추구 혹은 학문의 연구라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끊임없는 성찰과 진지한 태도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오늘날의 범람하고 있는 수많은 오락 거리들과 시민들이 습득된 지식으로 사회를 통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체제 지배적인 반대가 뒤를 따랐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가 밝히고 있는 이와 같은 '지식의 쇠퇴'에 신자유주의가 배경이 되었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여기서 굳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부각시키고 싶진 않지만, 자본과 기업의 논리에 의해 사회와 시민들이 지배당해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어떤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문장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에 대한 본질은 거의 오십보백보 일텐데요. 유럽이 지난 역사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던 계몽주의를 꽃피우기도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지독한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 글 7장에서 논하는 바와 같이 "계몽 절대주의는 과학 지식의 혜택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국민을 이 지식의 중심과 그 과정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국민으로부터 지식을 소외시켰다는 음모론으로 국한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가 분명 각자의 시민들이 자본주의에에 성공적으로 부역하고 심지어 내면화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서 '진정한 지식'을 이들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체제에 지속적으로 순응하고 반항하지 않는 국민들을 길러내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 체제 안정에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저자의 여러 나레이션 중에 지식의 진정한 쓰임새와 관련된 '세계에 대한 통찰 Durchdringung der Welt"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7장에서 이어지는 대학 내지는 사회가 마땅히 길러내야 하는 엘리트들에 대한 교육과 반대로 소외되어가고 있는 일반 시민들에 대한 리스만의 분석은 바로 언급한 이 세계에 대한 통찰이 어떻게 무력화 되고 있는 보여주는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사회를 움직이고 발전시키는 지식들을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엘리트들에 집중시키고 다수의 시민들에게는 그저 일자리를 위한 교육만을 시키는 차별적인 행태가 과연 평범한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지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전반적인 이러한 결과물이 의도하지 않은 형태로서, 우연하게 도출된 우민화(愚民化)인지 아니면 "세상을 통찰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자각한 시민들에 대한 우려스러운 시선"인지는 여기선 불명확하다는 식으로 갈음하겠습니다. 결국 앞선 의심을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지식 사회라는 문법과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탄생한 인터넷 망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너저분한 지식들'이 진리인 마냥 넘쳐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생각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는 진지하게 구현되지 않은 지식 산업이라는 미명이 산업사회 개념을 잠정적으로 해체하거나 대체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구조적으로 이러한 지식 발전 매키니즘이나 디지털 혁명이 산업화 시대 생산양식의 근본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소모적인 지식 범람이 사회에서 어떠한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오류라고 볼 수 있고 설사 진정한 지식 산업 내지는 지식 정보 사회가 완벽하게 구현된다 하더라도 기존의 전통적인 산업 규모로서의 생산 자체를 완전하게 대체할 수 없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애초에 자본가들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사회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계층들의 이 '지식' 함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매우 다른 단어이고, 그러한 구분이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은폐되어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식만을 '정당한 지식'이라고 규정하고 그 외의 다른 학문과 지식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인문학의 부활'로는 현실을 타파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교육 받는 시민을 길러내는 현재 대학의 위기, 특히 유럽 대학의 거대한 자본주의화로 판단할 수 있는 '볼로냐 프로그램'에 저자가 대학 관계자로서 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도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연구 성과급 체계의 유럽 대학의 미국식 프로그램인 이 볼로냐 프로그램은 소위 인문학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여러 저명한 대학들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미국 대학 시스템과는 다른 전통적이고 학문지향적인 유럽의 대학 토대를 뒤흔든 사건으로도 유명한데요. 자본과 기업이 대학에 일일이 스며들어 그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봉사'를 돈을 통해 요구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학문 연구라는 대학들의 고유한 영역을 연구비라는 명목으로 줄을 세우는 것은 사실상 건강한 사회 체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쯤에서 우리 시민들이 이러한 노골적인 자본주의화가 주입된 대학 교육을 원했느냐고 질문을 던져 본다면 차마 입으로는 말을 못할수도 있겠지만 속으로는 대부분 아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연구비에 따른 대학의 서열화가 그것에 완전히 소외된 인문학의 현실이 바로 저자가 답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식 사회 그리고 대학의 서열화 및 비즈니스 계열을 제외한 다른 순수 학문들의 소외가 결국 현재 우리가 맞이한 학문의 위기로 점철되어 왔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시민들의 효율적인 소비와 공정한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사회체제에 이러한 논리를 주입시켜 왔습니다. 경제학과 사회학을 분리해야 하는 것이냐, 아니냐에 각자 논박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을테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경제 전반이 자신들의 주장에 반론을 세우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고, 그들 스스로 고립된 전문주의로 말미암아 정작 필요한 사회와의 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단순히 지식 사회 물음에서 뿐만 아니라 '지식은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는 저 자본주의자들과 그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낱낱이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한데요.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일정한 수의 엘리트들을 배출해야 한다는 저자의 함의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다만, 소수의 지식을 처리하는 데 있어 엘리트가 유리하다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내각의 비엘리트 관료들이 순조롭게 대공황을 이겨낸 것으로 보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재조정과 시민 교육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지 않고 말장난에 불과한 '지식 사회' 놀음을 냉정하게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이 글을 통해 이와 같은 '몰교양'이라는 시대적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책임이 없는 것에도 무조건 '너희들의 책임'이라는 익히 알만한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저자들의 터무니 없는 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진정으로 '세계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모두가 이에 동의하시겠죠.


-자리를 빌어 알라딘에 대해 쓴소리를 해야겠는데요. 저는 얼마전에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계산을 하고 유유히 집에 와서 확인을 해보니, 또 앞장에 "증정 한울"이라는 사각형 형태의 도장이 찍혀 있네요. 아니 대체, 증정품을 왜 매입해서 저와 같은 애꿎은 독자에게 되파는 겁니까? 검수 좀 제대로 할 수 없는 건가요. 물론 구입시 확인을 제대로 안한 일차적 책임이 저에게도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몰교양‘이란 단순히 지식이 없는 무식함이나 특정한 형태의 반문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철저하게 교양 이념과 분리해놓고 대하는 것을 말한다

아도르노는 한때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진정한 교양이 무엇인지 논증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데카르트 학파의 철학과 그 철학의 체계적,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지식을 ‘소환‘할 수 있는지 알고 있더하도 그것은 늘 피상적으로만 아는 사전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지식사회가 모든 인식의 목표에, 진리 혹은 적어도 그와 연관된 분별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지식사회의 역설이다

지식이 쓸모가 있는지는 결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처한 상황의 문제이다

빌헬름 폰 훔볼트의 말처럼 인문학은 공부하는 사람의 ‘고독과 자유 Einsamkeit und Freiheit‘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혀 다른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식의 산업화를 이제는 사회의 마지막 피난처로 파악한 보편적인 과정을 따르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지식 엘리트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또 있는데 사람들을 노동과정에 적합하게 만들고 오락산업에나 어울리는 정서를 갖게 하는 부질없는 ‘단편 지식 Stickwerkwissen‘이 바로 그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인식하는 인간의 사유는 항상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며 인간의 행동은 ‘자기 안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는‘의지의 노력이다

기업 친화적인 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확산되는 현상을 보면 한때 대학다움을 갖추고 있던 기관들이 이제는 모두 허울만 대학 이름을 걸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계몽 절대주의는 과학 지식의 혜택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국민을 이 지식의 중심과 그 과정에서 멀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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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낭만주의
칼 슈미트 지음, 조효원 옮김 / 에디투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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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법학자이자 철학자 및 사상가인 카를 슈미트는 그가 주장했던 정치와 법에 대한 이론 및 고유한 철학적 성과들로 꺼지지 않는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순진한 자유와 정치를 혐오했으나, 스스로는 후에 히틀러의 나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하며, 유대인들을 정리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에 동의했던 것만으로도 악명을 떨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크 릴라는 그런 슈미트를 '도덕적 최저점'에 있는 인물로 규정하기도 하였는데요. 1945년 독일의 패전 이후, 미군에 의해 주도된 전범 재판에서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고 나서,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는 말년에 이르러 나치시절의 자신의 행적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시대의 인물인 알렉상드르 코제프가 "대화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일인"이라고 언급했던 것을 보면, 이러한 그의 참담한 도덕성과는 달리 학문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는 철학자라는 당시 저명인의 범주에서 세인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샹탈 무페와 지그문트 바우만을 통해 카를 슈미트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진보에 있는 사상가들이 카를 슈미트를 전체주의의 반면 교사로 그를 여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순전히 학문적인 측면에서 법에 대한 슈미트의 흥미로운 이론들이 어느정도는 일독의 필요성으로 답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처럼 "비도덕적 인물의 천재적인 측면"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라 일개 독서인으로서 가타부타 말을 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시대의 천재가 항상 만인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님을 고려해 볼 때, 각자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원제, "Poltische Romantik" 으로 1919년 처음 출판되었으며, 1925년에 제2판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번역된 책의 서지 정보에 의하면 이 책은 1998년의 제6판을 기반으로 번역되었고, 2020년 8월에 초도 번역이 이루어졌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슈미트의 이 글이 원만한 번역에 비해 일독의 난해함을 갖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저자가 규정하는 '낭만'과 '낭만주의'에 대해 이론적인 측면에서 명확한 기준이 다소 모호한 것은 일견 아쉬움으로 다가왔는데요. 슈미트가 철학적으로 규명한 '실재'가 사회와 역사의 혼합물임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실재가 부재한채로 '내키는대로 주관화'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낭만주의로 보는 것이 기본적인 인식틀로 여겨졌습니다. 즉,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 반대이면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반대"라는 그의 인식은 일종의 '대립론'이라 치부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분명한 요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이 글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이후의 나폴레옹 전쟁으로 귀결되어 나타난 복고주의 체제인 빈체제를 앞선 것의 대립물로 놓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당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1500년이 넘은 카톨릭의 존재를 낭만주의자들이 부정하고 개혁의 대상으로 여긴 지점을 "역사는 결코 단절될 수 없다"는 이해하에 낭만주의자들이 갖는 "역사적 주관성" 비판하는 데, 메테르니히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프리드리희 폰 겐츠와 아담 뮐러의 정치적인 행적과 특히, 아담 뮐러의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변화들을 고찰하면서, "당시의 난폭한 프랑스 혁명의 시재적 결과물"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상세히 분석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정치사상적 서사로 글 전체가 점철화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독자들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당시에 극명하게 도래한 자유주의적 낭만주의는 저자인 슈미트의 입을 통해, "개인과 개인주의 그리고 자유"의 고삐풀린 관념체계로 이해되면서 더 나아가, "역겨운 천민들의 정치"라고 일컫는 프랑스 혁명으로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그에 의하면, 이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일개 개인들이 국가와 다름없는 위상을 갖고 있다고 여겼으며, 이들에 의해 자행된 무분별한 헌법의 자의적인 해석과 그에 따른 개헌 역시, 슈미트는 매우 비판적 어조로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슈미트가 프리드리히 슐레겔을 통해 살펴본는 국가 개념의 본질이 과거의 역사의 산물로서, 또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객관화된 주체로서 강조되고 있었는데요. 앞선 낭만주의자들의 이론적인 측면에서 도화선이 되었던 장 자크 루소를 유독 꼬집어 비판하는 것은 그에게는 마찬가지로 동일한 기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위대한 개인주의'와 '자유 의지'를 잉태했던 이들을 낭만주의라는 외피로 규정해 탈역사적 혹은 충동적이고 감정에 사로잡힌 무리들로 인식하는 것이 과연 명확한 대립된 개념으로서, 일차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는 약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18세기 이후, 철학과 사회에서 전유럽의 계몽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전통을 어느 정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는 이 자유주의적 낭만주의에 대해 슈미트가 가졌을 반감은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문제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있어서 유럽의 저명한 인사들이 가졌던 감정은 각기 상이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요. 글 초반에서 언급되는 낭만주의의 시초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인과 독일인들이 혁명에 대한 감정과 태도가 극명하게 달랐던 것도 슈미트의 언설로 통해 상당 부분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만, 에드먼드 버크를 통해, 어찌됐든 장 자크 루소를 매섭게 깎아 내리는 것과 그것이 혁명의 외형적 모습이라 할지라도 '천민들의 정치'라고 규정되는 것은 현대인의 감성을 가진 저로서는 다소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는데요.요. 반대로 "빈체제 이후, 다시 혈통을 내세우는 자들이 도래했다"고 언급되는 부분에서 슈미트의 명확한 태도가 보이지 않는 점 또한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쉽다는 표현 정도로 일단락을 내리려고 합니다만, 그의 이후 행적들로 봤을 때, 특히 카톨릭에 대한 기존(개혁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의 "혈통있는 자들"의 인식을 어느 정도 동조하는 것으로 느껴지디고 했는데요.. 이러한 인식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렇게 나누기 좋아하는 단순한 정치적 관념으로서의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대로 카톨릭은 전통주의적 입장에서 그 역사를 존중받을 만하다는 것이 슈미트의 해석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국가와 정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역사의 실재성과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폭력이나 힘으로 무너트려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표하는 것에 이르고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런 슈미트의 입장은 아담 뮐러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읽혀지기도 하는데요. 자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는 당시의 아담 뮐러는 대표적인 낭만주의자였고, 혁명을 견인한 자유주의적 낭만주의가 종래에는 여러 정치적 지형들을 통해 '보수주의'로 귀결되는 것으로 고려했을 때, 그도 역시 보수주의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여기서 인용되고 있는 아담 뮐러가 다소간 에드먼드 버크의 지지자로 읽히기도 하는데요. 뮐러의 대표적인 논저인 "대립론"에 주목하고 있는 슈미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소회로서 밝히고 있는 뮐러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떠들썩했던 18세기 말이 우리에게 남겨준 온갖 문서, 대화, 행동 들 가운데 지금까지 어느 하나 완결된 것이 없다"고 피력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낭만주의자의 눈물나는 재조명에 대한 노력과 다시금 이 혁명의 주옥같은 언어들을 되새김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슈미트 스스로는 이 아담 뮐러의 사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다소 어렵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뮐러가 보수적인 지주들로 구성된 반대파에도 줄을 대고, 동시에 보수주의에도 손을 내민 것으로 보아 아담 뮐러의 낭만주의는 스스로의 이익과 결정에 수반하는 것으로도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고유한 결정 내지는 이익에 대해 슈미트도 어느 정도 애덤 스미스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만, 슈미트가 평생에 걸쳐 겉으로는 '일관된 주의'를 옹호했던 것으로 보아 낭만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혁명 이후, 슈미트는 빈체제에 의한 복고주의 시대에서 '정치적 낭만주의'는 추상적 합리주의에 대한 역사적 반동에 종속되었다고 평가하고 이를 헤르더와 보날에 이르러, 2장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논증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점철된 도덕주의자였던 로비에스피에르가 실로 무지했던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개인적 욕망이었을 겁니다. 혁명의 주역들이 전부 자신과 같았으면 혁명이 그런식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처럼 그의 인간에 대한 진정한 무지가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이 강고하게 갖고 있던 생각은 "인간 사회는 이미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가 그 자체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을 갖고 있는 것이죠. 또한, 이것은 혁명 열사들의 무질서를 바로 잡는데에 역사가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축이 무너진 인류 공동체에 대해 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고 보는 점은 꽤 흥미롭기도 하였습니다. 민족 개념의 탄생이 어떻게 보면 혁명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혁명의 부정적인 파급을 치유하기 위해 도출된 것이 민족이라는 그의 해석은 루소가 이를 오용했다고 다시 한번 규정하면서, 이것은 오로지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단락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2장 전반은 역사와 국가의 연계라는 인식적 측면에서 슈미트가 공을 들인 부분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이 역사와 국가간의 관계는 무엇보다 합리적인 관계이고 이를 다시금 재해석하거나 기존의 인식적 체계를 기피하는 것을 낭만주의의 숨길 수 없는 본질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단순히 낭만주의가 비합리적인 어떤 주체성에 대해 집중하고 뒤이어 3장에서 논의되는 '인간의 충동적인 감정적 소산'으로서의 수많은 개인주의들이 역사의 흐름을 배격하는 움직임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결말로 그려지고 있기도 한데요. 앞선 빈체제에 따른 복고주의를 전통과 역사에 기반한 기존의 공동체적 사회체계로 저자인 슈미트와 동일하게 같이 바라봐야 할지는 지금으로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습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슈미트가 '보수주의'라는 단어를 끄집어 내어 그가 줄곧 잘했던 낭만주의의 대립물로 체계를 확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라는 단순한 이원화된 논리들을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꺼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18세기 말을 거쳐, 19세기를 침윤시킨 낭만주의적 서사들이 "주관화된 기연주의"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은 그의 일관된 가치 체계에서 일견 이해되기도 합니다만 낭만주의자들의 주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기연주의를 꺼내들 필요는 있었을지 약간 의문이 듭니다. 무신론을 비판했던 말브랑슈와 같은 철학자들과 그것에 기반한 기연주의적 입장들과 범신론 전반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러한 일부의 비판적 사조속에 혁명의 단어와도 같은 일반 의지에 군주를 종속시키려고 한 일련의 움직임 또한 그는 점진적으로 비판합니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수많은 천민들과 반대의 군주는 극명한 대립물로서, 이러한 인식의 토대가 아담 뮐러의 것이라 할지라도 슈미트 역시 성공적으로 이를 받아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간접적으로는 인용된 에드먼드 버크를 통해 슈미트 역시 혁명을 경멸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자신의 정치적 관념에서가 아니라 실재의 측면, 합리의 측면, 전통의 측면에서 거부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에서 전반적으로 진술되고 있는 아담 뮐러와 같은 수사에 대해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는 낭만주의자들이 기존의 전통주의와 그것들을 따르는 여러 주제들을 관념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었던 것은 낭만주의 자체가 그 특별한 주관성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사상에서 다소나마 일관성을 결여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별반 상관없는 카톨릭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요리하고 싶어했던 것이나,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형이상학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논리적 명료성을 답보하지 못해 시대적 요청을 위한 중대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 것도 결점이자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부족한 이해로 왜 자유주의적 낭만주의가 왜 보수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일종의 단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소개했던 바와 같이 혁명의 실패와 그에 따른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보수주의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각국의 정치 무대에서 보수주의가 얼마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부르짖는지 따져보면 얼마간 그러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역사의 개인적 해석"조차도 용인받는 시대이고,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시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하층 계급들이 일으킨 혁명의 그 결과물이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라는 함의에 이르기도 하였죠. 물론 과거 보수주의의 이력에서 개인의 자유란 오로지 힘있는 자들의 자유이기는 했습니다. 무덤에 있는 슈미트가 개인들의 자유가 중요시 되는 이 사회를 나약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볼지는 모르겠으나, 반대로 국가와 공동체의 필요성 또한 자유주의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그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앞선 인식과 마찬가지로 힙있는 자들의 국가론과 일반 시민의 국가론은 명백하게 상이한 차이를 갖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글을 마무리 하기에 앞서,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아담 뮐러, 겐츠, 말브랑슈와 보날과 같은 당시의 사상가들에 대한 기초적인 인지없이, 슈미트의 서사에 기반해 서평을 썼기에 매우 부족한 글이 되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더불어 번역은 대체로 나무랄데가 없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역자의 후기는 모두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번역서에 대한 판권 문제에 대한 한국 출판계의 아쉬운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구입은 출간된 8월 즈음이었는데요. 그동안 다른 글들을 읽느라 손을 대지 못하고 이제야 겨우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책은 얇은 비닐에 싸여져 있었는데요. 비닐이 없는 책은 아마도 중고라 여겨도 되실 것 같습니다. 구매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카를 슈미트가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치적 낭만주의의 간략한 요점은, 아마도 순진한 자유주의와 입헌주의를 주장하는 낭만주의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자유를 경멸하고 헌법의 예외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그의 일관주의를 고려해 봤을 때, 이는 크게 어긋나지 않은 이해이기도 합니다.

가령 국가가, 민족 또는 개별 주체가 지고의 심급이자 결정적 요인으로 등장해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정식을 제안한다. 낭만주의는 주관화된 기연주의다

1848년 독일 부르주아 혁명 운동은 낭만주의를 자신들의 정치적 적수, 즉 반동적 절대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여기서 메테르니히는 낭만주의를 자유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경향으로 보고 있다

17, 18세기의 고전주의에 대한 대립은 루소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가 감정적 왜곡의 대상으로 삼았던 당대 철학의 여러 개념들 가운데 일부는 칸트 철학에서, 그리고 다른 일부는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게 - 이것은 그 자체로 반동의 표현이었다 - 에서 차용했다는 사실이다

복고주의 시대의 이른바 ‘정치적 낭만주의‘는 추상적 합리주의에 대한 역사적 반동에 종속되어 있다

기연주의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참된 본성을 속이려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행위는 어디서 성립하는가? 기연주의 체계의 윤리에 따르면, 그것은 오직 기분의 움직임 속에서만 일어날 따름이다

바꿔 말해, 낭만주의자는 어떤 기분을 느끼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낭만주의자는 자신의 기분을 다른 어떤 ‘평볌한‘활동보다 높이 평가했다

혁명은 "사실"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이교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버크에게 혁명은 신의 법과 인간의 법에 대한 혐오스러운 모욕이었다

그러니까 정치적 낭만주의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국가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역사적-정치적 현실 속의 국가는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낭만 적 주체의 창조적 활동을 위한 기연, 즉 시와 소설 혹은 순전히 낭만적인 기분을 위한 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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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꾸러미 2022-10-02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2-10-04 00:00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칼 슈미트에 대한 상당히 인상적인 비평을 쓴 어느 블로그 글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제가 그 블로그 주소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ㅜㅜ
개인적으로 슈미트는 알면 알 수록 대단한 느낌과 함께 실망감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후자는 나치에 대한 부역과 관련된 일화들인데요. 아마 자신의 이력에 대한 것들을 슈미트가 변명으로 일관한 것을 아주 잘 아실 겁니다.

책꾸러미 2022-10-04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칼슈미트가 나치 부역자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감시의 시대 - 통제하다 평화롭다 불안하다
아르망 마틀라르 지음, 전용희 옮김 / 알마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벨기에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진보주의 학자로 알려진 아르망 마틀라르는 미디어와 문화 및 커뮤니케이션을 주제로 특히, 역사와 세계화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입니다. 그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과 연계된 피노체트 정권 이전의 칠레의 제도 개혁에 자문 위원으로 나섰으나, 1973년 미국 리처드 닉슨 정권에 의해 자행된 칠레 군부의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 이후, 칠레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이력을 통해 살펴보면 자유주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후 벨기에가 아닌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37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학업을 다시 이어가, 노력끝에 파리 8대학의 방문 학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파리8 대학의 정보통신학과의 정교수가 되었으며, 1983년과 1997년 사이에는 프랑스 렌2 대학의 정보통신학과에서 교수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04년까지 파리 8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다 2004년 9월부터 동 대학의 명예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La Globalisation De La Surveillance"로 지난 200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이 글은 현재 국내에서 절판된 상황입니다.

국역된 책의 제목으로 인해, 글을 읽기전에는 9.11 테러 이후에 불어닥친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안보 강화를 다룬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요. 사실 이 글의 정확한 요점은 "오늘날 점차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안보에 대한 인식과 과거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이어진 다수에 의한 권리 및 그에 따른 공화주의"가 미국과 같은 헤게모니 국가에 의해 어떻게 침탈당했는지를 여러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는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업의 이익과 그것을 보장하고자 하는 국가의 안보 함의와 이것이 각국의 정치 지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분석하는 광범위한 안보에 대한 본질을 추구하는 일종의 르포르타주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글에는 알제리 독립 시기에 자행되었던 알제리인들에 대한 프랑스 군부의 조직적인 납치와 고문, 그리고 그것을 지원하던 각종 조직과 시설 등을 다루면서,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이 국가 안보와 국익을 매개로 자행했던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의 조직적인 군사적 개입 및 CIA와 같은 안보 조직에 의한 작전 등을 거의 가감없이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에드먼드 버크의 초기 사상에서도 기인한 것이지만, 무질서한 대중들에 의한 사회 체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권력층의 요구는 통제와 질서의 붕괴 가능성에 따라 안보 개념이 탄생한 것으로 1장과 2장의 논증을 통해 저자는 규명하고 있는데요. 가브리엘 타르드와 귀스타브 르 봉에 의해 확산되었던 '조직된 대중' 혹은 '무질서한 군중'에 의해 사회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당시 지식인들과 지배 계급의 공포는 현재 우리가 짐작하게 되는 공포보다 지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지금도 사회 질서와 체제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질서 자체를 수호하고자 하는 테크노크라트와 엘리트들이 이러한 관념을 견고하게 지지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것에는 저들의 사활적 이익이 체제적 안전이라는 틀안에 교묘히 숨겨져 있습니다만 그것을 떠나 설사 체제 자체가 건전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저들의 우려를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자유 세계의 리더라는 미국과 현재의 이 체제를 같이 고민하고 만들었던 서구 유럽 국가들이 자유주의적인 이론적 토대하에 '현실적인 살'을 갖다 붙인 것이 지금까지 국제 체제가 만들어진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국내 정치적 환경에서 저들이 자신들의 침해받지 않는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공화주의와 민주적 절차를 절충해 받아들인 것이지만, 헌법의 존재 의미를 되도록이면 언급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현재의 안보에 대한 주요 국가들의 사회 제도와 그 태도의 기본적 인식에 있어서 전자와 같은 유사한 궤를 같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헌법이 먼저냐, 체제가 먼저이냐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것을 후자가의 입장이 이데올로기화 되어 변질된 자유주의적 인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보이는 분석과 마찬가지로 위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 타국과 국제 체제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에 대해선 다소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즈음에서 소위 현실적 맥락의 보수주의라고 부를 수 없는 보수주의자들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처럼 자신들의 국가 체제에 있어서 현재의 토대를 지키려고 하는 일차적인 요구가 처음에는 타국에 - 미국에 있어서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대해 명분 없이 개입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이 보수주의자가 아닌 자들에 의해 환경 자체가 백팔십도 변하게 됩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냉전시기의 이 보수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그 가운데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도 있었지만, 당시의 소위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은 명확히 말하자면 거의 '반공주의자'에 가까웠습니다. 즉, 민주적 가치에서 흔히 이해하고 있듯이, 정치에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결코 균질화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을 넘어 사회 전반의 건전한 비판에도 이'공포의 레드'를 노골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아르망 마틀라르는 이 글의 6장에서, "매카시즘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같이 강력한 보수주의"라는 표현으로 이를 수식하고 있었는데요. 저자의 이러한 인식에 충분히 동의를 하게 됩니다. 최소한의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면서,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기존의 지배 엘리트들이 다수의 대중이 모인 그 '집합체'를 본질적으로 혐오하고, 잊지도 않은 혁명의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철지난 이상주의로 몰아왔는데요. 이 철저한 반공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지금도 강한 생존성을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물론 시민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에서도 충분한 함의를 갖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해 저 역시 크게 긍정하고 있습니다만, 저 반공주의자들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자들)에 의해 규정된 자유(소수 기득권의 자유과 자유 시장 담론)와 다수 시민들의 자유가 그 맥락이 다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모두의 자유를 함의하는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안보 욕망이 오늘날 국가 체제 안정과 주변의 정치적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소수 힘있는 국가들에 의해 -특히 미국-  조직적인 군사적 개입 등을 나타난 것입니다.

이 글의 4장에서는 앞선 국가들의 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비대해진 안보 조직'에 대한 성역화를 먼저 꼽아 볼 수 있겠는데요. 미국의 CIA와 같은 경우 무조건 의회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긴 하지만, 이 정보 조직들은 기어코 헌법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동안 CIA는 테러리스트로 오인해, 프랑스와 미국의 시민권자를 납치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의회와 사법 조직이 마땅히 경고하고 응징해야 했음에도, 이들에게는 아직도 치외법권적인 안전망이 존재합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이들이 장차 시민들을 억업하거나 형식상은 민주주의이나 거의 '과두제에 준하는' 체제에서 시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을 갖을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정보 조직에 대한 명확한 정치적 견제가 이뤄지고 있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직화 된 과정들이 과거 안보에 대한 프로파간다의 확립과 카를 슈미트와 같은 '예외 법칙'을 주장한 지식인들에 의해 마련되었는데요. 더욱이 이 슈미트의 논리들은 이후,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권 국가' 혹은 '종속 국가'에 별다른 도덕적 자책감이 없이 군사력을 투입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안보가 위협받는 비상한 시기이니 마찬가지로 비상한 작전과 개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이죠.

다음, 8장에서도 논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시장과 그에 따른 세계화에 따라 국가의 체제 안보는 더욱 중요한 관념이 되었습니다.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오늘날과 같은 긴밀히 연결된 시대에는 주변 국가 뿐만 아니라 견고하게 구축된 체체 전체의 안전이 중요하게 되었는데요. 신자유주의 시기에 정치가 경제의 시녀가 된 것을 차치하더라도, 주요 경제국들이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막대한 국방력을 투입하게 된 연유에는 이러한 자신들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2001년 9월 이후 더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유 시장과 무역을 위한 미국의 강조는 '중동 테러리즘의 축출'과 더불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대로 자유 민주주의는 좀 더 다원성을 지각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동등한 시민들의 권리 또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가 믿었던 체제입니다. 그런데 테러리즘의 시기라는 명목하에 안보 조직이 정치의 장이나 시민의 활동의 분야에 까지, 그 합법성을 운운하며 따지고 들려 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민주주의적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다수는 현재의 미국 정치가 민주주의하에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있으니 전자와 같은 터무니 없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우리의 민주주의가 소위 '정치적 톨레랑스'를 잃은지 이미 오래된 상황이면서, 또한 정치에서 신자유주의가 득세한지 40여년이 넘었기에 이것을 마냥 안심하면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칠레에서 추방된 경험을 익히 겪었기 때문에, 안보에 대한 맥락이 어떤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10장에서 논하고 있는 "시민 보호의 취약성"은 단순히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요. 유럽 연합이 2001년 이후 개인정보 수집과 관리에 대한 공격적인 대책을 신속하게 통과시킨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행 가운데,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고 더 나아가 유럽의 이민자들을 테러리즘의 배후로 인식해, 이들에 대한 시민권과 관련된 가혹한 조치를 시작한 것은 우리에게도 시시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유대인을 비롯한 비 게르만계 주변 이웃의 시민권을 침해하면서 이들을 격리시킨 나치 독일의 사례를 보면, 이와 같은 반이민주의와 그에 따른 강력한 안보 함의는 다소 우려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민들의 안전이 국가의 일부 조직에 의해 인질로 잡힌 경우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더욱이 고도화 되어 가고 있는 네트워크 시대에 개인 정보와 기본 권리가 기업과 국가 조직에 들어가 있는 상황은 헌법의 유명무실화를 통해 달성되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현실적인 시민들에 의한 국가와 국가가 주도하는 안보 정책의 현실적인 견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종의 중립적인 민간 감시 기구를 만들어서 헌법이 이들에 대한 법적인 감찰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각국의 안보에 대한 매파가 득세하지 않도록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이 정치 일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고 있으며, 작금의 세태 자체가 다음 세대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정치 환경의 개선과 무엇이 민주 국가에서 제일 필요하고 시급한 것인지를 공화주의와 헌법에 입각해, 다시금 고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철지난 이상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또한, 이 지점에서 지배 엘리틀이 다수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자각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안전사회는 18세기 후반 이후 스코틀랜드 출신의 계몽주의자 애덤 스미스와 중농학파의 수장 프랑수아 케네가 초석을 쌓은 자유주의와 혼합된 형태다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군중에 대한 토론은 언론 자유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통해 획득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표현법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징조였다

귀스타브 르 봉의 의견에 따르면, 군중은 프랑스대혁명과 함께 시작된 평등주의에 대한 망상이 승리하면서 불거져 나온 것에 불과했다

가브리엘 타르드는 ‘여론과 군중‘에서 군중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다시 강조한다

이 같은 조치는 1798년에 시작된 ‘외국인 단속법과 치안유지법 Alien and Sedition Acts‘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 법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평화 유지를 명분으로 수천 명의 미국인을 구속하고 독일 출신 미국 시민권자들의 워싱턴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물로 근방 5킬로미터 내에 접근하는 것까지 차단했다

테크노크라시라는 용어는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활동하던 윌리엄 헨리 스미스가 1919년 잡지 산업 경영 Industrial Management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들의 기대와 맞물려 진행되고 있는 "영원한 전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발터 밴야민은 1930년,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에게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라틴아메리카를 부차적 국가로 분류했다. 그 원인은 19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적 코드와 "정복 없는 미국의 원정문화"에서 나타난다

1954년 8월 4일. 르몽드 Le Monde에서 샤를 라쉬로이는 온건한 민주주의의 프로파간다가 그들의 타깃 중 10분의 9를 벗어난다고 말했다. 반면 엄격하고 강력한 수평 구조의 계급사회에 편입된 프로파간다는 최대의 효과를 보장한다고 설명했다

쿠바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크고 작은 혁명의 움직임이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속출하면서 미국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남반구의 안전을 위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간 군사협조 시스템 계획을 재가동시켰다

2년 후, 미국 정보기관들과 닉슨 대통령에게 국가안전보장에 관해 고문 역할을 했던 헨리 키신저와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의 정보부장관들은 납치와 강제 실종 그리고 고문이 자행된 ‘콘도르 Condor 작전‘을 실행했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는가? 라는 물음은 점점 더 절박한 방식으로 서방 국가 지도자들과 기자, 연구원 그리고 대중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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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의 문화
노암 촘스키 지음, 홍건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얼마전에 작고한 하워드 진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살아있는 양심으로 일컬어지는 노엄 촘스키는 스스로 열렬한 민주주의자이자 사회 비평과 및 정치 운동가로 본업인 인지 과학과 언어학 분야와 비견될 정도로 폭넓은 명성을 얻은 지식인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촘스키를 보며, 지그문트 바우만도 지금 생존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노엄 촘스키는 이 세계와 인류를 위해 더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촘스키의 간단한 약력은 쓰지 않을까 하는데요.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제국 미국'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제가 자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만 기간은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CIA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은 지식인으로서 현재의 미국 기득권층과 엘리트 지배 세력들이 그를 얼마나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혹자들은 흔히 노엄 촘스키를 가리켜 '사회주의자'라고 애써 폄하하려고 드는데요. 이것은 그의 글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자들의 폄훼이고, 그는 네오콘이나 보수 우파, 티파티 누구보다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그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세계 다수의 진보 좌파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한 부분인데요. 냉전 이후 자유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를 삭제하고 싶은 엘리트 세력과 기득권 지배층들의 노골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이나 일삼는 것에 비하면, 그의 양심은 최소한 대다수 시민을 향해 있다 봐도 분명해 보입니다. 하여튼 이 정도에서 그에 대한 소개는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Culture of Terrorism"으로 지난 198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이 되어 국내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데요. 판권의 문제이든 에이전시의 문제이든 간에 잘 해결되어 모쪼록 재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원제와 거의 동일한 의미인 이 글의 국역 제목과 관련해, 많은 독자분들은 이것을 어떻게 미국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어쩌면 제목으로 인해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 책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건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추악한 "이란-콘트라 사건"입니다. 리처드 닉슨의 불명예스런 퇴진과 마찬가지로 레이건을 백악관에서 쫓겨나가게 할 뻔한 이 최악의 스캔들은 레이건의 사망 이후,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분위기와 그것을 주도하는 정치가들 및 일부 지식인들의 의해 조직적으로 묻혀졌던 감이 있습니다. 많은 이론가들이나 시민들은 한 정치인의 공과 과를 되도록이면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것에 대해 제가 따로 판단을 할 필요는 없겠으나, 이 사건은 명백히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과(過)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많은 공화당 지지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평가하거나 파헤치는 지식인이나 시민들을 '사회주의자'로 매도해 왔는데요.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그에 따른 비판을 촘스키의 장점인 '사건을 밑바닥까지 파헤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입증해 내고 있는데요. 저는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 이 글을 별 다섯개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현존하는 이란-콘트라 사건의 아주 명확한 분석이자, 깊이 있는 일종의 '논문적 르포르타주'로서, 그 가치가 지대하고 둘째로는 엘리트 지배 체제를 더욱 강고히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존하려 하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정책이 어떻게 미국 외교와 국제 정치의 본질이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어 어떤 국제 정치학자들의 논저들보다 매우 '현실적'이라는 점을 높이 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정치 스캔들인 이란-콘트라 사건은 1979년, 중남미 니카라과에서 민중혁명에 의해 무너진 우익 독재 정권인 소모사 정부 사태와 관련해 미국 정부가 벌인 불법적인(국제 협약 파기, 의회 정치를 무력화 시키고, 불법 송금과 주권국의 주권 침해 등) 지원이 주가 되었던 왜곡된 밀실 정치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뒤이어 살펴보겠지만 이 사건은 자신의 앞마당에서 초래되는 사회주의 혁명의 공포에 대한 미국 정부의 니카라과 개입으로 대변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것은 그동안 대내외에 알려진 매우 명목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인 촘스키는 1장부터 3장까지, 미국이 스스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내세우면서도 CIA에 의한 조작 개입과 용병들을 통해 진행된 타국에 대한 무력 진입 및 그러한 불법적인 논리가 바로 '미국 외교 정책'의 본질임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워드 진이 일찍부터 인정한 부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요. 즉,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경찰 국가라는 하워드 진의 인식 말입니다. 그리고 촘스키는 이를 넘어 더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수도 없이 강조하고 부르짖는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초등학생이라도 알만한 시민들에 대한 의무, 민주적 절차, 공개되어야 하는 정책적 행위 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 그리고 '자신의 앞마당은 오로지 자신들의 것'이라는 이 이데올로기를 누구 눈치도 볼 것 없이 자행했던 미국 정부의 어두운 일면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를 명백하게 옹호하고 있는 미국 내의 저 보수주의자들이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는 촘스키의 비판과 함께, "비밀기록과 공식문건에서 드러나듯이,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미국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요구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일련의 공세적 함의들이 미국 외교와 그 권력의 숨겨진 본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분명한 선한 가치들로 위장되어 있기 마련이다"는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과 유사하게도 미국의 대외 정책은 저 자유 민주주의라는 미사여구로 그동안 점철되어 왔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유 민주주의로 자신들의 노골적인 이익과 더불어 사적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과 관련된 촘스키의 주제 의식은 미국은 이란-콘트라 사건을 포함해, 자신들의 국익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공세적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식의 엘리트주의적인 테러리즘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언론과 여러 글들을 통해, 이란-콘트라 사건의 주역으로 알려진 올리버 노스는 겉으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촘스키의 이 글에서는 그조차 허수아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배후가 백악관과 CIA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상당합니다. 당시 니카라과의 우익 반군인 콘트라가 벌인 추악한 군사작전인 '무고한 농민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이 백악관에서 검증된 군사적 성과라고 자화자찬하는 관료들의 언행들을 낱낱이 살펴볼 수가 있는데요. 그 주역들이 스스로 자화자찬한 이면에는 전례에 따른 선입견과 그리고 여러 사건들로 인해 미국 정부 혹은 관료들이 "공산주의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일관된 논리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저 노련한 정책 당국자들이 다수의 가난하고 억압받던 하위 계층의 소위 민주적 열망이 '폭발적인 공산주의 혁명의 불씨'로 전개 될 수 있다고 확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련의 사주를 받는 저 민중들을 전부 제거하고, 종래대로 미국의 말을 잘 듣는 보수 우익들을 다시 정권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인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최근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나왔던 "과연 미국이 가만히 있겠느냐"와 묘하게 오버랩 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냉전의 시기가 매우 비상한 때였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최근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강제된 민주주의적 이식이 여러 계층과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다양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그처럼 강조하는 이 민주주의가 이제야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초보 민주 국가' 들에게 미국의 정책(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간에)이 유독 그들에게 가혹했다는 것은 촘스키도 역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국익에 거슬린다고 해서 초보 민주 국가가 아닌 꽤 견고하고 뿌리 내린 기성의 민주주의 국가를 CIA의 작전으로 무너뜨린 사례가 있는지는 저로서도 확실하지 않은데요. 오히려 한국과 대만과 같은 권위주의 독재 정권을 옹호하고 지원함으로써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합치된다는 식으로 자위했던 최근까지의 독트린(?) 역사가 존재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미국으로 기억되고 지금까지도 미국에 대한 보은의 필요성을 느끼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만, 여기에 베트남전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레이건과 지미 카터, 그 이전의 케네디 정부를 되새김질 해봐도 우리의 사정과는 다르게 이 아름다운 미국이 얼마나 불법적으로 군을 투입하고 작전을 펼쳤는지, 이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촘스키의 이 글이 단순히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추악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국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라이트 밀스가 언급한대로, "엘리트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시민들에 의한 정치, 민주적 절차와 합법성 그리고 권력간의 균형과 이를 통해 실현시킬 수 있는 시민 다수의 권리가 경우에 따라 전부 무력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게 됩니다. 현재 미국은 이러한 노골적인 현실에 있는 것이 거의 명백해 보이는데요. 저들이 진정으로 과두제를 열고 싶어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이러한 맥락 가운데 그동안의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러한 정치적 결과의 실현 가능성을 더욱 가깝게 만든 것도 거의 확실합니다. 이에 촘스키는 "미국인들에 대한 신자유주의화는 이미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시민의 권리를 축소하는 지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거의 야합과 가까운 결합'이 미국의 지배 계층이 바라는 이익과 합치되는 과정이었고 자본의 광범위한 이익과 관련된 민주주의의 제한과 축소 필요성은 실질적으로 증명된 논저들이 수를 셀수 없을 만큼 많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힘의 투사 내지는 소위 '은밀한 작전'과 보수 독재 혁명을 지원하는 행태의 이린-콘트라 사건 그리고 따로 언급되고 있는 과테말라의 경우와도 미국의 그같은 개입이 바라는 목적이 앞선 진술들을 통해 분명하고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미국의 정치적 본질을 가감없이 다루면서 통찰하고 있는 것이 이 글의 8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대개 정치신학 용어들이 그렇듯이 '민주주의'란 말이 지는 두 가지 의미, 즉 그것의 사전적 의미와 교리를 주입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기술적 의미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언급은 "미국의 경우. 이 '민주주의'는 미국 투자자들의 이익에 부응하는 부류의 사람들의 정치체제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는 것을 뜻한다"고 촘스키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정치 및 이데올로기 체제가 경제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성취되었다"고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논지가 이 글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미국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매커니즘으로 국가가 돌아가고 있었고, 이것에 대한 반론은 특히 대외적인 측면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군사적 지출과 군비 증강을 전혀 반대하지 않는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더 바라고 있기까지 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왜곡으로 점절된 정치적 이데올로기 상황에서 언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13장에서 이 '지유 언론'에 대한 본질을 동일선상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 자유 언론들이 이미 본질적으로 권력에 포획된 상황으로 심지어 '보수주의'가 아닌 '겉으로만 보수주의 행세'를 하고 있는 정치 세력들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실정이며, 어느새부턴가 언론들이 민주주의를 입에 담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들 자유 언론들, 역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라 자본에 종속된 경우도 많고, 강고한 이익론에 입각해 주주의 이익에 헌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민주적 수호의 대의적 명분 마저 종속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이를테면, 언론인들 사이에 "개인의 이익과 대의를 균형있게 갖춘다"는 완벽하게 자위하는 명분 같은 것들 말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맥락은, 앞선 이란-콘트라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데 있어 동원되기도 하였는데요. 의회의 청문회 조차도 당시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백악관을 보호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노력했고, 일부의 탐사 보도 언론인들을 제외하면 다수의 언론들이 본질적으로 핵심을 파고들어 비판을 가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정부의 앞잡이나 되었던 자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아닌 일개 니카라과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중요하냐는 저변의 논법들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끝으로, 촘스키는 국제 협력 시대의 중요한 협정인 '파리 협정'을 제시하면서 미국이 이를 어떻게 무시했으며, 국제 합의를 얼마나 휴지 조각처럼 여겼는지를 거의 2장 분량의 글을 통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그만큼의 힘과 군사력을 갖고 있는 패권 국가가 효율적으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그 힘을 투사하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괴벨스와 같은 경우처럼 국민을 프로파간다의 노예로 만들어 민주주의와는 다른 체제를 이중 삼중으로 구축하는 것도 물론 현시대에서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민의 존재 가치와 이들의 단합된 응집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도 실상은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직은 많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네트워크 시대에 시민들의 요구와는 매우 상반되게 흘러가는 정ㅊ적 분위기와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기구라고 할 수 있는 정보 기구들이 안보 구축이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무력화 시킬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은 작금의 시대는 어쩌면 우리에게 시급하게 중요한 분기점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있어서 많은 기업들이 하나도 어떠한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로버트 커트너의 언급은 이처럼 중요하다 볼 수 있습니다. 기업들의 지배적인 이익이 민주주의의 강화된 시기에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촘스키도 아직은 권력이 시민들을 두랴워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우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국가의 권력에 대한 그릇된 욕망을 견제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우리, 시민이라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훗날 혹은 가까운 미래에 촘스키 일독을 시작하게 될 수 있는 여러 독서인들은 제일 먼저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유 드려봅니다.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이처럼 얄팍한 서평으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미국의 요구에 고분고분한 권위주의 독재 정부와 자신들의 생존과 독립성, 고유한 주권을 위해 노력하는 민주적 정부, 이 양자에 대한 명확한 미국의 정치적 태도가 이란-콘트라 사건을 일으킨 진정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의 전반적인 대결 구도를 인식한다면, 저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의 인식적 범주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대외 정책, 경제, 국내 정치 등에 있어서 쓸모없는 맹탕이기 때문에, 이를 대체적으로 경멸합니다. 이들은 여기에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경멸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저들의 기본 인식 구조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은 일종의 테크노크라트이자 신자유주의자들 그리고 기득권주의자들이 혼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것은 꽤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세탁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본질을 시민들이 놓치고 있으니 특히 신자유주의적 담론의 확대와 그 이행에 따라 이러한 왜곡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처하기 위해 계속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해야 하는데, 정치적 해결은 미국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며 적의 배신에 의해 무산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런 설득의 근거가 된다

미국은 "중앙아메리카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특히 1980년대에, 이 지역에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가 싹틀 수 있는 가능성을 말살하는 데 골몰했다

자신에 대한 자의적인 무지의 교리는 그 뿌리가 워낙 깊어, 지난 10개월 동안 최대관심사였던 새로운 이야기들은 레이건 행정부가 극적인 전환을 약속한 날부터 즉각 그 효력을 잃어버렸다

레이건 정부 아래서 엘살바도르에서의 사망자 수는 5만 명을 넘었고, 과테말라에서는 근 10만명에 달했다

1982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인해 발생한 2만이 넘는 사망자 (대부분 시민이었던)를 보탤 수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보수주의"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동적인 징고이즘‘, 혹은 그보다 더 심한 용어로 불러야 적당하다. 미국 정치계 내에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거의 없다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국내에서의 위대한 사회 건설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케네디의 "신자유주의적"후예들은 깨닫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의 광범한 지지 아래 적색공포 작전은 노동운동과 정치적 반대를 무력화시키고 기업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선량한 의도‘에 대한 신념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에 대한 미국 개입의 역사기록에도 불구하고 손상받는 일이 없다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동안 영국의 힘을 이용해 영국의 전통적인 세력권을 넘겨받고 있을 때, 영국의 외무성 관리들은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가면을 꿰뚫어 보았다

오늘날 마오이즘과 현대 신지유주의, 신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합 내에서는 자연스런 일이다

즉 미국은 국제법,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연합, 혹은 그 밖의 다른 국제기구와 같은 온갖 허섭스레기와는 상관없는 무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이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콘트라의 우두머리 아돌프 카렐로를 "CIA의 충성스런 병사이자 인질로서, 장점이라곤 코카콜라 판매원이었다는 것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한다

나아가, 온갖 비밀계획에 관한 문서기록과 함께 공식적인 해설 역시 잘 설명해주듯이, 현실세계는 과거의 방식을 따르는 편이나. 그래서 미국이 행해온 개입의 진상이 밝혀진다고 했을 때 그것이 미국 사회 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측 가능하다. 미국의 식자층은, 그들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한, 그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알게 되는 일은 없다

공식적인 견해에 따르면, 국내적으로는 온갖 술수를 다 부리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투기사업에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니카라과는 히틀러식의 국가이다

하지만 그(올리버 노스)가 민주주의에 대한 심한 경멸을 아주 분명히 드러내 보여준 의회증언 이전이라도 하더라도, 그가 민주주의 - 니카라과의 민주주의든 미국의 민주주의든 - 에 대해 염려했으며, 그가 민주주의란 말의 의미에 대해 알고 있다는 증거라든가, 혹은 콘트라 지도부나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혹은 가진적이 있다는 증거가 도대체 있기라도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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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외교는 도덕적인가 - 루스벨트부터 트럼프까지
조지프 나이 지음, 황재호 옮김 / 명인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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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새뮤얼 나이 주니어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고 있는 국제정치학자입니다. 그는 현실 정치와 이론 간에 거의 치우치지 않은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학자로서나 혹은 정치인으로서 이러한 균형적인 경험은 유익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프린스턴을 거쳐, 명예로운 로즈 장학금으로 옥스포드에서 수학하고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됩니다. 나이는 1964년부터 하버드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여 1985년부터 1990년까지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국제 문제 센터의 이사로 경력을 쌓게 됩니다. 뒤이어 1994년부터 1995년까지 당시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제 안보 담당 차관보를 역임하고, 이후 국부부의 공로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헨리 키신저와 달리 국제정치에서 자유주의적인 해결 방안을 추구하는 학자이자 관료로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이 글에서도 간략하게 나오지만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세계에 확장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대외 기조가 자유주의적 정책하에서 국제 무대에서 합의와 신뢰의 구축이라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 다수의 현실주의자들이 공격하는 자유주의적 정책의 성과물이라고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행정부의 도덕적 원칙을 분석해보는 가운데, 조지 W. 부시 시절의 공격적 현실주의적 입장을 천명했던 네오콘의 부류들과 확실히 상반되는 견해를 그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비판과 이러한 인식의 지점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의 노작을 통해 전공자들과 일반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 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이의 이 글이 꽤 의미있는 연구물이라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Do Morals Matter? : President and Foreign Policy from FDR to Trump"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최근에 번역된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제본된 책 중간에 3칸의 흑색 표시가 전 페이지에 걸쳐 너무 도드라지게 표시되어 있어서 가편집된 상태의 미완성본을 돈주고 구매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인쇄소의 문제로 추측되는데요. 구매한 입장에서는 다소 불쾌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자인 조지프 나이는 책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 국제 외교 정책에서의 도덕주의와 관련해, "도덕적 외교 정책은 의도 대 결과의 문제가 아니고, 유럽 계몽주의 전통의 임마누엘 칸트의 입을 빌어, "기본적인 가치들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설사 자유주의적 순진함으로 매도된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도덕적 의무는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외교 정책을 단순히 다른 국가들이 최대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정책과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 글의 7장인 조지 H. W. 부시와 관련된 인식에서. 냉전 시기에 소련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세력균형 상황이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자만심을 제어할 수 있었다"고 언급되는데요. 이처럼 이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외교에 있어서 적절한 세력 균형이 자신들의 국익에 부합되었다는 의견입니다. 더욱이 미소 양국 간에 보유한 핵무기로 인한 상호 확증 파괴 (MAD) 가능성이 역설적으로 40여년간의 번영을 이끌어 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전후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부터 최근의 트럼프의 백악관까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는 CIA와 특수군을 동원해 여러 국가들의 정치에 개입한 것"은 암울한 역사의 한 단락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결국 어느 정도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적 기조가 서로 경직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최종 결정권자(이를테면 대통령)의 면밀하고 예민한 감각이 있어야만 할 텐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조지프 나이는 상황 지능과 감성 지능 등을 이용하여, 각 시기의 대통령들의 공과를 꽤 정밀한 객관성으로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우선 나이의 이 글에서 다른 여타 글들과 비교해, 크게 고유성을 갖고 있는 분석이라면, 프랭클린 루스벨트부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까지 각 대통령의 임기내 정책들과 평가에 대해 나름의 '윤리적 성적표'를 제시하고 부분이었습니다. 대표적인 현실주의자들인 조지 케넌과 미어셰이머 혹은 키신저 등과는 저자인 나이와는 조금 구별되는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하지만 나이가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자유주의적 이상주의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국익과 관련해서는 선후의 판단을 들어 무리가 되더라도 미국에게 유익한 결과물을 안긴 정책들에 대해선 긍정하고 있고, 지미 카터와 같은 경우 진솔하고 도덕적인 대통령의 품성과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당시 국제 외교의 여러 이슈들에 있어서 그저 단순히 순진한 측면만 내보인 카터를 어느 정도 비판하면서 논점에 대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할 지점은 많은 현실주의자들이 공격해 마지않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도덕적 원칙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대체로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최소한의 도덕적 원칙을 갖고 있어야만 미국의 정책적 결정에 있어 일종의 국제적 명분을 얻을 수 있다고 저자는 첨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과거 빌 클린턴 대통령의 보스니아 사태와 소말리아에 대한 외교적 무능에 있어 당시 유럽 국가들이 적잖게 그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반증으로 제시할 수도 있는데요. 자유시장이나 민주주의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일정한 원칙을 강조하는 미국의 지도층과 향유된 권력이 이것을 시시때때로 어떠한 원칙 없이 즉흥적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국제 여론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국제 제도와 그러한 원칙들을 조율하고 결정한 미국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비대칭 동맹들이 미국의 정책에 일희일비하고 심지어는 냉전이 시작된 시기에 미국이 과거의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후에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서 당시 한국 전쟁과 같은 공산주의 세력의 도발에 전혀 망설임 없이 최대한 시급하게 개입하게 되었던 진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국 외교사에 있어 가장 중대한 시점으로 여겨지는 베트남 전(戰) 발발과 미국의 참전과 관련해, 케네디 행정부 부터 존슨 그리고 닉슨 시기까지 후에 제한된 국력을 투사할 수밖에 없었던 냉전시기, 더 빠른 베트남 전쟁에서의 탈출이 그만큼 지연된 것은 저자가 판단하기에도 아쉬운 부분으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닉슨 행정부 시기, 헨리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와의 기적적인 회담과 당시 중공에 대한 미국의 대화 의지가 마찬가지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냉전 종식과 꽤 설득력 있게 양자 간의 연계가 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키신저보다 닉슨이 중공의 개방을 먼저 포착했다는 것은 그만큼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그가 비도덕적인 공작 정치로 자신의 임기를 도중에 끝낼때까지 닉슨은 공산권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갖고 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처럼 각기 백악관의 주인들에게선 그들의 두드러진 개성 만큼이나 참모를 대하는 태도, 각료에 대한 인선, 국민을 재교육시키는 태도라든지, 여론에 대한 입장 등 선출되고 나서의 통치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나이는 대통령들에 대한 사생활적인 부분에서부터 출생과 가족 관계의 분석으로 이 행정부의 수반이 어떠한 도덕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박한 시각이 글 전반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 부분은 이 글의 특징적인 부분이기도 한데요.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당시 존슨 대통령의 비도덕적인 통킹만 사건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개입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고립과 개입이라는 미국 외교사의 주요한 국제 정치적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는 '과거 윌슨 대통령의 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이 베트남 전쟁의 성격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존슨 자신이 주창하는 미국의 '위대한 사회'를 위해 이 베트남 전쟁을 이용했다는 것은 분명 주지된 사실이기도 한데요. 처음에 반대에 입장에 있던 그가 도덕적 원칙을 저버리면서까지 앞선 정치적 술수에 몰입한 것은 그와 미국에 있어 불행한 일이기도 했는데요.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내의 전반적인 반전 여론을 나이는 거의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1950년대 초반의 '매카시즘의 광풍'과도 같은 심각한 국론 분열을 야기시켰습니다. 적절한 예시인지는 모르겠으나 '레이건이 사뭇 중요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카터는 레이건의 케이스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분석하고, 물론 존슨이 카터와는 다른 류의 대통령이었지만 지도자가 최소한의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이거나, 견실한 참모들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 경우에서 어떠한 결과가 초래할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가정이지만 베트남 전쟁에서의 보다 이른 탈출이 시도되었다면 이후 냉전의 양상도 그만큼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로널드 레이건과 관련해서도 이 글에서 몇가지 흥미로운 부분이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우선 심각한 정치적 스캔들이었던 이란-콘트라 사건에 있어서 그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닉슨처럼 마땅한 정치적 후과를 받지 않은 것은 일종의 불공평한 일이기도 할텐데요. 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그의 거대한 업적에 비해 눈곱만큼도 안되는 과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국내외에 아직도 많기 때문에 이러한 대통령의 비도덕적인 개입을 그저 과업으로 넘어가려는 행태라고 생각됩니다.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역사적으로 큰 기여를 한 로널드 레이건의 업적이야 대단한 것이지만, 콘트라 사건에 연루된 모든 자들에게 사법적 처벌을 회피하게 하는 사면권을 임기 말에 쥐어준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레이건과 관련된 글의 6장에서 레이건이 이 콘트라 사건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을 동의했다고 나이가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콘트라 사건은 레이건 행정부의 거의 기밀 사항이 아니었던가요. 이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냉전의 종식과 관련해 레이건 특유의 공갈과도 같은 압박으로 소련을 화해의 장으로 나오게 만들고, 대 소련 정책에 대한 그의 실용주의적인 해법은 충분히 긍정적인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칠레와 그레나다, 파나마 등에 불법적으로 개입하고 동티모르를 침략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을 지지한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그러한 외교적 맥락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미국의 거대한 선명성인 선(善)의 정치와는 사뭇 맞지 않아 보이는데요. 더군다나 조지 H. W. 부시 시절의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생포하기 위해 주권 국가에 불법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한 당시 행정부의 결정에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인정하는 나이의 진술은 역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미국처럼 사활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국가에게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조금 철지난 논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도덕적 관념을 지닌 대통령이 무능한 정책과 무의미한 결단(이를테면 지미 카터 행정부)을 갖고 있었다는 식의 이분법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일 텐데요. 사실 장황하게 글을 썼습니다만, 외교 무대에서 일견 전세계의 일극 국가라 할지라도 도덕적 명분과 본보기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미국과 같은 비대칭 동맹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국가는 자신들의 국익과 다수 동맹들에게 있어서 최소한의 명분을 갖고 국제 체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외교 자체가 독립된 고유한 권리로서 미국이 이를 이끌어 나간다고 공언할 수는 없지만 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으로서 정치적 결정과 관련해, 최소한의 도덕적 함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주의와 자유주의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된 인식을 서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것은 민주주의 혹은 인권과 합의 정신 및 국제적 제도에 대한 신뢰 등을 말합니다.

과거 존 코널리 재무장관은 동맹국들에게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곧 너희의 문제"라고 발언한 바가 있습니다. 일개 재무장관의 오만함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언급하는 것은 당면한 국제적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은 기대를 안고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의 실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혹자는 오바마를 가리켜 "지미 카터보다도 무능한 인사"라고 혹평을 하기도 합니다. 임기 초기에 국민들과 주변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발언을 많이 했던 오바마는 그래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도 많이 비교 되기도 하였습니다. 중동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그의 임기에서 리비아에 대한 신중한 개입과 자신이 주도하는 미국의 국제 정치가 과연 어떻게 외부에 비쳐질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 중동의 민주화에 국제사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견 그의 심사숙고가 꽤 신중하게 보였습니다만 중동에서의 민주화 혁명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정치적 한계로 보여집니다. 나이의 의견대로 오바마의 독트린 자체가 "멍청한 행동은 하지마라"라고 요약된다면, 이후 그의 무능으로 인해 초래된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미국 국내의 정치 상황에서 매우 극심한 정치 불신을 야기시킨 결과물이기도 한데요. 너무나 많은 것을 고려한 나머지 필요한 결정을 적절한 시기에 내리지 못한 그의 우유부단함은 경제적 문제에서 대부분 실패를 맛본 지미 카터와 유사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미국의 평론가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기 자체를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태도 자체가 실로 무의미한 일이다. 그가 평범한 정치인도 아닐 뿐더러, 그의 가슴에 무슨 대의나 선에 대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정치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언급한 내용이 문득 기억이 났습니다. 저자인 나이의 언급대로 트럼프는 스스로 정치나 국제 외교에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전혀 배울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야말로 처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트럼프 행정부의 관료나 측근들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특출나는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짐작대로 자신의 이권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자신의 딸과 사위 등을 통해 이를 증명시킨 바가 있습니다. 트럼프는 왜곡된 포퓰리즘 정치인이자, 신자유주의에 매우 걸맞는 사익 추구의 완성형 인간으로 당시 미국 정치가 도덕적인 가치에 있어, 엘리트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몰락한 상황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한 국가의 무모한 일방주의 만큼이나 국내 정치에 있어 만연된 개인주의와 사익 추구는 거의 도덕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글 초입에 강조되는 도덕적 원칙과 관련해, 현재 미국은 과도한 자유주의적 담론 등으로 인해 시장 자유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를 제외한다면 대체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담론이 전무한 것은 명백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나이가 "미국 국민들에게는 오로지 신자유주의 뿐이다"라고 언급했던 것인데요. 사실 경제적 자유와 이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득세가 설사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독성을 제거할 시간은 그들에게 충분히 주어졌다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필요한 의지는 거의 전무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과거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강요되어 온 그러한 국제 외교 전반이 타협과 원만한 합의를 실종하고 그것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국방력 향상과 방산 업체의 이익 증대까지 이런 주도적인 메커니즘이 40년 이상 미국 사회에서 강화된 것은 익히 주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전반적인 국제 체제가 세계화와 그에 따른 시장 자유를 위해 그동안 산파의 역할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렇게 고착화된 환경에서 나이는 도덕주의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의 실효성을 앞으로 있을 중국과의 대결과 혹여 있을 국제 무대의 무질서를 제시하며 어쩌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힘을 외교에 투사할 수 있는 그러한 정책과 수단들에 있어 미국이 필요에 따라 국제 규범을 어기고 일방적인 군사력을 투입하고 주권 국가에 개입한 역사들을 나이와 같은 정치 이론가들이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그의 아이디어는 거의 유명무실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정책적 결과를 세계의 국가들에게 알리면서 미국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 도덕적 원칙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차라리 한스 모겐소와 같은 철저한 현실주의 논법을 더 연구하는 것이 미국에게 더 유용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에게 도덕적 원칙은 인간성을 규정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권력의 속성에 있어서도 더 나아가 더 많은 국가들의 원리 원칙에 있어서도 이 도덕은 애써 무시받을 정도로 쓸모 없는 것은 아닐겁니다. 이 부분은 역시 나이도 거듭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인 나이는 좀 더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도덕주의적 원칙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이 글이 미국 외교사의 한 영역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였습니다만 더불어 그만큼 한계도 이처럼 명확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게 도덕이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유명무실한 가정으로 전락한다면 이것을 초래한 노골적인 힘의 투사를 현실적으로 뒷받침하는 국방력과 정보력 등으로 화살을 돌려야 할까요. 자신들이 보유한 힘 앞에서 절제를 보이지 않고 쉽게 가려고 하는 백악관 수장의 개인적 특성으로 치부하기에는 미국이 가진 힘이 정말 무시무시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무정부 상황의 국제정치를 과연 민주주의적 합의로 나아가는 것을 미국이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먼저 결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민주주의와 도덕은 서로 긴밀히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오바마 행정부를 다룬 글의 8장에서 나이는 "국제금융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조치는 세계적인 공황과 불황을 막은 결정적인 행동이었지만, 실업률이 증가하는 가운데에서 은행들을 살린 것은 대중들의 불만을 야기했다"고 진술하고 있었는데요. 기존의 국제금융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없이 그저 파급의 측면에서 미온에 방지한 오바마의 결정을 막연하게 존중하며, 한편으론 대중의 불만이라는 언급으로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모양새가 나이의 여러 분석과 평가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었습니다. 오바마가 월 스트리트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국제금융체제가 별반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읽혀져 저는 뭔가 안타까웠는데요. 그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노후 연금 놀이를 했던 CEO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책임이 있는 자들, 어느 누구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을 비평하나 없이 그저 진술로 때우는 것은 심히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대중들이 왜, 어떤 부분에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최소한의 앞뒤 맥락 정도는 삽입해야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가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과테말라, 이란, 그리고 일부 정부들이 전복에 개입했던 외교적 결정들은 윤리적 정당성에 의문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1960년대 이후 전개되어온 깊은 인종적, 이념적, 문화적 분열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외교정책에 있어 진정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국의 이익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도덕성이 외교정책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미국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정책을 생각할 때, 미국의 대통령들은 선한 가치를 표방하는 것과 함께 이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세계정치의 제도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오늘날 세계정부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 통치를 위한 어느 정도의 세계 거버넌스 기반이 구축된 상태이나, 국제사회에서의 무정부 상태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강압과 강제력의 수준은 지역적 선택과 권리를 제한하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이젠하워는 CIA 국장 덜레스가 여러 국가에서 암살 시도를 포함한 은밀한 행동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양극체계의 냉전에서 가능한 한 공산주의 진전을 막아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플로리다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쿠바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베를린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존슨은 ‘위대한 사회‘의 법제화가 자신의 유산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이것 때문에 존슨은 의도적으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전쟁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코널리는 동맹국들에게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곧 너희의 문제"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레이건은 정말로 냉전을 끝냈는가? 그의 언변과 소련을 압박한 군비 증강은 부분적으로 그 결과에 기여했지만, 레이건의 진정한 기술은 공격적인 수사를 실제적인 협상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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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4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터라이프 2021-09-18 21:40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석 연휴 끝나고 한번 연락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