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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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조르지오 아감벤은 카를 슈미트의 '예외 상태' 연구로서 그리고 민주주의적 삼권 분립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는 어느 지식인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요. 과거 역사에서 무솔리니를 몸소 체험한 이탈리아 인으로서 이러한 그의 믿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물론 아감벤의 이런 정치적 신념을 차치하더라도 현재 세계 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고 봐야 할 텐데요. 작고한 움베르토 에코와 더불어 전세계인이 그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미셸 푸코와 발터 벤야민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기반으로 현재에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해박한 분석을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감벤은 여러 외신들을 통해 전세계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분석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는데요. 이탈리아 내에서도 그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었고 여기에는 슬라보예 지젝까지 일정 부분 동참하기까지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유와 인권의 측면에서 각국의 봉쇄 정책이 씁쓸한 뒷맛을 남길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아감벤이 인문학적이고 정치사회적인 비판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 것이 지금 소개할 이 책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글과 관련해 구글 검색으로 원전을 찾아보려 했지만 정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아감벤의 이 책은 2020년 5월 경부터 2021년 1월 경까지의 짤막한 시론을 모은 글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서두에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추천사가 있어서 내심 반갑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아감벤의 일관된 논지와는 별개로 그가 2020년 10월 이후에 같은 맥락으로 글을 썼다면 어조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최근에 그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저 역시도 이 책을 다른 글보다 좀 더 꼼꼼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아감벤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점은 "생존 외에 다른 인류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를 명확히 대변한다 생각합니다. 그는 초지일관 작금의 과학 기술주의에 대한 맹신으로 주도되고 있는 각국의 사회 격리와 이를 바탕으로 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헌법의 명령 없이 제한하게 될지도 모르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파시즘의 나치의 학살자 아이히만을 언급하면서까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어떤 측면에서는 너무 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많은 정권이 소위 '공중 보건'이라는 핑계로 권위적인 테크노크라트 정치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경계를 가질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연상시키면서도 한편으론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적절히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우려를 클로드 르포르 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인간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도 희생해 본 적이 없는 미국과 프랑스'와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미 전체주의의 경험을 갖고 있기에 아감벤이 이탈리아 인으로서 우려하는 바는 지극히 온당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에밀 뒤르켐이 오래전부터 분석해 왔던 이런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전체주의적 종말을 그려보지 않더라도 일말의 정치사회적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시민들을 위해 먼저 선행적인 고찰을 해야만 하는 지식인의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전방위적인 펜데믹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에 대한 냉엄한 질문 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보건 관료들과 의료진들에 대해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일종의 정치사회적인 헤게모니로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분명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문학의 쇠퇴와 종교가 과학 기술의 맹종을 견제하는데 실패한 부분을 우려스럽게 보기도 했습니다만 인류가 무분별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끝내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의 기본적인 우려대로 기술 과학이 민주주의나 보편적인 인권 및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되는 것은 명확하며, 의학 전반이 인간성과 도덕적인 의무를 저버리고 단순한 수단화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이를 견제해야만 할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매번 사회에 옳은 결과만을 가져다는 것은 아니며 이들이 사회 전반의 비판적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때 파시즘의 준하는 정치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이것을 음모론이나 과도한 회의주의라 공격할 수도 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두고 성찰하는 것 또한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비판들 가운데 아감벤은 특히 법학자들에 대해 더욱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삼권 분립의 가치를 사실상 훼손하는 행정부에 의한 입법부를 대체하는 긴급한 수단들이 처방되는 지금의 상황을 법을 전공한 많은 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에 대해 일정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는데요. 여기서 그가 히틀러 시대의 카를 슈미트를 오버랩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정 부분 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 보는 듯 했습니다. 이와 같은 예외 상태를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법률학자들의 침묵이 아감벤의 의견대로 도덕적 인식의 종말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와 시민이 필요할 때 이상하게 입을 닫는 지식인들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 '바이오 보안'의 정치가 시민을 관리하는 정부들의 손쉬운 정치적 획득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지금과 같은 '중요한 보건 위기'의 시대에서 인문학 분야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있는 지식인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최근의 아감벤에 대한 논란은 기자의 양심을 망각한 일부 언론인들에 의해 과도화 된 측면이 있습니다. 공중 보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충분한 함의를 갖고 있음에도 이를 언론이 반사회적 논법으로 과장해 온 것은 일개 시민 대 언론의 비균형적인 힘의 논리를 일견 떠올리게 하는데요. 아감벤과는 약간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장 지글러 역시 유사한 고초를 겪은 바가 있습니다. 다행히 프랑스나 영국의 많은 언론들이 최근에는 공중 보건에 대해 균형잡힌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 역시도 부분적으로는 봉쇄에 대한 자유와 개인의 기본권의 제한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마땅히 헌법의 제한을 제외하고 이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에게 자유라는 가치는 충분히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현대의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이 민주주의의 확대와 더불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 증진에 있어왔던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런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나 독재와 공존할 수 없음은 확실합니다. 이에 펜테믹 사태에 따른 각국의 정부가 보여온 보건 정책에 대해 자신들이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마땅히 필요해 보입니다.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성화 된 의료 과학은 이단과의 불협화음이 있다

그렇게 개인의 두려움, 집단적 패닉의 악순환의 고리를 통해 정부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안전에 대한 욕구를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역사는 모든 사회 현상에 정치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또 다른 부류는 법학자들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삼권 분립의 원칙이 훼손되고 행정권이 실질적으로 입법권을 대체하는 긴급 명령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경우를 오래전부터 익숙히 봐 왔다

나는 분명 도덕적 명분을 위해 뒤따르는 거대한 희생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들에게 나는 나치의 장교 아이히만을 말해 주고 싶다

거짓으로 밝혀진다 해도 반드시 참이어야 하는 거짓은 사실처럼 여겨질 것이다

여전히 다수의 이탈리아인이 은연중에 사용하는, 문화 곳곳에 퍼져 있는 반유대주의에 동조하는 유대인 박멸이라는 소재를 전염병 사태와 같은 선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까지 음모와 작당 모의, 비밀 조직이 만연했던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 보건 긴급 사태를 향한 비판적 시각을 음모라고 완고하게 치부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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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6-25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존 외에 인류가 추구하는 다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

오늘도 베터라이프님의 서재와 왔다 얻어 갑니다.

베터라이프 2021-06-25 10:46   좋아요 0 | URL
부족항 글 항상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감벤도 역시 바우만과 비슷한 어조였는데 분명 희망은 있겠지요 ^^;;

chaos 2021-07-09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불편했는데 아마도 아감벤의 논의가 인간 혹은 인류라는 이야기로 돌아가기에 그 어디서도 자본주의비판 또는 이 문제에 대한 계급적 관점은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베터라이프 2021-07-09 01:59   좋아요 0 | URL
현재의 펜데믹 사태로 인한 사회 부조의 불확실성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행을 주요한 관점으로 아감벤이 다루고 있는데 쓰신 글이 어떤 관점으로 비판을 하시고 있는지 저로서도 이해가 안되네요. 혹여 쓰신글을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유럽과 미국의 의료 붕괴와 그러한 시민들의 고통은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이부분을 아감벤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chaos 2021-07-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연한 신자유주의 비판은 아감벤 아니라도 널려있죠. 한데 현재 팬더믹과 관련하여 정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인류 일반인가요? 정치경제학 비판이 빠진 자본주의 문화비판이란게.. 신자유주의 비판이라셨는데 신자유주의 극복 대안이 인류의 자유인가요?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인가요?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끔직히 싫어하겠네요? 아감벤은.. 현학적인 말투로 유럽의 현자인듯 글을 써서 도대체 글을 읽고 무얼 생각해 볼 수 있는건지 전혀 모르겠던데요.

베터라이프 2021-07-09 13:24   좋아요 0 | URL
종래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그저 막연한 비판들로 채워져 있다 생각하시는지요? 아감벤은 이 글에서 펜더믹 사태로 인한 정부의 대응과 결과물에 대해서 파시즘의 그것과 비슷한 관점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것의 동의 여부를 떠나 현재의 펜데믹으로 인해 얼마간의 공공 의료가 준비가 안된 것은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한 것은 확실합니다. 반대로 님께 되묻고 싶은것이 자본의 축적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론적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인류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인간답게 영위하는데 신자유주의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적 안전망과 부조, 공공성 및 도덕적 근거의 사회적 책임 모두를 앗아간게 신자유주의인데 이것 조차도 긍정을 하시지 않는다면 달리 드릴말씀이 없네요.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아감벤 역시 민주주의의 확대와 좀 거 건전한 정치 인식을 주장하고 있고 이에 선결 조건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개선 즉, 공공성을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바우만이 말한대로 모두가 모두를 책임지는 일종의 미래지향적 목표라도 가져야하는것이죠. 이렇게 후기 자본주의 상황에서 극심한 불평등을 초래한 것은 신자유주의이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사회가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권력의 균형추가 이미 너무 기울어진 상태라 기득권과 부유층의 기존 세력화에 일반 시민들이 비벼볼 틈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단 아감벤의 이 글은 정부의 공중 보건 개입에 대한 권력의 남용을 우려한 글로서 이 부분은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이해하고 있는것이 좋겠죠. 일반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런 비상 대책은 그 후이든
어떻든 간에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아감벤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슈미트의 과거를 떠울리며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철학자의 양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지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오로지 시민이 더 많은 사회적 변별력을 갖추고 어느 정도 실질적인 정치조직화 선행되어야 하겠죠. 지금처럼 엘리트 위임 방식이 아니고요. 이 모든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저의 글 논조가 딱딱하실수 있는데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핸폰으로 쓰다보니 너무 두서없이 쓴 것 같아 송구하네요.
 
미중 갈등의 구조 - 금융 위기 이후의 헤게모니 경쟁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41
공민석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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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금융 위기 이후의 미국 정치와 오늘날의 미중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특이하게도 학부 시절에는 국사학을 전공해 이 분야에는 특별히 접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후 모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수료하고 자신의 연구 방향을 바꾸게 되는데요. 정치학과 경제학을 일반적인 제도권에서 수학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개인적으로도 궁금하지만 한편으론 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은 스리체어스가 '북저널리즘'이라는 사회과학 시리즈물로 지난 2019년 8월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이 책의 주된 관점을 간략히 소개해 드리자면 오늘날까지의 미중 관계에 있어서 특히 금융과 통화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인식과 갈등 등을 중점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혹여 군사나 대외적인 측면에서의 해석을 기대하신 분들이라면 이 점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칭화대의 옌쉐퉁이 자신의 글인 '2023'을 통해 중국이 미국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는 2023년 이후부터가 본격적인 미중 관계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분명 대학 강단에 있는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1997년 이후 가파르게 상승한 자신들의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아주 큰 자신감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조슈아 쿠퍼 레이모의 '베이징 컨센서스'를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중국 경제의 발전이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세계화에 기반해 얻은 이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론을 절대 무시할 수가 없을텐데요. 저자가 1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미국은 막대한 쌍둥이 적자를 자의반 타의반 감내하면서 과거 일본과 대만 그리고 한국에 제공했던 것처럼 자국의 시장을 중국에 개방한 결과물로서 중국의 번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이익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미국과 중국의 경제 갈등의 주요한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수출 달러의 환류 메커니즘"이 여실히 양면성을 띠고 있었으며, 중국과 일본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에서 막대한 무역 흑자를 거두면서도 바로 이 수출 달러를 미국에 재투자 하는 등의 순환구조가 무조건적으로 미국에게 해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요. 미국은 다른 여타 국가들과는 달리 외환 보유고를 유지하고 관리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즉, 이러한 경제적 현실은 2006년부터 일정 부분 미국과 미국인들의 과도하고 방만한 신용 생활을 초래한 원인이었으며, 이것을 아직도 "중국의 막대한 저축과 그로 인한 미국의 자본 수출"로 세계 금융 위기의 원인을 찾는 미국 내의 경제학자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저자는 이 막대한 저축과 자본 수출에 대해 일반적으로 개관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글의 구조를 보았을 때,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가 순전히 중국의 자본 수출에 있었다고 다소간 오해할 소지는 충분히 있어 보였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당시 미국의 거대한 거품은 신용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신용 기관에 일차적 책임이 있고 더불어 주택 시장의 거품을 이용해 호주머니를 채우려 했던 각 투자 은행들의 면밀한 주도적 행위에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반성을 하지 않고 그 반성을 중국에게 미루는 행위는 외환 보유고 따위는 신경쓰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메리트를 보유한 국가기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이 수출 달러 환류가 지속되지 않았다면 미국 시장 내부에서 건전성을 찾기 위해 일말의 노력을 기울였을 수도 있겠으나, 이미 폴 보커 시기 이후부터 막대한 통화 발행을 거침없이 해왔던 미국으로서는 그저 가정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1984년의 일본과 2009년의 중국에게 그들의 통화를 절상 시키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은 헤외에 존재하는 막대한 달러들에 대한 통제력을 손에 넣기 위한 방편이었음은 이미 익히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저자는 양국간의 이러한 경제적 혹은 금융 흐름의 과정에서 중국이 자신들의 통화에 대한 관리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미국 당국의 대결이 트럼프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와 배타적인 외교 관계를 기반으로 일본과 한국 그리고 독일과 같은 동맹 관계에도 균열을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의 패착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을 "미국의 TPP 탈퇴"를 꼽고 싶은데요. 중국이 미국의 이러한 아시아 지역에서의 대외정책 수정으로 이득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내의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이원화 된 대외 정책의 기조가 더욱 강화된 측면이 있으며, 이미 중국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아세안 국가들이 중국의 남중국해 농단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연유에 이 TPP 탈퇴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의 전임 정부였던 오바마 행정부의 이 아시아로부터의 회귀 Pivot to Asia 는 일정 부분 대만 문제와 해당 지역의 균형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나, 이를 트럼프가 상당 부분 철회함으로써 오늘날의 대만 해협의 불안정성과 같은 문제가 초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미국은 중국의 고삐를 어느 정도 조일 수 있었지만 중국의 일대일로에 따른 AIIB와 관련된 무력한 외교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의 미중 관계에 있어서 많은 전문가들이 그동안 중국의 대두에 따른 미국의 패권 약화를 점찍었지만 아직도 미국이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한 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외 균형 전략 Offshore Balancing 에 따라 스스로를 아시아 태평양 국가로 여기는 미국이 중국의 지역 패권국에 오르는 것을 넋놓고 수수방관하게 될 것이라는 일부의 예측은 그저 상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는 동아시아 지역에 한해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만 우리와 일본은 말할것도 없고 대만과 필리핀 또한 중국의 대두를 원천적으로 바라지 않는 상황입니다. 안보와 경제를 중국이 미국을 대신한다? 이는 있어서는 안되고 일어나서도 안되는 일이죠. 사실 저는 그동안 미국의 외교와 정치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습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국가 이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 독재국가가 감히 민주주의 국가들을 제 영향권에 두려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국가 체제론에 입각해 고려해 본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희박한 예측이라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포기하고 얻을 수 있는 국익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더불어 중국의 대만에 대한 무력 점령 조차도 미국이 용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마당에 중국에 대한 주변국들의 원초적이 거부감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익은 자신이 먼저 안정적으로 국체를 보존할 수 있어야 그 이후 달성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직접적인 미중 대결을 저로서도 원치는 않습니다만 현재의 질서를 타파해야만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앞으로의 10년이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임인 거의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아시아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동아시아 지역에서 동맹 관계의 청산이나 미군 철수 같은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현실화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은 외환 보유의 부담에서 자유로웠고, 상당한 규모의 국제 수지 적자가 발생해도 긴축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적자로 인한 달러 가치 하락이나 인플레이션 등의 비용을 다른 국가와 분담하거나, 다른 국가에 전가하면서 국제 정치경제 질서를 불안정하게 하고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유자하는 한 미국은 인플레이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필요에 따라 통화 발행량을 증가시키고 외환 보유의 제약 없이 국제 수지 적자를 누적할 수 있었다.

미국이 동아시아로부터 상품을 수입하고 그 대가로 달러를 지불하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 달러를 다시 미국의 금융 시장에 투자하는 수출 달러 환류가 미국의 통화 금융 권력이 유지되는 핵심 메커니즘이 됐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미국 중심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하에서 발전을 도모한 서독이나 일본, 동아시아 신흥 공업국들과 달리 국제 관계에서 근본적인 힘의 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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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24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중간의 역학관계를 잘 알면, 미중일한 유럽을 넘어 전세계적인 흐름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베터라이프 2021-06-24 16:31   좋아요 1 | URL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전세계 코로나 때문에 여러 대결 구도와 맞물려 미중간의 관계 재설정이 초미의 관심사죠. 부디 이들이 평화롭게 정리되길 바라지만 걱정이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국가 의무의 한계
허버트 스펜서 지음, 이상률 옮김 / 이른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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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백과전서의 디드로와 약간 다른 성격이지만 19세기의 허버트 스펜서 역시 다방면의 학문을 섭렵하여 당시 다양한 주제의 접근을 통한 학문 기여에 이바지 한 사람입니다. 이에 위키 백과에서는 20세기에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을 버틀란드 러셀이라 규정하고 있기도 한데요. 후자인 버틀란드 러셀의 명성을 고려했을 때, 이와 견주게 되는 스펜서의 학문적 성과를 과소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다만, 스펜서는 생물학적인 다윈주의에 심취해 이를 바탕으로 사회학에서의 ‘약육강식‘을 옹호했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위치해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사실상 도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 인물로 악명이 높기도 한데요. 특히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대거 인용됨으로써 스펜서 본인에게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언급하려 합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할 이 책은 허버트 스펜서가 집필한 ‘윤리학 원리‘의 국가론 부분을 발췌 편집해 후에 놓은 그의 논문인 자발적 개혁을 함께 실어 국내에서 편역한 논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영국이나 미국에 따로 원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임의로 만들어진 복잡한 편역본이 국내에 출시된는 것처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역자 역시 국내에서 스펜서가 상당한 악명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특별히 옹호하기 위해서 스펜서가 자유방임주의자 보다는 ‘자유주의자‘에 가깝다고 평가를 하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 18세기의 계몽적인 자유주의의 전통을 고려한다면 일반적인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마땅히 보장받게 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인들의 활동은 충분히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당시 유럽이 큰 변화의 길목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스펜서가 이 글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듯이 ‘산업개발‘에 따른 국가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소위 ˝수요와 공급에 따른 자연스런 이익 활동을 인위적으로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스펜서는 아마도 시장의 이러한 활동 구조 자체가 흡사 자연 상태의 규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여겼던 듯 싶은데요. 전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20세기에 넘어와 시장 자유에 대한 강력한 옹호를 내비쳤으며, 이것은 후에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상적 토대 혹은 사상적 기반‘이라는 맥락으로 어떤 검증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사실 스펜서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공정한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동등 자유의 법칙‘을 이 글에서 광범위하게 논증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과연 저런 맥락에 맞는 사조인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 없는 비교라고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즉, 이러한 스펜서에 대한 맹목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용은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의 사례와 유사하게 본인에게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글의 초입부터 스펜서는 ˝동등 자유의 법칙˝을 논하면서 모든 개인들의 공정한 자유,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주장입니까. 다만, 경제학의 기조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논법으로 강화된 현재의 우리 상황은 스펜서의 저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진 부유층과 기득권들의 자유가 어찌 일반 시민들의 자유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저들은 능력주의의 강화라는 일환으로 자신들이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된 연유에 이론적인 방호막까지 갖추지 않았습니까. 능력주의의 인식적 기반에 따르면 개인의 성공 여부는 오로지 각 개인들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며, 그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진정한 사회의 진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서 이 동등 자유의 법칙을 생각해보면 당시의 스펜서는 이 동등한 자유를 해치는 원인을 아마도 국가라는 개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공화주의 정부라 할지라도 국가가 전쟁에 돌입하게 될 경우 이런 개인들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전쟁의 상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가 본연의 사회와 시민을 보호하는 기본의 의무를 떠나서 전쟁 상황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자유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여겼던 듯 싶습니다.

따라서, 스펜서는 국가의 기본적인 목적은 ˝그 구성단위들의 복리˝로서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정치 권력을 소유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정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연계되면서 그와같이 인식되는 것에 저로서는 크게 반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스펜서 역시 이미 사회구조상 권력의 차이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그가 앞으로의 산업 개발 시대를 다소 예측하면서도 시장 지배의 관념과 부의 편중을 미리 감안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문제를 너무 과대평가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19세기 이후에 그가 말하는 완전한 산업 개발 시대로 유럽이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의 명분만을 찾는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됨으로써, 그가 그토록 경고했던 국가의 전쟁 행위가 반대로 제국주의 시대에 무차별적으로 발생한 것은 너무 극심한 국가 체제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스펜서는 이러한 국가론에 대한 홉스의 소극적 인용을 통해 국가 자체의 비효율성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에 따른 낭비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한데요. 물론 기본적인 비용의 활용 측면에서 전쟁의 수행 보다는 자신이 피력하고 있는 동등 자유의 법칙을 위해 쓰이는 것이 논증으로 보아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제가 언급한바대로 이 산업 개발의 잉여 생산품의 문제가 결국 제국주의의 총구를 앞당긴 결과로 나타난 점은 그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라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스펜서의 정치 인식 역시, ˝정치인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시민이 그의 소득에서의 공제를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후에 이러한 주장의 기반은 ˝각각의 시민은 살고 싶어하며, 그 것의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하게 살고 싶어한다˝는 3장의 인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그는 정치 자체가 세금 징수가 얼마나 저항 없이 혹은 전혀 생각지도 않을 정도로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행해질 수 있느냐에 정치의 정당성이 달려 있다 여기고 있으며 이것을 국가로 확대해서 분석해 보면 국가가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이외의 비용 청구를 시민들에게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설될 만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너무나 낭비하는 비용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스펜서는 일관되게 하고 있었는데요. 국가를 온존시키는 사회계약적 측면에서 아무리 그 존재의 필요성이 최소한의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국가 자체가 효율적인 측면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의 광범위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이를 무슨 복지 국가의 논법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조차도 현대의 국가 개념은 너무나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민 각자가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히 살고 싶어한다는 앞선 주장의 핵심은 ˝모두가 각자를 위해 지켜야 한다˝는 주요 맥락과 더불어 국가의 존재 필요성은 큰 틀에서 옹호될 수 있도록 반증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스펜서가 국가의 비효율적인 측면과 무리한 전쟁 행위 자체에만 요점을 두고 이를 비판하면 비판할 수록 국가의 필요성은 다른 측면에서 강조되는 것과 유사한 논리 체계가 진행된다고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스펜서는 사회 진화의 측면에서 국가 스스로가 호전성이 쇠퇴하고 산업주의가 상승하게 되면 수많은 계약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긍정적이 변화를 초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도 한데요. 많은 시민의 결사체와 같은 인식을 통해 시민들이 스스로의 자결권을 얻게 된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국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시민들이 각자의 의회에 호소하고 단체를 결성해 일종의 압력 단체 수준으로 진보하게 된다면 이것 자체가 스펜서가 옹호하는 시민사회적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가지 제가 동의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노동자들의 이익 단체화에 대해선 사실상 그는 반대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노동자들의 궤멸적인 주장이라고 수식되는 일련의 행동들이 사회주의에 물들은 파괴적인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를 조금 소급해 이해해 본다면 스펜서는 노동의 문제 자체가 시장의 문제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를 의회에 호소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즉, 스펜서의 일관된 정치 영영의 한계 짓기는 이처럼 위험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18세기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학 진보와 인간 삶의 전반적인 향상 등) 주장과 논증이 이상하게 상반되는 부분도 많아서 오해와 원용의 괴리가 크다는 점을 여기에서 밝혀두고 싶습니다.

최종적으로 스펜서가 인식하고 있는 국가론은 실제로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국가가 수행하는 그 밖의 활동 중에서 한 가지 종류는 몇몇 개인들의 자유를 다른 개인들의 동일한 자유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제약하는 활동 항목에 들어간˝다는 주장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이 동등 자유의 법칙에 따른 맥락은 다음에 ˝공공 지출로 얻게 되는 이익이 세금을 내는 모든 이들 사이에 골고루 분배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이익이 공정한 사회 질서라는 근본적인 원칙과 모순된다는 것˝의 인식도 그가 주장하는 공정한 질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6장 후반부에서 ˝동정심으로 인해 만일 우리 자신이 겉보기 만의 ‘사건의 시비곡직‘이라는 틀의 위험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그가 말하는 공정의 의미가 어떤건지 다시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진화론의 논법은 실로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능력주의의 해악보다도 더 심대한 것이며 사실상 사회 전부를 파편화 시키는데 이바지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더 논의해 볼 문제겠지만 ‘복지 국가 혹은 사회 부조‘에 대한 전반적인 이 사회진화론의 공격은 시민들을 오도하고 체제 전반을 간편하고 손쉬운 쪽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공익에 대한 반대와 공격 그리고 부조에 대한 몰이해를 양산시켜 시민들 스스로가 이를 공격하게 하는 데 이바지해 왔습니다.

끝으로, 역자의 스펜서에 대한 약간의 다시 읽기와 다소 주장과 근거가 상충되는 스펜서의 논법들이 그를 일정부분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는 사회진화론에 심취한 인물이었으며, 그런 토대로 진행된 결과물이 ‘엄연한 사회 진보‘라고 인식했으며 그것이 설사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의 맥락이라는 절묘한 길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와 개인의 논법으로 인식된 연계였으며 따라서 그런 한계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시민들은 분명하게 사회 부조에 대해 긍정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함의 역시 분명한 형태의 주장으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즉, 사회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사회의 파편화는 실로 위험할 수준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이를 시민들이 망각하게 된다면 사실상 사회 전반이 ‘엘리트 과두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고도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시장 경제에 대한 우월적인 예외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국가 전반을 거리낌없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삼 대니 로드릭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동침의 한계가 결국 파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의 생명과 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다

모든 사람이 정치 권력을 소유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정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를 원시적인 유형의 군사독재로 변형시키는 게 필요한 것은 계속되는 전쟁뿐이다

실제로 공정한 제도의 성공적인 확립고 그 타당성을 증명하기 전에는 조롱 받는 것처럼 말이다

각각의 시민은 살고 싶어하며, 그것도 그의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하게 살고 싶어 한다

국가의 통제력이 제한된 영역안에서만 올바르게 행사될 수 있다는 학설은 완전히 발전된 평화로운 산업 사회 유형에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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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정병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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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영남대학교 정병기 교수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포퓰리즘 연구를 해오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는 문학에 있어서도 시집을 발표하는 등 꽤 다방면의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전반적인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꽤 원론적인 개론서라 할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이래로 포퓰리즘을 연구한 해외 학자에 대한 연구 결과도 요약해서 친절히 소개하는 등의 일반 독자들에도 꽤 유익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포퓰리즘‘과 ‘포퓰러리즘‘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포퓰리즘에 대한 서평을 많이 썼기에, 다른 서평에서 별다른 비판없이 포퓰리즘을 ‘대중 인기 영합주의‘로 써왔던 점은 저의 큰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카스 무데는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에서 현재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좌절한 수많은 시민들에게 파고 들었는지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도 포퓰리즘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견고하지 않은 약한 측면을 갖고 있어서 민족주의와 인종 혐오, 배외주의 등에 숱하게 결합하는 등의 일종의 그 폐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포퓰리즘 자체를 사회학 내에서의 고정되고 인식되는 학문의 범주로 넣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 왔는데요. 포퓰리즘 현상 자체가 학자들 사이에서 잘 규명이 되지 않았고 ‘시민 대 엘리트 기득권 정치‘를 구도로 거의 기존의 정치 체제를 불신하는 등의 파행적 언행들이 흡사 반정치의 논법과도 유사해 보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이 포퓰리즘 정치는 이 글 3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소위 이들 정치 세력이 집권에 성공하게 되면 기존의 정치적 입장은 사라지고 체제에 대한 대부분의 강경 발언이 사라진다는 점은 포퓰리즘 정치를 현격한 정치 현상으로 인정해야 될지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는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그토록 현 체제와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해댔으나 그가 기존 시스템에 들어와서는 특별히 엘리트들과 각을 세운일이 없었다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의견을 피력한 바가 없었고 임기 중에는 오히려 월스트리트와 별 문제없이 잘 지내왔다는 점에서 이 포퓰리즘적 정치인들은 오로지 권력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와 시민들을 이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포퓰리즘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범은 시민들이 이들에 대한 엄격한 분별력을 갖추는 것 일 텐데요. 그러므로 토크빌과 듀이의 경고는 이처럼 중요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여겨집니다.

또한, 4부에서도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인종적 선동과 혐오를 방관하고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데 비슷한 역사와 보편성을 띠는 동일 민족의 민주주의적 함의가 중요하다고 인식한 유발 하라리의 입장을 차치하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 유입된 이슬람인들의 노동력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해 왔으면서도 이제는 다른 말을 하는 정치인들의 논법은 유럽의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발언일 텐데요. 이슬람 이주민들 자체가 유럽 산업에서 단물만 빤 것이 아니라 이들이 유럽인들 대부분이 기피하는 산업 노동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등의 이중적 행태를 스스로 돌아보지도 않고 종교 갈등, 민족적 차이 등만을 내세워 사회의 불안심리를 더욱 자극하는 것은 이 극우 포퓰리즘을 과연 정치의 카테고리로 편입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파시즘을 인정하고 배려해야할 대상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기준이라 첨언드리고 싶습니다.

보수주의가 관련된 시장 자유의 논법과 관련해 저자는 객관적인 논법으로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보수주의가 일찍이 자본주의와 화합한 것은 일전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보수주의-신자유주의-기득권 정치‘가 견고하게 결합되어 직간접적으로 그동안 대의 민주주의의 훼손을 초래한 것은 분명하며, 이에 부역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시민은 전문 관료와 지식 엘리트들의 전문성을 굳게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강조해왔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기존의 시민들의 정치 불신과 맞물려 자본주의 하에서 엘리트 지배체제가 의심을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똑똑하고 대단한 경력의 엘리트주의가 유능하지 않고 무능할 수 있다는 불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대의 민주주의 건전성은 시민들의 건전한 참여가 뒷받침 되어야 하며, 엘리트 지배 체제가 민주 정치의 일부분을 떠안으면서 ˝너희들은 스스로의 생업에만 중시해라. 그리고 다소 생활 여건이 힘들더라도 참아보도록 해라˝라는 대책없는 요구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강요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부분의 역할을 신자유주의가 주도적으로 맡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글 초입에 저자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그림자˝라는 캐노밴의 주장을 인용하는데요. 저는 미처 글을 다 읽지 않고 저자에 대해 분통을 터트릴 뻔 했습니다. 이후에 포퓰리즘은 사실상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저의 성질 급함을 반성하였는데요. 이처럼 포퓰리즘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신물나게 강조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이 민주주의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4부에서 ˝포퓰리스트의 성격이 주요 고객인 시민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언급되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보수에 있는 정치인이든 진보에 있는 정치인이든 일정 부분 시민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이를 완벽하게 부인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스스로 각자의 대의를 주장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정치인들 스스로 여러 갈래로 얽혀 있는 사익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명확한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정치인들의 가려운 곳을 적극적으로 긁어 주었으나, 그 반대급부로 저들이 가져간 것은 시장에서의 민주 정치였습니다. 우리의 대의 민주주의가 쇠퇴한 것은 이들 직업 정치인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 거의 절반 이상의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를 반대로 시민들의 마땅한 정치 관심의 결여라고 반론을 펼치는 자들은 거의 회색분자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나 그 기반을 이렇게나 왜곡 시킨 것은 생산성이 없는 이데올로기 싸움 자체가 아니라 전문적인 직업 정치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시민들을 이용만 했던 것에 크게 기인합니다. 영민하고 머리가 잘돌아가는 정치인들이 대의 민주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어 이러한 정치적 불신을 조장한 것은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러한 맥락 가운데 등장한 반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포퓰리즘이 우려스러운 것은 끝내 파시즘을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들의 공격은 정치 엘리트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 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경제 엘리트와 학계 및 언론 엘리트를 포함한 지식 엘리트도 중요한 공격 대상이 되며, 이들의 무능, 탐욕, 부패의 피해자인 나머지 인민을 이들과 구별한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는 국적이나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사회적 열패자라는 점이 핵심적 근거로 제시된다

포퓰리스트들은 기득권 질서에 반발해 침묵하는 대중을 동원하지만, 자신들이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회피하는 언술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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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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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을 거쳐 현재 영국 런던 대학의 버크벡 연구소의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더불어 미국에 소재한 뉴욕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이기도 한데요. 그는 라캉 연구에 대한 명성과 함께 프로이트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것은 세계화 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보였던 첨예한 공격이었습니다. 특히 우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일부에게는 보수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이 꽤 완벽해 보이는 한쌍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사회 전반의 불안전성을 고려해 봤을 때, 그동안 제대로 된 비판이 전무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지젝은 강요된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분석해 비판하고 그 실상을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한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First As Tragedy Then As Face˝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6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먼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시피 전세계에 충격을 가져다 준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위기를 주제로 방만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중점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라구람 라잔이 금융 엘리트들의 거대한 ‘도덕적 해이‘를 언급하며 이와 같은 금융 위기를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지젝은 이 ‘도덕적 해이‘에 대해 좀 더 노골적이고 흥미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었는데요. 앨런 그리스펀의 철지난 큰 깨달음을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그가 깜박 잊고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은, 금융 붕괴가 발생할 시에는 국가가 자신들의 손실을 보상해 줄테니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금융 투기꾼들의 매우 합리적인 기대였다˝는 폭로입니다. 이들 경제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경제학에서 오로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명분이 딱 한 번 있는데 그것은 위기에 빠진 시장을 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나설 때일 뿐입니다. 일찍이 밀턴 프리드먼은 ˝시장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신념으로 ˝사회에는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고 일갈했는데요. 물론 그의 믿음은 상당 부분 현실과는 거리가 있음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그의 추종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언급되는 기 소르망이 이 프리드먼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무슨 훈장처럼 여긴다는 스스로의 고백은 꽤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지젝에 의해 적잖게 인용되고 있는 소르망의 주장들은 보통의 경제학자가 말할 법한 시장주의적인 언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시장주의자들과 국가 개입주의자들의 대비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둘 다 유사해 보인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시장 자유에 대한 믿음이 일부 시민들에게는 깊이 체화되어 있고 그것의 진위 여부, 실현 가능성을 떠나 무의식적으로 추종하게 되는 현실은 우려의 차원을 넘는 안타까운 일면이라 생각됩니다.

어제 서평을 쓴 ˝천하대혼돈˝에서도 지젝은 일관되게 좌파들이 적확한 피아 구별을 통해 좀 현실적인 비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이념의 구분을 떠나서 지식인의 의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수의 공익에 기여해야 하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지젝은 ‘도덕적 의무‘를 철지난 이론 정도로 격하시키는 세태 내지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와 그 보존을 제외한 다수의 도덕적 의무에만 열을 올리는 자본가들과 그 추종자들의 도를 넘는 왜곡 행태가 있어 왔는데요. 여기에는 다수의 시민들이 이를 면밀히 구분하고 비판할 수 있는 분별력이 전무하다는 것에 있어 마찬가지로 현실과 이상의 분명한 괴리라고 말할 수 있을겁니다. 이렇게 교묘하게 감춰진 권력 문제가 달린 이데올로기들은 정확히 규명하지 않는다면 실체를 벗겨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수의 자본가들이나 소수 기득권층에 있어 ‘약탈 경제가 자신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여기에 일언반구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사회 전반의 여러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조차 시도하기 어려운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2008년의 대위기는 이러한 고착화 된 사회경제적 분위기와 투자 은행들의 방만한 경영 및 한탕주의가 몰고 온 비극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파국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던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공화당 내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국가가 시장에 나서는 것을 무슨 공산주의적 기법으로 확대해석 하면서 그것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내놓을 수 없었다는 것은 당시 사태의 숨겨진 본질일겁니다. 즉, 이익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만을 비판적 분석없이 맹종하는 행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바마 행정부가 의회를 설득해 7천억 달러가 넘는 공적 자금을 지출하게 되었을 때, 이 파국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금융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노후 자금을 따내기 위해 이 공적 자금을 유용해 왔으며, 어떠한 금융인도 기소되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는 예우와 명성을 존치시킨 것은 지젝이 보기에도 불합리한 모습임에 분명했을 겁니다. 심지어 이러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는 정상적인 시민들을 반자본주의자로 몰고 갔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과 보수적 지식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실 저들이 믿고 있는 바대로 ˝경제학이 스스로 자신들이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1장에서 나오는 ˝우리가 민주주의나 정의를 믿지 않아도 그것들은 작동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참여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맥락은 일종의 소극적인 내면화의 증거로 이해됩니다. 이처럼 기 소르망이 피력하는 대로 ˝자본주의가 인류의 비참한 조건을 구원해 낸 것˝을 일언지하에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다수의 시민들을 자본주의에 있어서 맹목적인 상태로 만들어 내고 심지어 그것에 일절 반항 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민의 운명인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그렇게 설계되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자연적 고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이런 사실들을 놓고 사기를 치고 있는데, 극 방식이란 가톨릭 교회가 전체주의의 위협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자연적‘수호자로 자처할 때의 사기 방식과 똑같다˝고 저자인 지젝은 비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진술은 아주 명확하게 경제학자들과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연관이 깊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의 논리에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봉사를 할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시장이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과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될 시민의 의무라든지 민주적 합의를 다소 희생시키더라도 시장의 선택을 보장하는 쪽으로 진행되는 규모적 움직임에 권위까지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적극적인 우파의 항복과 수동적인 좌파의 합류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보수 우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와 화해 했지만 좌파는 민주주의의 보존과 (믿기지는 않지만) 시민들의 삶을 위해 같이 행동하기로 하였으나 결국 그것은 패착으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지젝은 일반적인 보수 우파들보다 좌파들에게 끊임없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일겁니다. 일전에 저도 샹탈 무페를 인용하며 신자유주의 시기에서 좌파의 실패를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도덕적인 의무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삶에서 조차 좌파는 그냥 지리멸렬 했던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저 신선 놀음과도 같은 관념적 조언은 시민들에게 어떠한 기대도 갖게 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러한 맥락의 인식이 꽤 오랫동안 자리했던 나머지 전세계 진보주의 세력에게 지금까지도 이들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글 초반에 지젝은 이러한 사회적 뷸균형 상황에서 2001년과 2008년의 위기 가운데 전세계에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 태동할 것이라 예견했던 것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때가 2008년인데 지젝은 이미 트럼프와 같은 극우 포퓰리즘이 나타날 것을 예측했던 모양입니다. 이를 명확히 드러내는 진술로 ˝포퓰리즘은 결국 언제난 보통사람들의 좌절 섞인 격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더는 못 참겠어! 이대로는 안돼! 이젠 끝을 봐야 돼!˝라는 외침에 의해 지탱된다 강조하고 포퓰리즘 운동 자체가 기존의 체제 전반을 부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시민들이 프로파간다에 의해 그저 이용당하고 심지어 사회 전반을 증오와 혐오로 이끈다는 점에서 실로 반동주의 정치라고 할만합니다. 이 포퓰리즘을 반동주의 정치라 규정한 지젝의 인식은 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도식적으로도 부유한 자들 대 근면한 보통 사람들의 대결 구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이것이 민주주의 자체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였으나,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이 언론을 통해 몇 번이나 내비쳤던 주장들은 실제로 금융 시스템과 금융 엘리트들에게 있어선 전혀 적의 조차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한 기만의 정치라 할 수 있을겁니다. 포퓰리스트들이 입으로 주장하는 것이 힘이 없는 자들의 권리를 위해 나서게 되었고 이를 위한 민주주의의 확대를 일견 주장하고 있지만 그 내심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핵심이겠죠. 결국 저들은 그저 자신의 정치 권력을 위해서 입을 놀린 것이며 ˝자유로운 섹스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저 자유주의자들을 증오하기에 급급한 평범한 노동자들˝이 철저하게 포퓰리스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자유주의적 보편주의는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던 사상이었습니다. 보편성 자체가 모두를 위한 가치로서 수렴하는 것임에도 자유 자체가 실질적으로 시민 모두가 누릴 수 없는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지젝은 ˝우리가 위험한 선택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회에서는 소수만이 선택하기 choosing 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기 risking 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앞선 ˝천하대혼란˝에서도 지젝은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많은 시민들은 그저 덜 나쁜 것을 선택하기에 급급하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저 알량한 선택의 권리는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처럼 명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자유를 위치는 자들은 이러한 차별적 기반을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은 절대 안되는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니 이것은 다수 시민들을 기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화주의 전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저 예전에는 평등을 공산주의로 몰아가기가 쉬웠으나 이제는 탈이데올로기 시기에 교묘한 화법으로 평등 자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교묘한 언설로 선동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이제는 ˝공익˝을 사회주의로 몰고가는 지식인까지 있으니 탈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실로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실패한 사회주의가 못한 것을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가 해낼 수 있다는 확장된 인식은 꽤 신선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보수주의자들보다 오히려 진보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더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함께 ˝좌파 포퓰리즘˝을 한쌍으로 제시한 샹탈 무페의 인식론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앞으로 20년 내의 진보주의의 성쇠는 얼마만큼 시민들에게 확대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심어줄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높은 확률로 폭주한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으며, 모두가 적절한 수준의 자유와 충분한 수준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젝의 다음 2부는 이러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부의 핵심 단어인 ˝민중에 대한 신뢰˝는 건전한 시민의 전제를 바탕으로 현재의 질서 전반을 재구축하고 좀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틀 잡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젝처럼 평등이 해방주의적 관점으로 사회를 크게 변혁시킬 수 있다 보지는 않지만 자유와 평등의 균형적 발전과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민주적 합의를 바탕으로 시장의 건전성을 답보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오판을 막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다시 1부로 돌아가서 ˝오도된 경제학˝이 이미 시민들의 삶을 크게 뒤흔들었듯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품위있는 삶을 이룩해 나갈 수 있도록 모든 체제의 균형적인 진보가 수반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더욱 파급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극우 포퓰리즘에 대한 대응과 정치 전반의 불신을 포퓰리즘으로 해소하길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오판을 좀 더 개선시킬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현명하게 대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잠시 오판과 오해를 하고 있는 시민들을 대적으로 여기지 말고 좀 더 제 2의 교육에 나서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주 확대해석해서 얘기하자면 존 듀이는 이러한 미래를 염두해 두고 교육의 문제를 다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지젝에게 조언하고 싶은 부분은 좀더 너그러운 언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으면 합니다만 과격함˝이 빠진 지젝은 지젝으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지그문트 바우만이 없는 시점에서 그가 자신의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외래어 표기에 있어서 된소리로 강조하는 표기법이 이 출판사의 특징인 모양입니다만 엄연히 규정된 표기법이 있음에도 이런식으로 출판되어 나오는 것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국가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으며 오히려 둘 사이에는 복잡한 동맹이 있다. 나는 자유사회가 복지국가를 필요로 한다고 보는데 이는 우선 지적 정당성과 관련된다. (기 소르망의 인용)

이에 그린스펀은 답했다 "저는 제가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규정하는 결정적 작동구조로 보았던 모델에서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린스펀은 "백년에 한번 찾아올 만한 신용 쓰나미"가 금융 시작을 덮쳤을 때 규제를 멀리 하려는 자신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결함을 지닌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지배 계급‘은 비록 포퓰리스트들의 도덕적 의제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하층계급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 전쟁‘을 용인하기는 한다

지난 몇달간 교환에서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공인들은 과욕과 소비의 문화에 대항해 싸우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폭탄처럼 퍼부었다. 값싼 도덕화의 이런 역겨운 광경이야말로 이데올로기 공작이라는 범주에 딱 들어맞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자연적 고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놓고 사기를 치고 있는데, 그 방식이란 가톨리교회가 전체주의 위협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자연적‘ 수호자로 자처할 때의 사기 방식과 똑같다

우리의 정치적 풍경이 관대하고 자유주의적인 테크노크라시와 근본주의적 포퓰리즘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면, 베를루스코니의 위대한 업적은 이 둘을 통합해낸 데에, 둘을 동시에 붙잡은 데에 있다

일상생활상의 소외, 소비의 상품화, 우리가 ‘가면을 쓰도록‘ 강요되고 성적 억압과 그밖의 억압을 당하며 사는 대중 사회의 비진정성 따위 말이다

자본이 우리 삶의 실재, 사회적 자연적 현실의 가장 긴급한 요구보다도 훨씬 더 절대적인 명령을 내리는 실재라는 데 대해 더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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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6-2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창비만의 외래어 표기법이 있는가 봅니다 ㅎㅎ 다른 창비에서 나온 책들도 그렇더군요...

베터라이프 2021-06-26 15:14   좋아요 1 | URL
외래어 표기법은 되도록이면 지키면 좋을텐데 아쉽긴 하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