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이렇게 -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마이클 왈저 지음, 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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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지 공공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마이클 왈저는 노엄 촘스키와 하워드 진과 비견될 정도로 행동하는 양심으로도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는 매사추세츠 월섬에 있는 브랜다이스 대학을 거쳐, 명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로버트 노직과의 논쟁에서 드러나듯 사회 정의와 체제안의 구조화 된 소위 '복잡한 평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민주 정치를 비교적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런 연계에서 시민의 사회 참여를 위한 지식인의 의무와 시민 정치의 확대 필요성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치 이론과 관련해서는 레오 스트라우스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 독보적인 학자로 여겨지는데요. 그만큼 왈저의 사상적이고 학문적인 영향력을 인정하는 이들이 많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Political Action"으로 지난 197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왈저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이 글의 주요한 목적 의식에 대해 일정 부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종식과 부패하고 전제적인 리더의 퇴진을 요구할 경우,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는 마치 2016년 한국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운동의 선명한 정치적 목표를 짐작하게 할 만한데요. 이는 글의 17장에서 거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는 "일상에서든 급진적 의사표시에서든, 시민 정치는 성격상 총체적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문장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저는 앞선 문장이 이 글의 주제 뿐만 아니라 시민 정치의 중요한 목적 의식을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아무리 시민들 개개인의 의지가 모인 힘이 별반 보잘것이 없어 보이더라도 사회와 우리 정치의 건전성을 위해 그것은 매우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반해 시민들의 과도한 이데올로기화가 '급진주의 세력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왈저의 경고는 특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 이론가들에 의해 시민들 각자가 갖고 있는 정치적 인식과 관련해, 이를 명확히 규정하는 수단에는 '도덕적 명분 혹은 도덕주의'가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 있음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현실정치에서 꽤나 시대착오적인 인식으로 매도되기도 하는데요. 민주 정치에 있어서 다원주의와 더불어 이 도덕적 투명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정치 전반의 건전성이 매몰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선 주장들의 맥락들이 특히 신자유주의의 개인주의적 이기심의 옹호와 사회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돈과 자본'이 중요한 기준으로 순위에 오르게 하는데 기여한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엘리트 지배체제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마이클 왈저의 이 글은 현시대의 정치 문제를 과거와 비교하여 분석할 수 있는 현실의 인식 차이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이 책에 대해 꽤 놀랐던 감정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이 글이 번역되어 널리 읽혀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고 사회에 깔려있는 막연한 정치적 의견들이 어떻게 합치되어 앞으로의 체제를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독자나 시민이라면 이 책의 일독이 꽤 유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왈저는 오늘날의 SNS를 비롯한 온라인 상에서의 활발한 의견 개진과 교환을 딱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정치 참여라는 이 명분과 실효적인 가능성이 이러한 인터넷 공론장이 아니라 '직접 대면'에 있다고 그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요즘의 MZ세대들은 이러한 저자의 강경한 원칙론에 반대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사실 여론의 형성이라는 것이 요즘의 정치에서는 제법 중요한 화두이지만 막연한 구호나 주의 정도로 온란인에서의 정치적 각성 내지는 감화가 본질적인 의미를 갖기에는 한계가 명백하고, 이른바 정치적 운동이 스스로 생명과 실천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이 이슈에 대한 공감대, 정치적 의견의 상호 교환으로서 그런 전제를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이를 가볍게 아날로그적 감성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그것의 진정성은 충분히 공감이 될 정도입니다. 애초에 이러한 운동들이 명백하게 '정당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좀 더 명확한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 글 1장과 5장까지의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이 정치적으로 유사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을 우선적인 갖추는 것이 운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왈저는 일개 시민이 기존 체제의 불만이나 심각한 불평등으로 인한 정치적 각성이 수반되었을 때, 흔히 운동에 관심을 갖게 마련인데. "하지만 세상은 거의 변하지 않을 것이며 기존 제도와 관행 또한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운동을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현실에 좌절하게 되어 끝내 극단적인 혁명에 심취하게 되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왈저는 사회운동가와 혁명가의 비교를 통해, 과거의 혁명이 사회에 별 반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폭력으로 치닫게 한 역사를 반면 교사로 삼고 있었습니다. 위와 같은 맥락은 현실 정치 개선을 위한 사회 운동이 끝내 좌절에 이르렀을 때, 혁명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자포자기 할 그 시점에 급진주의와 극단주의의 망령이 끼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종주의와 극우적 사고에도 마찬가지로 급진주의가 폭력을 획책할 가능성이 있기에 사회운동가라는 의미에 미리부터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일반적으로 특정 집단이 감내하고 있는 피해나 불의에 대응하려는 운동" 자체에 대해 왈저의 설명이 다소 부족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흐름 전반이 일종의 도덕적 불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전자는 앞선 진술과 일관되게 "운동이 사회 내에서 생명력을 갖게 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사회적 공감대와 불만과 불평에 대한 공감이 정치 운동으로서의 세력화에 이바지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왈저의 언급대로 "유독 중산층들에게 보이는 도덕적 감정에 대한 일관되지 않는 사항"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열위한 계층의 도덕적 인식론보다 민주주의를 위해 그만큼 중요한 맥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고 있는 이들 중산층들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다원주의와 도덕주의를 백안시 한다면 체제 전반의 미래가 암울한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상의 시민 정치가 이들 중산층의 공통된 정치적 함의와 목표 의식에 달려 있는 만큼 최소한 자신들의 사적 이익과 관련된 행동들이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 균형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내에서 중산층의 의무와 역할이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 맞닿아 있다고 봐야하는 것이죠.

왈저가 글의 전개 과정에서 거듭 언급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갈등론이 그것 자체로 그가 민주주의에 회의를 갖고 있따고 인식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민주적 통제가 도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노동단체들과 같은 경우와 실제적인 정당 조직에 가까워진 '일부 운동 조직'이 수직적인 명령 하달 방식 등을 민주적 방식의 위협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이슈에 대한 공감대와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경우일텐데요. 이들이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하부로서 그리고 여론을 이끄는 주체로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민주주의적 갈등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자인 왈저의 이론은 이 점을 다소 명확하게 언급하면서 일부 운동 조직에 대한 비 민주성에 대해서도 순순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13장 이후에 인정되는 '조직 내의 분파주의'에 관련된 문제에 이관될 수도 있지만 '공통된 이슈'에 대한 논의가 끝내 '공동의 정책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모두가 만족하는 수준으로 이르는 것은 꽤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왈저는 일개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그에 따른 행동과 조직에 대한 참여 및 나중에 정당과 연수하게 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실 바깥에서 일부의 선의라도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이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이 부분은 과거 키신저에 의해 추진된 캄보디아 침공에 따른 반대 운동에서 그가 맞닥뜨린 냉엄한 현실이라고도 여겨집니다. 마이클 왈저의 이러한 인식은 마누엘 카스텔이나 노엄 촘스키와도 다르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따라서 맹렬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꽤 견고한 현실주의적 입장이라 이 글의 논증들이 그만큼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글의 전반적인 논증에 있어 12장은 약간의 첨언과도 같은 부분이라 따로 서평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는데요. 여기에선 과거 미국 정치가 여성들을 어떻게 수단화 했는지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유독 여성들이 현실 정치에서 남성들과 달리 배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한나 피트킨의 여러 글들이 하루빨리 국내에 번역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운동의 목표가 괌범하고 긴급할 때, 이를테면 전쟁의 종식, 혹은 부패하고 전제적인 리더의 퇴진을 요구할 경우,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아야 한다

인터넷에서는 매일 수천수만명의 사람들이 글과 이미지를 남기고 교환한다. 참여민주주의처럼 보이는 것이 극단적 양극화와 끝없는 논쟁을 낳고 있다

두 번째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벌어진 부정이나 해외에서 우리 정부가 자행한 불의에 대한 분노, 개탄, 슬픔이 정치활동을 낳는 경우다.

침묵하고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 즉 오랫동안 참다가 이제부터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든 운동이 벌이는 활동은 사회 변화를 셜멍하는 ‘참된 이론‘에 의존하지 않으며 의존할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 특정 집단이 감내하고 있는 피해나 불의에 대응하려는 운동은 바로 그 집단에서 지지를 구하고자 한다

노동자들은 ‘아래로부터‘ 조직되어야 한다는 좌파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인식은 조직가의 오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 해도 협력은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 현실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작은 선의에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더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될 수 있고, 그런 주장들이 운동에 관한 논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시민정치가 성공하려면 (특히 지역 수준에서) 시민 리더의 육성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말뿐이고 글뿐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과 글은 효과, 심지어 중요한 효과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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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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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의 프랑스 문학에 대한 권위자이자 번역가로서 그리고 사회사상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우치다 타츠루는 그의 저서와 발언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꽤 개혁적인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평화 헌법에 대해 뚜렷하게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나 2011년 3월 대일본 지진 이후, 일본 내에서 강하게 불었던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명확한 의사 표시를 한 것으로 보았을 때도, 도쿄 전력이 일본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기업인지 잘 알고 있는 그가 그러한 발언을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정부가 주도하거나 견고한 보수 여론이 주가 되고 있는 여러 의견에 반대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일본 사회학계가 비판의 원동력을 이미 상실했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그를 리버럴 지식인으로 폄하할 수도 없는 것인데요. 뿐만 아니라 기존의 상아탑 체계에서의 권위있는 지식을 다루는 것보다는 시민들을 위해 끊임없이 글을 써 나가고 있는 부분도 그의 사회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문화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비판을 가한 이 책은 원제, "女は何を欲望するか?"로 지난 2002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이 책을 일독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주디스 버틀러의 학문적 명성이 최근 뿐만 아니라 꽤 오래전에도 지속되어 왔다는 점일텐데요. 버틀러에 대한 페미니즘 운동 일각의 평가가 다채로운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나, 특히 그녀가 페미니즘에 대해 꽤 객관적인 태도 보여왔다는 점은 역시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일 겁니다. 그럼에도 그녀 역시 여러 공격을 당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헤겔 강의로 당대의 프랑스 사회학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요. 그런면에서 마크 릴라가 왜 코제브를 굳이 다룰 수밖에 없었는지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핵심 주제를 담은 장(章)이라 할 수 있는 2장에서 이미 보봐르는 배타적 페미니즘 운동의 비타협적인 노선을 차치하더라도 코제브에 상당한 영감을 얻은 그녀가 남성과 여성간의 사회적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치열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그 계획이 1970년대 이후 전세계 페미니즘을 일정 부분 변질되게 한 원인이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물론 이러한 화살을 전적으로 보봐르게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상인던지 그것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때론 왜곡도 불사하는 취사 선택의 행위를 하는 바로 그 수용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겠죠.

이에 우치다 타츠루 역시 현재의 페미니즘 및 페미니즘 운동이 고유한 사회학 이론이 늘 그렇듯이, 페미니즘으로 모든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했으며, 전적으로 그런 측면에서 일본 내의 페미니즘이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유혹에 손쉽게 빠져들어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정밀하고 실용적인 검증 과정을 아예 도외시하게 된 것이 바로 래디컬 페미니즘과 같은 극단주의를 초래한 원인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저자의 지적대로 페미니즘 자체가 건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초석으로서 충분히 그 필요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부권주의'로 이해되고 있지만 가부장제도의 폐해 또한 분명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부분이 거부하고 반감을 갖고 있는 '여성성'에 대해, 저자는 푸코를 인용하면서 어떻게 보면 여성성 자체가 사회학적 개념으로 명확한 실체가 보이지 않는 문제로서, 그것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성상품화에 가로막혀 오로지 사회적 쾌락에 힘쓰고 있는 상황을 꼬집고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적 성상품화에 마땅히 반대하고 개선을 요구해할 당사자들이 반대로 돈과 사회적 자원의 획득이라는 표면적인 이유에 매몰되어 오히려 이를 여성들에게 피치못하게 권유하게 하는 웃지못할 상황까지 이른 것이죠. 그런 점에서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1980년대 이후, 전세계 민주화 운동의 주류가 견고한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여러 획기적인 개혁의 소산으로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불식시켜 이를 통해 진정한 여성주의 운동을 사회에 뿌리 내리게 하겠다는 기획이 100 퍼센트 이상주의에만 경도된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뭐, 우선은 2장에서의 보봐르에 의한 초기 페미니즘의 이론적 고찰로서 당시 남성이 전반적으로 주도하고 있던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하면 여성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수 있을지를 강구하면서, 그러한 기존의 기득권 체제에 진입한 뛰어나고 현명한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위해 체제 전반을 개선시켜 나간다는 이러한 야심찬 계획들이 보기좋게 무산된 사회적 역사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기존 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여성들이 결국 킹즐리 브라운의 해석대로 '권위주의적인 또다른 남성화'로 스스로 변질된 것이었죠. 그러니까 기존 사회 체제의 자원을 획득한 유능한 여성들이 결국은 다수의 여성들을 위해 체제를 개혁하는데 힘을 전혀 보태지 않은 상황은 사실상 견고한 자본주의적 계급화를 개선시켜 나가는데 결국 중대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페미니즘이 사회적 운동의 크나큰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사회적 자원의 분배라는 공정성 문제에 국한 해 생각해 본다면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여성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자신들의 이익 추구와 높은 지위 획득에 몰입하게 됨으로써 거의 완벽하게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화가 달성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흐름 자체를 거부하기는 커녕 이러한 과정들이 사회가 자본주의를 내면화시키고 그 구성원들인 시민들이 저항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서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전세계 페미니즘 운동이 앞서 언급한 대로,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와 확신된 신념을 기반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이해하려 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두의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고 판단합니다. 오로지 단일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를 획일화로 이끌고,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에 반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부분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요. 이후 3장과 4장은 이러한 기본적인 언어 사용과 학문적 맥락에서 페미니즘적 이론에 정통한 쇼샤나 펠먼과 같은 이론가들의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언어 혹은 말하기'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사되기가 어려운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존의 말하기와 언어 구사의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남성 문화의 전유물로 규정하고 이를 타파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의 발로인지는 불명확한 일이기도 한데요. 문학 이론에서 독서와 말하기는 스스로 자아와 작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마저도 외부 요인으로 규정될 정도로 글과 독자와의 관계 자체는 매우 내밀하고 진지한 성찰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독자들이 남성주의적인 언어로 점철된 글을 그저 수동적으로 인식해 나가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미 내면에서 그 수많은 글자들의 행로에 자신의 자아가 반응하게 되는 것이죠. 이를 간단히 풀어보면 루카치식의 문학적 수용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고로 저자의 요점은 페미니스트들이 무분별하게 말하는 성화(性化)의 인식을 강요하여 그것을 오로지 수용하게끔 만드는 그런 이론들이 검증조차 되지 않은 주장들이라는 것입니다.

초기의 페미니즘 운동이 애초에 남성성에 대한 배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전반을 남성주의로 해석하고 이것을 구축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라는 미명으로 배타적인 노선에 들어선 것이 적지 않은 페미니스트들의 사상적 행로일텐데요. 순전히 여성을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객체로서 열화시키는 행위 자체가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갖고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차라리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지언정 여성들이 보봐르 식의 사회 변혁에 한 팔 거드는 것이 자본주의적 계급에서 하층에 있는 여성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텐데요.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하층에 위치한 남성들을 구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각자가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힘을 얻어 그것을 가지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변혁에 나서는 것, 이것이 전도유망한 방법입니다만 현재의 자본주의는 역시 만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시민들을 '상업적 태도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해제시키고 있기에, 소비 문화주의라는 그 일면의 본질을 빨리 깨닫지 않는다면 진정한 페미니즘이 사회에 발현될 길은 매우 요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성성 및 남성주의 혹은 그 기반에 대한 거부와 비난'에 힘쓰기 보다는 시민을 괴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내면화를 공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골적인 여성들의 성 상품화에 대한 진지한 액션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해석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 되었기에 이것을 사회에 분리해 내어 규명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건전한 사회와 시민의 삶에 대한 안위가 달려 있는 것이겠죠.



-저자인 우치다 다츠루 역시 건전한 페미니즘이 올바르다고 인정하고 있고 사회를 좀 더 건전하게 하는 데 있어 이러한 페미니즘이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적이 아닌 해석을 ‘부권제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해석‘이라는 딱지를 붙여 내치자 거의 누구로부터 반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상력을 결여한 편협함, 비관용성, 독단적인 테제, 공허한 용어,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다

남성과 여성 간에 주체로서의 이니셔티브와 사회적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치열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고 하는 이 보부아르의 계획은,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보부아르는 이것을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헤겔 강의를 통해 학습했다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우리는 모두 우의식중에 ‘우리 안에 박혀 있는 남성적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열의를 담아 이러한 등장인물을 묘사하고, 우리는 그 허구의 인물에 깊이 빠져들어, 그들의 보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접한 것을 접한다

독자가 읽어내는 ‘의미‘는 텍스트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권제 사회에 있어서, 모든 독자는 남성중심주의적인 의미만을 읽어내도록 제도적으로 강요되고 있고, 독자 개인에게 ‘읽기의 자유‘는 주어지지 않으므로, ‘읽기의 자유‘는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페미니즘 언어론의 기간을 이루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페미니스트가 실행하는 읽기만이 ‘자유롭고 올바른 읽기‘이고, 그 외의 모든 읽기를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오독‘으로서 배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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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제국 상호의존성단 시리즈 1
존 스칼지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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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멜로 소설이라 할 수 있는 '노인의 전쟁'으로 유명한 존 스칼지는 소설 뿐만 아니라 금융. 비디오 게임, 영화, 천문학, 정치 등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입니다. 후에 자신을 공화당원이라고 소개하면서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그와 관련된 여러 기사들과 온라인에 공개된 행적들을 봤을 때, 여타 일반적인 소설가로는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사회와 소통한다는 것은 작가로서도 충분히 긍정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는 이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여러 기부 활동과 그리고 팬들과의 소통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가 SF 소설에 집중하게 된 연유를 정확히 가늠해 볼 수는 없지만 휴고상을 수상하고 평단에서 '상호의존성단' 시리즈의 호평을 받은 점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남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Collapsing Empire"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대략 천 년전, 지구와도 연결되었던 플로우가 끊기면서 인간이 문명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각종 자원을 서로 분배하여 생산하고 그런 권리를 보유한 가문들이 체제 내에서 준독점적 지위를 인정받는 행태의 이 '상호의존성단' 시스템이 글의 주요한 배경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플로우는 일종의 웜홀이나 화이트 홀과 같은 우주의 한 지점인 A와 다소 멀리 떨어진 B지점을 빠르게 연결하는 우주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플로우로 연결되는 각 시스템은 인류가 생존하기에는 난망한 지역이었지만 이들은 이 플로우를 생명선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문명 발전을 지속하게 됩니다. 보통 행성과 어떤 다른 지점으로 우주를 여행하는데 광속의 개념이 필요하다면 이 광속보다 더 빠르게 여행을 보장했던 것이 플로우였고 이 플로우를 따라 새로운 인류가 번성하게 된 것은 어쩌면 강한 개연성을 답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세계는 정치-상업-종교라는 3개의 권력 분업으로 지탱되고 특히 느슨한 봉건제하에 특정한 상업 생산을 귀족 가문이 독점하게 됨으로써 이들이 경제 권력과 사회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체제로 소개됩니다. 전반적인 스토리 진행은 특정한 주인공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맞이하게 되는 붕괴의 자취를 따라 여러 인물들의 행적이 주된 서사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항성과 다른 항성간의 거리를 감안하더라도 이 플로우의 축복으로 40여개의 시스템이 우주선으로 연결되고 이러한 체제 전반을 황제와 상업 귀족이 권력을 분산하여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소수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계층을 제외한 일반 평민 혹은 시민 계층은 스스로의 자기 결정권을 갖고 있지 못하며 상업적 이익과 경제적 권력이 조화와 선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우주 전체가 이익 활동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배경의 설계는 인간이 스스로 땅을 딛고 살 수 있는 지역이 '엔드'라는 한 곳 뿐이라는 점과 나머지 시스템은 콜로니거나 아니면 황제궁이 있는 허브폴의 경우처럼 지하를 타고 들어가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인위적으로 만든 지역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설정을 보고 '익스팬스'의 배경이 생각나기도 했는데요. 한정된 자원의 생산을 소수 가문이 독점하고 있고 그러한 체제에서 황제가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설명들은 제게 뭔가 기시감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우매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특별한 우주적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불변하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을겁니다. 주변의 자연 법칙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플로우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흐름과 그것을 배경으로 확고하게 지속하고 있는 소수 가문들의 권력 답습이 만약 플로우가 붕괴되거나 예전처럼 기능을 지속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예측할 만한 일이죠. 이 부분에선 유독 슘페터의 주장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스스로가 지극히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는 시스템이 그렇게 철썩같이 믿고 있는 믿음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것을 숱한 클리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극히 냉소적인 교훈까지 겹쳐 있게 되지요. 더군다나 여기의 귀족이라는 자들은 700년 전에, 플로우가 단절되어 고립된 2천만명을 손쉽게 버린 행적도 있기까지 합니다. 오로지 시스템의 유지라는 목적만으로 말입니다.

저는 SF가 그 존재 이유만으로도 일정 부분 어리석은 사람들을 개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고전 장르의 순수성을 차치하더라도 SF만의 나레이션은 우리가 미래의 지표를 예측할 수 있게 하거나 또는 인류의 오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디스토피아의 한 귀퉁이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스칼지의 이 글, 특히 2부에 막간으로 들어가 있는 부분은 참으로 이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치밀한 사적 욕망이 생존의 문제라는 벽을 만났을 때, 과연 권력에 심취한 인간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수 있겠는가가 저의 주된 관심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삶의 기억을 갖고 있는 여황제가 새롭게 즉위해 들어간 '기억의 방'에 이 상호의존성단과 플로우가 거짓의 위에서 시작했다고 말하는 나레이션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짓의 위에서 탄생은 것은 마땅히 거짓으로 끝나야 한다는 음성 또한 매우 진실된 느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쯤에서 여러분도 플로우를 무엇으로 비교하고 계실지 짐작됩니다. 우리의 사회에서 플로우로 빗대어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요.

끝으로, 순수하게 자신의 이익으로 나아가는 자가 과연 모두의 운명을 책임지게 될지는 다음 2권에서 만나볼 수 있겠는데요. 맹목적으로 이익에만 온전히 몰입하는 자들은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해 무언가를 던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냉소하죠. 또한 비웃습니다. 2편의 내용이 어떨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제법 기대가 되네요. 저는 소설 자체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는 사람인데 스칼지의 이 작품은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너무 잘 그려내고 있어서 그것대로 문제입니다. 보통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란 장르가 때론 알맹이가 없는 화려함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스칼지는 아마도 그렇게 가볍게 서사를 동원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좀 더 기대하고 즐겨봐도 될 듯 싶습니다.



-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 '기억의 방'은 꽤 신선한 발상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을 달리 해석해본다면 인간의 의식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지는 저의 짧은 지식으로 가늠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상호의존전단의 종말을 원하지는 않아. 우 가문을 포함해서, 너무나 많은 돈과 권력이 달려 있다" 아타비오 6세가 말했다. "인류의 생존은 중요하지 않고요?" 카르데니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것이 상호의존성단의 종말을 의미한다면, 중요하지 않아."

의회는 여전히 문제 제기 자체를 자기들을 주변화하려는 정치적 음모라고 볼 거고. 아무도 무역이나 길드 가문의 특권에 훼방을 놓고 싶어하지 않아. 또한 이번 경우는 달라시슬라처럼 하나의 시스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 전체의 문제야. 도망갈 곳이 없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가 현재 대공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그 자신을, 그의 집안을, 엔드에 있는 그의 재산을 걸고 과잉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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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5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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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5 1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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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앨버트 오토 허쉬먼은 제1차대전이 한창이었던 1915년에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도 교육받은 유태인으로서 당시 독일에 팽배해 있던 파시즘에 대항해 파리로 이주했고, 파리 소르본 대학과 런던 정경대를 거쳐,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에 항복한 비시 프랑스 체제 하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유럽의 많은 예술인과 지식인들을 미국으로 탈출시키는 협력자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요. 이후 도미해,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록펠러 재단에서 일을 하며, 미국애 정착하게 됩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CIA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략 사무국인 OSS에서 1943년부터 1946년까지 복무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콜롬비아 국가기획위원회의 재무 고문으로 일하게 된 연유가 이 때의 OSS 경력이 일조하지 않았나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앨버트 허쉬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각계 각층에서 꽤 상반되는 평가를 보이고 있는데요. 그의 생전 저서들을 좀 살펴보더라도 보편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한 경제학자이기도 했지만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풀어서 해석해 보면, 민주주의가 시장 원리와 자본주의에 대해 협력하는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는 당시 냉전시기의 논리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적인 입장에 섰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특히 그는 개혁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세계에 대한 면밀한 통찰을 경제학자 치고는 꽤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책은 원제, "The Rhetoric of Reaction : Perversity, Futility, Jeopardy"로 지난 199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 이 글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글의 원제를 생각해 본다면, 독자들은 국역으로 번역된 제목을 약간 글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원제의 '레토릭'을 허쉬먼의 주장대로 '반동에 준하는 레토릭'으로 이해한다면 보수주의가 어떻게 1800년대 계몽의 시기의 진보에 이르는 마땅한 인간의 권리를 어떻게 무력화시키려고 했는지를 꽤 상세히 분석한 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허쉬먼이 보수의 반대가 반동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논하고 있진 않지만 앞선 언급대로 인간의 문명이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의 권리와 사회의 진보를 마땅히 요구하거나 이룩해 나갈 수 있는 그러한 '나아감'을 문제의 '레토릭'으로 시민들을 오도하려는 시도로 읽혀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것도 꽤 온건한 어조로 돌려 말하는 것입니다. 뭔가 칼 포퍼의 유명한 경구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은 보수 아니 반동에 가까운 자들의 "자유를 얻으려는 시도는 사회를 노예 상태로 떨어뜨릴 것이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면 과두정치나 전제정치를 만들어낼 것이고, 사회 복지 프로그램들은 빈곤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게 할 것"이라는 에드먼드 버크가 생존해 있던 시기의 설득력이 전혀 없는 허위적 인과와 다름없는 이 프로파간다가 허쉬먼이 비판하고자 하는 골자의 중심입니다. 오늘날 건전한 보수의 대부로 여겨지고 있는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일어난 민중들이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하게 된 것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단두대 정치를 이끌었고 끝내 나폴레옹의 군정을 잉태시켜 그 혁명이 어떻게 자유와 하등 상관없게 되었는지를 냉소했던 바가 있습니다. 혁명에 대한 그의 경멸은 덤으로 말이죠. 이런 버크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하기 전에, 저자인 허쉬먼은 이 글 4장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시민 대부분의 참정권 확대가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용을 통해서 말입니다. 1920년대까지 민주주의가 당시 사회주의와 동급으로 치부될 만큼 위험한 것이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당시에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귀스타브 르 봉의 냉소처럼 프랑스 혁명의 영향은 때론 잘 보이지 않을수가 있습니다.

국내의 적지 않은 정치학자들 가운데,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이뤄지는 선거와 시민들의 선거권에 대해 제법 경멸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평가하기 앞서, 유럽 역사의 획을 그었던 계몽주의적 흐름에서 조차 평범한 시민들에게까지 확대하는 참정권 투쟁 역사는 너무나 지난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권이 마치 휴지조각처럼 치부가 된 것은 민주주의가 엘리트 지배체제의 한 방편으로 전락한데 있습니다. 이것이 오로지 민주주의의 폐해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책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르 봉은 군중은 위협적일정도로 강하고 저급한 생명체라고 일갈을 했었죠. 그와 생각을 같이한 허버트 스펜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심대한 냉전의 갈등시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1900년대 초반까지도 보수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참정권의 부여"를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여겼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정 부분 재산을 가진 자들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논리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겠죠. 그래서 허쉬먼이 이 글을 쓰게 된 주요 목적이기도 한 거의 반동세력 혹은 이에 동조하는 자들의 '반동적' 주장의 요체인 '위험론과 역효과론 및 무용론'이 특히, 복지 국가 담론과 민주주의의 기본 핵심인 평등, 그리고 이에 상반되게, "과연 민주주의가 자유를 효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겠느냐?" 혹은 "자유가 민주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에 대한 무늬만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하이브리드화 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시민들의 관념체계에 성공적으로 스며들었다는 점을 저자는 밝히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경제학자의 논리 치고는 꽤 색다르다고 볼 수 있겠죠.

제가 일전에 홉하우스의 서평을 통해,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과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그 맥락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전자는 보편적 자유에 가깝고, 후자는 경제적 자유에 가깝죠. 이를 동일한 맥락으로 풀어본다면 이 글에서 허쉬먼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최근에 '신보수주의'가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제가 예전에도 글을 통해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만 자칭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은 그들이 경멸하는 진보주의자들보다 더 열심히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있어야만 하죠, 물론 보수주의가 에드먼드 버크 이후로 3단계의 진화를 거쳤다고 가정한다면 제가 말하는 보수주의는 냉전시기의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를 옹호했던 그 보수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는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이 이미 신자유주의자들과 한 몸이 되어 '하이브리드화'가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맞지 않는 개념일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허쉬먼은 4장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요 논리인 "평등이 자유주의적 자유와 갈등관계에 놓일 것"이라는 이 유명한 우려를 마찬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그들 스스로의 중요한 레토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요. 이 부분은 로버트 달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동일한 맥락으로 "단언코 평등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복지와 관련된, 복지 국가 담론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평등을 자유의 무슨 해악으로 여기는 행위는 민주주의자라면 참을 수가 없는 것이죠. 복지와 관련된 저들의 레토릭을 보더라도, 허쉬먼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복지 국가 담론이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복지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사실상 증거가 없다"는 것이 그의 비판적 평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 보수 혹은 보수주의자들은 이처럼 민주주의에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앵무새처럼 자신이 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말은 하겠지만 기본적인 논리 조차, 혹은 어떤 가치에 어떻게 위협이 되고,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죠.

다시금 강조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시기로부터 지금까지, 허쉬먼이 다루고 있는대로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위한 진보에 대한 가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진보를 안 믿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찌됐든 사람들의 권리가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한 것처럼 "마땅히 사회에 필요없는 자들은 도태시켜야 한다"는 인간 이하의 논법들이 공감대를 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니까요. 물론 이러한 가운데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 또한 마땅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본주의가 어떤 비판도 용납할 수 없는 성역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하고, 민주 정치가 당연하게 시장을 보호하는 데만 책임을 다하고 시장 자유를 맹렬하게 지켜내야한다는 신보수주의자든 신자유주의자든 뭐라 불리던 간에, 그러한 주장들이 터무니 없는 '반동 레토릭들'을 배경으로 재생산되어 왔다는 점은 꽤 우려할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전개로 인해, 민주주의가 경멸을 당하고 있는 상황인데, 과연 전세계는 민주주의가 과잉인 상황일까요? 가까운 미래에 민주주의가 과두제에 이를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득세가 원인일 것입니다. 개혁의 문제를 혁명의 방편으로 여기는 흐름이 이처럼 아직도 강고하기에, 시민들의 변별력 자체가 어떤 측면에서는 소용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의 진보를 위한 개혁과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은 진보주의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죠.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그것은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이 더 옹호해야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반동적 반민주주의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허쉬먼의 이 놀라운 글은 제게 무엇보다 두 가지 부분에서 이채를 느끼게 하였는데요. 그것은 허버트 스펜서와 귀스타브 르 봉을 보수주의자로 꼭집어 지칭했다는 것입니다. 스펜서와 르 봉을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로 스펙트럼화 하는 것이 뭔가 우습다고 해야할까요. 이 지점에서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이런 허쉬먼의 주장에 격렬히 반대해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현재의 여러 논쟁들에서는 일부 ‘진보적‘ 혹은 ‘선의의‘공공 정책이 시행 과정에서 반직관적이고 반생산적이거나 혹은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는 지적들이 제기되곤 한다. 자유를 얻으려는 시도는 사회를 노예 상태로 떨어뜨릴 것이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면 과두정치나 전제정치를 만들어낼 것이고,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은 빈곤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버크는 메피스토의 말에서 선과 악을 뒤집어,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혁명가들의 노력이 사회적으로는 악과 재앙을 초래할 것이며, 이는 그들이 말하는 목적과 희망에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주 초보적인 형태의 보통선거권이라고 해도,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개념이 유럽의 대다수 엘리트 계층에게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는지에 대한 증거는 쉽게 더 모을 수 있다

르 봉은 인간의 우둔함을 체념하며 바라보는 기록자의 태도를 자처하며, ‘시간만이 그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홉스와는 정반대로,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좀 더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토크빌, "(프랑스 혁명) 이후에 우리가 절대권력을 타파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노예와 몸 위에 자유의 머리를 얹는 일에만 성공했을 뿐이다

군중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르 봉과 같은 학자들은 직접적으로 재앙을 예견했고, 좀 더 ‘신중하고‘보다 신랄한 부류는 무용 명제를 차용했다

즉 복지 급여가 가난한 사람들의 행동 양식에 자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돈이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궤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용 명제는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용 명제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준다거나 복지국가의 제도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내세우는 정책들이 그런 일을 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기존의 권력 및 부의 분배를 유지하고 강화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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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심리학
귀스타브 르 봉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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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철학자들의 사회 분석에 대해 내심 인내의 한계를 느꼈던 귀스타브 르 봉은 그런 연유로 심리학에 기반한 국가와 민족을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의학을 전공했음에도 의외로 역사에 조예가 깊기도 하였는데요. 뿐만 아니라 당시에 거의 미지의 세계와 다름없었던 북아프리카 지역을 탐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는 각 인종별로 머리뼈와 뇌의 크기를 분류해 진화론적인 분석을 심리학에 접목시키기도 하였고, 이런 학문적 연계에서 남들에게 흔히 볼 수 없었던 민족에 대한 고유 연구를 완성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군중 심리'에서 보여지듯이 흡사 엘리트 계층에 대비하여 군중을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몰고 간 것은 꽤 논란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관념체계로 이러한 그의 인식을 십분 이해하기란 다소 어려운 법이기도 한데요. 개인적으로 추측하건대, 간접적으로 목도한 프랑스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학자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에 대한 심리학적 근원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전쟁의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대전에 대한 종래의 역사학자들의 틀에박힌 분석을 사실상 르 봉이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Psychology of The Great War"로서 지난 19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출판된 여러 대전사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논저들을 꼽는다면, 마이클 히키와 제프리 주크스의 삼인 공저, 그리고 로버트 거워스의 글입니다. 명성을 얻고 있는 마이클 하워드의 관련 글은 아직 접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그의 책도 일독해 보려고 합니다. 앞선 이들과 같은 역사학의 글과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르 봉의 이 대전사 기록은 일단 '집단심리학적인 측면'에서 1차대전을 해석하고 여기에 덧붙여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그리고 러시아 제국이 심리학적인 불신상황에서 서로를 오판하게 된 연유를 밝혀보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후발주자였던 독일이 성공적으로 산업화를 완성시키고 강대국에 준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자, 자신들의 진정한 적이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이었다는 것을 르 봉은 일차적으로 전제하고, 이 부분과 더불어 집단적 심리주의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만 민족은 마땅히 세계를 지배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공통된 인식하에, 당시 독일 정부와 언론들이 이를 조장해 왔다는 것을 저자인 르 봉이 짚어내고 있습니다. 독일은 1870년 보불 전쟁 이후, 국력과 관련해 견실한 내실을 쌓고 있었고 꽤 견고한 자본주의화를 이룩해 냅니다. 자신들의 국력이 다른 유럽 열강과 비슷해지자, 그들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보유하고 싶다는 원초적 열망에 휩싸이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르 봉은 사실상 독일의 오판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충분히 활발한 상품 경제에 이른 독일이 프랑스와 영국에 자신들의 상품을 파는 것 만으로도 식민지를 보유하는 것보다 이익이 될 수 있음에도 이러한 정치적 시도가 자신들의 국익을 해치는 수준에 끝나지 않고, 당시의 국제 정세를 해치는 결과에 이르렀다고 그는 보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이 모로코에 개입했던 것이, 자신들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경계심을 유발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언급하면서, 이 이후에 모로코 사건과 유사한 국제적 문제들에 대해 카이저의 차원에서 독일 제국이 이를 최종적으로 힘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 않았나 짐작해 보게 되었습니다.


쇼비니즘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당시 독일 국민들의 광신적인 애국주의는 기존에 제가 알고 있던 히틀러에 의해서 처음 유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시기에도 만연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역사적 연원으로부터 게르만 민족들은 주변의 라틴 민족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종족이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르 봉에 인용되는데요. 물론 이러한 타 민족 혹은 인종에 대한 끊없는 편견은 14세기에도 이미 자체로 심각한 수준이었던 '유대인에 대한 편견'보다 심각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 타협할 수 없는 '게르만주의'는 민족적 열망의 시대에서조차 문제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독일인들 스스로 자신들은 여타 유럽의 다른 민족들과 다른 운명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의 카이저가 자신들을 명예로운 과업으로 이끌 것이라는 광신적인 믿음까지, 단순히 프랑스인들에 대한 경멸이나 영국인들에 대한 일축들을 더 넘어서는 꽤 위험한 수준의 분위기라고 판단할 수 있는데요. 더욱이 당시 독일 국민 거의 모두가 하나같이 이러한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병영 사회와 상명하달에 익숙한 이러한 독일인들"이 정부와 언론에 대해 일말의 비판적 의견조차 보이지 않고 있던 점은 실로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인데요. 물론 르 봉의 이러한 독일 게르만인들의 인식이, '군중 심리'에서 보여지는 대중에 대한 불신과 유사한 관념체계라고 단정지을수는 없지만, 앨버트 O. 허시먼의 평가대로 르 봉이 허버트 스펜서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인물로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기존의 저자 자신의 인식이 아예 배제되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총상에 의해 절명했을 때, 온건하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제국의 황제가 이미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예측한 부분과 자신들의 위신을 위해 발칸 반도의 소국가인 세르비아를 이쯤에서 손봐줘야 한다는 요구가 당시의 제국 신민들에게 매우 팽배해 있었다는 분석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어떻게 유럽을 전화의 잿더미로 몰고 갔는지 대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규모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민족이 배타적인 민족주의의 기운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평가는 '몽유병자들'의 크리스토퍼 클라크에 의해서도 증명되기도 하였는데요. 이러한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과거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민족의 자주 혹은 민족의 자립을 인정하는 차원에서의 건전성을 상실한 민족주의가 배타적으로 혹은 폭력적으로 분화해, 이러한 인식적 전통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극단적 유일 종교와 배타적 민족주의는 인류의 앞날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게 하는 요인이라고 봐도 거의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1차대전 당시에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한 민족국가의 운명은 후에 발발되는 2차대전의 상황과 거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는데요. 세르비아 사태에 대해 영국이 자신들의 이익과 하등 상관이 없는 사건이라고 일축하게 됨으로써, 2차대전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세르비아가 겪었던 경험과 거의 다를 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는 발칸 소국들의 후견인을 자처했던 러시아 제국의 차르에게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귀중한 황태자의 목숨값을 세르비아에게 청구하려는 수준에 끝나지 않고, 자신들의 지도를 새로 쓰기 위한 정치적 의도까지 사실상 포함하고 있었던 점에서 파국을 잉태한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야만의 시기'를 어떻게 E. H 카가 "당시 전쟁에 대한 터무니 없는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었는지 저로서는 약간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외교적 치킨 게임에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평화 협상에 대한 노력을 통해, 러시아는 자신들의 세르비아 개입에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오판하고, 독일은 마찬가지로 프랑스를 다시금 손보려고 하는 자신들의 결정을 결국 영국은 중간에서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과신해, 독일 제국이 룩셈부르크가 아닌 벨기에로 쳐들어가 그 나라를 지도에서 지우려고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대로 전쟁은 돌아가지 않았는데요. 저지대에 대한 영국의 이익을 너무나 과소 평가한 독일은 후에 값비싼 대가를 치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독일의 왜곡된 민족주의, 즉, 자신들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다는 이 선민사상은 르 봉에 의해, 증거로 규명되지 않은 "신비주의적인 힘 혹은 신비주의"로 지칭되고 있었는데요. 본디 의학자였던 르 봉이 과학이라는 본질에 의거해, 근거에 기반하지 않는 사상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그도 역시 게르만 민족에 대해 풍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선입견과 유사한 주장들을 이 책에서 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소위 군중들이 야기한 '혁명'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던 그는 독일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의 게르만 민족이 권력과 정부에 대한 수동적인 본능을 마냥 비판하는 것이 논리적인 측면에서 다소 맞지 않는다고 여겨졌는데요. 영국이 끝내 프랑스를 외면하고 중립을 지키게 될 것이라는 이들의 억측을 냉소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전쟁의 원인이라는 점에 국한지어 정치적 행위자들의 비이성적인 결정이 결국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사실은 뼈아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민족의 자주권을 위해 강대국에 마냥 고개를 숙일 수 없었던 세르비아 인에 대해서도 독일의 민족주의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가 양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국민들이 주도가 된 국민국가와 민족이 중요한 주체가 되는 민족국가 개념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있는 점은 인정해야 될 부분이지만 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다시 유럽에 팽배한 민족주의의 대두로 단편적인 수준으로 국한해, 이해하는 것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흔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 프란츠 황태자에게 향한 총성은 당시 유럽을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전쟁의 한복판으로 내몰게 되었습니다. 이에 르 봉은 논란의 이 글을 통해, 무엇보다 급박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러시아의 이 삼자가 자신들의 대사들을 통한 외교, 그리고 급박했던 당시의 사정이 르 봉의 나레이션을 통해 꽤 사실적으로 규명해 냅니다. 순전히 전쟁 양상과 전략적인 측면에서 대전 전체로서의 모든 장면들을 끄집어 내고 있진 않지만, 비참한 참호전과 가스전을 언급하기 이전에 대전 초기 프랑스 방면으로 진격하는 독일군에 의한 저지대 국가인 벨기에 초토화가 독일에게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했다는 점에서, 숙고하지 않은 어떤 정치적 결단에 대한 교훈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는 독일 내에 팽배해 있던 민족주의와 독일 국민의 신비주의적 맹신이 끝내 카이저의 몰락으로 이르게 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요. 독일은 대전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대적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카이저의 내각 전체가 전쟁 행위에 대한 충분한 숙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기록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어쩌면 프랑스를 몰락시키면 영국은 알아서 자신들의 요구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그들의 오만이 바탕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거대한 제국이 이렇게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될 수밖에 없던 부분은 "전쟁은 그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결코 완벽한 것이 될 수 없다"라는 비스마르크의 금언을 절로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르 봉은 이 글의 마지막 장인 7장을 통해, 대전의 미스테리에 대한 몇가지 가설들을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분명 흥미로운 부분도 있어서 얼마간 생각에 잠기기도 했는데요. 르 봉의 꽤 견고한 심리학적인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 이 글이 무엇보다 가장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은 것은,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독일 제국의 카이저, 러시아 제국의 차르, 이 세 사람 어느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의 대응으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리고, 이를 독일이 완강하게 철회하라고 요구했을 때, 만약 러시아가 독일의 요구를 수용했다면 과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독일인들 스스로가 전유럽을 지배할 만한 민족은 오로지 자신들 뿐이라는 맹신에 비추어 봤을때,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이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는 현실을 해가 가면 갈수록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쌓여가는 그들의 불만족과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늠해 집니다. 다소 맹목적인 국민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던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관념의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독단이 오스트리아의 터무니없는 야망과 독단, 러시아의 정치적 무리수와 더불어, 결국 전유럽에 4천만에 가까운 인명 피해를 초래했고, 이는 역사의 반복일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또 다시 히틀러의 등장을 예고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인류에게 있어 결코 초대받지 않은 자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신비주의자들의 유구한 논법대로 역사가 인류를 단죄하기 위한 수순이었을까요. 물론 저의 이런 억측도 르 봉의 언급대로라면 전적으로 '신비주의적인 주장'이 될 것입니다.           



-몇가지 논증적 단점을 제외한다면, 르 봉의 이 작업은 독일과 러시아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내밀한 외교 정치를 꽤 사실적인 수준에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충분한 일독의 당위라고 생각됩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번역 또한 크게 나무랄데가 없었습니다.


-글을 다 읽고 드는 단편적인 생각은 르 봉의 국가에 대한 관념이 지금까지 '국가의 공포'를 터무니 없이 설파하고 있는 자유 지상주의자들의 논법과 일견 유사해 보이는 측면이 있었는데요. 독일 제국이 자신들의 국민을 다루는 일련의 정치적 방법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14년 7월 23일부터 8월 1일 사이의 일주일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기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까지 간단히 요약한 내용은 프로이센이 정복을 통해 태어났다는 점을, 그리고 프로이센이 정복만으로 점점 위대해졌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한다면, 프로이센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럽을 기만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반면에 독일인은 국가를 국가가 설정한 가장 고귀한 목표를 탁월하게 수행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여기고 있으며, 따라서 국가의 권위가 미치는 범위는 국민의 삶 전체이며 국가의 권위는 국민의 삶이 생생하게 돌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때부터 줄곧 새로운 학파의 이론가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독일 국민들에게 자신들은 우수한 민족이며, 그래서 세계를 정복할 의무를 져야 한다는 식으로 설득시켜 왔다

독일이 다른 나라들이 가진 식민지들을 모두다 점령한다 하더라도 독일의 상업적 이익은 독일이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의 교역을 통해 얻는 이익에 절대로 미치지 못한다

1914년 7월 23일부터 8월 1일 사이의 일주일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기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인간들이 군중 속에서 사고하는 방식은 그들이 따로 있을 때 사고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이유는 인간들의 집합은 그 집합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독일로 하여금 영국이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믿도록 만들었으며, 영국의 그런 태도가 전쟁을 초래하는 데 기여하지 않았는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독일 통치차들이 국민들에게 영국과 러시아가 독일을 상대로 은밀히 음모를 꾸미며 자신들을 배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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