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가질 권리 -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스테파니 데구이어 외 지음, 김승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미국 오리건주 세일럼에 소재한 월라밋 대학과 포틀랜드 주립대학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미국 내의 저명한 한나 아렌트 권위자들의 소산입니다. 여기에 집필진으로 올린 연구자는 스테파니 데구이어, 알라스테어 헌트, 라이다 맥스웰 그리고 새뮤얼 모인입니다. 이들은 각기 전공이 상이한 학자들이기도 한데요. 한나 아렌트는 세상을 떠난 1976년 이전에 그녀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역설적으로 '인권'의 개념을 알린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녀가 정치적 다원성을 필생의 연구로 삼았던 것에 비해 한 절반 정도 한나 아렌트의 손을 거친 이 '인권'의 개념은 책의 주요한 논점인 '권리'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펼쳐보기 전에 단순히 '성소수자'들이 받아야 될 마땅한 권리를 위한 일종의 제언인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공화주의의 연원까지 가봐야하는 다소 가볍지 않은 정치철학을 다룬 논저임을 알고 잠시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연구하는 독자들에겐 이 책의 일독이 꽤 중요한 과업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랍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난 2018년에 원제, "The Right To Have Rights"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과 더불어 필자들이 주로 논하고 있는 '권리'에 대해, 한나 아렌트의 중요한 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 제6장에서 짤막하게 등장하는 '권리들을 위한 권리'가 사장되었다가 최근에 난민과 국민국가의 한계를 통해 새롭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에 의해 '배제된 유대인'으로 규정되어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서 그녀는 스스로 보장 받지 못하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 애써 멀리했지만 (에드먼드 버크와 마찬가지로 권리에 대한 이상주의적 환원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녀를 연구하는 후학들에 의해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 글이 그러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기본적으로 아렌트는 자신이 국민국가라는 소위 '정치 공동체'에서 폭력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상실했다고 여겼습니다. 즉, 4장에서 역설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인종주의적 견해와 맞물려, "영국 백인들만의 권리라는 것이 당시 귀족 계층이 누리고 있던 것을 사회 전체의 백인들에게까지 확장 되기도 했다"는 지점에서 막연하게 인식되고 주장으로 설파되는 반대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어떻게 불명확한지 드러내기 위해 비교 분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종주의의 해악성을 새삼스레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인종주의적인 강조가 제국주의 시기의 영국을 거쳐 "국민국가"의 개념으로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면 타당하게 보입니다. 물론 지금 대두되고 있는 인종주의 관점이 과거의 귀족의 권리와 혜택이라는 사회경제적 담론을 승화시키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엄밀하게 분석해보면 도널드 트럼프가 견지하는 인종주의는 특권과 인종 혐오가 더욱 가미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앞서 짧게 언급해 봤지만, 이 권리에 대해 에드먼드 버크는 막연한 이상주의적 관점이라고 평가하면서 "권리가 박탈되어야만 권리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있다"는 식의 냉소로 일관하게 됩니다. 그가 프랑스 혁명을 혐오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1789년의 프랑스 인들은 마땅히 귀족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안정적인 사회경제적 지원이 있어야만 한다고 파악했던 점을 한나 아렌트의 권리에 대한 특별한 한계, 즉 "권리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경제적 지원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는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그녀는 "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가 꼭 자유로운 국가일 필요는 없고 자유로운 국가가 꼭 복지와 부를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우려했다"는 것에 '정부가 시민들을 위해 복지를 보장'하는 것에 왜 부정적으로 판단했는지 반추할 만합니다. 진정한 인간과 인류의 개념이 칸트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아렌트가 그것이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되어 오늘날까지 막연하게 인식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권리라는 단어가 매우 모호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공화주의적 권리"라고 한정해 의미를 명확하게 했다면 그녀가 우려했던 사회경제적 복지라는 담론을 다시금 논의라도 해봤을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정부가 복지를 위해 '시민의 자유'를 임의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장 자크 루소 조차 우려했던 부분으로 '모든 개인의 동등한 자유의 보장'이라는 것이 막연한 도덕주의적인 관점의 권리에 상대적인 대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우려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주장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와 마땅히 결별하여 다시금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일 자체"가 어떤 식으로보면 자유의 진정한 회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아렌트는 정치에 있어서 다원성의 확립이야 말로 제일 중요한 과제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자크 랑시에르는 한나 아렌트가 시민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너무나 극명하게 대립시켜 인식해 몰두해 온 결과가 그녀의 사상 자체에 경직성을 띠게 되었다고 보는 듯했는데요. 지금 광범위하게 발생되고 있는 난민의 상황은 이들이 '정치적 공동체'에서 유리되어 조르지오 아감벤이 인식한 '일종의 벌거벗은 생명"이라 보는 것과 동일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왜곡된 자유주의의적 사고의 결과물인 자유와 권리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지점은 시민들을 논의에서 격리시켜 결국 파편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권리를 어떤 정치체제든 간에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은 논의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즉, 정치체를 잃어버리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능력도 잃게 된다는 아렌트의 주요 논리는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권리가 자연적으로 주어졌다는 도덕적 해석"에 너무 매몰되어 시스템 자체를 숙고해보지 않게 되는 문제는 아렌트의 앞선 우려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태어났을 때부터 권리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 비판당하는 연유에는 한편으론 현실의 문제를 등한시하는데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 문제를 공화주의적 관점으로 한정시켜 권리 본연의 문제를 정치의 다원적인 틀로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난민의 권리 문제를 견고한 국민국가주의적 시스템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국제사회와 인간 본연의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인종과 종교의 차별 없이 모두가 인간의 가치"로 개념화 하는 것이 시민 전체로 봤을 때도 이것이 이득이 될 수 있을겁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매우 노골적으로 자본에 의한 계급화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권리 자체에 대한 새로운 규명이 현시점에서 매우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우리가 자주 읊어대는 '보편적 권리'라는 구절의 도덕주의적 애매함으로 인해 그동안 보수주의적 정치인들에게 멸시를 받아왔다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너에게 어떠한 권리가 있느냐"고 되묻는 이러한 보수주의적 시스템의 터무니없는 반문은 한나 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상주의적 관점으로 너무 매몰차게 치부되어 왔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여기에는 칸트를 뭔가 보수주의의 화신으로 해석하는 몰염치한 지식인들의 행태와 권리를 요구하는 행위가 정부에게 우언가를 강요하는 행태로 이해되는 요즘의 세태에서 루소의 말대로 "법을 인간의 위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게 할지라도" 법이 나서서 이것을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혹여 자연 상태의 미덕이 인위적인 것이 전부 배제되어 스스로의 삶을 가진 자원대로 결정하게 하는 '자유의 원칙'같은 것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을 위하는 것, 시민을 위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지지와 확신이 재차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뭔가 버크의 역설 같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나 아렌트의 이 "권리를 가질 권리"가 이제야 새롭게 세인들의 입에 오르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법적 평등이 깨어진 상태에서 나중에 국민 국가가 그것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회의적으로 본 아렌트의 고찰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렌트가 규정한 '시민권'의 개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 글은 거의 전적으로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키기 위한 의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권리를 가질 권리'자체가 한나 아렌트의 재해석을 포함해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를 효과적으로 탈각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소위 ‘인간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로서만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권리는 그것을 상실하고 나서야, 즉 그것을 잃은 사람들이 갑자기 수백만 명이나 생기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권리다

일단 법적 평등의 원칙이 깨어지고 난 다음에 국민국가가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아렌트의 입장이 심지어 더 회의적이다

이렇게 권리를 정치적인 의미로 보면 천부권으로 볼 때만큼 도덕적인 안심이나 위안을 얻게 되지는 않는다

특히 아렌트는 역사적으로 권리들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 국민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국민국가였음을 지적하면서, 권리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렌트가 인권 정치가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오만을 우려한 것은 전후 유럽의 무권리자, 무국적자, 그 밖의 박해받는 사람들을 염두해 둔 것이지만, 권리가 다원적인 주체들에게 동질화를 강제하는 속성을 갖는다는 아렌트의 견해는 권리 정치가 제국주의적이고 차이를 파괴하는 속성을 갖는다는 오늘날의 비판과도 상통한다

냉전이 끝나고 인권 옹호자들은, 이제는 초국가적인 규모에서 경제적, 사회적 권리라는 의제로 뒤늦게 다시 돌아왔다. 아렌트가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했던 복지 국가가 한때 가졌던 호소력을 상실하고 내부로부터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외부로부터는 ‘세계화‘에 의해 잠식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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