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없는 열정 - 20세기 정치 참여 지식인들의 초상, 개정증보판
마크 릴라 지음, 서유경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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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마크 릴라는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후에 하버드 케네디 스쿨을 다니는 동안 저널리즘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공공 정책 석사를 수여받고, 1990년에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게 됩니다. 그는 근래 미국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정치학자로 종종 대중매체에도 등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특히 마크 릴라는 서구 유럽의 계몽주의 연구에 대한 미국 내 권위자이며 동시에 극단주의 정치에 대해 냉엄한 비판을 하고 있는 학자기이도 합니다. 그는 2007년부터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저명한 언론사들에 꾸준히 자신의 글을 기고하고 있고 철학과 정치학을 동시에 연구했던 지식인으로서 미국 정치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정치적 연구 및 철학적 담론을 분석하는 데 정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원제, "The Reckless Mind : Intellectuals in Politics"로 지난 200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 초도 번역을 거쳐 2018년에 개정판을 다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독한 판은 2018년 9월에 나온 개정판입니다.

마크 릴라의 이 글은 뉴욕 서평과 타임스 문학 부록에 수록된 글들을 한데 모아 출간한 것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상적 인물들의 삶의 자취는 1920년부터 파시즘과 그로인한 세계 제2차대전의 발발까지, 당시 근대주의의 극심한 침몰과 사회에 만연된 회의주의와 또한 그런 인간 정신의 종말을 현대에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저 사상가들의 내밀한 인생 역정과 소위 '사상적 휩쓸림'을 통해 객관적으로 분석해 낸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과거 역사의 잔인한 퇴보라 할 수 있는 전체주의와 관련해, 각자가 다른 행보를 보이고 극명한 영향의 일환으로 각기 상이한 해석과 결과를 보이게 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 극단적인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발터 벤야민의 비극적 종말, 유쾌한 헤겔주의자였던 프랑스의 이방인 알렉상드르 코제프, 니체주의의 한계에 직면했다고 봐야하는 미셸 푸코 그리고 끝내는 신자유주의까지 해체하려고 들었던 자크 데리다까지 사회학이나 정치학 혹은 철학을 통해 독자들이 한번쯤은 그 이름과 명성을 들어봤을 법한 인물들을 마크 릴라는 그 혼란스런 시대적 과오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창궐한 파시즘의 시대'에 몰입하여 과연 일개 개인으로서 어떠한 삶으로 살았을지 호기심을 곁들이며 상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보면 유럽 대부분이 인간성 말살의 시대에 놓여있었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 그리고 한나 아렌트를 다룬 1장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카를 슈미트의 2장과 삶의 압박과 반대로 깊은 감수성을 가진 발터 벤야민의 비극을 다룬 3장 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는데요. '이방인' 알렉상드르 코제프를 다룬 4장은 레오 스트라우스 때문에 좀 더 집중했고 5장인 푸코와 다음 6장인 데리다는 큰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평이하게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철학과 정치를 엄밀히 구분하고자 했던 마르틴 하이데거는 익히 알려진 대로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어쩌면 이 사실을 처음 접하는 분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제자였던 한나 아렌트와의 짧은 사랑(초기의 서신 교환의 내용을 보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죠)과 스스로 고유하게 사유한 사상의 성과 측면에서 하이데거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카를 야스퍼스가 진심을 다해 평생동안 그와 교류를 해왔던 행적들이 절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저는 하이데거에 대한 야스퍼스의 글들을 통해, 인간 하이데거가 다소 교활하다고 느끼게 되었는데요. 나치에 대한 부역과 관련해 말을 바꾼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치에 대한 스스로의 발언이 후에도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양심에 위반되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상을 적잖이 받았습니다. 물론 2장의 주인공이랄 할 수 있는 카를 슈미트에 비하면 하이데거의 이런 태도는 다소 애교로 느껴질만 한데요. 그럼에도 마르틴 하이데거는 당시 철학계에서 형이상학 전반에 분명한 족적을 남긴 대가이며, 근현대의 철학에서 그를 빼놓고서는 시대와 학문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는 한나 아렌트가 스스로 겸허한 '정치 이론가'로 규명하는데 있어 하이데거의 손꼽히는 철학적 업적들이 존재했기에 그녀가 하이데거를 단순한 매료를 넘어 존경했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범인들과 평범한 여자의 입장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아렌트와 같은 태도는 보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사상적 대가들의 학문적인 성취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의 수용자라는 입장에서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유사한 형태가 아닌가 짐작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단순히 이분법이나 선악의 문제가 아닌 '파시즘의 부역'과 관련해 하이데거의 꾸준한 회피 시도는 그가 자신의 평판에 있어서 교활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는데요. 마땅한 학문적 성취와 반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혹은 정치적인 행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통합을 해서 살펴보던 따로 구분을 해보던 간에 확실히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합니다.

이에 반해, 카를 슈미트는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자유주의를 혐오하면서, 그 이면에 자유주의에 전도된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전제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에 의해 자신의 결단주의가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대략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치에 부역하는 것을 정당화 시킵니다. 앞선 하이데거가 성공적인 나치의 이론을 설파하는 이론가로서 잠정적으로 실패했다고 봐야한다면 여기 카를 슈미트는 완전히 반대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히틀러의 정치적 예외 현상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이를 엄정한 결단으로 봤던 슈미트는 생애 말년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난 뒤 슈미트는 비굴한 인생을 살았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비망록에 개인적인 울분을 토로했다"고 덧붙이고 있었는데요. 슈미트의 사상을 옹호했던 레오 스트라우스와 "대화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일인"이라고 밝혔던 알렉상드르 코제프를 제외한다면 그의 생애 말년은 외로운 섬과도 같았다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좌파와 우파, 모두에 의해 그의 사상이 주목받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양쪽의 적극적인 연구와 인용은 60년전 전까지만 해도 다소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다수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엄중한 결단이 때론 필요할 수 있다는 그의 핵심적인 주장들이 지금의 시대에는 상당히 거부감이 있는 논법임에도 혁명의 준하는 어떠한 심각한 비상 상황을 설정해 해석하고, 자유주의의 전반적인 위기가 도래할 시에 그의 이론들을 되짚어 나가며, 민주주의의 나아갈 방향을 역설적으로 제시받을 수 있다는 부분은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저는 자본주의의 오판을 경고하는 데 있어도 카를 슈미트의 글이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방만한 개인주의를 배경으로 오늘날 비판없는 자본주의의 융성이 바로 슈미트의 일침을 가할 지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우려스러운 부분은 극단주의 정치의 시발점인 극우주의자들이 민주주의 토대를 '결단주의'적으로 해체하기 위해 이론적인 측면에서 슈미트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이론의 오용이라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해석의 문제라고 해야할까요.

어린 시절, 한나 아렌트 짧은 글을 통해 잠시 발터 벤야민의 비극적인 종말을 접했던 저는 다시금 마크 릴라의 글을 보며, 벤야민의 행적에 거듭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벤야민이 영국에 있던 전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과거 빈곤했던 그가 창피를 무릅쓰고 전처의 하숙집에 머물렀음에도 왜 영국으로 오라는 재차 권유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지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러한 상황은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개인의 불행을 넘어 역사의 참혹함이라고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때 여러모로 후원을 했던 아도르노에 대해 그 호의는 충분히 고마운 부분이지만, 학문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복잡한 관계였던 두 사람의 행적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학문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충돌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철회하거나 절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양심의 문제를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어 어려운 문제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애인을 만나러 간 모스크바에 만연된 스탈린주의를 그토록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던 그가 시대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이 듭니다. 이미 자유와 역사의 진보라는 대안에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명확하게 밝혀진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끝으로, 20세기에 등장했던 이데올로기들이 개인의 삶과 그 개인들의 의지조차도 무시하고 강요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정치와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충분히 분석되고 비판되어야 하는 것이 일종의 당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개인들의 평범한 삶을 얼마나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겠느냐가 정치의 선결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대의를 갖고 있지 않아도 자유롭게 또한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이 국가와 제도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을 망각한 슈미트의 '적과 아'의 개념은 마찬가지로 히틀러에 의해 전 유럽을 지옥으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멀쩡한 얼굴로 웹상에서 '반유대주의'를 외치는 자들도 이와 비슷한 사고라고 여겨지느데요. '무지의 죄'는 절대로 처벌되어선 안된다는 관념을 차치하더라도 저자인 마크 릴라가 언급하는 지난 세기 동안의 '지식인의 책임'이 무의미한 용어가 되었다고 진술하는 것에 지금의 현실과 당시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맞물려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수준 낮은 지식인들을 그렇게 경멸했던 것일까요. 고차원적인 지식과 사유를 만들어낸다고 믿는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책무는 별로 관심이 없는 시대는 과연 어떻게 귀결될지 몹시 궁금해지는 저녁입니다.



-본문 37페이지에 대괄호 하나가 홀로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47페이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문장이 있었습니다. 개정판을 내면서 이렇게 수정을 안한건 조금 믿겨지기가 어려웠습니다.

-마크 릴라는 나치 독일의 시기에 슈미트가 '도덕의 최저점'에 있었다고 꽤 비판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상가들을 경애하는 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그 사람들의 정치적 분별없음을 무시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도 그들을 선정하는 중요하는 고려사항이었다

이제 이 여인(한나 아렌트)은 마침내 한 사람에게만 "확고부동의 헌신"을 바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하이데거는 죄의식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의 연구 작업을 위해서 (당분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아렌트를 설득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동료들과 모든 관계를 청산했는데, 그중에는 스승인 에드문드 후설도 들어 있었다

야스퍼스는 친구고 아렌트는 연인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하이데거가 자력으로 진정한 의미의 ‘철학함‘을 재생시킨 사상가임을 굳게 믿고 경애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에서 나치즘과 관련된 주제는 하이데거가 1950년 3월에 스스로 언급할 때까지 완전히 배제되었다

나치는 슈미트가 히틀러의 행위에 사법적 지위를 부여하리라는 희망을 품은 게 분명한데, 결국 실망하지 않았다

슈미트는 히틀러의 처신이 ‘그 자체로 지고한 정의‘라고 주장하는 악명 높고 영향력이 있는 글을 발표했다

슈미트는 바이마르공화국 정치의 혼돈은 자유주의자들 스스로 극우와 극좌 노선에 선 적들과 충돌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거의 200년 동안 자유주의 사상의 주창자들은 슈미트 같은 반대자들과 대치해 왔다

코제브와 스트라우스는 고대 철학과 근대의 ‘지혜‘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우리가 정치적으로 사유하며 살아가는 방향을 찾는 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어째서 때때로 모호하고 늘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던 사상가의 저서와 발언이, 20세기 지식인이 살아온 삶의 지형에서 이미 하나의 기념물이 되어버린 뒤에도 그렇듯 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는 푸코를 찬양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푸코는 단순히 저자 이상의 다른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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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의 시대 -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모함에 관하여
크리스틴 J. 앤더슨 지음, 김청아.이덕균 옮김 / 나름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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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휴스턴 다운타운 대학 (UHD)의 인종 연구 센터의 심리학 교수이자 연구원인 크리스틴 J. 앤더슨은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UC 산타크루즈)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양성 평등과 사회 심리학 및 여성 심리학 등을 연구해 오고 있는데요. 그녀는 아직까진 해당 연구에서 신진 학자로 알려져 있고, 스스로 여성학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팔로우수가 이제 220명이 넘는 그녀의 트위터에도 잠시 방문을 해보기도 했는데요. 다만, 위키 백과에서도 저자에 대한 자료가 등재되어 있지 않고 웹 상에서도 특별한 정보가 나오지 않아 저자에 대한 소개는 아무래도 이정도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Modern Misogyny : Anti-Femnisim In A Post-Feminism Era"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쉽지 않은 논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매끄러운 번역을 해주신 두 분의 역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번역된 글의 부제인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 이 글의 주요한 논점이 아니라, "그동안 여성들의 권리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도달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과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외모 치장과 전통적인 순종허는 여성상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매우 상세한 반론이라 할 수 있겟습니다. 바로 1장과 2장이 그런 내용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준비되어 있는데요. 먼저, 저자가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포스트 페미니즘과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저역시 저자인 앤더슨의 논증을 통해 이해한, 그녀의 주장이 매우 설득력이 높다고 여겨졌습니다. 1장 도입에서, 저자는 "포스트 페미니즘은 특히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와 잘 어울린다"고 언급하고 이는 다음 2장에서 논증될 "9.11 테러 이후 신자유주의가 교묘하게 공공 분야의 지출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시민들의 권리를 축소하고, 고통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과거 전통주의적인 여성성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는 발을 맞춰왔다고 요약되고 있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여성주의 운동 자체가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적 이념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며, 이를 확대해보면 결국 여성들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이해와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념체계 자체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포스트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여성들의 전통적인 성역할에의 복귀와 강요는 앞선 진술대로 신자유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요. 2장에서 상세하게 논증되고 있는 '비상 상황'에서, "전쟁 기간의 시민권은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가 된다"는 언급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즉, 이 부분에서 신자유주의는 진보주의 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이 당시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신보수주의(네오콘)와 결합이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만 합니다. 일전에 데이비드 코츠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유독 국가의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관대한 편인데요. 아마도 이 지점에서 네오콘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의 야합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이미 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포스트 페미니즘과 연결되는지 저자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약하시키고 신자유주의의 금과옥조인 이윤, 사유화, 개인주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을 중시하는 문화를 일상생활 전반에 뿌리는 내리는 것, 복지 '개혁'(빈곤층 지원 축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 덕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소비자 시민권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특권 혹은 특권층에 관한 부분은 4장, 남성의 종말과 소년의 위기에서 다루고 있는데요. 그것은 "강한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갖 좋은 것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장 자유라는 명목으로 시민 절대 다수에게 강요했던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실상은 특권층과 기득권 계급 및 엘리트들을 위한 비타협적 관념 체계로 이는 민주주의적 이념인 평등에 반하는 것이고,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계급 정치를 용인하지 않는 기본적인 골자를 위해하는 것으로 그동안 평범한 노동자들마저 이런 논리에 세뇌되어 왔다는 것이 그동안의 수많은 연구로 밝혀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페미니즘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 자체는 좀 더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 이해하고, 인종을 가리지 않는 여성 전체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자도 3장에서 '남성 혐오'를 내포하고 있는 극단주의와 극단주의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3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 대해 대체로 '중립적인 인식' 갖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주장에 동의하는 많은 여성은 페미니즘이 부정적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칭하길 꺼린다고 알려져 있다"는 진술은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얼마나 외부에서 왜곡해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요. 사실 페미니즘은 소년 시절부터 주입되는 '남성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강요' 방지한다는 점에서 남성들에게 유익하고 아무 이유 없이 대다수 여성을 적대시하는 분위기를 이성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충분히 기여를 할 수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여러 주장들 가운데 주의깊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높은 교육을 받고 인정을 받는 성공한 여성들조차도 심지어 남성들의 연애 요구와 섹스 요구에 응해야만 한다는 포스트 페미니즘의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이미 여성들의 권리가 충분히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 전통주의적인 여성성에 여성들은 집중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성이었는데요. 전반적으로 현재 미국에서 일고 있는 "남성이 원하는 연애를 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적대감"이 이것에 기반한다고 생각됩니다. 첨단 과학의 발달과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현재의 세기에 아직도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이토록 무시하는 행태가 있다는 것이 실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하였습니다. 과거처럼 여성들이 익히 알면서도 고분고분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남성들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종래처럼 여성들과 성소수자들, 유색 여성들의 권리를 '백인 여성들의 권리' 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만인이 긍정하는 인권법과 사회 체제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인데요.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극단적인 혐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지 작금의 시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선, 유색 인종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 글 1장과 2장에서 꽤 논의되고 있는 사항이 있는데요.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들을 백인 여성들 만큼이나 사회에서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미국 사회에서 인종주의적 편견은 아직도 타파되지 않은 상황이고, 4천만이 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도를 넘는 태도와 선입견은 아직도 여전한 편입니다. 더 심한 말로,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을 소위 '창녀' 취급을 하면서, 반대로 백인 여성의 인권은 예외로 취급한다든지, 고학력 전문직 백인 여성들의 권리와 그렇지 않은 서비스 직종과 '파트 타임 잡'에 있는 여성들의 인권을 예외취급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포스트 페미니즘의 노골적인 구분법입니다. 이는 제도권 교육을 받은 많은 미국 남성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시각을 볼 수 있기도 한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여성, 즉 능력있고 사회에 귀감이 되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대부분 미움을 받는다"는 분석을 하고 있는 5장에서는 남성들에 대해 대체로 고분고분 하지 않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에 대한 원초적인 반감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높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남성을 혐오하거나 남성과의 연애를 회의적으로 볼 것이라는 일부 주장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남성들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들이라는 인식 아래, 좀 더 남성들에게 고분고분해질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광범위하게 오랫동안 진행된 민주적 사회에서 과연 이러한 왜곡된 가치 체계들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가는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남녀간의 입장차이나 어떤 대결 구도에 집중해 이를 일종의 중화하고 개변시키는 어떤 당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녀 평등의 기본 가치와 사회적 약자와 성소수자, 인종소수자들에 대한 권리 문제는 염연히 민주주의가 마땅히 보장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한 묶음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처음 글 도입부에서 저자는 포스트 페미니즘이 여성의 몸을 성애화하고 대상화 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거의 벗다시피 한 여성의 몸을 즐기는 것이 다시금 괜찮은 일이 되어버린 상황"을 스스로 반성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1장에서 하이힐을 신고 추는 '폴댄스'의 사회적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몸을 과시할 준비가 돼 있는 여성은 누구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많은 젊은 여성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는 저자의 놀라운 언급이 있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몸을 성상품화하고 이를 확대시키는 것이 여성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즉 몸이라도 팔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득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념과 동시에 포스트 페미니즘이 그러한 상황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국제적 패션 브랜드들이 강간이 묘사되는 사진 구도와 여성의 눈빛을 흐릿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것으로 묘사해, 성적 대상화를 하고 있는 광고들의 본질이 바로 오늘날 소비 자본주의의 속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처럼 뿌리깊은 반페미니즘에 대한 사회경제적 맥락과 그것을 조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을 분석한 이 글의 통찰은 충분히 높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생각되었습니다.


-포스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의 야합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사회를 균질화시키고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노골적인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는 믿음과 그러한 배경 가운데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담론이 마땅히 시민 다수가 따라야만 한다는 그들만의 당위를 완전무결성과 같은 것으로 주장함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판단은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적인 거부가 사회내에서 좌파의 몰락 내지는 유명무실화를 추구했던 지난 40여년간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적과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특히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와 잘 어울린다

반대로 포스트 페미니즘은 마치 모든 여성이 백인 중간계급 아니면 상류계급 이성애 여성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을 중시하는 문화를 일상생활 전반에 뿌리내리는 것, 복지 ‘개혁‘(빈곤층 지원 축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 덕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소비자 시민권을 장려하는 것이다

개인주의 경향은 자아도취, 비대한 자아, 특권 의식,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나르시시즘에 관한 심리학 연구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광고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석한 결과, 슬프게도 현대 여성들이 10년이나 20년 전보다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더 가까이 수용하고, 불쾌함을 덜 느낀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자신의 몸을 과시할 준비가 돼 있는 여성은 누구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젊은 여성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약화시키고 신자유주의의 금과옥조인 이윤, 사유화, 개인주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다

(군에서) 남성의 성적 접근을 거부한 여성 병사들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발당했고 동성애 행위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페미니스트를 "남자 까는 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문자 그대로 폭력을 당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대신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 때문에 남자들의 기분이 상하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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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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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릴리 브룩스돌턴은 미국 버몬트 주 출신으로 메사추세츠 애머스트 대학을 거쳐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예술 석사라고 할 수 있는 MFA를 수여 받았습니다. 몇몇의 습작을 제외한다면 2016년, 랜덤하우스에서 출판한 '굿모닝 미드나이트'가 첫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이후 조지 클루니가 감독해 동명의 영화화가 진행된 바가 있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Good Morning, Midnight"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넷플릭스를 통해 조지 클루니가 연출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접하게 되었는데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아무것도 못한 채, 꼼짝없이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청을 마치고 나서 불현듯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웹을 열어 영화를 검색해 보니 원작이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했고, 다급한 나머지 알라딘에 책 주문을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설의 서평을 쓰는 것도 제법 오랜만인 듯 싶습니다.

영화에서는 지구가 어떠한 전쟁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언급되지만 책을 일독하고 보니, 뭔가 '시간의 패러독스'와 같은 현상이 잠정적으로 동시간대의 인물이라 볼 수 없는 어거스틴과 아이리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지구 위에 떠있는 인공위성들이 먹통이 된다든지, 에테르에서 전혀 지구에서 방출되는 전파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여느 아포칼립스 소설들에서 보여지는 핵전쟁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소설의 축이 되는 이 시간 왜곡 현상에 대한 배경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주인공인 어거스틴은 스스로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 오만하고 자기 멋대로인 인물이었습니다.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이 살아온 그동안의 삶에 대해 회한을 느끼면서 점차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요. "그는 사랑에 대해 북극곰 만큼 아는 게 없었다"는 다소 황당한 문장에 그의 사람에 대한 태도를 짐작할 만합니다. 교제를 하고 있던 여자친구에게 낙태를 권유하다 그녀가 들어주지 않자 어딘지도 모를 남반구로 도피한 것은 작가가 여성이어서 저런 극단적인 남성성을 마련했던 것이 아닌가 잠깐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아이리스라는 소녀와의 짧은 동거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점은 앞선 인물 설정이 나중에는 얼마간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지식의 수준으로 평가하는'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에게 있어 아무래도 타인과의 관계 특히, 가까운 이성과 지근의 사람과 불협화음이 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배제할 수 없을 텐데요. 자신의 딸을 낳은 진이 후에 '아빠는 큰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하는 것은 이렇게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다 생각됩니다. 여자들을 오로지 섹스의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의 기분과 의도대로 관계를 제멋대로 끌고 간 그가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 열망해 마지 않았던 대상이 바로 우주였다는 점이 얼마간 이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작가의 의도된 이름(나중에 중요한 이름이 밝혀지므로 이것은 성입니다)인, '설리'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훌륭히 성장했고, 끝내는 목성과 갈리레오 위성들의 탐사를 맡은 '에테르'호의 대원이기도 합니다. 전 남편인 잭에게서 어린 딸 '루시'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이번 임무를 결정하는 데 있어 어린 딸의 존재가 큰 난관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주변을 세심히 살피는 설리는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던 중에 에테르에 수신되던 통신이 끊기고 나서, 심리적 혼란을 느끼는 대원들의 심리 변화에 민감해 하고, 데비와 같은 가까운 이의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등의 다감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적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전해준 천문학 책을 보면서 꿈을 키우기도 했는데요. 아버지에 대한 어떤 원망이나 분노라기 보다는 부성애를 느껴보지 못한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연민이 담겨있는 문장이 보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재혼한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산후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그녀의 삶 자체가 대체로 무난했다고 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전 남편 잭과의 이혼이 그런 와중에 있던 불행한 결과물이라고 선뜻 판단할 여지는 없지만 그로인해 자신보다 주변을 더 챙기게 되는 인물로 읽혀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어거스틴과 아이리스, 설리와 하퍼와 같이 스토리상 주요한 축인, 이들의 뭔가 운명적인 관계로 인해, 발생되는 감정과 이들의 내면의 변화를 포함한 묘사들이 꽤 훌륭하다고 느껴졌는데요. 책 뒤에 나오는 역자의 후기로 이 글을 단순히 지구 종말에 대한 어떤 기록 정도로 여기는 것은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아서 클라크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을 등장시켜 뭔가 SF의 외투를 입고 있지만, 사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인생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갑자기 다가온 사랑으로 깨닫는 내면의 변화, 그리고 여자 작가에 의해 그려지는 부성애에 대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마크 트웨인이 인간은 때론 고독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을지라도 우리가 관계를 맺는 사람이 없어서는 그 스스로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꽤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가족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혹은 주변 사람들간의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엄청난 사회적 명성과 직업적 성취를 쌓는다 할지라도 그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온전히 해내는 고독한 성찰 만큼이나 타인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가 마치 제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이런 느낌을 더 상세하게 쓰기 위해 글의 구조와 스토리 라인에 있어서 좀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만 상당히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저의 알량한 글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일단 저는 영화를 먼저 접하고 이 소설을 일독하게 되었는데요. 책과 영화를 전부 소화하고 나서, 속으로는 꽤 애석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를 보시는 것 추천드려 봅니다. 이렇게 순서를 정해 접하시고 나면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렸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143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트럼프 카드의 ♠를 스페이드라 부르는 것은 검색만 해봐도 아는 것을 '스페이스'로 표기한 것은 뭔가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 어원을 따져봐도 스페이스라는 단어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소녀 아이리스에 대한 인물 묘사와 행동거지, 말투,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작가의 묘사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랑에 대해 저 북극곰만큼도 아는 게 없었다

어거스틴은 그 무엇보다 지능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다

천문대 밖의 세상은 조용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 여자들도 죽었을 것이다. 논문들은 잿더미가 되고 강연장과 천문대들도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추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불안한 미래에 사로잡혀, 설리가 말을 걸어도 온전한 현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동반자를 원한 적이 없었다. 다른 생명을 돌보겠다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특히나 지금, 그의 생명이 끝나가는 이때에 말이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여기에 있었고 어거스틴도 그랬다. 그들은 함께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거스틴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대부분을 투명 망토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보냈다. 조용하고 똑똑하고 조심스러운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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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05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의 서평에 감사드립니다
SF를 예전에 읽고 싶다 생각해서 화재 감시원 읽고 좀 좌절하고 다시 읽지 않았는데,
이 책으로 다시 열어 볼까합니다.
산소 발견 이전에 연소를 설명했던 에테르가 등장하니 또 관심이 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베터라이프 2021-09-07 20:3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초딩님 ^^ 이 소설에서 우주는 두 인물을 연결시켜주는 매개라고 여겨지네요. sf소설이 가미되긴 했지만 본질은 내면과 관계의 화해를 담은 글이 아닌가 싶어요. 아 너무 스포한 것 같네요 ^^; 하여튼 초딩님의 서평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는 소설 전문(?)이 아니라서 많이 읽은 분들의 서평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구요!
 
불안의 사회학 -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하인츠 부데 지음, 이미옥 옮김 / 동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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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일 보윈켈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츠 부데는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사회학, 철학 그리고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1986년에 동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 사회연구소의 연구 조교로 일하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로파 대학 비아드리나에서 석좌 교수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96년에는 코넬 대학의 방문 학자를 거쳐 현재는 카셀 대학에서 거시 사회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세대 연구와 기업가 논리 등을 연구하면서 독일 사회가 미래에 나아갈 길을 학자로서 제시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Gesellschaft de Angst"로 201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부데의 이 책은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정신적인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에까지 과거 안정적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졌던 '복지 국가 담론'이 신자유주의에 철회되면서 그 와중에 분화된 엘리트 계급과 중산층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약한 사람들의 각각의 불안을 많은 인용과 그를 뒷받침 하는 주장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독일 특유의 직설적인 분위기 답게 부데가 쓴 이 글의 어조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넘어 곳곳에 냉정한 판단이 들어가 있었는데요. 특히, 포괄적으로 3장부터 6장까지 등장하는 '능력주의'와 불안과의 관계를 으레 짐작되는 단순한 인과의 문제로 서술하지 않고, 불가피한 능력주의가 주도하는 사회 자체의 현실을 진술하는 데 좀 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 특유의 냉소적인 표현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예를들어 우리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8장에서는 소위 제어되지 않는 금융 시장 이데올로기를 빗대면서, "의심스러우면서 많은 돈으로 구제해줘야만 하는 체제를 위해 중요한 은행들과 정부가 시민들에게 따르길 강요하는 시장과 동일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의 폐부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개인의 원초적인 불안을 다루고 있는 1장과 2장에서는 남녀간에 존재하는 '애정'에 대해 부데는 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마치 "연인과 섹스를 막 끝낸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방금 전의 격정적인 몸의 대화'를 쉽게 잊기 마련이라고 강조합니다. 남녀가 사랑으로 연결된 연인 사이의 관계 조차도 근원적인 불안을 야기시키며, 반대로 오로지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간에 관계에서만 이런 불안을 회피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아무리 다양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심리적인 불안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여자가 연인으로서 만나려 하는 남성들 가운데, "자신보다 교육을 덜 받은 남성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현실"은 그런 명확한 개인의 선택은 일견 불안에 빠질 가능성을 회피하는 목적이 있다고 여기는 듯 했는데요. 물론 부데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물건을 고르는 것과는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설사 합리적이고 마땅한 선택으로 누군가를 만난다 하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통제력을 잃게 되어 나타나는 불안을 잠정적으로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토록 고도화 된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원칙적으로 개인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여기에 나날이 강요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체화시킨 능력주의의 사회에서 계급 전반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요약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이 글 5장에서 "엄연히 30년간의 신자유주의 시기에 부가가치의 우선 순위의 변화로 각국들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고 언급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현실적인 가치를 나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글 전반에 논의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의 '능력주의'는 성공이 있으면 반드시 실패가 있고, 양지가 있으면 무조건 그늘이 있는 것과 같은 상반된 인식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20세기의 전체주의가 미연에 발생할 수 있는 첨예한 계급 갈등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는 저자의 요상한 해석을 조금 틀어보자면, 복지 국가의 담론도 역시 마찬가지로 계급 갈등의 문제를 (의도했던 안했던 간에) 방지하는 것에 기여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자도 토마스 프랭크를 인용하면서 사회 최상급 그룹에 부여하는 상여금과 관련해 이러한 시스템을 마냥 긍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승자독식' 세계에 살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사람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다고 회의적으로 표명하고 있는데요. 이는 경제적으로 중간 계급 이하의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계 문제로 인해 시스템 자체를 성찰하기 위한 시간이 부족한 것이며, 어느 정도는 이러한 강요된 사회에서 체념하며 지내는 것이 현상황을 해석하는 설득력있는 주장 일겁니다. 따라서, 저자가 단언하는대로 "사람들은 승자독식사회를 무자비하게 최고 엘리트들만 선별하는 자본주의 일면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라 받아들 수 있다"고 보면서 "이렇게 사회 전체가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면 사회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예상외로 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와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반대로 5장에서, "국가가 세금으로 중산층의 돈을 탈탈털고 있다"는 국가에 대한 다소 냉소적인 평가는 부데가 과연 어떠한 입장을 지지하고 비판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인용들이 계급과 사회 내부의 불안에 대한 관점을 좀 더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양가적인 측면을 언급하며 진술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글의 기법에서 일관된 논지에 포함될 수 있느냐가 쟁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자수성가한 소위 엘리트 계층에 대한 3장의 논증은 '승자독식'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개인들의 노력과 성취라는 부분에 있어 어떤 가치 판단을 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내의 눈들을 신경쓸 수밖에 없는 소수 엘리트들의 불안감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이 엘리트들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좀 더 냉혹하고 교활해져 더 많은 이익을 거두려 하는 욕망"에 빠질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 부분에 대한 도덕적 관념의 실종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에 일정 부분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승자독식과 능력주의를 역으로 해석해보면 이러한 견고한 기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부의 우위에 있는 자들이 "자본주의가 원래 이런 것이고 개인의 이익 추구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사회에 대한 철지난 책임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오로지 저들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하는 기형적이고 반사회적인 인식을 아무렇지 않게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저자가 앞선 능력주의를 불가피한 자본주의적 사회화 과정에 비롯된 현실 인식으로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진 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마땅히 도태되어야만 한다는 인식"은 인간이 그동안 쌓아온 인문주의와 역사적 진보를 깡그리 휴지통에 처박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인식에 대해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이익과 능력주의를 강조하며 마땅한 사회적 부조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해 왔는데요. 후쿠야마의 언급대로 이들은 어떠한 도덕적 양심이나 갈등으로 자신들의 내면이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내심 소름끼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자본주의가 인간성의 부분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갖고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그런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처럼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트들의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저들이 스스로의 불안감 때문에 차라리 간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선택지를 손에 쥔 것도 앞선 진술들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들 엘리트들의 성공에 사회적 자원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는 저자의 인식대로라면 엘리트들의 불안 문제를 일방적으로 곡해할 필요는 없지만 일대 다수의 대결 논법으로 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부분은 약간 우려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에 반해 5장에서 중산층의 불안과 다음 6장의 사회적 약자들의 불안과 관련한 논증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었는데요. 사회 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개인들이 언제나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평가와 시장 자유주의적 이행으로 인해, "개인의 능력과 공동체적 연대감이라는 정신을 중산층이 공유했던 시대는 사라진 게 분명하다"는 서술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일은 아마도 이런 중산층 정신을 꽤 중요하게 여겼던 국가로 볼 수 있을텐데요. 어느 정도 사회적인 재분배의 해법이 필요하지만 이것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뭔가 철지난 문제로 치부해 공격하는 사회적 행위들이 그동안 너무나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들을 전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음모론으로 몰아갈 수는 없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동안 사회에서 공익과 공공의 의미가 배척당해 온 것은 거의 확실하다 생각됩니다. 다만, 저자가 갖고 있는 국가와 정부가 초래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다소 일관되지 않은 부분은 독자들이 감안해서 읽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지는데요. 그리고 8장에서는 금융 자본주의로 인한 불안과 관련해, 아마 다수가 이를 증오하기도 하였으나, 그 부분과는 별개로 2008년의 경제 붕괴가 어느 정도 필요했을 수도 있다는 저자의 판단은 다음 논증을 통해 일정 부분 공감을 할 수 있었는데요. 그런 결과로 막대한 공적 자금이 시장에 투입되었지만 어떻게 보면 최악의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기에 사회 전반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카지노 자본주의에 의한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과 사회 구성원들의 불만이 이익 극대화를 위한 구조적 문제로 진정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도 불확실하다고 판단됩니다. 다른 어떠한 불안들 보다도 이 금융 자본주의의 불안이야 말로 다시금 체제 전반의 위험성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명백히 현재의 자본주의가 이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런 문제를 제기할라치면 왜곡된 자들에 의해 반자본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극우주의자들이 반대의 세력을 풀조차 남지 않도록 제거하기 위한 실현될 수 없는 욕망과 다름없는 것으로 불안의 문재를 떠나서 건전한 비판도 꺼내들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해 종내에는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개인들의 다원화 된 사회에서 어쩌면 각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트들과 중간 계급 및 사회적 약자가 처한 입장이 다 다르고 어떤 문제에 대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또한 각자가 다 상이합니다. 또한, 이러한 분화를 만들게 한 자본주의적인 불안 또한 시민 각각이 느끼는 부분이 분명 다를 것입니다. 다만, 일부 계층에게 주도되어 진행된 세계화와 이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담론들이 일정 부분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저자인 부데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사회를 시장이 주도하게 만들고 이기심이 만연된 비인간성의 왜곡된 구조를 더욱 고착화 시켰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선언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적인 동반자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런 고차원의 자본주의적 매커니즘이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토록 현 시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불안들이 개인의 다원화의 양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후 변화된 자본주의적 담론이 사회 전반을 보다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현재의 번영을 이끌었다고 보는 관점도 적지 않겠지만 반대로 심각한 부의 불평등 문제를 최소한의 논의조차 막아버리고 있는 자본주의의 무결성 논리도 큰 문제인 것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세기 중후반에 발전했던 복지국가는, 현대 사회를 전례 없이 통합시켰다

결국 알고 보면 우리가 헌신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타인이 바로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서 중산층이 줄고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게걸스러운 국가가 세금을 통해서 중산층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있으며, 그래서 중산층은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

사람들은 ‘승자독식사회‘를 무자비하게 최고 엘리트들만 선별하는 자본주의의 일면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산층과 하층이 매우 날선 대치를 했고, 그야말로 모두에게 불확실한 시기였다. 그 때문에 20세기의 전체주의는 폭동이나 전쟁과 같은 거시적 폭력과 일상의 폭력으로 미래에 계급 갈등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내쫓고자 했다

노동조합과 정당을 욕하고 국가가 약탈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들은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를 많이 고려하는데, 사회적 지위는 지식이라는 무형의 가치와 의미라는 상징 자본으로 그 가치를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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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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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미국 민중사와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깨어있는 양심'이었던 하워드 진은 전세계에서 정말 보기 드문 행동주의적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애틀란타에 있는 흑인 여자 대학 스팰먼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학교 당국에 의해 해고를 당하기 전까지 미국 진보주의 운동과 반전운동에 있어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는데요. 이후 보스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국 사회의 본질과 '병영 국가'로서의 미국을 파헤치는데 온 힘을 다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2010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시민 운동과 시민의 권리에 영감을 안겨줬던 그를 후에 노엄 촘스키는 실로 애석하게 여겼는데요. 사실 그동안 촘스키의 저작을 통해 하워드 진의 존재를 익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이제서야 그의 저작 하나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미 위키백과나 수많은 기사 자료들을 통해 하워드 진의 정력적인 활동과 살아온 자취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정말로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몸소 체험한 진정한 지식인인 하워드 진에 대해 실로 겸허한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그의 이력을 접하게 되는 많은 분들도 똑같은 마음이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하워드 진의 진실된 이야기를 끄집어 낸 언론인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은 이미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대가들과의 대담을 훌륭하게 이끌어낸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국내에 번역된 촘스키와의 여러 대담집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그리고 강주헌 선생의 번역 또한 크게 나무랄데가 없어서 읽는 내내 편한 마음으로 글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가의 큰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은, 원제 "Conversations on History and Politics"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책은 고유한 주제를 담은 총 8장의 구성으로 하워드 진이 알생에 걸쳐 천착한 학문적 양심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국내에 번역된 하워드 진의 글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이 책은 그의 사상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글이리 여겨졌습니다. 특히,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은 현재 미국은 거대한 군국주의적인 체제에 제국주의적 이해 관계를 몸소 달성하고 있는 국가로서, 이 외형적인 민주주의적 국가가 어떻게 지난 세기 동안 병영 국가화가 되었는지에 대해 하워드 진과 데이비드 바시미언의 대담을 통해 밝혀 나가고, 그 와중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흑인에 대한 권리 운동과 시민들의 불복종 운동 및 반전 운동에 대한 하워드 진의 과거 행적들을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제 임의로 정해본 1장과 2장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도 한데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분석하고 그에 따른 첨예하게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지배 계급의 논리가 어떻게 일반 시민들의 관념에 침투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그들의 논리가 재생산 되는지를 논하고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미국이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정부가 매우 성공적으로 기업과 결탁하고 그러한 자본주의 하에서 어떻게 '자유 시장 free market' 이데올로기로 진화되어 왔는지를 독자들에게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은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화신'이라 자임하면서도 소위 국익을 위해 다른 권위주의 국가와 독재 체제의 버팀목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것은 CIA와 군이 일원화 된 체계로 각지의 전쟁에서 노력한 결과로 이 글에 등장하는 해병대 출신의 인물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진은 미국을 소위 '군국주의 국가' 내지는 '병영 국가'라고 지칭하고 있었는데요. 좀 더 엄밀히 분석한다면, 막강한 산업정치적 권력을 지닌 '방산 업체'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변형된 이 '방산 자본주의'가 엘리트 정치 전반을 관장하고 이런 결합이 저들의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포섭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바로 여기에 시민의 정치는 실종되었다는 것이 하워드 진의 일관된 논점이었습니다. 즉, 루소를 발언을 통해 지금의 미국 사회를 인용하고 있는 하워드 진은, "가까운 미래에 공고히 할 전문가 계층의 정치에 따라 시민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규정될 만큼 이 해석상의 관계가 크게 어긋난 부분이 없어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렇듯 체제의 변화를 일종의 '국가주의화'로 그는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사실 사회학에서의 사회진화론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럽게 여겼던 '국가주의'와 하워드 진이 인식하고 있는 '국가주의'는 사뭇 다른 내용이기도 합니다. 특히,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병영 국가로서의 국가주의'는 앞선 부분과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장과 2장, 뒤이어 논의되는 3장과 4장에서도 이런 미국의 국가주의가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제한시키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함께 엘리트 지배 계층의 또다른 이해관계(자신들이 속한 기업의 이익 뿐만 아니라 국방비와 방산 업체의 이해 관계에 따른 다른 이익)에 봉사해 전쟁을 거부할 시민의 권리조차도 국가의 명령에 시민들이 승복하게 되는 악순환을 진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지배 엘리트들은 명예롭지 못한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발생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과 작전중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시민들이 더이상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마찬가지로 헬리버튼과 같은 용역 회사들의 전쟁을 통한 이익, 중동 내 있는 유전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는 등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그래도 '온건한 제국주의'를 통해 세계 안보에 이바지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미국의 '안보주의'가 마찬가지로 국가주의에 투신한 일례를 증명하는 것이라 저자는 밝혀내고 있습니다.

다음 5장은 '시민들이 왜 비판적 인식을 키워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제언이 담겨 있는데요.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펼 때, 마땅히 시민들이 비판을 해야한다"는 맥락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더 많은 독서를 통해 매스컴이 주입하는 정보들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는 부분도 동의할 수 있었는데요. "종일 TV만 보는 사람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2차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실제로는 명분이 없었고, '후세인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핵무기 1개 때문에" 미국이 지역 안보를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당국의 주장들은 만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소위 '우위의 도덕적 관념'을 이중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 견고화된 이데올로기가 충분한 교육과 지식 활동으로 축적된 것이라 인정하는 저자는 단순히 이념적 차이 때문에 반대편에 있는 시민들을 '세뇌당했다'고 터무니 없이 비난하는 것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러한 지식활동과 교육이 맹목적이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의 총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여겨지는데요. 그래서 듀이가 말하는 시민 스스로의 교육이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는 것이든 간에 '시민의 의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한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반지성주의'가 인용되는 마지막 장에서 현재의 미국 정치가 처한 일면을 저자의 인식을 통해 정확히 목도할 수 있었는데요. 텔레비전이 대다수가 되어 시민의 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더욱 시민들이 책과 멀어지는 것이 아마도 작금의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토양이 되었을 겁니다. 애초에 투철한 도덕적 관념을 지니고 있는 엘리트들이라 할지라도, 2세기가 넘는 동안 대중 정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저들이 일반 시민들이 사색과 이론을 통해 정치적으로 무장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많은 사회학자들의 인식이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이 만연된 오락거리에 노예가 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그런식으로 실제 정치에서 멀어지는 것을 오히려 반기는 것이 하워드 진이 말하는 지배 계급의 어쩌면 원하는 바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행동주의로 갈 수 있는 교두보가 선험된 지식들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고,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변별력이 없는 시민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이겠죠. 이는 촘스키도 그랬고, 바우만 역시 숱하게 강조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하워드 진 역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사색하라고 시민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는데요. 작금의 네트워크의 출현과 그에 따른 온라인 상에서의 국경을 초월한 문자의 접근성을 오히려 극우들과 왜곡된 보수 우파가 더 유연하게 이용하는 것은 가짜 뉴스와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는 변별력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전역에 파견하는 미군이 좋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의도가 순수한 거라고 그들은 전제한다. 하지만 세계를 약탈한 미국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런 전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의 교묘한 결탁이 있었다

오웰의 ‘1984‘는 요즘의 세계를 불안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주는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여론조작, 언어조작, 사용되는 선전 문구, 악랄한 외교정책에 붙여지는 명칭, 폭격과 전쟁에 붙여지는 이름 등이 섬뜩할 정도로 비슷하다

‘안보‘라는 단어는 국가주의의 산물이다. 다른 나라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폭격하는 짓은 그 나라 국민의 안전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은 유럽의 구 제국들, 예컨대 영국과 프랑스에게서 중동 석유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양도받았다

결국 미국은 민주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경찰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후 나는 사회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가졌고, 대부분의 사람은 무력하게 의사 결정자들의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18세기 말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세계에는 공학자, 과학자, 성직자 등 온갖 전문직 종사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시민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무자비하고, 그 어느 때보다 기업과 결탁되어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군국주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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