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크업 콜 - 서구는 왜 코로나19에 힘없이 무너졌고, 어떻게 일어설 것인가?
존 미클스웨이트.에이드리언 울드리지 지음, 송대원 옮김 / 따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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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공저자중 한 사람인 존 미클스웨이트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옥스포드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이후, 미국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서 2년간의 근무를 시작으로 경제 분야에서 일을 해왔는데요. 그는 1987년에 이코노미스트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언론사에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현재는 블룸버그 뉴스의 편집장으로 2015년 2월부터 일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ABC, BBC. PBS 등의 방송에 자주 출연하여 대중들에게도 얼굴을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공저자인 에이드리언 울드리지는 현재 이코노미스트 정치부서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데요. 그도 마찬가지로 옥스포드에서 수학하고 최종적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버클리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후, 2009년 7월까지 이코노미스트의 명예로운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영국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여러 비판적인 글을 기고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Wake-up Call"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우는 미국과 유럽의 민낯을 낱낱이 전세계에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그러한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두 공저자는 이 글의 1장과 2장에서 과거 서구 유럽이 어떻게 자유주의를 발전시켜 번영해 왔는지를 먼저 서사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토머스 홉스에 일견 대립되어 보이는 존 스튜어트 밀과 제러미 벤담의 자유주의를 분석하고, 더 나아가 왜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왜 '작은 정부론'을 옹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반을 먼저 분석하고 있는데요. 당시 밀의 자유주의 국가가 개인의 권리 보장이라는 목적하에 일종의 개혁을 단행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가 달성되었고, 이후 자유주의 내부에서 또 어떻게 분화가 되었는지에 대해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통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는가?" 에 대한 해법 찾기로 존 스튜어트 밀의 죽음 즈음에 사회는 정부가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는 식의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고 저자들은 새롭게 밝히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은 독일의 부흥을 이룬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노선에도 연계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공공의 증진'이라는 가치 아래 독일인들이 스스로의 정부 운용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영국과 프랑스와는 사뭇 다른 번영을 이룩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자유주의의 양상은 영국에서 분화되어 정부론에 대한 각국의 다른 양상을 잉태하게 된 것인데요. 이것은 현재 펜테믹 사태에 따른 미국과 유럽의 자유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염병 사태를 기화로 강화된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그리고 프랑스의 극우 포퓰리즘과 만나 그 공포가 더욱 사회 전체에 기승을 부리는 형태로 확산되었고, 이와는 반대로 효과적인 정책으로 방역에 나서고 있는 한국과 싱가포르, 타이완 등의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과 빗대어 '진정한 정부의 역할론'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위기를 경험했던 1920년대의 세계 경제 대공황 당시, 미국의 수많은 엘리트들은 겸허한 자세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많은 이가 정부에 투신을 하게 됩니다. 소위 이 시기는 엘리트주의에 있어서 공익을 위한 사명감이 존재했던 때로 많은 인재들이 당시에 직면한 미국의 문제에 엘리트들 스스로가 소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5장에서 조지 W. 부시가 아라비아말협회 회장을 지낸 마이클 브라운을 연방재난관리청에 임명해 그가 허리케인 카타리나에 대한 정부 대응을 엉망으로 만들게 한 일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이기도 한데요. 미국인들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거대한 정부가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우려가 위기 상황에 정부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겪게 되는 막대한 피해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현 사태에 대한 주요한 관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한가지 깨닫게 된 점은 시대의 변화에 발을 맞추지 못한 자유주의가 점점 더 공익에 멀어짐으로써, 정치 불신을 넘어서 기득권 정치를 증오하게 만든 포퓰리즘을 초래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 글의 1장에서 희화화 되고 있는 "가난한 뉴욕 시민이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받는 단 하나의 방법은 부유한 시민 가까이서 기침을 해대는 것"이라는 이 해방된 신자유주의의 논법이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요. "소위 부유층들은 국가가 법과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동안 그들의 세금이 최하층 사람들에게 허비되고 있다고 불평"을 해대는 상황에까지 이릅니다. 어떻게 보면 콜린 크라우치가 경고한대로 "신자유주의와 포퓰리즘이 화해하여 밀착하는 날"이 허무맹랑한 상상으로 끝나지 않을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미국의 여러 인사들과 유럽의 정치인들은 이 코로나 사태에 대한 원인으로 베이징을 지목하면서 그 분노를 중국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한에 대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5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이러한 "비난"만을 일삼은 도널드 트럼프와 보리스 존슨은 정작 중요한 방역 정책에는 소극적이고 거의 손을 놓았던 점에 공저자들 역시 이들에게 낙제점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세계의 경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2008년 뉴욕 발 금융위기에 대해 당시 네오콘들과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그들의 잉여 자본으로 인해 미국이 그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과 마찬가지인데요. 당시 미국인들의 무분별한 신용 생활을 중국의 저축금 때문이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바로 미국과 영국은 이러한 소모적인 비난에 중요한 시간을 허비하고 결국 펜데믹 파국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정부의 크기 그리고 무엇보다 무기력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한가지 희망을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이러한 펜데믹 상황에서 권위주의적인 국가들 보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이 더 나은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인 통제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 중국과 같은 케이스와는 달리 민주주의 국가들, 특히 서울이나 타이베이와 같은 세계화 된 도시가 파리나 런던보다 얼마나 안정적으로 대처를 하고 있는지 찬사와 함께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서구인들의 무지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몰이해를 강조하기 전에 지금 미국과 유럽의 근본적인 문제는 민주주의적인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통제를 백안시하고 오히려 공공의 이익이라는 담론을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정치학적인 관점으로 다시 풀어본다면 과거 평등이 매우 급진적인 사상으로 취급을 받았듯이 신자유주의와 노골적인 기득권 정치를 비판하고자 하는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일부 엘리트 계층과 그것에 부역하는 다수 지식인들의 터무니없는 우려는 이러한 위기 상황임에도 축적된 불평등에 대한 일종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자유를 침해한다는 담론'으로 불을 피우면서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이 특별한 케이스로 들고 있는 싱가포르의 사례는 유럽의 전철을 전혀 밟지 않는 고유의 정치체제 물론 그들의 행보가 전부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례로 취급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주목할 만한 것으로도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과거 유럽은 자유주의의 전통 뿐만 아니라 공공선에 대한 함의도 중요하게 여겼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계몽주의적 전통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평등의 대담한 출현도 바로 유럽의 토양에서 잉태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공화주의적인 토대이며, 비범한 사회계약의 출현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말할 수 있는 서구 민주주의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전부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의 펜데믹이 미국과 유럽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에 의해 괄시받은 민주주의를 이 참에 회복할 명분도 서구 유럽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훌륭한 정치적 토양을 갖고 있는 유럽이 전염병 사태만으로 스스로의 운명에 대못을 박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해야될 일을 하는 정부의 책무를 사악한 것이라 몰고가서는 안되는 것이겠죠. 아마도 밀턴 프리드먼이 죽기전인 2004년에 중대한 정치적 변모를 스스로 인정하게 된 것은 바로 정부가 갖는 이런 딜레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결국 지금 유럽의 가장 큰 문제는 공익을 위한 통제에 따른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수수방관하다 극우 포퓰리즘에 따른 제2의 파시즘을 도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미 유럽은 중대한 기로에 와 있다고 보는 것이 어찌보면 타당한 논리인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이것이 음모론으로 끝나길 바랄 뿐입니다. 


-글 중간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자신들 스스로가 보수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고 나오는데요. 특히 저자들은 밀턴 프리드먼을 뭔가 철지난 낭만주의자로 보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과연 그와 같은 자유지상주의자가 낭만 정도로 치부될 수 있을지는 뭔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19가 다시 정부를 중요한 존재로 만들었다. 정부는 다시 강력해졌을 뿐만 아니라(대단한 힘을 과시했던 기업들이 정부의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보라), 절대적으로 필요해졌다

비록 중국이 코로나 19와 관련해서 미국보다 전반적으로 잘했지만,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중국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다

물품을 나라 곳곳에 운반하기 위해 고속도로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군산복합체가 필요했다

그때쯤에는 자유시장이 격퇴되었다고 말하는 게 안전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이미 오랜 전에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한 힘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세계경제를 결딴내 놓고도 구제받은 은행가들 같은 세계 엘리트에 대한 분개였는데, 특히 그들이 실패를 하고도 더 좋은 일자리를 얻는 일이 되풀이되는 실태에 대한 분노였다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기득권층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고 우리의 번영과 안전은 고스란히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서구는 이런 조치들을 무시했다. 얼마든지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바이러스를 이주민 탓으로 돌렸다

또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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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7 1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혹시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책 중에
베타라이프님 기준으로 별 넷 책 추천 좀 해주실 수 있는지요? ㅎㅎ
전 안희경님의 오늘부터의 세계 정도도 좋았습니다. 유현준 교수의 공간의 미래도 나름 건축학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베터라이프님 추천 책도 읽고 싶어요,

베터라이프 2021-08-07 22:12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초딩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공저로 참여한 ˝코로나 19 자본주의 모순이 낳은 재난˝ 을 읽어볼까 하는데요. 요즘 핫한 우석균 교수도 집필진으로 참여해서 괜찮은 모양이더라구요. 캘리니코스가 신자유주의에 매우 비판적인 사상가라 뭔가 그림이 그려지기도 해요. 그외에는 제가 읽었던 코로나 관련 글들은 여기 서평이 다입니다 ^^; 참, 샹탈 무페가 코로나 관련 글을 쓸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어떻게 된건지는 모르겠네요. 만약그렇다면 정말 흥미로울 것 같은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번역본이 바로 나올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샹탈 무페의 관련 글은 영문 기사로 본 것 같은데 찾아봐야겠어요. 제가 착각한 것일수도 있어요 ^^;; 그리고 지금 이 책도 유럽의 현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라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것 같아요!

초딩 2021-08-08 09:5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님!!!
이렇게 종종 책 자문 구할게요~
저도 짧지만 책 언급하면서요
시원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