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 우리시대의 신앙이 되어버린 '발전'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질베르 리스트 지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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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질베르 리스트는 스위스 제네바에 소재한 국제발전학대학원의 명예 교수로, 일전에는 유럽-제3세계센터의 연구소장을 지내기고 했습니다. 그는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연구와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 이론, 개발론과 발전이 중요시되는 체제 전반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는데요. 특히, 그의 여러 논저들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미국에서도 '발전론'과 관련해 그의 글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제3세계를 비롯한 과거 식민지배 국가들이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진입하지 못한채, 아직도 심각한 빈곤 상황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맥락은 지구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혜택이 모든 나라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찾아보고자 하는 그의 학문적 욕구가 '발전학 담론'에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Le developpement: Histoire d’une croyance occidentale"로 2007년에 초도 출판되었고, 2013년까지 4차 개정이 이뤄집니다. 이에 국내판은 아마도 2013년의 개정된 영문판인 "The History of Development : From Western Origins to Global Faith"를 번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국내 번역판은 2013년 4월, 초판이 발행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번역된 제목이 글의 지향점과 다소 상이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인 질베르 리스트는 이 책을 통해 주요하게 담고 있는 발전과 발전론에 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제4정책'이후로 본격적으로 발전론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격적인 경제 담론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그는 보고 있었는데요. 글은 전반적으로 서구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인간의 이기심과 이기주의와 관련해서는 2장에서 사회진화론의 발전과 그 승리를 중요한 정치사회적 관점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리스트는 허버트 스펜서로 대표되는 이 사회진화론이 사실상 계몽주의와 공공의 복리와 맞붙어 승리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산업적으로 뒤쳐진 국가"라는 오명은 제국주의 시기에 중요한 가치 문제로 여겨지며, 당시 프랑스와 같은 중견국 이상의 국가는 산업화와 국가사회적 발전이라는 욕망에 제국주의와 마땅히 타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산업적인 발전을 위한 담론임과 동시에 사회진화론이 융성하던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회진화론의 승리에 따른 폐해는 사회에서의 인간의 권리를 축소시키고 왜곡한 데 있습니다. 더불어, 종래의 다윈의 논리를 왜곡하여 받아들였던 점도 학문상 최소한의 진실 추구를 이익에 따라 위반하는 행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2장에서 저자가 논하는 이 "왜곡된 발전 이데올로기"는 제국주의와 이후 서구 자본주의의 비정상적인 함의와도 맞닿아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기의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자유무역을 강조했던 이들은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보호무역을 일종의 공공선에 반하는 문제로 여겼던 듯 싶습니다. 이 책에서 주로 논하고 있는 인간의 진보라는 것을 명확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진보와 발전이라는 가치 자체가 서로 아주 관련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발전 자체가 명확하게 "빈곤의 퇴출"이라는 사활적 문제에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었는데요. 저자인 질베르 리스트가 이 두꺼운 분량의 글을 통해 발전과 관련된 여러 인식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이 '빈곤의 추방'을 중요한 관점으로 두고 일관되게 논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는 '경제학의 보편적 권위'에 대해 대체로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는 경제학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 및 현상을 아우르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의 역사적 맥락과 사회학적 관점 및 인간 진보의 측면에서의 다양한 해석 수단이 필요하다는 등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케인스주의와 고전경제학의 틀이 현실화된 자본주의 전반을 명확하게 제대로 다룰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발전과 관련된 자본주의의 체제 변화를 오로지 경제학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며, 경제와 그에 따른 발전의 맥락에 인문학과 심지어는 사회학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분기의 가능성이 있었고 유일 학문의 권위를 오롯이 하는 이익보다 경제학의 한계에 대해 더 많은 논의와 토론을 하는 것이 '진정한 발전'에 더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개인적으로는 그리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발전/저발전의 담론은 1950년 이후의 냉전시기에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데요. 여기에서 인용된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에서도 "제3세계 국가들이 기존의 산업 국가들을 비난하는 연유에는 서구화 때문이 아니라 서구화를 할 수단을 더 빨리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 역시 일정부분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단견이라기 보다는 과거 식민지배체제의 계몽적 착취에 기반한 서구 열강의 자국 보호주의에 따른 사회적 여파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반대로 유럽의 인종주의자들은 제3세계의 무능력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이것을 여러 편견으로 빗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는 "권위주의 정권이 통치하는 저임금 국가"를 이용했던 미국과 유럽의 노골적인 이해가 있었던 것인데요. 약간 다른 예시이지만 현재 중동의 많은 시민들이 미국과 유럽을 좋아하지 않는 연유에는 이들이 국제 무대에서 줄기차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쳐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미라는 이유로" 이 지역의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는데 막대한 정치적 지원을 해왔던 것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거 식민 지배에 있던 국가들의 착취에 따른 광범위한 이득이 실질적으로 민간 기업을 제외하면 증명된 바가 없다고 인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만, 당시 영국이 자신의 제국을 위해 인도인들을 병사로 징집한 것과 마찬가지로 체제의 결속을 위한 숱한 무형적 착취가 기반해 있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로지 재화로 표시되는 착취로 비롯된 이익을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뒤르켐식의 실증으로 빗대어 증명하기를 이들 식민지배 국가들은 원하겠지만 제국주의가 초래했던 수많은 비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그저 눈을 감을 수는 없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저의 개인적 관점은 리스트의 의견과 동일한 부분이 있는데요. 발전 전반에 대해 그가 보이고 있는 도덕적인 관점은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에 어떠한 식으로 기여"했는지에 대한 그 반대의 결과물을 논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수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는 동일하게 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과 앞선 논리들의 전개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진실일겁니다.


뒤이어 리스트는 한때 각광을 받았던 제3세계의 종속이론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자립주의 모델들을 살펴보면서 한계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데요. 사실상의 자유 무역체제에 따른 국제 경제의 기조가 많은 국가들에게서 갈라파고스 제도처럼 보호 무역이나 자립으로 빈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뒤에 14장에서 2008년의 거대 위기를 통한 충격적이며 개혁적인 반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일부 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신자유주의 모델이 즉각적인 생명을 잃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리스트의 해석대로라면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어떻게 하면 도덕적 가치들을 수렴하거나 혹은 인정하게 될 것인가를 논하는 게 진정한 발전에 있어 더 중요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절대선이라고 믿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을 설득해 내거나 그것이 안된다면 더이상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세계에 대한 헤게모니를 손에 쥐어주지 말아야 하지만 신자유주의화가 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과거와는 그 양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애초에 발전 단계에서 보이는 포드식의 대량 생산을 언제까지 소비가 맞춰줄 수 있겠느냐, 혹은 소비의 끝엔 과연 뭐가 있겠느냐는 필연적인 의문에 대해 현재의 자본주의에서는 더이상 반박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인류의 진보적인 측면에서 남반구 북반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번영을 이루게 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적 명제가 있었지만 정확하게는 자본주의 착취와 독점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이 착취와 독점에 준하는 여러 불법적인 행태들이 시장 자유라는 미명하에 부득이한 부분으로 치부되기 일상이었죠. 한때는 이러한 체제에 슘페터식 민주주의로 자본주의를 개선시켜 나가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발전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공감대가 더욱 커졌습니다. 대니 로드릭은 이를 좀 회의적으로 보긴 했습니다만 근래에 코츠와 같은 학자들이 개선된 이론을 펼쳐내고 있으니 우리에게 아예 희망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겁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월터 로스토의 '경제성장단계론'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에 대한 리스트의 분석이 발전론의 전개에 대한 주요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는데요. 이 장을 통해 로스토의 이론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의 분석이 전개되고 있습니다만 특히, "모든 사회가 똑같은 욕망을 품고 똑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이 경제사학자는 일종의 사회중심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회가 경제적 이득만을 보고 나아간다는 것과 유사한데요. 어떤 사회는 공공선을 목적으로 또 어떤 사회는 기초 단계인 가정의 안정을 목적으로 사회 정책과 그에 따른 사회적 진화가 이뤄져 나가기도 합니다. 물론 발전론의 기본적인 개요를 소개하고 있는 로스토의 주장들은 분명 참고할 만하지만, 그가 반공시대의 인물로서, 이데올로기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장 자유주의에 경도된 보수주의자들이 더욱더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발전을 해석하는 바로메타에 이념이 덧씌워지는 것은 역사 진행의 결과물들을 무시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일정부분 치우친 이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자인 리스트는 거의 2장에 걸쳐 월터 로스토를 분석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리스트는 서구 문명의 전반적인 우월성에 대해 반대하면서 모든 국가의 문화나 문명은 그 나름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서구 중심의 근대화에 대해 많은 비판과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근대화가 나중에 제국주의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이제와서 근대화의 한계라고 말하기는 우습지만 보편적인 인간 모두의 이익이 되지 못했던 것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합니다. 다만, 저자는 현재의 경제적 패러다임 자체를 유지시켜야만 하는 것에 대해선 달리 이견이 있다고 볼 수는 없었는데요. 특히,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가 따로 언급되지 않은 점은 아쉬웠습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것에 대한 대안은 있을 수 없다고 강고하게 주장하는 것 만큼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시도하는 학자들 조차 없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즉, 시민들이 현 체제에 대해 수용할 밖에 없는 강고한 분위기와 40년이 넘도록 민주주의가 조금씩 무력화 되었기 때문에 '시민의 전투적인 야생성'이 시장 자유주의에 뒷전으로 밀려난 것도 현재의 기조가 적지 않게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실 제가 이 부분을 왜 굳이 업급했냐 하면 저자가 줄곧 인권을 논하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해 가타부타 어떠한 의견이 없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유지되고 있는 단일한 경제학 모델(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 과연 모두의 발전이 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일견 명확하고, 그런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개선과 최소한의 민주적 대안이라도 저자가 내놓길 바랐지만 분석의 주체가 정해져 있었고 그런 가운데 광범위한 명제들을 다뤄야만 했으니, 아마도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검토는 약간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물론 전방위적인 국제 체제 내에서의 협력과 앞으로의 이러한 시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분석이 있는 것은 고무적이라 할만 한데요. 어차피 여기에서 소개되고 있는 현대 경제학의 흐름이 중요한 골자는 거의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문제는 서구의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다른 문화의 사상적 측면과 연원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일종의 문화적 상대주의와 유사한 관념 체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만드는 이러한 기반이 상대의 다른 관습과 도덕적 체계 또한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인데요. 아예 서구 모델이 아니라 토착 모델의 발전론이 어디에선가 탄생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세계화가 너무 이상하게 진행된 상황이라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는 이론이 탄생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스템으로 발생되는 이익 전반이 시민들 대부분에게 돌아가지 않고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빈곤이 퇴출되지 않은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 극명한 차별을 소위 북반구가 남반구를 착취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발전 담론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인식이 기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의 국문 제목은 바로 이것을 꼬집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글 말미에 나오는 발전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로베르토 웅거가 조만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데요.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은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조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힘이 너무나 강대하기 때문에 단합된 시민들의 힘이 아니라면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근래 딱히 즐거운 일이 없었는데 그렇게 고대하던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는 무척 기쁘기도 했습니다. 다만, 온라인으로는 전혀 구매가 되질 않아서 분당까지 나갔어야 했는데요. 아무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그런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됐든 귀한 책을 구한 것으로 만족해 보고자 합니다.




남반구 위원회의 보고서는 발전을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고 자신감을 키우며 존엄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며, 인간을 결핍과 착취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이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운동이다. 정치적 독립은 발전을 통해 그 진정한 중요성을 획득한다. 또한 이것은 성장의 과정이며, 발전하는 사회의 내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운동이다"라고 정의했다

대리모나 정자은행의 관행은 상품의 형태가 사회적 관계의 모든 영역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다윈의 저작과 관련된 생물진화론(다윈이 말한 것은 ‘진화‘가 아니라 ‘자연선택‘이었다)과 사회진화론을 주의해서 구분해야 한다

프랑스 여론이 식민지 건설의 장점을 납득하는 데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발전‘이 인류의 집단 과제인 것처럼 여겨지도록 만드는 데도 같은 기간이 요구되었다

발전도상국들에 대한 자금지원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국제적 연대뿐만 아니라 계몽된 이기주의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총계(노동력, 완전고용, 저축)도 ‘저발전‘국가에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실물과 금융 앙쪽에서. ‘저발전‘국가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경제의 전반적인 맥락을 따지지 않고는 ‘저발전‘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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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6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분야 지식이 짧다는 것을 감안해주세요 ㅎㅎㅎ
통독하며 느낀 것은
희망고문처럼 빈곤의 탈출, 발전 등의 기치를 내세우지만, 이면에 전혀 상반대는 제국 주의의 작은 가능성마저 싹뚝 잘라버린 열강의 무리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시카고 곡물 사일로처럼
결국은 기승전 약탈 이었던 것 같아요
내전과 분쟁도 그 산출물 같습니다.

베터라이프 2021-08-06 01:16   좋아요 1 | URL
초딩님의 댓글을 보고 엉망진창인 글을 또 수정해 나섰습니다 ^^;; 사실 쓰신바와 같이 프랑스와 벨기에와 같은 국가들은 식민지배와 관련해 도의적인 책임은 지겠다고 했지만 식민지배 국가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은 어렵다고 밝힌 바가 있지요. 저는 이러한 맥락이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독일의 사례가 너무나 희귀했던 것이지 과거 대부분의 제국주의를 신봉했던 국가는 다 저런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자들이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대는 것이겠죠. 누가 말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을 극한의 빈곤 상태로 몰아서 우리는 뽈을 수 있을 만큼의 이익을 얻는 체계를 신봉한다˝고 했었는데요. 극단적으로 들리실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또한 그러한 맥락으로 움직이고 있죠. 돈을 가진자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와 그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의 질이 여타 시민들의 그것들과는 매우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